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수필아카데미 26기

결혼이라는 숙제 / 임성림6

작성자임성림|작성시간26.06.21|조회수65 목록 댓글 2

1. 서른다섯 살 된 딸이 있다. 미혼이다. 결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변했다. 그것은 선택일 뿐 하지 않았다고 삶이 실패하거나 결함이 있는 건 아니다. 사고를 탈바꿈하지 못한 나는 걱정이 많다. 딸이 감당해야 할 고난을 떠 올리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2. 딸애는 자신의 나이를 걱정하거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다. 주변에서 어리게 봐 주니 상큼한 이십 대 후반으로 착각한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세상에서 원래 나이로 보인다면 그건 관리가 제대로 안된 것이다. 예리한 AI의 눈으로 보면 어림없다. 엎드려서 고개를 치켜들 때 잡히는 이마 주름이 안타깝다. 웃을 때도 어김없이 눈가 주름이 포착된다. 늦기 전에 어울리는 상대를 찾아야 하는데, 눈은 또 남산타워 꼭대기에 올라 가 있다.
3. 저 나이에 사귄 남자가 없다면, 분명 무능한 것인데 딸은 고고하다고 한다. 나이에 밀려 끌리지도 않는 사람 만나 시간을 낭비하느니, 독야청청한 게 백 번 낫다는 것이다. 말은 맞는데 어쩐지 모태솔로인 게 창피해 둘러대는 말 같다. 하긴 숙맥 같은 성정의 근본을 따지자면 할 말은 없다. 독신을 주장하던 나와, 가까스로 노총각 딱지를 뗀 제 아빠의 유전자가 어딜 가겠는가.
4. 딸애 때문에 모임도 시큰둥하다. 하나같이 사위나 며느리 이야기며 손주들 자랑에 여념이 없다. 사진을 봐주며 장단을 맞추지만 마지못해 예의를 차릴 뿐이다. 참아 온 가슴 한 켠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는다. 갱년기가 부활한 것 처럼, 냉수를 마셔도 얼음을 깨물어 먹어도 진정이 안된다. 자식이 혼자면 또다른 자책감이 든다.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 같다. 지금이라도 간섭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자유가 방임인지 관망인지 구분이 안된다. 그러다 스스로 위안을 한다. 제 인생인데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냐는 믿음과, 천생의 연분이 쉽게 나타나겠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인다.
5. 남편이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한다. 친구가 자기 조카를 우리 딸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고 한다. 그가 들뜬 건, 소개남의 이력이 괜찮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딸애는 그의 신상을 듣기도 전에 거절한다. 능력있고 같은 서울에 거주하며, 잘 생겼다고 강조해도 들은 척 않는다.
'그리 잘난 놈이 어째 나한테까지 굴러와?'
호박도 아닌 멀쩡한 사람한테 굴러오다니! 싹수없고 냉소적이다. 가기 싫다던 청학동 예절 학교를 강하게 밀어부쳐야 했는데, 후회는 고스란히 나의 몫이다.
6. 제안이 싫으면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엄마한테는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 하지 않나. 남편은 내게 특사의 전권을 준다며 딸의 속내를 낱낱이 알아 오라고 한다. 그는 거북스러운 일을 그럴 듯 하게 포장해 내게 미룬다. 나 역시 궁금하다. 결혼이 언제부터 관심 밖의 일이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최근 자주 집에 오지 않는 이유도 알고 싶다. 딸에게 올라간다고 연락하니 모호한 말을 한다. 약속은 없는데 놀아주지는 못하니 알아서 하란다. 불면 날아갈까 키워놨더니 자식 다 소용없다는 기분이 든다.
7. 금요일 저녁 기차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기울자, 들녘 위로 길다란 산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은빛 비닐하우스들이 지나간 세월같이 휙휙 지나간다. 어리기만 하던 아이가 이 기차를 타고 십 칠 년을 왕래했다. 청춘의 꿈을 안고 시작한 재수부터, 대학생활과 외국에 나가 있던 시간과 직장생활까지. 자식이 원하는 건 다 해주려고 노력했건만, 딸은 왜 예전 같지 않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굵어졌기 때문일까.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때로는 지적질까지 한다.
8. 부모 품을 떠난 뒤 혼자 판단하고 결정하는 게 힘들어서 그럴까. 딸애 입장에서도 생각해 본다. 몸져 누워 텅 빈 위장 속으로 약을 삼키던 날이 있었을 거다. 뜨거웠던 열정이 사그라들어 모든 게 허무해질 때도, 열등감이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 때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도 모르는 슬픔으로 엄마 품이 한없이 그리울 때도, 딸은 한 번도 전화기로 울먹이거나 상경해 달라는 요청이 없었다. 응석도 위로도 받을 수 없었던 순간들이 가슴에 맺힌 것일까. 일찌감치 삶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외로운 투쟁이라고 느꼈기에, 자신의 결핍을 엄마에게 맡기지 않으려는 건지 모르겠다.
9. 딸의 오피스텔 센서등이 번쩍 켜진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벌어진다. 코딱지 만한 공간일수록 정돈을 잘해야 한다고 일렀거늘,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다. 벗어던진 옷들이 침대에 널브러져 있고, 쌓인 그릇들에 양념이 붙었고 카펫에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런 꼬라지에 무슨 결혼이며 살림이란 말인가. 스테이크를 안주삼아 와인으로 아이의 속내를 살피려 한 전략이 틀어진다.
10. 청소를 마치고 라면을 끓이는데 딸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다.
"엄마, 내 것도."
여태 밥도 못 먹고 뭘 했단 말인지. 라면과 즉석밥과 김치로 상을 차린다. 냉장고에 소주를 꺼낸다. 아이의 얼굴은 전보다 야원 듯하고, 눈 밑엔 거무스름한 어둠이 깔려있다. 라면을 애 쪽으로 밀어주며 뭐 하다 이제 왔냐고 추궁한다.
"뭐 하긴 여태 일했지. 엄마 때문에 뛰어왔구만."
업무 외에 일 시키는 것, 저녁밥 안 먹이고 일 시키는 것, 모두 근로기준법에 위반이라고 비난한다.
"수당도 식사비도 다 받아. 빨리 오려고 저녁을 안 먹은 거지."
11. 그 말이 다행이다 싶으면서 또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더 일찍 와서 맛있는 밥을 해놓고 기다렸어야 했다. 몸 약한 애가 매일 어김없이 출근하는 것도 힘든데, 책임과 압박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건 아닌지. 그런 가운데 한 달을 꼭 채워야 받을 수 있는 보상이니, 어찌 눈물같이 짠 소금(salary) 맛이 아니겠는가. 청소와 빨래가 미뤄지는 게 설명되고도 남는다.
12. 딸한테 사실을 털어놓는다.
"사실은 엄마가 너 결혼을 독촉하러 왔는데, 사는 거 보니 말 안 해도 되겠다. 힘들지?"
뭔가 말하려다 말 끝을 흐리는 딸이 더 가엾게 느껴진다. 힘든 세상을 경쟁하고 사는데, 거기에 결혼의 짐까지 보태고 싶지 않다. 결혼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 혼자가 편하면 혼자 살면 된다고 말해 버린다. 행복하다면 삶의 형태는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
13. 내 말이 그쯤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이다. 술이 좀 오르자 이상한 말까지 한다. 성분 구조상 엄마의 독신주의 피를 네가 물려받았다는 둥, 결혼에 얽매이지 않을 면책특권을 오늘 밤 주겠다는 둥, 엄마의 자유를 방해하는 사람은 네 아빠라는 둥. 위험한 말을 내뱉고 만다.
14. 딸은 내 말에 피식 웃더니 입을 연다. 사실은 일주일 넘게 야근하다 집이 엉망이 되었을 뿐, 다른 때는 정말 깨끗하다고 말한다. 일이 많은 건 동료가 얻은 긴 결혼 휴가 때문이라고. 그뿐만 아니다. 자신은 애초에 엄마의 유전자를 닮은 독신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 일에 지쳐 생각이 없을 뿐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엄마도 결혼했으니, 독신주의자는 아니니 멋있는 페미니스트 흉내는 내지 말란다. 자신이 정말 결혼하고 싶을 때, 또 뭔가를 이룬 후가 적령기니, 나이로 밀어붙이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15. '저리 똑 부러진 애를 내가 낳았단 말이지.'
딸의 명쾌한 생각을 들으니 속이 후련해진다. 그렇다. 요즘 결혼은 필수 관문이 아니라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서두룰 게 아니라 마음과 상황에 따라 신중하게 고민하고 결정할 일이다. 더 이상 딸아이에 대한 걱정을 접기로 한다. 저 아이의 몸과 마음이 자연적인 이치와 순리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고 지지하기로 마음먹는다. 동이 트려는지 블라인드 사이로 희붐한 빛과 편안함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진일 | 작성시간 26.06.21 딸 하나인지 모르겠어나, 아직 자식들 결혼 못 시켰군요. 친구들 손주 자랑 하는데, 고립감을 느낄 수 있겠네요.
    요즘 30대 중반이후, 결혼을 많이 하니깐에, 노산이라 임신도 잘 안되어 시험관 시술도 많이 하더이다. 절에서 기도하는 모친이 있어서,
    스님으로 간곡히 축원하고 있는 중입니다.
    결혼 안 해도 걱정, 하여도 걱정이니 부모 마음은 늘 속앓이 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좋은 혼처가 나타나길 바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임성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2 딸이 결혼한 지 2년이 다 되어갑니다. 교수님께서 사건을 쪼개서 쓰라하셔서, 딸이 결혼하기 전 저의 심정을 써 보았습니다.
    스님 읽어주시고 축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