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구지학(一丘之貉)
한 언덕의 오소리라는 뜻으로, 구별하기 어려운 같은 부류 또는 한통속의 나쁜 무리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一 : 한 일(一/0)
丘 : 언덕 구(一/4)
之 : 갈 지(丿/3)
貉 : 담비 학, 오랑캐 맥(豸/6)
한 언덕에 모여 사는 오소리. 서로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부류나, 한통속인 나쁜 무리를 비유하는 말이다.
실력이 어금버금하여 우열을 가리기 힘들 때 난형난제(難兄難弟)나 대동소이(大同小異)란 말을 쓴다. 속담 도토리 키 재기가 나타내듯이 두 비교되는 사람이나 사물이 낫고 못함이 적은 경우를 나타낸다.
반면 그 나물에 그 밥이나 속된 표현으로 그 놈이 그 놈이라 하면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대립하는 양자의 수준이 나쁜 쪽으로 비슷할 때 쓴다. 당사자와는 떨어져 있는 입장에서 볼 때 별 차이도 없는 것들이 싸운다는 냉소적인 뜻이 담겼다. 양비론의 예시이기도 한데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와 상통한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족제빗과의 포유동물 오소리는 생긴 것도 호감을 못줘 한 곳에 모여 살면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할 수 없다. 한 언덕(一丘)에서 사는 오소리(之貉)라는 성어도 서로 다를 바 없는 똑 같은 부류나 한통속인 나쁜 무리를 비유한다.
오소리 학(貉)은 담비라는 뜻도 있고, 오랑캐를 말할 때는 ‘맥’으로 읽는다. 반고(班固)의 역사서 한서(漢書)에 실려 전한다.
양운(楊惲)전의 내용을 간추려 보자. 한(漢)나라 양운은 집안도 떵떵거릴만 하고 어려서부터 외조부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공부했기 때문에 학식도 남달라 젊은 나이에 요직에 발탁됐다. 청렴결백했지만 일찍 명성을 누려 미움도 많이 샀다. 당시 선제(宣帝)가 총애하던 장락(長樂)이란 사람과 특히 사이가 나빴다.
한번은 장락이 누군가에게 고소를 당하자 양운의 소행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양운을 비방하는 글을 선제에게 올렸는데,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양운은 흉노(匈奴)에서 항복한 자들로부터 선우(單于)가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못난 군주는 대신이 나라를 다스릴 방책을 잘 세워도 이를 쓰지 않아 스스로 자기 몸을 둘 곳을 없게 만든다. 이는 마치 진(秦)나라 때 소인을 기용하고 충신을 주살하여 멸망에 이른 것과 같다. 만약 대신을 신임하였더라면 진나라가 지금까지 존속되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리석은 군주는) 한 언덕에 모여 사는 오소리와 다를 바 없다.’고 하였습니다.”
惲聞匈奴降者道單于見殺, 惲曰,
운문흉노강자도단우견살, 운왈,
得不肖君, 大臣爲畵善計不用, 自令身無處所.
득불초군, 대신위화선계불용, 자령신무처소.
若秦時但任小臣, 誅殺忠良, 竟以滅亡.
약진시단임소신, 주살충량, 경이멸망.
令親任大臣, 卽至今耳.
영친임대신, 즉지금이.
古與今如一丘之貉.
고여금여일구지학.
이를 본 선제(宣帝)는 화가 났지만 차마 양운을 죽이지는 못하고 삭탈관직하고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양운은 관작을 잃은 후에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도 마음에 불만을 가득 품고 살았다. 그는 땅을 사고 집을 새로 짓고, 빈객들과 널리 사귀면서 소일하고 지냈다.
친구인 손회종(孫會宗)이 “대신들이 내침을 당하면 근신하며 자기 과오를 고치려고 노력한다. 그러지 않으면 화를 초래하게 된다.”고 충고했다. 양운은 손회종에게 편지를 써 조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는데, 나중에 누군가가 이를 고발했고, 양운은 그 편지로 인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한서(漢書) 양운전(楊惲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일구지학(一丘之貉)은 서로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부류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유사한 성어로 낭패위간(狼狽爲奸)이 있다. 서로 결탁하여 나쁜 일을 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낭(狼)은 패(狽)와 같은 종류의 이리이다. 낭은 앞다리가 매우 짧아서 패의 몸 위에 엎드려 있어야만 비로소 행동할 수 있으므로 늘 같이 붙어 다니면서 약한 동물들을 해쳤다. 나쁜 놈들이 서로 결탁하여 나쁜 일을 꾸미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얼마 전 자기 딸의 특별채용을 위해 인사규정을 바꿨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결국 도중하차한 모 장관! 결국 수하들과 낭패위간한 자들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왜 나만 갖고 그래? 이조 오백년 역사에도 비일비재한 일인데… 하지만 오늘 날 공정한 사회를 구현하는 것에 앞장서야 할 엘리트라는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나!
양운(楊惲)과 한선제(漢宣帝)
한무제(漢武帝)가 죽자 한소제(漢昭帝) 유불릉(劉弗陵)이 7살의 나이로 뒤를 잇고 대장군 곽광(霍光)이 보정(輔政)을 맡았다. 그러나 유불릉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여 그의 나이 21살에 친정에 임했으나 그 해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아마도 곽광의 처자가 독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소제의 황비는 곽광의 딸이다. 곽광은 한소제의 후임으로 한무제의 손자 중의 한 명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옹립하여 대통을 잇게 했다. 그러나 유하는 음란하고 유약했기 때문에 평소에 아무에게도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런 점이 곽광의 선택을 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하 역시 2백 명에 달하는 문객들을 이끌고 마치 이리나 호랑이처럼 권력을 노리고 있어 곽광 일파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그 결과 유하는 황제의 자리에 앉은지 21일 만에 쫓겨나고 2백여 명에 달하는 문객들은 모두 피살되고 말았다.
그때 무고(巫蠱)의 난 때 억울하게 살해당한 황태자 유거(劉據)의 손자 유순(劉詢)은 민간에 맡겨져 날마다 생계를 걱정하며 주변에는 돌봐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곤궁하게 살고 있었다. 곽광은 자신의 요구에 부합된다고 생각되었던 그런 처지의 유순을 데려와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한선제(漢宣帝)다. 곽광을 매우 두려워한 한선제는 항상 등을 칼로 찔리지나 않을까 걱정했고 사사건건 모두 곽광에게 의지했으나 황비만은 민간 출신인 허평군(許平君)을 취했다.
이때 양운(楊惲)은 유순에게서 희망을 발견했다. 그는 유순이 자기가 바라는 이상적인 황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순 역시 양운을 같은 정도로 인식했다. 두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가까워졌다.
민간에 맡겨져 성장한 유순은 민간이 당한 질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선제는 백성들을 유린한 한무제의 탄압정책을 모두 폐지시키려는 생각과 함께 한무제가 저질렀던 폭정에 대해 심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서 양운은 한선제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이때 곽광 일가의 권력은 중천에 떠 있는 해와 같이 극에 달해있어 끝간 데 없던 욕망은 마침내 자기의 딸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황후 허평군을 독살하고 계속해서 태자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한선제는 오로지 은인자중하여 반격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고 한선제와 막역한 사이의 양운은 분노에 떨며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곽광이 죽고 친정에 임하게 된 한선제가 곽광 일가에 수중에 있던 권력들을 하나하나 회수하기 시작한 조치들은 곽현(霍顯) 등의 곽씨 종족들의 불만을 일으켰다. 이에 양운은 선수를 쳐서 곽씨 종족들이 모반했다고 고발하여 곽씨들은 마침내 멸족되었다.
한선제는 한무제가 시행한 염철의 전매제도, 산민(算緡)과 고민(告緡) 봉선출순(封禪出巡) 주금속사(酎金贖死) 매관매작(賣官鬻爵) 등의 일련의 한나라 경제를 파탄 낸 정책들을 모조리 철폐했다.
안으로는 관료제도의 정비, 탐관오리들의 척결, 토지겸병을 억제하고 밖으로는 서강(西羌)을 격파하고 흉노를 항복시켰으며 서역(西域)을 한나라 영토에 포함시키고 유가들을 초빙하여 경학 회의를 열고, 경전을 정리하여 문화를 발전시키는 등 일련의 혁조치들을 대거 실행했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백성들의 신임을 얻게 된 한선제의 위망은 서한 말 발생한 녹림적미군이 기의했을 때 서한의 황릉은 거의 도굴되어 파괴되었지만 오로지 한선제 유순의 능묘만은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다.
이때 중랑장(中郎將)이 되이 한껏 고무된 양운은 휘하의 낭관들이 근무태도가 바쁜 사람은 일에 파묻혀 살고, 한가한 사람들은 일이 없이 무위도생하고 있는 실상을 보았다.
부자집 자제들은 손을 놓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오히려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가난한 집의 자식들은 일 년 내내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적자생활을 면치 못하고 낭관들 사이에 경쟁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있어 업무의 효율이 지극히 낮았다.
양운은 전형적인 살계혁후(殺鷄吓猴) 수법을 사용하지 않고는 그런 폐단을 혁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대 세계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를 창안하여 낭관의 근무, 휴가, 승진, 파면 등의 모든 인사제도를 완전히 규정에 의해 시행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면직되고 어떤 사람들은 승진하여 군수로 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그 결과 낭관의 근무태도에 일대 변화를 일어나 낭관 개개인을 모두 자기 일을 수행하는데 온 힘을 기우리게 만들었다. 한선제는 양운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광록훈으로 발탁하여 관원들의 정치적인 업적을 판정하는 일을 맡겼다.
그때 한나라 조정이 바로 잡혔다고 생각한 양운은 그의 외조부가 지어 숨겨 놓은 상태로 20년이 지나 먼지만 가득 쌓인 사기(史記)가 마땅히 세상에 나와 빛을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한선제에게 사기를 꺼내 바치고 공개적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로써 천하의 인재들은 중국 역사상 위대한 작품인 사기를 함께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공개한사기(史記)의 출현은 점차 사람들 사이에 한무제가 행한 사업에 대한 시비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또한 한선제에게도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한무제의 50여 년에 이르는 치세기간 동안 시행한 모든 정책들은 결코 선정이라고 칭할 수 없었다. 한선제도 그런 점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선제로써는 자기의 황위가 한무제의 뒤를 잇는 정통성을 강조해야 했다. 한소제와 자기는 나이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으나 항렬로는 한무제의 후비인 구익부인의 아들로써 할아버지에 해당하나 자기와는 전혀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에 한무제의 황위는 한소제와 창읍왕 유하를 거쳐 결국은 정통성을 갖춘 자기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무제에 대한 공과를 다시 평가하는 풍조에 역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한선제는 단지 홍기를 들어 홍기에 반대한다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한무제가 시행한 정책들을 모두 폐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무제의 전통을 이어받으려고 한 이유를 마치 침상의 일을 떠벌리지 못하는 것처럼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사기(史記)의 공개는 한선제로써는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양운의 사상은 황제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체제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생각한 체제의 국가가 건설되었다면 중국의 2천년 봉건제 국가역사는 모두 바뀌어 써야했겠지만 그렇다고 양운의 생각이 성공했건 성공하지 못했건 난세를 다스려 새로운 왕조를 일으켜 구왕조를 교체하는 일을 반복시키는 못했을 것이다.
원래 양운의 요구에 답하여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던 한선제 역시 권력을 독점하려는 한무제와 같은 동류의 인물로 한왕조 역시 인재를 육성하거나 인재를 신임하는 제도에 의해서 창건된 왕조가 아니었음으로 한선제는 관리들과 권력을 나눌 형편이 아니었다. 양운은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고 느끼고 한선제에 대한 불만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졌다.
후에 양운과 태복(太仆) 대장락(戴長樂) 사이에 충돌이 생겨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래 대장락은 한선제가 민간에 섞여 살아갈 때의 친구로서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친밀했다. 그러나 양운은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흙으로 만든 보살이 강을 건너야 했던 위험한 순간임에도 자신의 친구를 출두시켜 반전을 시도해봤으나 결국은 한선제는 양운에게 매우 불리하게 판결했다.
상벌은 반드시 공정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한선제는 두 사람에게 모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 모두 관직에서 파면하고 서민으로 만들었다. 한선제로써는 그와 같은 판결은 양운과 화해를 다시하기 위한 계산에서였다.
양운은 원래 나라를 위해 헌신하려는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산업을 다스리고 저택을 지었으며 빈객들을 초대해서 연회를 열고 친구들을 사귀었다.
양운이 보기에는 한선제나 한무제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뜻의 일구지학(一丘之貉)같은 무리로써 목숨을 바쳐 보좌할 가치가 없으니 자신은 그와 같은 왕후들을 받들지 않고 상업을 운영하여 자유직업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친구 손종회는 그런 양운에게 말과 행동을 조심해서 살다보면 후에 다시 관직에 복귀할 수 있다고 권고했다. 그래서 양운은 그 유명한 한 편의 보손회종서(報孫會宗書)라는 문장을 통해서 자기는 권력이나 관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표현했다.
한선제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양운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양운은 그의 출중한 재능으로 언제나 그가 마음만 먹으면 한무제가 억압한 사상에 대한 해방운동을 일으켜 물의를 빚을 수 있다고 한선제는 생각했다.
한무제의 억압정책에 대해 쟁론하게 되면 틀림없이 저변에 숨은 한무제의 사악하고 포학한 내면이 전부 천하에 폭로되어 자기가 나라를 통치하는데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한나라 황실에도 이롭지 않아 만일 양운으로 하여금 황제의 권력을 제약받게 되면 그것은 바로 한나라가 유씨 천하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사기의 발간은 이미 잘못된 일이었고 또 다시 그 잘못을 반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해에 일식이 발생하자 그 이유가 양운의 방자한 생활로 인했다고 어떤 사람이 고변했다. 사람을 보내 양운의 집안을 수색하여 찾아낸 문제의 서한인 보손회종서(報孫會宗書)을 읽고 매우 분노한 한선제는 양운을 대역무도한 행위를 저지렀다고 판결하고 요참형에 처하고 처와 자녀들을 모두 감숙성의 주천(酒泉)으로 유배보냈다. 양운의 친구들도 모두 색출하여 파직시켰다.
반고(班固)가 사마천의 전기를 쓸 때 사마천이 쓴 보임안서(報任安書) 전문을 인용한 것은 당시 사마천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듯이 양운의 전기를 쓸 때 또한 보손회종서(報孫會宗書)의 전문을 인용한 것은 양운이 지향했던 뜻을 천하에 명백하게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는 양운이 사기(史記)를 공부한 것부터 시작해서 의를 받들고 재물을 가볍게 여겼으며, 다른 사람의 비밀을 고변하고 또한 사람들과 어울려 상호간에 서로 고변을 주고 받다가 결국은 다른 사람의 고변을 받아 전개되는 사건을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장황하고 또한 지나치게 자세하게 기술했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 어떤 다른 뜻을 내포시키기 위해서였다. 반고는 그의 전기에서 우리들에게 알리고 싶은 비밀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 一(한 일)은 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라는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일거양득(一擧兩得) 등에 쓰인다.
▶ 丘(언덕 구)는 상형문자로 坵(구)의 본자(本字)이다. 사방이 높고 중앙이 낮은 언덕의 모양으로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北(북)과 一(일)의 합자(合字)로 집은 산을 등지고(北) 남쪽의 땅(一)에 세우기 때문에 집의 북쪽인 언덕이나 산을 나타낸다. 그래서 丘(구)는 ①언덕 ②구릉 ③무덤 ④분묘(墳墓) ⑤마을, 촌락(村落) ⑥맏이 ⑦메(山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뫼 ⑧종(從), 하인(下人) ⑨폐허(廢墟) ⑩지적(地籍) 단위(單位) ⑪비다, 없다 ⑫공허(空虛)하다 ⑬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언덕이나 나직한 산을 구릉(丘陵), 언덕이나 나직한 산을 구부(丘阜), 무덤이나 언덕을 구분(丘墳), 무덤을 구묘(丘墓), 무덤이나 송장이나 유골을 땅에 묻어 놓은 곳을 구총(丘冢), 땅이 비탈지고 조금 높은 곳을 구강(丘岡), 언덕이나 조상의 산소를 구롱(丘壟), 언덕과 동산을 구원(丘園), 시골 백성을 구민(丘民), 언덕과 산 또는 산더미를 구산(丘山), 무덤 가에 있는 나무를 구목(丘木), 여우는 죽을 때에 자기가 본디 살던 산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구수(丘首), 시골말을 구리지언(丘里之言),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을 구묘지향(丘墓之鄕) 등에 쓰인다.
▶ 之(갈 지)는 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 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貉(담비 학, 담비 락, 오랑캐 맥, 제사 이름 마)은 ①오랑캐 ②북방(北方) 오랑캐 ③몸이 튼튼하다 ④고요하다(조용하고 잠잠하다) ⓐ담비(족제빗과의 동물)(락) ⓑ오소리(족제빗과의 동물)(락) ⓒ담비(족제빗과의 동물)(학) ⓓ오소리(족제빗과의 동물)(학) ⓔ제사(祭祀)의 이름(마) 따위의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