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호주국립대학(ANU) 발행 온라인 저널 <뉴 만달라>(New Mandala) 2016-10-19 (번역) 크메르의 세계
[분석] 푸미폰 국왕 사후의 태국 : 최악의 시나리오와 최선의 시나리오
태국 왕위계승의 역사적 전례들과 향후 전망
글 : Jeffrey Peters
* '제프리 피터스'(Jeffrey Peters)는 필명(가명)이며, 오랜 기간 동남아시아를 관찰해온 인물이다.
[역주] 태국의 '왕실모독 처벌법'은 국내 및 해외에까지 그 가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저명 해외 언론이나 공신력 있는 사이트들이 보다 심도 있는 내용의 서술을 보장하고 저자 개인의 신변 보호를 위해, 태국에 관해서만큼은 가명을 허용하거나 저자명 없이 글을 싣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 경우도 바로 이에 해당한다.
푸미폰 국왕의 서거와 그의 아들 와치랄롱꼰 왕세자의 왕위계승이 주요한 정치적 위기 혹은 심지어 더욱 나쁜 상황으로 나아갈 것인가? 제프리 피터스가 최선의 경우와 최악의 경우에 관한 시나리오들을 제시해보았다.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1927~2016) 국왕이 즉위(1946년)하기 전까지 태국에는 세 번의 왕위계승이 있었다. 세 경우 모두 중대한 정치위기를 촉발시켰다.
1868년 몽꿋(Mongkut, 라마 4세: 1804~1868, [재위] 1851~1868) 국왕이 죽고 그 아들인 쭐라롱꼰(Chulalongkorn, 라마 5세: 1853~1910) 국왕이 즉위했을 때, 행여라도 국왕이 젊어서 사망할 경우를 대비한 "예비" 국왕, 즉 부국왕(副國王: [역주] 태국어 '왕나'[วังหน้า, wang na]를 직역하면 '전궁'[前宮, Front Palace]이 될 것이다)과 동반해서 즉위했는데, 당시의 부국왕은 위차이찬(Wichaichan: 1838~1885) 왕자였다([역주] 위차이찬 왕자는 몽꿋 국왕의 동생이자 부국왕이었던 삔끌라오[Pinklao: 1808~1866] 왕자의 아들). 1897년, [개혁파] 쭐라롱꼰 국왕과 [보수파] 위차이찬 부국왕 사이의 긴장관계가 특이점에 도달했다(☞ 전궁의 난[Front Palace crisis: 1874.12.28.~1875.2.25.]). 당시 위차이찬 부국왕은 독자적인 군대를 갖고 있었다. 쭐라롱꼰은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당시 싱가포르에 있던 영국의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 총독 앤드류 클라크(Sir Andrew Clarke: 1824~1902, [재임] 1873~1875)와 협조하여 무혈의 성과를 거두었다([역주] 부국왕 폐위). 이 사태 이후 쭐라롱꼰은 아직 유아기에 있던 태국(=시암)에서 도전받지 않는 통제권을 획득했다.
와치라웃(Vajiravudh, 라마 6세: 1880~1925) 국왕은 1910년에 즉위했다. 즉위 직후인 1912년, 와치라웃은 자신의 육군과 해군 내 젊은 장교들이 일으킨 심각한 군사반란에 직면했다. 반란군은 1911년에 발생한 중국 신해혁명(Xinhai Revolution, 辛亥革命)의 영향을 받아, 더 나은 처우의 요구 뿐만 아니라 민주적 개혁도 요구했다. 하지만 이 반란은 진압됐다(☞ 1912년 궁중 반란: Palace Revolt of 1912).
와치라웃 국왕의 뒤를 이어 쁘라차티뽁(Prajadhipok, 라마 7세: 1893~1941, [재위] 1925~1935) 국왕이 즉위한지 약 7년이 지나자, 변화의 욕구가 더욱 강력해졌다. [특히 군부 등에서] 프랑스 유학파가 귀국하여 정부 최고위직을 귀족들이 독식하는 현상 및 태국의 궁핍한 경제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면서, 1932년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of 1932)을 이끌었다. 쁘라차티뽁은 실각했고, 태국의 절대왕정 시대는 막을 내렸다.
형인 아난다 마히돈(Ananda Mahidol, 라마 8세: 1925~1946, [재위] 1935~1946) 국왕에서 푸미폰 국왕으로 이어진 1946년의 왕위계승 과정 역시 태국 정치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있었다. 1946년의 태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사분오열돼 있었다. 태국은 전쟁 중 일본군의 침략 및 점령(1941.12.~1945.8.) 때문에 연합국의 공습에 시달려야 했고, 이후 일본군의 항복을 관할하는 연합국 군대의 진주를 맛봐야만 했다. 항복 과정은 10만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무장해제 및 본국으로 송환시키는 절차였다.
독재자 쁠랙 피분송끄람(Plaek Pibulsonggram: 1897~1964, [집권] 1938~1944) 원수는 전쟁 중 일본에 협조하면서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연합국의 승리와 함께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쟁 중 미국의 편에 서서 정부군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펼쳤던] 쁘리디 파놈용(Pridi Banomyong: 1900~1983, [집권] 1946.3.~1946.8.)과 '세리 타이 운동'(Seri Thai: 자유 태국)이 집권하면서, 태국은 영토 분할과 가혹한 배상금을 면제받는 구원을 얻었다. 쁘리디는 확고한 민주주의자로서, 1938년 피분송끄람이 권력을 장악한 후 보여줬던 파시즘과 군사독재를 반대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순진했던 것인지 아니면 낙관주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쁘리디는 자신이 전쟁 중에 동맹을 맺었던 왕당파의 선의는 과대평가했고, '세리 타이 운동'의 승리로 [패전 세력으로 전락해] 모욕감을 갖고 있던 군부의 반감은 과소평가했다.
1965년에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했던 장성들 처형의 밤과 마찬가지로, 아난다 국왕의 미스테리한 총격 사망은 태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강력한 정치적 힘을 촉발시킨 사건이었다. 국왕의 죽음이 미궁 속에 이뤄진지 며칠 이내에 쁘리디에 관한 소문이 나돌았고, 그의 실각 후 변화되는 상황 속에서 쁘리디는 해외로 망명까지 해야만 했다. 쁘리디 총리의 후임자로서 '세리 타이 운동' 출신의 타완 탐롱나와사왓(Thawan Thamrongnawasawat: 1901~1988)은 역사상 유일한 해군 출신 총리였다. 하지만 1947년 11월 8일 피분송끄람 지지 세력이 주도한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았다. 그러자 오랜 기간 미국과 영국에 원한을 갖고 있던 피분송끄람이 다시금 집권하게 됐고(1948.4.~1957.9.), 태국은 다시금 군부 독재의 수렁에 빠졌다. 쁘리디와 '세리 타이 운동'은 나중에 두 차례나 재집권을 위한 시도를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고, '세리 타이 운동' 출신 각료 네 명이 살해된 것을 비롯하여 유혈 후폭풍도 뒤따랐다.
'냉전시대' 전체를 포함하여 푸미폰 국왕의 70년 치세는 이제 끝이 났고, 태국은 새로운 왕위계승 과정에 직면해 있다. 이번 왕위계승도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푸미폰이 즉위한 후 70년 동안, 그는 3가지 방식으로 현대 태국 정치와 관련이 있었다.
첫째, 푸미폰 국왕은 관념화된 준-종교적 중요성을 거대하게 축적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쾀벤타이"(kwhambenthai), 즉 "태국다움"(Thainess)에 관한 내용들도 포함된다. 현 시점에서 "태국다움"이란 "국왕을 사랑하는 것"이다. 2006년 9월의 쿠데타 이후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전 총리와 연계됐던 대중주의 정권들에 대해 [보수 기득권 왕당파가] 붙인 특정한 혐의들은 다양하지만, 탁신의 최대 범죄가 2005년 총선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종종 회자되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태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중요해야만 할 제도인 '군주'의 위상을 잠식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군주는 어떠한 성문법에도 저촉되지 않는 제한받지 않는 "예비 권력"(reserve powers)을 획득하고 보유했다. 푸미폰은 대체로 결정권이 없는 역할에 안주해왔지만, 쿠데타 시도나 중대한 대규모 시위 같은 정치적 위기에는, 이러한 예비 권력들이 주기적으로 발현되곤 했다. 군주는 승자와 패자를 결정할 수 있었다.
셋째, [태국학의 권위 있는 연구자인 영국 '리즈 대학'(University of Leeds) 정치학 교수] 던칸 맥카고(Duncan McCargo) 및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듯이(참조☞ 네트워크 군주제[network monarchy]), 태국의 군주제는 물질적인 방식들을 통해 확장된다. 군주제는 한 개인을 넘어서 주요 관료체제 및 투자 포트폴리오 및 주식지분 보유를 포함하여, 태국의 재계 및 정부 주변 엘리트 계층으로 분배되는 훨씬 더 확장된 네트워크이다.
개괄적으로 보면, 푸미폰 치세의 태국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지만 그러한 발전은 불공평한 것이었다. 냉전시대 미국이 인프라 및 교육 부문에 투자한 선발주자로서의 유리함 속에서, 태국은 현재 동남아시아 지역 제2위의 경제를 갖고 있다. 태국은 상당한 규모의 제조업 부문과 더불어 대규모의 도시화된 고학력 중산층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나라 인구의 40%는 여전히 농업에 종사한다. 더욱이 태국의 정치적 과정도 이러한 양극화를 반영하듯 대단히 경쟁적 구조를 갖고 있다. 중산층들이 벌였던 1973년의 시위와 1992년의 시위는 군부 개입 반대라는 규범을 강화하는 징후로 보였지만, 이제 [중산층들의] 이러한 규범이 군사정권을 조건부로 수용하는 데로 이동했다. 친-탁신 정권들이 농촌 주민 및 노동자 계층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잡는 일을 막을 수만 있다면, 태국의 기득권 엘리트 계층은 군부 통치를 수용한다.
이것이 바로 푸미폰의 적법한 후계자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가 이제부터 입장하고자 하는 정치적 무대의 배경이다. 새로운 국왕의 즉위 후 나타날 불확실성 가운데는, 만일 정치 위기가 발생했을 때 국왕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질문도 포함돼 있다.
정치 위기 발생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러한 위기가 군부를 동원해야 할만큼 심각한 상황이 될 것인가?
최근 군사정권의 행보는 새로운 헌법의 통과를 이뤄냈다. 이 헌법은 장차 탄생할 정권들의 구성과 정책방향들을 제약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일련의 제한적 정책들을 담고 있고, 선거를 위한 "궤도"(train track)로서 작용할 것이다. 만일 차기 정부가 국민의 신임을 얻으면서 이 헌법을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이 헌법의 규정들로부터 이탈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라면 분명 긴장이 고조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궤도" 헌법의 입안자들은 다양한 탈출구와 안전장치들을 마련해뒀다. 그 중 하나는 사법부 개입의 문턱을 낮춘 것이다. 또 다른 장치는 상하원 합동 회의를 통한 탄핵이다. 여기에는 250명이라는 임명직 상원의원들이 포함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최근 10여년 간 나타났던 것과 같은 정치위기의 고조는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처럼 군사정권이 이 헌법을 만들어두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도로주행을 해보기 전에는 아무도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만일 농촌 지역에서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한 또 하나의 정부가 탄생하여 새로운 긴장이 고조된다면, 아마도 익숙한 드라마를 다시 한번 보게 될 것이다. 먼저 기득권 보수 세력이 방콕을 마비시키는 시위를 다시금 벌인 후, [그것을 빌미로 삼아] 군부가 다시금 개입할 수도 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국왕이 군부의 개입을 지지하게 될 것인가? 태국 스타일로 보자면, 그 경우 국왕이 군부를 지지하면 정상적인 일이 된다. 하지만 만일 지지하지 않는다면, 태국은 위험한 땅이 될 것이다.
가장 암담한 시나리오는 군주제 네트워크 내에서 각기 다른 세력들이 각기 다른 부문들과 연합하는 가운데 군부가 분열하는 것이다. 그 경우, 태국은 시리아가 된다. 태국을 관찰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군부가 보다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니길 바라고 있지만, 강력한 군부가 이념적으로나 파벌적으로 분열한다면, 그 결과는 매우 섬뜩한 것이 되고 만다.
만일 새로운 선거제도가 단순히 유약한 연립정부들이 이어지는 현상을 만들어낸다면, 그 경우 질문은 군부의 정치개입에 관해 중산층 및 군부가 1990년대의 규범으로 복귀할 것인가 하는 데로 모아진다. 혹은 1970년대와 1980년대처럼 군부 내 파벌 싸움에서 파생한 쿠데타들이 다시금 발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과 관계없이, 정치적 안정을 보장하는 데 순조로운 왕위계승에 의존해야만 하는 일의 종식이야말로 좋은 결과물이 될 것이다.
(자료사진) 2014년 초, 군부 쿠데타를 위한 명분 축적용으로 반 년 동안이나 진행됐던 태국 중상류층 보수파들의 시위는 총기와 폭약을 동원한 무법 천지의 폭력도 행사됐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 그 어느 곳의 시위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럭셔리함이 넘쳐났다. 이하의 사진들은 이 글에서 "중산층 보수파"라고 지칭한 계층의 모습을 담고 있다. (1) 호루라기 불기 시위에 참가한 방콕의 중산층 모녀, (2) 명품 샵에서 팔리고 있던 시위 상징 로고(태국 국기)를 담은 목걸이, (3) 시위 행렬을 선도하는 메르세데스 벤츠 오픈카, (4)(5) 적십자사 깃발을 들고 "민주주의 반대"에 나선 의사와 간호사들.
* 관련 게시물
- [속보 타임라인] 푸미폰 태국 국왕 사망 - 라마 9세의 시대가 끝나다 (크세 2016-10-12)
- [긴급분석] 푸미폰 태국 국왕 사망 시 예상되는 시나리오들 (Andrew MacGregor Marshall 2016-10-13)
- [평전] 태국 국왕 푸미폰 : 그 나약하고 비겁했던 수구적 삶 (Giles Ji Ungpakorn 2016-10-13)
- 쁘렘 띠나술라논 태국 추밀원 의장, "섭정 권한대행"에 임명 (The Bangkok Post 2016-10-14)
- [기고] 푸미폰 태국 국왕 사망, 과장된 "존경"의 신화와 그 그늘 (Lee Jones / New Mandala 2016-10-14)
- [단상] 탈북자 출신 주성하 기자가 본 태국 국왕의 사망 (크세 2016-10-15)
- 태국 왕세자의 의절 아들들, 조부 푸미폰 국왕 추모 성명서 발표 (크세 2016-10-15)
- [분석] 태국 국왕 사망과 섭정의 임명, 그리고 왕세자의 즉위 사양 (Andrew MacGregor Marshall 2016-10-16)
- [르뽀] 태국 국왕 사망 : "검은색 광기"로 변해가는 추모의 열기 (Khaosod English 2016-10-16)
- 태국 총리 : "새로운 국왕의 즉위는 최소 15일간의 추모기간 이후" (The Bangkok Post 2016-10-18)
- 태국 정부, "온라인 유언비어 유포하는 해외 거주자 6명 파악" (태국 The Nation 2016-10-18)
- [르뽀] 태국 국왕 사망 : 북부 및 북동부 지방 상황 - 고요 속의 기다림 (로이터통신 2016-10-21)
- [동영상 모음] 푸미폰 태국 국왕 사망 10일째 : "국왕찬가" 전국민 합창 행사 (2016-10-22)
* 참조용 게시물
- [논문]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Andrew MacGregor Marshall 2013-10-31)
* 상위화면 : "[기사목록] 2016년 태국 뉴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제이J 작성시간 16.10.21 결말부분이 조금 모호한 것 같아서 안타깝네요.
그리고 한가지 의문사항은 푸미폰 전국왕의 형인 아난다 마히돈 라마 8세의 재위기간이 1935년~1946년(11년)이 맞는건지요? -
답댓글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10.21 맞습니다..
하지만 귀국은 1938년에야 하죠
쁘라차티뽁 국왕(라마 7세)이 1932년 혁명 이후에 신병치료 차 해외에 머물면서..
새로 들어선 혁명 군사정부에 상당히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요구를 했었는데요..
그게 수용이 안 되자 1935년에 자진 퇴위해버립니다.
라마 7세는 원래 영국 이튼스쿨과 사관학교를 나온 사람이라 상당히 서구형 지식인 같은 인물이었나봅나다
그의 퇴위 성명서 내용이 태국 민주주의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1932년 혁명이 일어나자,
자신이 절대군주에서 입헌군주로 변하는 것도 즉각 수용했고요..
-
답댓글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10.21 그는 원래 성군의 재목이었습니다..
태국 역사상 최초로 모든 공문서와 백성들의 탄원서, 학자들의 연구물까지 쉬지 않고 읽었고..
심지어는 태국 최초로 평민들을 위한 의회를 설치하려고 개혁 노력을 했던 인물입니다.
겸허하게 자신의 실수를 공식으로 인정하기도 했고,
여러 모로 세종대왕과 유사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은데..
즉위 초부터 기존의 국가재정 적자와 경기 후퇴에 발목이 잡혔고
특히 방콕의 엘리트들이 성장하는 걸 간과했다가
결국 1932년 혁명을 맞이하죠..
아마 그대로 절대군주 국왕을 했어도
굉장한 성군으로 기록됐을 법한 문무겸비형 인재였죠..
태국 역사에서 안타까운 인물 중 하나죠.. -
답댓글 작성자제이J 작성시간 16.10.21 울트라-노마드 라마7세시대에 입헌군주제로 변경이 되었군요. 아무튼 격동기를 겪은 왕임에는 틀림이 없네요.
마히돈 왕은 즉위하고 대관식도 못한채 암살되었다고 알고 있어 실제 재위기간이 그렇게 길었는지는 몰랐네요.
즉위후 대부분의 시간을 외국에서 보낸 것으로 되어 있네요.... -
답댓글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10.21 "즉위"는 이전 국왕의 궐위 직후 왕위계승권자로 지명됨과 동시에 한 셈인데요..
대관식은 바로 사망하던 해에 하려고 했던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나이도 어렸고,
해외에서 공부도 계속해야만 했죠.
그리고 중요한 점은 라마 8세(아난다)가 암살당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살 아니면 사고사였을텐데..
사고사 쪽에 무게가 실려 있고..
그 경우 총기를 발사한 사람이 푸미폰 국왕일 것이란 유력한 추정이 존재하죠
푸미폰은 평생 2번의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하나가 형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가 아내 시리낏 왕후로부터 소외당한 것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