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블로그 Uglytruth-Thailand 2016-10-13 (번역) 크메르의 세계
[평전] 태국 국왕 푸미폰 : 그 나약하고 비겁했던 수구적 삶
글 : 길레스 짜이 응파꼰 (Giles Ji Ungpakorn)
태국 국왕 푸미폰(Pumipon, [공식] 푸미폰 아둔야뎃 Bhumibol Adulyadej)은 나약하고 특색없는 군주였다. 그는 고립된 채로 무용하고 특권을 삶을 누렸다. 그를 둘러싼 이들은 그를 "신"이라고 주장하며 아양을 떨고 굽신거리던 아첨꾼들이었다. 푸미폰은 어떤 방식으로도 동정을 받아선 안 될 가련한 존재이다. 그의 평생 업적은 자기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군사정권들을 지지하며, 불평등을 옹호했던 일 뿐이다. 그는 민주적 권리, 사회정의의 발전, 법률의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사용을 가로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태국의 집권자들이 저지른 최악의 정부 정책들과 잔학행위들 모두를 정당화시켜줌으로써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최근 몇년 동안 그가 침묵을 유지하는 사이에 더욱 더 많은 정부 비판자들이 가혹한 악법인 <왕실모독 처벌법>(형법 제112조)에 따라 감옥으로 갔다. 그들은 단순히 민주주의 파괴 행위를 비판하는 말을 한 것 뿐이었다. 군부가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해할 때도 푸미폰은 언제나 침묵을 지켰다.
(사진) 독재자 타넘 낏띠카쫀(집권: 1963~1973)과 함께 한 푸미폰 국왕(우측)과 마하 와치라롱꼰 왕세자(좌측).
푸미폰은 기꺼이 군부의 도구가 돼주었다. 군부는 끊임없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태국 국민들의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에 장매물이 돼온 존재이다. 하지만 푸미폰은 이런 과정을 통해 보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치세 동안 다른 사업들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그 결과 태국 최고의 부자는 물론이고 세계 최고의 부유한 군주도 됐다. 하지만 그는 "충족경제 이념"(Sufficiency Economy Ideology)을 주창하면서, 자신의 "백성들"에겐 가난 속에서도 행복할 것을 가르쳤고, 부의 재분배에도 언제나 반대했다. 태국은 아시아에서도 가장 불공평한 국가 중 하나이다.
푸미폰의 아첨꾼들은 그의 콧등에 땀방울이 맺힌 사진 한 장을 끊임없이 유포시켰다. 푸미폰이 참된 땀방울을 흘릴만큼 무언가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사진은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유포된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푸미폰의 추종자들은 국왕이 주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신발끈을 묶는 사진이 유포되자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이 등장할 때 사람들이 무릎으로 기거나 특별한 왕실 언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기능장애 자녀들에게도 자신이 갖고 있던 뒤틀리고 엘리트적 관점의 세계관을 전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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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미폰은 미국에서 태어났고,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스위스에서 보냈다. 클랙식카 및 풍족한 생활에 대한 애정은 결국 그의 한쪽 눈의 시력을 앗아간 교통사고를 초래했다.
푸미폰은 1946년 자신의 형 아난다 마히돈(Ananda Mahidol, 라마 8세: 1925~1946) 국왕이 총상으로 사망한 이후 즉위했다. 그의 형 아난다 국왕은 자살 아니면 총기사고로 사망했는데, 이 사건에는 푸미폰이 연루돼 있었다. 어느쪽이든 푸미폰은 당시 상황을 완벽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밀을 유지했고, 그 때문에 왕궁 시종 3명이 무고하게 처형당했고, 쁘리디 파놈용(Pridi Panomyong 혹은 Pridi Banomyong: 1900~1983) 당시 총리가 이 사건으로 인해 정적들로부터 그릇되게 욕을 먹고 [사임하게] 만들었다. 국왕으로서 푸미폰의 경력은 이렇게 기만적이고 줏대없는 방식으로 남은 인생 전반으로 이어졌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부패하고 전제적인 통치자 살릿 타나랏(Sarit Tanarat 혹은 Sarit Thanarat: 1908~1963, [집권] 1958~1963) 원수는 군부와 왕당파 사이의 강력한 동맹을 형성하기 위해 푸미폰을 이용했다. 1930년대~1940년대 사이, 절대왕정을 전복시킨 1932년의 성공적인 혁명(시암혁명) 전후로 태국 국민들 사이에서 국왕의 평판은 나빠졌고 인기도 없었다. 이 시기에는 심지어 군부의 핵심 지도자들조차 공화주의자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살릿과 왕당주의자들은 '냉전시대'를 보수파 엘리트들의 특권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푸미폰 국왕은 "반공주의" 동맹의 상징적 존재로서 체계적으로 선전됐고, 푸미폰이 바로 살릿의 핵심자산이 됐다. 심지어는 미국 정부조차 대공 전술의 일환으로 농촌지역 주민들에게 국왕의 초상화를 배포하는 사업을 지원할 정도였다. 국왕의 초상화가 없는 집은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살릿이 죽자, 그의 수하였던 타넘 낏띠카쫀(Thanom Kittikachorn: 1911~2004, [집권] 1963~1973)과 쁘라팟 짜루사티얀(Praphas Charusathien: 1912~1997)이 부패 군부의 그 다음 집권자가 됐고, 푸미폰은 그들과 공조했다.
(사진) 살릿 원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푸미폰 국왕.
푸미폰은 민주주의나 사회정의에 관해 단 한번도 발언한 적이 없었다. 또한 부정부패를 비판한 적도 없다. 군부는 국왕 및 그가 발의한 "왕실사업"(Royal Projects: [역주] '새마을사업'의 원조)을 선전해댔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왕실사업은 태국인 다수의 삶의 표준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73년 10월 대규모 대중 봉기가 발생하여 군사정권이 붕괴했고, [기득권] 엘리트 계층은 푸미폰이 개입하여 현상유지를 해줄 것을 종용했다. 그는 TV에 등장해 새로운 문민정부를 발표함으로써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하여 푸미폰은 가까스로 "민주적 국왕"인 척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급투쟁의 먹구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고, 태국의 학생운동가들과 사회운동가들이 참다운 사회적 변화를 추구했던 시대였다. 그들은 공산당의 이념에 매료됐다. 푸미폰은 군부 및 보수 엘리트들과 함께 했고, 학생들과 좌파들을 공격할 '빌리지 스카우트'(Village Scouts: 의용방위군[VDC]) 같은 극우 민병대 단체들의 설립과 활동을 고무했다. 그 결과는 1976년 10월 6일에 발생한 유혈 시위진압인 '탐마삿 대학의 학살 사건'(Thammasat University massacre)이었다. 군부는 곧바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새로운 독재정권 하에서 보편적인 탄압과 검열이 행해졌다. 이 해 12월, 푸미폰은 태국이 "너무 많은 민주주의를 갖고 있었다"고 발언하여 일련의 사태를 정당화했다. 좌파 진영의 태국인들은 그를 증오했다. 탐마삿 대학 학살사건 이후 태국은 정부군과 공산반군 사이의 내전 시기로 들어갔다.
(사진) '빌리지 스카우트' 대원들을 접견하는 푸미폰 국왕.
1980년대 중반이 되자 태국에는 민주적 공간의 문이 열렸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이어서 1991년 새로운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문민정부가 전복됐고, 푸미폰은 다시 한번 군사정권을 지지했다. 하지만 1992년 방콕에서 대규모 대중 봉기가 발생하여 가두투쟁이 전개됐고, 독재정권은 종식됐다. 군부가 패배할 것이 확실해지자, 푸미폰은 자신의 민주적 신용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한번 공개석상에 등장했다([역주] 군부 지도자 수찐다 장군과 시위 지도자 짬렁을 왕궁으로 불러들인 사건. 방콕시장 출신 예비역 소장 짬렁은 2000년대에 극우 왕당파 시위대 '옐로셔츠'의 리더로서 탁신 축출운동의 선봉이 된다). 하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민주적 선거가 열렸고, 정치 엘리트들은 앞다퉈 푸미폰의 "초인적 재능"을 찬양하거나 재홍보하면서 "대왕"에게 굽신거리며 칭송을 해댔다. 그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적법성을 확장시켰다. 푸미폰은 이 모든 것을 꿀꺽 삼켜버렸고, 아마도 그 스스로도 자신의 "신성"을 믿게 됐을 것이다.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도 푸미폰의 이미지를 선양하는 데 조력한 엘리트 정치인 중 한명이었다. 그렇지만 탁신의 정당은 빈곤층 친화적 정책을 통해 2000년대의 선거들에서 반복적으로 승리했다. 절대 다수의 태국인 유권자들은 탁신의 정책으로부터 참다웁고 직접적인 경제 사회적 이익을 누렸다. 그것은 국왕이 수십 년 동안 행했다고 하는 선행의 결과와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푸미폰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 흐름에 편승했고, 탁신이 실시한 잔학한 정책인 "마약과의 전쟁"을 칭송했다. 이 정책으로 3천명의 사람들이 사법외 처형을 당했다.
유권자 과반수에서 탁신이 지닌 영향력은 결국 군부, 관료, 보수 정치인과 경제인 등 보수층 엘리트로 구성된 경쟁자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그 결과는 2006년 9월의 쿠데타와 2014년 5월의 쿠데타였고, 그에 이어진 민주주의 파괴였다. 푸미폰은 이들 쿠데타들에 기꺼이 도구가 돼주길 응했고, 그러한 쿠데타의 명분을 축적해주기 위한 군부와 왕당파 폭도들의 활동에 자신의 이름이 사용되는 일도 허용했다. 푸미폰은 정치위기가 확대되는 일을 막기 위해 용기를 발휘하거나 통합적 노력을 한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 실제로 푸미폰이 태국 시민들을 위해 안정을 구축하려하거나 "국가 단합 유지"를 이룩한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헐벗은 계급의 억압에 있어서 하나의 상징이었다.
2010년 4~5월의 대규모 시위 당시 군대가 수백 명의 민간인을 총격으로 쓰러뜨릴 때, 푸미폰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늙었지만 아직 말할 힘은 있었고, 간혹 새로 임명된 판사들 앞에서 연설도 종종 하던 때였다. 이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국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일이 기껏해야 공적 자금의 완벽한 낭비에 지나지 않음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수백만 명의 태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푸미폰이든 아니면 다른 누구든 소위 "국왕을 둠으로써 얻게 되는 이로움"에 관한 심각한 회의가 발생한 것은 바로 이 사건 및 최근 2차례의 쿠데타였다. 이제 태국에는 강력한 공화주의 정서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정서는 현실적인 탄압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푸미폰이 강력한 지도자이며 2006년 쿠데타 및 심지어는 2010년 학살사건에 명령을 내렸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2014년 쿠데타 무렵, 푸미폰은 노령으로 인해 심신이 정상적이지 않았고, 아마도 그는 발생중인 상황에 대해 제한적인 인지능력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장군이 쿠데타에 국왕의 이름을 이용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
팩트는 푸미폰이 결코 정치적 권력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엘리트들과 그들의 행동, 특히 군부의 행동에 강력한 이념적 적법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푸미폰은 정치적 지도자가 될 만큼 결코 용감하지도 못했고, 결단력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꼭대기에 걸려 있는 눈부신 요정이었다. 그의 이념적 역할은 단순히 군부나 비민주적 엘리트들의 옹호한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가 제안한 반동적인 "충족경제" 이념은 부의 재분배에 관한 어떠한 시도도 반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고, 빈곤 완화를 위한 국가의 개입을 반대함으로써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태국의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 엘리트 계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푸미폰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한 이들에는 탁신을 포함한 재벌 경제인들, 그리고 (공무원과 사법부, 의료분야 등의) 민간부문 및 군부의 관료들도 포함된다.
푸미폰은 거짓을 바탕으로 호사스런 삶을 살았다. 그는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는 국가의 아버지"라고 투사됐다. 하지만 그의 아들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는 얼빠진 자이고 많은 이들의 미움을 받는 불한당이다. 그는 자신의 여성들 사진을 인터넷에 공개하여 모든 여성을 억압했다.
푸미폰은 "천재"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가 "소박한 삶"을 이끌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국왕이나 왕실 엘리트들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왕실모독 처벌법>으로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이제부터 외국 언론인들이 작성할 푸미폰에 관한 추도문들은 항상 해오던 거짓말을 반복하게 될 것이며, 이 가련하고 혐오스러운 남성에 관한 무의미한 칭송들로 나열될 것이다.
푸미폰은 수줍음이 많고 소외된 개인이었고, 자신의 인간 동료들보다는 애완견 무리와 함께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여겼던 인물이다. 수백만 명의 태국인들은 그의 죽음이 태국 사회에 진보적인 변화의 문을 열어주길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만 할 것이며, 여전히 군부 및 반동적인 푸미폰의 후계자에 대처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참다운 민주적 공화정을 위한 때가 됐다. 태국 왕실의 막대한 부와 궁전들은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국민들에게 돌려줘야만 한다. 푸미폰을 위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말라. 그 대신 그의 이름 하에 군대가 죽였던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며, 오랜 기간 질질 끌려가면서 값비싼 장례식 때문에 고통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라.
게으른 언론인들은 오랜 기간의 정치위기가 모두 왕위계승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십여년 간의 정치위기는 국왕의 건강 악화나 왕위계승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로서, 탁신 친나왓이 태국 사회를 현대화시키려는 시도에서부터 출발한다.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는 태국 사회가 안고 있던 기존의 단층선들을 폭로하는 기제로 작용했고, 정치적 주요 인물들의 행위는 모두 이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보수파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격으로 이어졌다. (☞ 참조용 글)
끔찍한 차기 국왕 와치랄롱꼰에 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라.
왕이 죽었다! 공화정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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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용 게시물
- [논문]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Andrew MacGregor Marshall 2013-10-31)
* 상위화면 : "[기사목록] 2016년 태국 뉴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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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보아즈 작성시간 16.10.24 울트라-노마드 금석학을 전공하신 울 노님의 경우 크메르어에 정통하시니 잘 아시겠습니다만, 태국어로 10은 씹 입니다. 한국어와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씹세 씹세 하는거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틀린 말은 아니죠?? (한국말로 십도 보면 어원이 다 통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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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10.24 보아즈 아.. 저 금석학 전공자 아녀요~~
금석학 세미나에 참가해서 배운 적은 있지만요.. ㅎㅎㅎ -
작성자Who am I 작성시간 16.10.24 이글을 방콕에 있는 지인 교수한테 보여주니, 응파곤 교수를 도덕성과 양심이 매우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하네요. 방콕 출신의 엘리트들은 어쩔수 없는가 봅니다. 그러면서 미국과 공모하여 태국의 자원을 해외로 팔아먹으려고 한 탁신 정권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또 그와 잉락 총리를 지지한 대다수 서민들을 stupid한 사람들로 치부해 버리더군요. 저와 라인으로 논쟁이 좀 있었는데, 논리에서 밀리니 오래전 제작된 국왕 홍보 영상과 국왕 만세 합창 영상을 보내주었답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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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Who am I 작성시간 16.10.25 어늘날 국왕이 갑자기 몰래 집에 방문하여 술자리를 함께 했다는 내용인데 요지는 이런 성왕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수 있겠냐는 강변입니다.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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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10.25 "푸미폰 아둔야뎃 교"는 일종의 종교적 광신이라 할 수 있는데요..
사이비종교 신자들과는 토론이 안 됩니다..
가능하면 방콕의 중산층이나 지식인들과는 직접 논쟁하지 마시길 권유해 드리고 싶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실제로 위해를 가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들이 한국 사회나 국제사회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고 할 때만
논리적으로 논파하시고...
사적으로는 토론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나저나
한국의 대통령이 실은 무대 뒤에 숨어있던 무당이라 하니..
남의 나라 이야기 하기 전에..
우리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