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독백&공지&회원근황

[독백]잠 못이루는 순례길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작성자fairy|작성시간19.04.09|조회수109 목록 댓글 2

순례길 일기중에서.

한밤중 ‘여행은 또 다른 삶’이라는 어느 여행사 버스안 광고문구를 보내준 제자와 톡을 하다 갑자기 드는 생각.
다를게 뭐 있나.
삶 자체가 잠시 왔다 가는 여행인걸.

사실 이번 순례전에도 어렴풋이 느낀거지만 세상이 이토록 단순하고 쉬운 여행이 있을까 싶다.
계획한 순례일정 후반에 들어가면서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아무것도 하지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걷기만하면 되는 여행.
걷다가 힘들면 쉬어가고 체력이 바닥나지 않게 적절히 안배하여 숙소를 결정해야 한다.
어떤 경우 12킬로를 걸어도 마을 하나 없는 적도 있으니까.
연결편 교통수단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호텔이나 알베르게는 마을마다 있으니까 어디서 묵을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비수기라 잠 잘곳이 없지 않으니 파란하늘 예쁜구름.
새소리 바람소리 풀 냄새. 작은 풀꽃의 흔들림.
앙상한 나무가지가 만들어 놓은 자연 등등 빨리 걸어갈 필요도 없고 길 위에 있어야 더 좋다.

날마다 동행이 바뀌고 밤마다 동숙자가 바뀌어도 그려려니 하면된다.
서로 언어가 다르니 말할필요도 없고 소통이 필요하다면 조용히 웃기만 해도 전세계인이 친구가 된다.

흔히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하지만 살만큼 살아서인지 뭘 찾겠다는 거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기. 걷다가 적당히 쉴 곳이 있으면 쉬어가고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고 배고프면 요기정도 한다.
아마도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있는 세계적이고 공식루트가 있는 길이다.
그래서 안정적이고 값싼 숙소와 순례자메뉴라는 기본 음식이 있어 이 먼곳까지 오지 않았나 싶다.

모자간, 부녀간, 친구간, 부부간 등등 짝 지어 오는 순례자들도 많지만 단연코 홀로 길 위에 선 이가 대부분이다.
맞다. 순례길은 혼자가 답이다.
현재 6인실의 네 명의 나그네로 제각각이다.
찢어진 청바지가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독서를 즐기는 20대 서양 소녀.
주먹만 한 헤드셋을 목에 걸로 들어선 장대크기의 80대 서양 할아버지.
밤새 이를 갈고 코를 고는 중년의 동양 아저씨까지 모두 홀로 나그네다.
하지만 지금 난 코 고는 소리땜에 한잠도 못 이루고 있다.
방 밖으로 나와 앉아 있지만 추워서 다시 들어가야 한다.
침낭속에서 다시 잠을 잘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지금 새벽 4시 16분. 날 새면 얼마나 걸을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이다. 참나


2019년 4월 9일
거문고선녀

11킬로를 걷는 내내 펑펑 눈이 내리는 Foncebadon의 아침.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무울 | 작성시간 19.04.09 햇살 고운 아침에 지금쯤 어딘가 길위에 있는 선녀님을 생각해 봅니다.
    순례길을 잘 그려주셨네요.
    오늘도 부엔 카미노.
  • 답댓글 작성자fairy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4.10 무울님 어제는 봄꼬만발한 산길을 하염없이 걸어 너무행복했는데 밤새 흰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펑펑 눈냐라는 산을 덩실덩실 춤추며 30킬로 걸었네요. 여긴 Foncebadon ~ Ponferida 입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