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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 예정론과 숙명론(2)/김규욱 목사

작성자주님의심정|작성시간09.07.26|조회수258 목록 댓글 43

* 기독교 예정론과 역사의식의 관계

 

  흔히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과연 기독교 예정론을 믿으면 역사의식을 상실하고 현실의 삶에서 나태와 방종을 갖고 오게 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러한 오해는 기독교 예정론을 철학적 숙명론과 동일시 할 때 따라 나오는 귀결이다. 

이 장에서는 기독교 예정론이 성도로 하여금 역사의식을 박탈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하는 모체가 됨을 성경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역사의식 태동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 보고 난 후 예정론과 역사의식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1. 역사의식 태동의 역사적 기원

 

  20세기의 저명한 역사 철학자 콜링우드(Collingwood)의 날카로운 지적에 의하면, 서양 세계에서의 역사의식은 실상 그리스·로마시대가 아니라 기독교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4∼5세기에 이르러 서양의 역사관은 기독교 사상의 혁명적 영향을 받아 혁신되었다고 한다.(R. G. Collingwood, The Idea of History, 1946, p. 46)  

그것은 바로 어거스틴이 최초로 시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사색을 시작하고, 시간의 태초와 종말을 의식하는 역사 신학적 사고가 생겨날 무렵이다.  

그 이전에는 사실 상 역사 혹은 시간에 대한 사색이 적극적이지 않았다. 

인간이 시간에 대해서 사색한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에 대한 사색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모든 것을 변하게 하고 썩게 하고 죽게 하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루타르크는 ‘시간은 인류의 원수이며 모든 것을 부패시킨다’ 라고 말했다. 

기원전 5세기 인물인 서양철학의 대부격인 플라톤은 변화하는 ‘시간의 세계’ 를 타락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참된 인식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리하여 변화하는 역사 안에서 철학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플라톤 뿐만 아니라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헤르도토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역사의식은 현재나 과거가 천편일률적으로 영원히 순환하는 것으로서 역사는 마치 꽃이 피고 지는 반복적 흥망성쇠의 기록으로 볼 뿐 어떤 의미가 깃든 것으로 의식하지 않았다. 

이것을 콜링우드는 희랍사상의 반역사적 경향(anti-historical tendency) 이라고 지적했다.(앞의 책, pp. 20∼21)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진리가 희랍세계에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변화하는 시간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기독교 진리는 내세의 세계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시간세계에 대한 새로운 혁명적인 관념을 갖게 하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려 간다는 것이 이제 절망적이며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소망적이며 긍정적인 것으로 역전되며 죽음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소망적 과정이었다. 

이 뿐 아니라 철학자 칼 뢰비트(K. Löwith)가 잘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 사관만이 역사과정의 중심점(그리스도 사건)을 정해 놓고 있다. 

그리하여 비로소 그 점을 기점으로 한 이전(과거)와 이후(미래) 즉 현재, 과거, 미래라는 역사의 관념이 탄생할 수 있다(K. Löwith, Meaning in history, 1949, p. 182)는 것이다.  

  

  역사를 보는 관점인 사관들이 여러 가지 있지만 크게 둘로 나누어 보면 하나는 직선적 사관(linear view of history)이고 다른 하나는 순환적 사관(circular view of history)이다. 

엄격하게 이야기해서 기독교 사관과 그것의 영향을 받은 사관 이외에는 전부 순환적 사관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순환적 사관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똑같은 혹은 유사한 사건이 언젠가 또 다시 반복되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역사의 진보라든가, 역사를 통한 반성의 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 

단지 지금의 삶이 완전한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반복 재생된다고 믿고자 하는 근거없는 신념일 뿐이며 시간의 영구한 연속에 자신을 심리적으로 맡겨 버리면 나약하고 허황된 사고와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반면에 기독교에서만이 직선적 역사관을 말하고 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계셔서 역사의 시작인 태초로부터 과정 그리고 종말에 이르는 모든 역사적 사건을 합목적적인 의미를 가지고 직선적으로 진행시킨다. 

이러한 기독교 사관에서라야 과거, 현재, 미래라는 명확한 직선적인 시간(역사) 개념이 올바르게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시점에 서 있는 신앙인은 과거의 사건을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을 연단하고 성숙시키려는 섭리로 감사히 받아들이며, 현재의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나님 나라의 의의 도구로서의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미래의 삶 역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장중에 맡기고 소망가운데 바라 본다.

 

  이러한 직선적 역사의식의 원형은 예수님 오시기 전의 구약시대 성도에게서도 명확히 발견되어진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다윗왕조 이후의 백성들은 그들의 가나안에서의 삶이 과거 그 열조와 맹세하사 약속대로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과거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현재의 삶의 문제 역시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느낀다. 

더 나아가 그들이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할 때 예언자들이 나타나 책망하고 예언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자신들이 현재 율법을 범하며 그 결과 바벨론에서 포로로 사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약속대로 70년이 차면 회복될 것을 바라 보았다. 

이는 더 나아가 장차 미래에 메시야가 오셔서 영원한 왕국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자신들이 현재 율법을 범하며 바벨론에서의 포로로 사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선지자와의 약속대로 장차 하나님께서 예언한 약속대로 메시야를 통해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미래의 소망 중에 살아가는 진정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원형적 역사의식은 예수님 안에서 총체적으로 성취되었다. 

예수님이야 말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러 오시되 그 분은 과거 구약의 언약을 자신의 온몸을 통해 성취하고 계시는 분이요 더 나아가 성령을 통해 미래의 역사를 빚어 가실 것을 잘 알고 계셨고 마침내 역사의 종말에 다시 오실 것을 예언적으로 언약 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언약 성취의 역사적 의식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의식하고 계셨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지는 역사의식은 바울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바울의 모든 글은 구약의 언약과 예언을 근거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차매 모든 일이 이루어지며 미래 역시 하나님의 언약적 뜻에 의해 진행됨을 믿었다. 

그것이 신약 성경안에 구체화 된 것이다. 

구약 성도의 메시야 대망이 신약성도에게 와서는 메시야 재림 소망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성경 안에 드러나 있는 언약에 근거하는 역사의식은 예수님 오신 후 4~5세기 무렵 어거스틴에게 와서 보다 확실하게 구체화 되어진 것으로 보아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직선적 사관에 의한 역사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역사의 주관자가 존재하지 않는 순환적 역사관에서는 생겨날 수 없으며, 시간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기독교 사관에서만 태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19세기 서구라파의 진보주의 사관이나 마르크스주의 사관 등의 미래 지향적 직선적 사관은 모두 기독교 문화권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기독교 사관의 철학적 변형물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문화권 밖의 동양 세계에서는 도무지 직선적 사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2. 기독교 예정론과 역사의식의 관계 -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중심으로 -

 

  위에서 잠깐 언급한대로 기독교 교회사에 있어서 최초로 역사에 대한 언급을 한 신학자는 어거스틴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예정을 강렬하게 주장하면서 동시에 역사 혹은 시간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긍적적인 사색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는 예정론과 역사의식 양자간에 모종의 긴밀한 관련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도대체 예정론과 역사 의식 이 양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서 이 글에서는 어떤 신학자나 역사 철학자의 논의를 빌리지 않고 오직 성경의 논리에 근거하여 논증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양자의 관계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중심으로 밝혀 보도록 하겠다.

 

  로마서는 우리에게 칭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義)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

인간의 전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義)로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간은 의롭다함을 받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인데 이 믿음이 인간편에서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기쁘신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됨을 확실히 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이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달음박질함으로가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못박는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세우심이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려는 것이며 그런즉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또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도 하심을 명백히 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대해 반문하는 인간을 향해 바울은 지음을 받은 진흙덩어리 같은 인간이 지은 자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질문할 권한조차 없음을 말했다.

그런 반문 자체가 이미 자신이 자신의 존재에 근본적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는  피조물이요 또한 무엇이든지  창조주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인정치 않으려는 죄의 근성에서 나온 그릇된 질문임을 말하는 것이다.(롬 9장)

  

  이런 주장을 한뒤 바울은 하나님의 의(義)의 실현, 즉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연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언급한다. 

즉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이라는 것이다.(롬9장 후반부)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 예정론의 성경적 근거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사건은 구약의 언약의 성취인데 이때 구약의 언약은 다시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다름 아닌 창세전의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기초한다. 

이 글은 예정론을 주로 신약을 근거로 전개했으나 실제 구약의 언약 역시 예정을 근거로 전개됨을 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G.H.Clark의 저서 Predestination의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예정이 구약에도 편재된 교리(pervasive doctrine)임을 분명히 했다. (p205)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이미 전제되고 있으며 이 내용은 에베소서에 가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까지에서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논한 후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 오묘한 구원의 섭리를 찬양한 다음 12장에서 성도의 생활을 권면하면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정론과 성도의 실제적 신앙과의 관련성을 확인 할 수 있다.

앞절에서 밝힌대로 기독교 예정의 목적은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바 은혜의 영광을 깨닫게 하려는데 있다.

이를 깨달은 성도는 바울이 했던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된다.

이때의 찬양과 감사는 반드시 성도로 하여금 이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있는 삶의 모습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정은 성도의 참된 열심있는 삶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예정론을 배운뒤 모든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열심도 없어지고 나태하게 된다는 것은 예정론을 로마서에서 처럼 성도의 참된 열심을 가져오는 성경적 은혜의 원천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유사하게 보이는 이방종교의 숙명론의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에베소서의 증거를 통해 좀더 상세히 확인해 보기로 하자.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옥중서신으로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땅의 교회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 교회는 어떻게 성장하며, 또한 어떻게 교회의 생활을 해 가는 것이 올바른 가를 가르쳐 주는 체계적이고도 장엄한 교회론에 관한 서신이다. 

바울은 1장에 간단한 인사말을 한 뒤 1장 3~13절에 이르기까지 곧 바로 교회의 영원한 기초를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말한다. 

그 내용 중 첫번째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복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성도로 하여금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엡 1:3~6) 

그 다음 7~10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죄사함도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11~14절에서는 이 예정을 따라 약속의 성령이 오셔서 성도를 인치시고 기업의 보증이 되게 하셨다고 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장엄한 사역의 내용은 서신의 중·후반부에 전개되어갈 교회의 성장과 윤리부분의 기초가 된다. 

즉 현재의 교회의 성장과 생활은 이미 창세 전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정의 시점이 역사 내적인 것이 아니라 창세 전 영원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듯 그의 계획과 예정 또한 영원하다. 

영원한 것이기에 불변적이며 그 계획은 역사 내에 실현될 때 한치의 착오없이 이루어질 성실한 계획이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역사 안에서의 어떤 계기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 구원의 계획은 창세 전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 즉 예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 안에서의 구원의 실현은 영원한 경륜의 때가 찬(카이로스적) 실현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너무도 명백한 성경이 증거하는 기독교 예정론의 진수이며 기독교로 하여금 기독교 되게 하는 핵심적 성경진리이다.

 

이것의 부인은 구원의 문제에 인간의 계획과 선행과 공로를 내세우고자 하는 자고한 인간철학의 장난이거나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는다.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구원론과 교회론은 장엄하고도 영원한 예정론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정론을 말하지 않는 구원과 교회에 대한 언급은 뿌리 잘린 나무의 가지와 열매의 시한부 생명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구원의 즐거움과 교회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근본 뿌리인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말미암은 예정에 돌리지 않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이 영원하고도 장엄한 예정론을 말하고 나서 4장 17절 이하에서 성도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권면하는 과정에서 5장 15절에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끼라”는 권고를 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 세월이란 역사적 존재인 인간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의미하며 그것을 아끼라는 말은 어리석게 낭비하지 말고 주어진 시간을 지혜롭게 살아 가라는 뜻이다. 

그런데 바로 15절 앞부분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세월을 아낄 수 있는 것, 즉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지혜를 가질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의 지혜는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인간적인 슬기로움이나 영리함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서의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에베소서 앞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향해 갖고 계셨던 창세 전의 은혜로운 예정의 경륜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구원은 하나님의 창세 전 예정을 따라 은혜의 선물로 거저 주어진 것이며 그것을 깨닫는 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이다. 

그 지혜는 성도로 하여금 구원의 즐거움을 갖게 하고 비록 삶의 여건이 어려울지라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성도는 지금까지 자신의 정욕을 위해 세월을 낭비해 왔던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교회와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역사적 사명의식에 불타는 아름다운 삶을 점차 지향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과 성도가 갖게 되는 역사의식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적 예정론을 깨닫고 난 후 삶에 방종과 나태가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단지 기독교 예정론을 철학적 숙명론으로 오해하여 가르치거나 배울 때 생겨나는 일이다. 

오히려 기독교 예정론만이 영원한 천국의 소망과 구원의 확신을 주는 근본 원천이 되기에 성도로 하여금 현재의 역사적 삶에 대한 성실한 삶의 근거가 되며 또한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는 신앙적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현재의 삶이 어떠한 고난에 있을지라도 영원한 예정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확신은 현실을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철두 철미 확신했던 바울의 실제의 삶은 이를 너무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바울은 그토록 무수한 삶의 역경과 고비를 거쳐 갔으나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믿었기에 세상은 바울을 감당할 수 없었다.

사실상 바울처럼 역사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은 찾아 보기 드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짚고 지나갈 필요가 있다. 

바울에게서 영원과 역사 (시간)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즉 이분법적으로 분리된다는 것은 영원(내세)을 택하면 역사에 소홀하게 되고 역사에 관심을 두면 영원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역사는 영원안에 일원론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영원한 은혜의 예정을 깨달을 수록 역사 현실에서 참된 열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바울에게 역사 현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배우고 발견하고 그의 뜻을 이루어 가는  교육적 실천적 현장인 것이다.

 

  지금 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인의 역사의식이란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 되어 역사의 흐름을 자기 중심적으로 파악하려는 왜곡된 철학적 역사의식과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함을 알 수 있다. 

기독교적 역사의식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경륜, 그리고 그 경륜대로 역사의 현장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지금의 역사에 맡겨주신 아름다운 주의 뜻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신앙적 역사의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정론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세월을 아낄 줄 아는 신앙적 역사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기독교 예정론은 올바른 신앙적 역사의식이 생겨날 수 있는 모체이자 원천이 된다.

 

  Ⅳ. 성경적 역사의식의 정립

 

  지금까지 우리는 성도가 성경대로 예정론을 믿게 되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되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 도피적이고 위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오늘 날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한편으로는 도피주의적 신비주의 신앙에 빠져 탈역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마치 역사만을 위한 종교인 것 같이 착각한 나머지 기독교에서 영원한 예정과 천국을 제거하여 기독교를 평면화, 역사화시켜 버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양극화된 두 부류의 잘못된 역사의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 우리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잘못된 역사 의식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나아가서 성경대로 가져야 할 기독교인의 역사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1. 신비주의적 탈역사의식 비판

 

  신비주의적 신앙지도자들은 자충족한 문자적 성경계시보다는 현재의 신비주의적인 잘못된 계시와 체험을 더욱 중요시 함으로 말씀에 의한 인격적 신앙성숙이 아닌 비정상적인 체험과 갑작스런 변화 그리고 신비스런 황홀경을 강조하게 된다. 

성도는 그러한 체험과 황홀경 속에서 현실적 삶의 어려움을 일시적으로 마취시켜 잠시 위로를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마취의 효과는 점차 현실에 대한 신앙적 감각을 무디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해 가는 데 심각한 장애를 가져 온다. 

약 20~30년 전부터 한국교회에 불어닥친 오순절 운동과 그와 유사한 신비주의적 운동은 성도로 하여금 역사적 현실을 하나님이 주신 신앙 성숙의 교육적 무대로서 긍정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이원론적 사고 방식에 의해 현실의 삶을 죄악시하고 속된 것으로 보아 기피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신앙 공동체라는 미명 아래 자기 폐쇄적이며 위축된 삶을 영위하고, 소위 속세를 떠난 수도원 운동, 불건전한 은사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세상 속에서의 정상적인 삶을 경원시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 신앙운동에 현실 도피적이며 탈역사주의적 태도이다.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의 해독성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 보다 훨씬 심각하다. 

한번 신비주의적 신앙에 접하게 되면 점차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시키며 영적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된다. 

그것은 곧바로 보통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양상을 띠게 되고 더 나아가 역사 현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탈역사적인 태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고도의 신앙수준인 영적 황홀경의 세계에 있다고 착각하며 현실을 직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건과 건강으로 열심히 땀흘려 수고하고 노력하려는 신앙적 의지를 갖기보다는, 기도가 자기 욕구나 자기 소원을 채워주는 만능의 도구인 줄로 착각하고, 반신앙적인 이방 종교의 주문같은 기도로 삶을 영위한다. 

이쯤 되면 현실 감각을 상실한 일종의 정신적 장애자 내지 몽상가인 셈이다.

 

  결국 성도가 극단적 신비주의 운동에 빠져 버리게 되면 역사적 사명의식을 상실한 채 자신의 영적 황홀경의 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현실 감각을 상실하고 이기적 신앙 양태에 몰입해 들어가는 심각한 결과에 이르게 된다.

이런 신비주의적 신앙 양태는 세상의 학문이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변혁적이고 일원론적인 사고 방식에 의한 세계관이나 역량을 갖추지 못한다. 

최근 이원론적 신앙 문제를 의식하고 기독교 세계관의 일원론적 성격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진정한 세계관의 정립은 개혁 신학이 주창해온 하나님 절대 주권과 그에 따르는 예정의 문제가 정립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이해로서는 제임스 사이어(김헌수 역)가 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이 좋은 길잡이가 된다.

  

  2. 해방신학적 역사의식 비판

 

  해방신학자(사회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포함)들은 성경의 말씀이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정황에서 쓰여진 역사적 문서(historical document)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구속주가 아니라 단지 그 시대의 억눌린 민중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도덕적 실천가로서의 역사적 인물로 간주될 뿐이다. 

해방 신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나 천국이 비과학적 신화에 불과한 무의미한 사실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지금의 역사 현실 뿐이며 이 시대의 정치·경제적인 구조적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역사적 실천 뿐이다. 

남미의 대표적인 해방신학자인 구티에레즈는 출애굽 사건을 장차 그리스도의 유월절 어린 양의 피흘리는 사건으로 말미암은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사건으로 취급한다.(구티에레즈, 1977, p200) 

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 지배를 언급하지만 그것의 의미는 성경적이 아니라 다분히 신은 역사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이신론적(理神論的) 신관(Deism)을 견지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창조 후 피조물로부터 멀리 떠나 계시고 이제는 역사가 인간의 자율적 의지에 의해 진행되고 변혁된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19세기 철학자 칼 막스의 유명한 발언인 “철학은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철학이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라는 말은 매우 매력있게 들린다. 

칼 막스의 철학체계 안에는 하나님이나 그의 주권적 역사섭리가 존재치 않기 때문에 역사의 궁극적 동인은 물질적 하부 구조에 영향을 받는 인간에게 있다고 보았다. 

즉 역사변혁의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는 철저한 반성경적 인본주의 역사철학을 주창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인본주의 역사철학이 오늘 날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에서는 의심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본 신조가 되어있다.

 

  신학이라는 미명 아래 철저한 인본주의 역사철학이 은폐되어 있다. 

신은 이제 역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기력한 허수아비일 뿐, 실제 역사의 변혁주체는 맑시즘으로 무장된 인간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역사의식은 하나님의 역사주관을 믿는 신앙적 역사의식이 아니라 인간의지의 자율적 역사변혁 능력을 믿는 철학적 역사의식이다.

 

  3. 성경적 역사의식의 정립을 위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양극화되어 있는 두 부류의 잘못된 역사의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두 부류의 공통된 오류는 바로 기독교의 본질인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내세의 소망을 상실하기 때문에 발생된 논리적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섭리에 의한 직선적 역사관을 믿지 않을 때에는 모든 역사의식이 시간 내의 한 부분을 절대화 내지 영원화하여 균형을 상실하고 만다. 

신비주의자들은 현실을 절대화하고 해방신학자들은 미래를 절대화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바탕으로 현실을 극복해 가는 확신을 지니지 못한 채, 인도의 신비주의 명상가들처럼 현재의 황홀경에 자신을 몰입시킴으로써 현실을 신비화 내지 환상화시켜 버린다. 

그 결과 올바른 역사적 현실감각을 상실하고 나아가서 부닥쳐 오는 현실의 어려움을 도피해 가는 탈역사주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반면, 해방신학자들은 내세의 영원한 천국 소망을 부정해 버리고 단순히 평면적 미래에 소망을 두고 역사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 내적 역사철학을 갖고 있다. 

헤겔 철학 이후 서양 철학은 초월이 모두 내재화 되었다.

이 철학의 영향 속에 전개된 자유주의 신학은 철저히 내재 신학으로서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역사 현실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고자하는 철저히 인본주의적 성격을 띤다. 

 

 그래서 그들은 다가 올 미래를 미화하여 영원화시켜 유토피아로 그려낸다. 

미래의 주관적 환상에 비추어 볼 때 오늘의 현실의 모습은 참담하게만 느껴지며 따라서 그들의 사고와 행위는 매우 현실 부정적이며 과격하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는 미래의 유토피아는 현재의 불만을 심리적으로 보상해 주고 현재의 자기 모순을 은폐시켜 주는 자기 기만적 장치일 뿐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다. 

19세기에 꿈꾸었던 구시대적 철학적 낭만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두 부류의 오류는 영원한 하나님의 예정과 천국의 소망이 확고하게 될 때까지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빠져들어갈 수 있는 함정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천국을 믿으면서도 육신의 소욕이 남아 있기에 현재의 안락하고 안일한 삶에 자신을 무비판적으로 맡겨 버리는 신비주의자들의 탈역사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인 행습을 할 때가 허다하다. 

또한 때때로 우리는 삶 속에서 천국의 소망은 까마득히 잊어 버린 채 역사의 주체가 마치 자기 자신인 줄 착각하여 자신의 뜻과 고집대로 일을 성취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인본주의적 역사철학 사고 방식에 사로잡힐 때가 무수히 많다. 

 

육신의 정욕이 남아 있는 한 이기적이며 자기 영광적인 역사의식의 위험성이 우리 자신 안에 항상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들은 올바른 성경적 예정론과 순수한 복음진리에 의해 부단히 잘못된 철학적 역사의식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역사는 하나님의 예정과 절대주권적 섭리에 의해 이루어져 가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사의 무대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의 도구로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역사적 사명의식을 느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명의식은 복음진리로 성숙해 가는 성도에게 맺혀지는 구체적인 아름다운 열매이다.

 

  예정론에 근거한 복음진리에 의해 진정한 역사의식을 갖게 된 성도는 역사 무대에서 도피하거나 미래의 환상에 빠져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주어진 역사 현실을 자신의 신앙적 성숙의 무대로서 감사하게 받아들임과 동시에 주를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예정론을 진정으로 깨달은 성도에게 결코 나태하고 안일한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바울 처럼 살든지 죽든지 역사 현실에서 가장 치열한 복음적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Ⅴ. 결론

 

  오늘날, 신학자에게나 성도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예정론에 대한 오해는 깊고도 심각하다. 

특히 기독교 예정론을 철학적 숙명론과 동일시하여 예정론을 수납하게 되면 역사적 사명의식이 박탈되고 나태와 안일한 삶에 빠진다는 비판은 그 비판의 화살을 엉뚱한데 겨냥하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 글은 오히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인 구원의 예정을 믿을 때라야 성도는 이 시대를 살아 가는 역사적 삶에 무궁한 원천적 힘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기독교는 이방 종교처럼 인간의 욕구와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인본주의적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오직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정하신 예정을 따라 이루어진 유일한 신본주의적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도 영원한 예정의 결과이며 그 예정에 기초하여 구약은  예수님이 역사 안에 오실 것이 언약했고 그 언약은 하나님 여호와의 신실하신 속성대로 성취됨으로써 구원이 이루어 졌다. 

그것을 통해 역사적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계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며, 십자가 사건이다.

 

  이러한 영원한 예정과 역사 안에 이루신 구원의 확증을 깨달은 성도는 참으로 삶에 역사적 사명을 느끼게 된다. 

진리를 깨닫기 전 육신의 정욕을 좇아 세월을 낭비하며 살아 가던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이 이제는 성령의 소욕에 의해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으로 전회하게 된다. 

말씀에 의해 예수의 형상이 자라감에 따라 성도의 역사적 삶은 점점 무게를 더해 가며 먹든지 마시든지,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며 그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이웃의 짐을 지고자 하는 아름다운 수고와 자기 희생의 삶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오늘 날 한국의 기독교는 양극화된 잘못된 두 부류의 신앙운동에 의해 심히 오염되어 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에서 영원한 예정과 영원한 천국을 제거하고 기독교를 평면적 역사 차원에서만 취급하여 이 땅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유주의 신학와 그 유파인 해방신학이 탁류처럼 몰려 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신비화라는 미명 아래 현재의 잘못된 영적 황홀경 속에 빠진 채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의식을 망각하는 무속적인 신비주의자들의 탈역사적인 잘못된 신앙의 흐름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전자는 기독교에서 영원을 제거시켰고 후자는 역사를 제거시켰다. 

이 양극단의 잘못된 흐름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올바른 신앙의 위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올바른 기독교 예정론의 성경적 정립과 이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의식의 확립과 전파는 오늘날 위기에 처한 한국 기독교의 최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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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믿음의힘 | 작성시간 09.07.29 도대체가 님의질문의도가 무엇인지 알쏭달쏭하네요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수차례말해도 믿지도않고 엉뚱한 유치원생같은 질문으로 대단한것처럼 마구글으쓰니 어찌대답해야하나요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님이말하는세분이아닙니다 님은 성부하나님.성자하나님.성령하나님 하니까 신은셋이요 하나님의영도셋이고,하나님도세분이시다, 이렇게말하고 있잖아요, 이러니 내가 어찌 님과입씨름이되도록 말할수있는지요 그래서 이제그만할렵니다 대꾸할 맘이별로 없어지네요 .
  • 작성자레마의말씀 | 작성시간 09.07.29 이 질문도 신이라고 물어서 않된다고 하실건지요? 하나님이란 말씀을 써면서.. 언어유희 속에 들어가려니... 신이라는 존재론적(개체론적) 개념을 피해가야만 그 삼위일체론의 삼신론의 실상을 감출 수 있는 것이랍니다.. 제가 다 알고 있답니다.. 글나, 삼위일체론자들의 언어유희 속에서도 한번 이 이론의 삼신론의 실상을 들추도록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믿음의힘 | 작성시간 09.07.29 레마님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께요 성경을 외곡되게 해석하지 마세요 하나님의말씀은 영원토록 알파와 오메가요, 교만한사람들의 글과 입방아 재주에 움직여지는것이 절대 아니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레마의말씀 | 작성시간 09.07.29 누가 드릴 말씀을 누가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앞에 겸손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세상이론과 철학과 언어유희적 철학 용어에 넘 기대를 두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시고... 말씀보다는 철학적 정의를 더 치중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한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철학보다 못하게 보시면 아니될 것입니다.. 앞으론 철학은 내려놓으시고... 영원한 생명과 능력과 진리의 말씀만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 작성자hdk호동 | 작성시간 09.07.29 참으로 기계적 예정론은 삭막합니다. 한국교회 수준을 다운시키는데 공헌했다고 해야 되겠지요. 독버섯은 이쁘다?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럽다? 이런 따위의 궤변을 타파 하느라 수고하시는 여러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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