라깡은 팔루스와 페니스를 구분한다. 라깡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이해하려면 이 팔루스와 페니스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이 둘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한번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남성중심 사회에서 페니스를 가진 남자는 이를 갖고 있지 않은 여자에 비해 더 중요한 존재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남성중심사회에서 페니스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팔루스를 갖고 있다고 '상상적'으로 생각한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페니스라는 생물학적 '사실' 자체보다는 팔루스가 상상적으로 의미하는 상징이나 의미이다. 남자에게 '자신은 대단한 인물이라는 자부심을 주는 것은 페니스라는 육체기관 자체가 아니다. 팔루스는 페니스라는 생물학적 기관과 관련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육체기관 자체와는 상관없는 어떤 허구적,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체계가 페니스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체계를 구성하는 최종 근거, 보증이 바로 상징으로서의 팔루스이다."(라깡의 재탄생 54~55쪽)
저 팔루스라는 개념이 참 어렵다. 남자의 페니스(여성과 구별되는 생물학적인 차이)에 부여되는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체계로서의 상징이 팔루스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성의 성기(남자와 구별되는 생물학적인 차이)에 부여되는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체계로서의 상징을 뜻하는 개념은 무엇인가? 저 팔루스라는 개념이 이데올로기적인 산물이라면, 문명이 바뀌어 가면서 존재를 보는 의미체계도 바뀌어 가는 것이다. 남성중심사회가 변해가면서 그렇다면 저 팔루스라는 개념에는 어떤 변화가 오기 시작하는 건가.
라깡은 이 팔루스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이중적인 속성을 말한다. 라깡이 팔루스 개념을 말하기 때문에 보통 남성중심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듣는다. 그런데 라깡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비판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페니스라는 육체기관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이 라깡의 팔루스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핵심 내용이다. 이렇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의미 체계의 최종근거가 되는 것이 상징으로서의 팔루스이다. 하지만 팔루스는 궁극적으로 어떠한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남자를 지탱해주는 팔루스는 '기의를 갖지 않은 기표'이며 '의미에 관해서는 그 의미의 실패'를 상징하는 기표, 즉 결여의 상징일 뿐이다.(Lacan 1975b, 74면)
요컨데 라깡의 접근방식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팔루스라는 상징을 이용해 '생물학적인 남자'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드러내고(현실적 측면), 다른 한편으로는 팔루스라는 상징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지탱할 어떠한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당위적 측면)"(55쪽)
저 결여의 상징일 뿐인 팔루스에 대한 신화는 아직도 공고하게 우리 사회, 가족제도, 관습에 배어 있다. 그렇다면 저 팔루스라는 허구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남성성의 본질을 드러내는 개념은 무엇인가? 팔루스라는 저 허깨비 개념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새로운 개념으로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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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돌멩이 작성시간 08.02.04 근데 라깡은 왜 팔루스를 궁극적으로 어떠한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고 보는 건가요? 그렇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어떻게 해서 남성에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상징으로서 작용할 수 있었나요? 고대에는 충분한 의미를 갖고 있었는데 현대에 들어서 더이상 의미있는 상징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건지요? 실제로 남근을 숭배했던 배경에는 여성(어머니)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의미체계가 있었다고 하던데요.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 아버지의 몸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거지요. 하나의 남성으로서요.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오거든요. 근데 그러한 상징적 의미가 허깨비 개념이라고 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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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야기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02.04 더 공부해 봐야겠는데요.허깨비가 그냥 허깨비가 아니고, 허깨비가 사람들의 상상속에서는 하나의 에너지를 갖고 현실에서 작용을 한다는 거겠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제 나름의 상상계에서 어쩌면 자기도취적인 상태에서 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라깡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로 세상을 나누어 보는 것도 같습니다. 이 세 의미는 상당히 어려운데요. 판타지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개념들입니다. 시공간을 보는 라깡 나름의 개념들이 사실 상당히 재미있고, 많은 상상력을 주는데요. 라깡은 자신이 프로이트의 독자라고 했다는데요. 독자라고 해도 날카롭게 비판적으로 재해석해서 읽어내는 독자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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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야기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02.04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책도 라깡의 이야기를 다시 연구자가 나름대로 해석을 해 놓은 문장이기때문에, 또 한번 옮겨지는 과정에서 틀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건 상관없어요. 우리는 라깡이나 라깡 연구자들의 말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고, 그 어떠한 원전이든지 간에, 그건 하나의 재료에 불과하니까요. 라깡 연구자라면 원전의 정확성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이들 연구에서 그냥 우리 나름의 탐구문제를 얻으면 되는 겁니다. 지식을 짜집기하는 공부하고, 몸의 에너지로 나의 사유로 지식의 관점을 녹여내는 공부는 그래서 아주 달라요. 우리는 지금 라깡을 모시는 공부가 아니라, 라깡을 재료로 해서 우리 나름의 사유를 해 나가보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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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야기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02.04 니까요. 하여튼 공부해 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