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 하나의 무게 / 김창남 14
1. 1969년 3월 초였다.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농협 신규 발령 통지서가 마침내 도착했다. 4월 1일 대구 지역본부로 출근하라는 내용이었다. 통지서에는 신원보증인의 보증서와 함께, 부동산 과세표준 100만 원 이상의 재산증명서와 인감증명서를 첨부하라고 적혀 있었다.
2. 지금 기준으로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당시 100만 원은 시골에서 전답을 넉넉히 가진 집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재산이었다. 시내에서도 괜찮은 집 한 채 값에 가까웠다.
3. 나는 우선 작은 과수원을 가진 큰아버지를 찾아갔다. 사정을 말씀드리자, 큰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참 말이 없던 큰아버지는 담뱃불을 비벼 끄더니 따라오라며 앞장서셨다. 면사무소로 가는 내내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앞서 걷는 큰아버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급받은 재산증명서에는 40여만 원이 적혀 있었다. 기준에 한 참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순간 큰아버지의 얼굴에 스치듯 지나간 안도감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큰아버지는 별말 없이 서류를 내게 건네주셨고,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4. 이번에는 사촌 자형을 찾아갔다. 잠사업을 하던 자형은 돈을 제법 잘 벌고 있었고, 내가 은행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해 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형님을 거쳐 조카사위에게까지 찾아가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은 듯 어머니를 내 앞에 세우셨다. 자형은 어머니가 말을 건네자 흔쾌히 승낙했다.
“숙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동사무소에 전화해 놓을게요.”
그러면서 자형은 이제 이 동네 유지라 인감증명서쯤은 직접 가지 않아도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평소 허세가 좀 심한 자형이었지만, 그날만큼은 그 허세가 든든하게 들렸다. 재산증명서에는 살고 있던 집 한 채만으로도 기준 금액을 훌쩍 넘었다.
5. 나는 대구 시내 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대망의 첫 출근을 했다. 내가 발령을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가족은 대구로 이사했다. 나는 직장 인근에 하숙을 정했고, 부모님은 변두리 달동네 쪽방에 몸을 의지하셨다.
6. 그렇게 한숨 돌리는가 했더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입사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총무계 직원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사촌 자형의 신원보증이 무효가 되었다며 보증인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통보였다. 날벼락 같은 소리에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자형은 내게 보증을 서 주던 그 시점에 이미 사업이 크게 기울어 부도 직전에 있었다. 은행에서 재산조사를 나갔을 때는 이미 집마저 압류된 상태였다. 훨씬 뒤에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자형은 부도나기 전 마지막으로 처남에게 좋은 일을 해 줄 수 있어서 다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 속 깊은 말을 전해 듣고 오래도록 가슴이 먹먹했다.
7. 신원보증인을 다시 세우지 못하면 발령은 취소된다. 그날 저녁, 쪽방에 모인 우리 가족은 손을 맞잡고 눈물만 흘릴 뿐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부도만 나지 않았더라면 신원보증 정도는 고향에서 어떻게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가진 것도, 기댈 곳도 없었다.
8. 저녁도 굶고 한숨만 쉬던 중, 갑자기 아버지가 밖에 바람을 좀 쐬고 오겠다며 나가셨다.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나는 골목을 서성거리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날따라 달빛은 유난히 밝았다. 그 환한 달빛이 우리 처지를 처량하게 비추는 듯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야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초등학교 동창 한 분이 계셨다. 대구에서 택시회사 사장으로 자수성가한 분이었다. 지난 추석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자랑삼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체면도 자존심도 다 내려놓고 그 회사를 찾아갔다. 친구분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맞아 주었고,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똑똑한 아들을 두어 좋겠다는 덕담과 함께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9. 이튿날, 그분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열심히 일하라는 격려와 함께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인감도장을 꾹 눌러 찍어주셨다. 붉은 도장이 찍힌 그 보증서를 보는 순간, 뜨거운 덩어리가 목까지 차올랐다. 그 도장은 단순한 도장이 아니었다. 한 청년의 미래를 믿어 주겠다는 약속이고 자신의 이름과 재산을 걸고 보내 주는 응원이었다.
그 후 나는 명절마다 작은 선물을 들고 찾아뵈었다. 이태가 지나자, 그분은 더는 오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성실하게 근무 잘하는 것이 내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 말씀은 오래 내 가슴에 남았다.
10. 당시에는 직원이 금융 사고를 내어 신원보증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간간이 있었다. 보증 갱신 때마다 찾아뵙고 도장을 다시 받으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나를 믿어 주는 이분에게 절대로 피해를 드리지 않겠다. 그게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그 다짐은 어느새 내 직업윤리가 되었다. 돈을 만지는 은행원으로서 부정한 돈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그때 뿌리내렸다.
11. 돌이켜보면 40년 농협 생활을 단 한 건의 금융 사고 없이 정년퇴직할 수 있었던 것은 내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벼랑 끝에 서 있던 젊은이에게 자신의 이름과 재산을 걸고 손을 내밀어 준 ‘위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나를 지켜 준 진정한 힘이었다.
12. 지금은 ‘신원보증보험제도’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참 편리하게 변했지만, 그러나 사람을 믿어 주는 그 따뜻한 마음까지는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가끔 내 마음속에 찍힌 그분의 붉은 도장 자국을 떠올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그런 보증인이 되어 준 적이 있는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질문은 여전히 내 마음을 두드린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진일 작성시간 26.06.15 보증인께 도장 받으러 다닌 기억이 제게도 있지만, 은행에서는 재산이 당시 100만원 이상 이었다면, 쉬운일이 아니었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믿어주신 그 분이 참 고맙겠습니다. 귀인이십니다.
나를 믿어 주는 이분에게 절대로 피해를 드리지 않겠다. 그게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그 다짐은 어느새 내 직업윤리가 되었다. 돈을 만지는 은행원으로서 부정한 돈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그때 뿌리내렸다.
40년 봉직하면서 한 건의 재무사고도 없이 잘 마무리 하였음에 찬사를 보냅니다.
대단 하십니다.
-
작성자김창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6 살아오면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 몇 분 중의 한 삶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아쉬운 마음 뿐입니다.
이렇게 글로 그분을 추모할 따름이지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