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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아카데미 26기

발걸음이 머무는 곳/이자연 4

작성자이자연|작성시간26.06.17|조회수51 목록 댓글 1

발걸음이 머무는 곳/이자연(4)

 

1 오월의 푸른 기운이 세상에 뻗치는 봄날, 문경 산북으로 문학기행을 떠났다. 울창한 숲속에 안긴 김용사에서 대승사로 향하는 길, 열린 차창으로 산 내음이 버스 안으로 훅 밀려들었다. 떨떠름하고 들큼한 감꽃과 찔레꽃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순간, 굳게 잠겨 있던 기억의 빗장이 열리듯 세월 속에 파묻혔던 오래된 마당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2 버스 창밖으로 어린 시절 보냈던 마을 앞 느티나무가 휙 지나갔다. 요즘은 폐교가 되어 잡초만 무성한 초등학교로 들어가던 길가의 아름드리 고목이었다. 차창에 이마를 댄 채 지나간 세월의 아득한 뒤편을 돌아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갔지만 내 눈은 본능적으로 알아보았다.

3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몇 년에 한 번씩은 꼭 이동해야 하는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은 철새처럼 따라다녔다. 거산이라는 낯선 이름의 이 마을도 우리 가족의 머물렀던 많은 간이역 중의 하나였다. 일곱 살, 철없던 시절 몇 해 보낸 곳이었다.

4 전날 비가 내린 마당에는 뽀얀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비린 듯하면서도 구수한 흙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마당을 마구 뛰어다니면, 발가락 사이로 말랑한 흙이 발가락을 간질렷다. 처마 끝에 뚝뚝 떨어지는 빗물은 내 심금을 울렸고, 물기 머금은 산바람이 마당을 건너와 옷자락을 스쳤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던 차가운 흙의 감촉이 육십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내 마음에 영화처럼 남아 있었다.

5 친구 울련의 큰아버지인 홍식 아재가 우리 집 마당에서 서성인다. 그는 어머니의 먼 친척이다. 귀가 들리지 않아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대답하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열두 살의 나는 아재가 어버버거려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 남에게 나쁜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주는 아저씨였다.

6 아재는 부지런했다. 잠시도 손을 놀리지 않고 무언가를 해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고 큰 나무를 베어다 한적한 마을이 울리도록 도끼질을 했다. 겨울철 농한기 때는 뒷방에 앉아서 묵묵히 가마니를 짜고 있었다. 굳은살 박인 손에 쥔 볏짚이 오갈 때마다 가마니기계 틀 소리가 비 오는 날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마술 같은 아재 손놀림을 넋 잃고 바라보곤 했다. 아재 앞에 수북이 쌓인 노르스름한 볏짚 부스러기들을 만지기도 하고 지푸라기를 비벼 새끼줄 꼬는 아재 흉내도 내었다.

7 아재는 꼭 우리 집의 우렁각시 같았다. 집안일을 부탁하거나 요구하지 않아도 장작이 떨어질 때쯤이면 나무 짐을 지어다 놓고, 초가지붕 손볼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 가을이 되면, 온몸에 알싸한 솔향을 묻히고 와서 산 정기를 가득 머금은 송이를 대바구니에 담아 마루 끝에 툭 얹어놓고 갔다.

8 초겨울 우리 집 마당에서는 메주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일을 거들러 온 울련엄마가 바쁘게 오가고 홍련 아재가 무쇠 가마솥에 불이 지폈다. 콩 삶는 구수한 내음과 하얀 김이 쑥쑥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소매를 걷어붙인 울련이 엄마가 삶은 콩을 커다란 함지박에 들이붓고 치댔다.

“아이고, 얼간아! 그것도 제대로 하나 못 맞추나!”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손과 입은 쉬지 않았다. 입으로는 콩알 떨어뜨리는 아재에게 호통을 치면서 손으로는 으깬 콩을 동글고 두툼하게 빚었다. 건네받은 아재는 사각 메주 틀에 넣고 꾹꾹 밟았다. 두 사람의 실랑이를 흥겨운 노동가로 듣는 듯 어머니는 웃으며 아직 따뜻한 메주를 틀에서 빼냈다.

9 나와 울련이는 마루에 걸터앉아 어른들이 부르기를 기다렸다. 심부름시킬 때 삶은 콩을 한 바가지씩 건넸기 때문이었다. 솥에서 막 꺼낸 콩은 엄청 뜨거웠지만, 이 손 저 손으로 옮겨가며 호호 불어 식혀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 뜨거워하며 엄살을 부렸지만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차면 행복했다. 처마 밑에는 짚으로 엮은 노란 메주가 매달렸다. 겨울 햇빛이 서산으로 기울면 메주 그림자가 마당에 길게 늘어졌다. 마당은 마치 피아노 건반이 되었다.

10 아버지의 전출로 우리 가족은 대구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 서 있는 홍식 아재가 보였다. 그는 빈 지게를 지고 멍하니 서 있던 모습은 그 자리에 뿌리내린 느티나무 같았다. 점점 멀어져 가는 아재의 모습이 점처럼 작아졌지만, 아재 웃음은 구름 타고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11 소박했던 아재의 손길과 따스했던 풍경들이 그날 그때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줄 알았다. 아니 이제껏 잊어버리고 살았다. 육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오늘 잠시 스쳐 가는 풍경에 옛 추억이 이렇게 가슴 저리도록 와 닿을 줄은 미처 몰랐다. 다정하게 품어주던 어머니, 엄격했지만 든든했던 아버지도 이제는 이 세상에 떠나셨다. 우리 집 마당을 쓸어주던 버버리 홍식 아재도, 목소리는 컸지만, 일머리가 잘 돌아가던 울련 엄마도 흙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12 그 시절을 떠올리면 미소가 절로 난다. 왜? 라는 의문들이 내 안에서 꼬리를 문다. 귀가 먹고 말을 못 하던 홍식 아재는 어떻게 의사를 표현했을까. 글을 모르던 아재 눈에 선생님이신 아버지가 존경하는 큰 바위 얼굴로 비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 궂은일을 묵묵히 도맡아 하는 건 아재가 하는 공부였으리라 여겨진다. 착하고 아재를 잘 따르는 귀여운 딸, 몸은 여리지만 강건하고 포근한 어머니, 우리 가족은 아재를 동네에서 대접해주는 사람들이었고 아재는 우리를 사랑했다는 내 짐작이 맞을까? 궁금하다. 이제는 물어볼 데도, 대답해 줄 사람도 없다.

13 글감을 찾아 떠나온 문학기행에서 잃어버린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을 찾아 그 속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다. 기억 속의 산길은 좁았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길은 넓고 여기저기 잘 지은 전원주택이 자리를 잡았다. 현대식 건물로 풍경은 달라졌지만 내 마음속 깊은 우물에 고인 추억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구수한 메주 냄새, 노을 속에 멀어지던 홍식 아재, 투박한 욕설 속에 숨겨진 바지런한 울련 엄마의 얼굴도 지워지지 않는 판화처럼 찍혔다.

14 육십 년이라는 시간은 정답던 사람들을 데려갔지만, 그들이 머물다 간 기억과 온기까지는 빼앗아 가지 않았다. 글쓰기라는 매체로 그 옛날의 사람들을 불러다 다시 한번 내 곁에 앉혀보았다.

15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마루에 앉아 다리를 흔든다. 까만 흙이 잔뜩 묻은 작은 발은 맨발로 디디던 차가운 흙의 감각을 온전히 기억하게 한다. 내 발걸음은 그곳에 머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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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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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진일 | 작성시간 26.06.18 그리웠던 옛 추억이 아름답습니다.
    버버리 아재의 순박하면서 착한 성품, 울련 엄마의 넉넉한 이웃의 정, 아버지는 교사로써 덕성이 훌륭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잘 대우하시고 배려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인덕이 많으니 이웃이 아무 대가도 없이 도와주는 것이 겠지요.
    훈훈한 옛 인심과 이웃간의 情이 그립습니다.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글이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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