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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6.10.21 맞습니다..
하지만 귀국은 1938년에야 하죠
쁘라차티뽁 국왕(라마 7세)이 1932년 혁명 이후에 신병치료 차 해외에 머물면서..
새로 들어선 혁명 군사정부에 상당히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요구를 했었는데요..
그게 수용이 안 되자 1935년에 자진 퇴위해버립니다.
라마 7세는 원래 영국 이튼스쿨과 사관학교를 나온 사람이라 상당히 서구형 지식인 같은 인물이었나봅나다
그의 퇴위 성명서 내용이 태국 민주주의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1932년 혁명이 일어나자,
자신이 절대군주에서 입헌군주로 변하는 것도 즉각 수용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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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6.10.21 그는 원래 성군의 재목이었습니다..
태국 역사상 최초로 모든 공문서와 백성들의 탄원서, 학자들의 연구물까지 쉬지 않고 읽었고..
심지어는 태국 최초로 평민들을 위한 의회를 설치하려고 개혁 노력을 했던 인물입니다.
겸허하게 자신의 실수를 공식으로 인정하기도 했고,
여러 모로 세종대왕과 유사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은데..
즉위 초부터 기존의 국가재정 적자와 경기 후퇴에 발목이 잡혔고
특히 방콕의 엘리트들이 성장하는 걸 간과했다가
결국 1932년 혁명을 맞이하죠..
아마 그대로 절대군주 국왕을 했어도
굉장한 성군으로 기록됐을 법한 문무겸비형 인재였죠..
태국 역사에서 안타까운 인물 중 하나죠.. -
답댓글 작성자 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6.10.21 "즉위"는 이전 국왕의 궐위 직후 왕위계승권자로 지명됨과 동시에 한 셈인데요..
대관식은 바로 사망하던 해에 하려고 했던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나이도 어렸고,
해외에서 공부도 계속해야만 했죠.
그리고 중요한 점은 라마 8세(아난다)가 암살당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살 아니면 사고사였을텐데..
사고사 쪽에 무게가 실려 있고..
그 경우 총기를 발사한 사람이 푸미폰 국왕일 것이란 유력한 추정이 존재하죠
푸미폰은 평생 2번의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하나가 형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가 아내 시리낏 왕후로부터 소외당한 것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