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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중국 도자기에 대한 고찰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09.10|조회수1,009 목록 댓글 3


중국 도자기에 대한 고찰

 

 

 

 

 

중국의 5대명요(五大名窯)

 

중국을 대표하는 명요라고 할 경우에는 수백년간에 걸친 명실상부한 관요로서 명성을 날린 징더전(경덕진; 景德鎭)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지만, 중국도자사상 오대 명요라 일컬어지는 것에는 나름대로 당송시대에 각기 특징적인 도자기들을 산출해 내면서 중국도자사의 큰획을 그엇다는 의미에서 별격 취급을 하고 있는 면이 있다. 중국의 역대 요지중에서 5대명요라고 하는 호칭의 발원은 명시대에 기인한다. 오대명요라는 호칭의 기원은 명대에 있다. 명나라의 선덕(宣德) 3(1428)에 저술된 [선덕정이보(宣德鼎彛譜)]에는 [內庫所藏, , , , , , ]이라고 6개의 저명한 요장들이 열거 되어 있다. 이중 시요에 관해서는 현재 중국의 학자들도 명쾌한 것을 알 수 없다고 하며 물론 송, 원시대에 나온 서적중에서는 이 시요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기록은 현재까지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중 시요를 제외한 여, , , , 정요를 중국도자사에서는 5대명요라 일컫고 있다. 다시말해 여(汝窯), (官窯), (哥窯), (鈞窯), (定窯)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무슨요(00)라고 표현할 때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나의가마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집단 군집적인 가마터들을 통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려청자를 만들어낸 곳의 하나인 유명한 요장인 강진요도 실상은 가마 1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가마군()인 것이다.

 

 



 

균요(鈞窯)는 중국 하남성 우현(河南省 禹縣), 낙양(洛陽)의 남쪽에 위치하며 팔괘동의 큰 요지를 총징하는 말이다. 당초 오대에도 활동하였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균요의 완성된 특징을 지니는 작품은 북송후기경(1080년경)부터라 할 수 있다. 흔히 잘 알려져 있는 작품으로는 수반, , 접시, , 그리고 화로 등에 우수한 작품이 많으나 그리 오래 영위되지는 못하였고 북송의 관요가 1100년에 팔괘동의 균대(鈞臺)에 화분(植木鉢)이나 존형병(尊形甁) 등에 정치한 작품을 구웠다.

 

하지만 1126년의 금의 공격으로 북송이 끝나고 남송시대로 들어가면서 전란으로 타격을 받아 이후 지속적인 요업은 12세기말경부터 재개된다고 보아야하며 제작 가마도 우현에서 하북, 산서성까지 그 균요독특한 기법은 전파된다.

 

균요작품의 특징으로는 실투성의 유약이 수겹걸쳐져 소성되는 관계로 빛에 굴절되는 광선의 영향으로 색배합이 각도에 따라서 변화무쌍하다는 점과 그 외에 당시까지의 단색유약기법과 달리 산화동에 의한 적색요변의 반점이 나타나게 한 것도 특징을 가진다.

 

태토는 비교적 철분이 많이 함유된 세밀한 점착질을 지니고 유약이 입혀지지 않은 노태부에는 송시대의 균요작에는 담갈색의 불색이 보이되 시대가 내려갈수록 점차 옅은 흑색이나 회색, 황색으로 변화하는 것도 특징이다. 대부분의 초기의 완류에는 굽밑까지 유약이 시유되어있지만 원시대를 기점으로 굽에서부터 몸통으로 점차 무유의 노태부분이 확장되는 것도 특징이다.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면 균요의 작품은 유약이 충분히 두텁게 걸쳐진 불투명의 상태로 크고작은 기포들이 수없이 보인다. 아울러 간혹 유약표면에도 기포가 들어간 흔적도 보이며 귤껍질처럼 토돌토돌한 질감을 보인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빙열처럼 크랙이 전면에 걸쳐져 있다.

 

우리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균요의 작품은 쉽게 표현한다면 불투명의 짙은 하늘색과 같은 바탕에 한두군데 염색이 얼룩져 번지듯이 자주빛이나 붉은빛의 반점의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들이 바로 균요의 작품이다.

 




 

 

정요(定窯)는 중국 도자사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 요지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정요(定窯)의 요적이 있는 간자촌(澗磁村)은 하북성(河北省) 곡양현(曲陽縣)에 있으며 지금의 북경시(北京市)에서 멀리 떨어진 남서쪽에 위치한다. 세계제2차대전중에 일본군을 이끌고 정요의 흔적을 찾아낸 일본의 고미술사학자인 고야마후지오씨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가 일단은 최초의 정요터를 찾아낸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학계에 보고한 것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는 각종 파편을 채집한것에 불과하며 본격적인 학술조사는 1970년 중국정부에서 대규모 발굴조사를 함으로써 그 전모가 들어났다.

 

요장의 면적은 117만평방킬로미터에 이르고 세 개의 층을 이룬 파편의 집적층을 발굴함으로써 일단은 당시대부터 오대로 발전하고 송시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후 물론 전쟁으로 인한 화북지역의 혼란기에 요업이 일시중단되기도 하였지만 12세기 중엽경 다시 재흥하여 원대까지도 지속되었고 정요 특유의 백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만당시대의 정요는 백자보는 황유, 황록, 갈유제품이 많고 굽쪽에는 시유하지 않고 백화장을 하고 있는것도 특징이다. 오대에 들어서 질의 향상을 가져와 화장하지 않고도 순백질의 것이 출현한다. 태토는 두텁고 굽은 노태가 많은편이다. 이윽고 우리에게 친숙한 상아빛의 정요의 작품은 대부분이 북송기에 이르러서 정치해지고 각종 인화나 조각 문양이 얇은 성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나타남으로써 전성기를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요의 흙도 양질이고 세밀하고 성분속에 규석이 많아 소성하면 자화되고 경질화되는 특징에다 유약속에도 티타늄의 산화물을 포함하고 있어 미량의 황색을 띠는 아이보리화이트로 나타나는 것이다.

 

 



 

요주요(耀州窯)

 

耀州窯는 예전에 北方靑磁라 불리면서 하남성(河南省) 임여현(臨汝縣)에서 동종류의 도편이 발견되기도 하여 汝窯라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섬서성(陜西省) 동천현(銅川縣)의 황보진(黃堡鎭)에서 대요지가 발견되고 이 지역이 송시대의 요주에 속해 있었다고 하여 점차 요주요라 불리게 된 중국의 대표적인 窯場 중의 하나다.

대체적으로 북송시대 활동 가마들이 그렇듯이 유약은 굽 밑바닥을 제외한 부분에는 모두 시유되고 있는 것도 특징이며, 태토는 회백색의 고운입자로 강력한 화력으로 소성되어 있다.

요주요는 당대에 이미 활동을 개시하여 북송연간에 최절정기를 거친 후에 원대에 소멸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대규모의 가마를 가지고 한때는 한번에 약 2,500개정도의 도자기를 구워내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대규모적인 생산을 자랑하던 요주요의 소멸은 필연적으로 이곳에 종사하던 많은 도공들이 이합 집산함에 따라 동으로는 하남성, 서로는 감숙성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변요장에 요주요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

耀州窯의 작품은 거의가 청자계통이라 할 수 있는데 깊이 있는 올리브 톤의 유색과 중국청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편음각기법이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 특징이고 깊이 단번에 잘라낸 인물이나 동식물, 어문 등은 투명도가 높은 올리브유계통의 녹색이 씌워지는 관계로 오히려 음각으로 패인 부분과 드러난 문양이 대조를 이루며 생동감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사진1, 2는 요주요의 형식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긴 하지만, 진품이 아니라 착오가 없기를 바란다. 다만, 올리브그린의 톤을 나타내는 유색과 사진2의 깊게 파인 단편음각 기법은 요주요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겨져 소개하여둔다.

 



 

 

여요(汝窯)

 

여요는 중국 송대오대명요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동안은 여주에서 소성되었기때문에 여주요 또는 여요로 불러왔던 것에 불과하였다. 또다른 5대명요중의 하나인 정요의 도자기 기명의 구연부에는 그릇을 엎어서 소성하였기 때문에 유약이 없다. 남송시대의 기술에 따르면 북송시대에는 그래서 왕실에서 이를 싫어하여 여주요에 명하여 모두 유약을 입힌 청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로 인해 당시의 여요가 중국의 북방청자 생산지중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요에서 제작된 기물들은북송의 궁정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가마 즉 관요의 제작품인 어기였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고도 정성스럽게 제작되었다. 태토는 세밀하고 부드러우며, 색은 속칭 [향회태(香灰胎)]라 불리는 香灰色(흰듯한 회색)이다. 태토중에 미량의 동분(銅分)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환원염에서 소성될경우 담홍색을 띠게 된다. 이것이 여요의 도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제일 큰 특색이라 할 수 있는데 빛을 받으면 유약를 투과하며 미세한 홍색이 떠오른다.

 

여요에서 제작된 도자기의 유색에 관해서는 천청(天靑), 분청(粉靑), 란청(卵靑) 등 다양한 명칭이 있지만, 크게 분류하면 심천청(深天靑)과 담천청(淡天靑)의 이색으로 분류된다. 이 두색의 차이는 소성상태의 차이에 따라 야기되는 것이며 의도적으로 이분화시킨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대체적으로 전세되고 있는 여요기의 형태는 존(), () 등 소수의 감상용의 목적으로 전대의 기물들을 모방한 제작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분(), (), (), ( ), 잔탁(盞托), (), ( ; 화장용상자) 등 일상용 기명들이다. 관요계통의 가마에서 많이 제작되는 필통, 연적, 비각( ; 팔걸이), 벼루 등의 문방구는 현재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다.

 

여요에서 제작된 기물은 이미 남송초기에 이르러 귀중시 되고 있는데 각종 기록들에 남송초기 왕에게 헌상한 자기중에 여요기가 있었다고 하므로 당시에 이르러 여요가 받았던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남송, 주휘(周輝)는 소희연간(紹熙; 1190-1194)에 저술한 [청파잡지(淸波雜志)]속에서 당시 이미 보기 어려웠던 여요기를 [최근 가장 얻기 힘들다]고 한탄하였다.

 

이와 같이 그 작품이 적은 이유는 역시 5대명요중의 하나인 북송의 官窯가 정화연간(政和; 1111-1118)에 이미설치됨에 따라 여요가 폐요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대체적으로 여요의 개요시기는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汝州新窯器]라는 말이 나오므로 여요의 개요는 선화(宣和) 6년에 가까운 시기라고 볼 때 여요의 활동시기는 현재로서는 특별한 다른 사료나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중국학자들의 견해대로 11세기말부터 12세기초경의 극히 짧은 기간동안이었을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용천요(龍泉窯)

 

 

절강성浙江省 여수麗水 지구 및 서강西江 연변에 위치한 도요*. 그 중에 용천현龍泉縣의 경내에 가장 밀집했는데 용천현의 대요촌大窯村에서 제작된 도자기의 질이 가장 좋았다. 북송대(北宋代)에 성립되어 남송南宋, , 금대(金代)에 이르기까지 흥성했고 명중기 이후에 점차 쇠퇴하여 청나라 중엽에 폐요됐다. 생산품은 청자*가 유명하다. 북송대에 유약이 현저하게 세련되어졌고 남송 후기 전성기에는 옥같은 유색(釉色)과 고아한 조형의 청자를 만들었다. 일본인이 침청자砧靑磁라고 부르는 용천요의 방망이 모양의 청자는 벽옥(碧玉)보다 아름답고 밝은 유색으로 독특하게 아름다운 청록색을 보여준다. 원대(元代)에 들어서는 일변하여 장식이 많아지고 다양해졌고, 명대(明代) 성화(成化), 홍치 연간(紅治) 이후에 점차 쇠락했다. 용천요의 청자는 13~14세기경에 생산량이 상당히 많아져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서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빈번하게 수출되었다.

 

 



 

유리홍(釉裏紅)

 

유약시유전에 산화동으로 그림을 그려 투명유를 시유하여 구워낸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진사(辰砂)라 부르고 필자의 경우 동화(銅畵)라 부르는 이 기법을 유약밑에 붉은 그림이 있다하여 중국에서는 유리홍(釉裏紅)이라 한다. 이 기법은 중국도자사에 있어서는 원시대( 元時代)에 시작되지만 본격적인 것은 명()에 들어선 홍무(洪武)연간에 크게 발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물론 중국보다 연대가 빠른 고려시대인 12세기경에는 이미 이 산화동을 채화에 이용하는 것이 앞서 사용되었다. 중국 경덕진요에서는 원말명초기의 전란으로 양질의 청화안료인 코발트블루가 입수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원시대의 훌륭한 청화백자의 생산수준에 미치지 못함에 대신하여 이 유리홍의 제작이 시도되었다고하는 추측도 있다. 이 시기를 벗어나면 시대가 한참 뒤인 청시대의 강희(康熙)시대에 다시 개화한다.

 

다만, 유리홍은 청화백자인 유리청에 비하여 발색 등이 그리 깔끔하지 못한 것이 옥의 티라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산화동의 문양은 온도의 조절이나 가마안의 상태에 따라서 그 착색이 붉게 나는데는 매우 컨트로하기 힘든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도자기술의 발전에 따라 강희제이후부터 옹정, 건륭제의 시대로 현대에 가까울수록 탁한 그리고 뿌연 색의 유리홍은 점차 선홍색으로 변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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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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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관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9.11 우리나라 고려청자는 강진과 부안 등지에서 질좋은 그릇을 생산하여 중국에서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삼감기법은 중국도자기에서는 없는 고려만의 기법으로 그 인기가 높았습니다. 원간섭기에는 공납으로 금채청자를 생산하기도 했지만 기형과 유색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조질인 분청사기를 제작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15세기 중엽 완성도 높은 청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자기 생산기술은 현저하게 떨어지게 됩니다. 청자는 도기와 자기의 중간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청백자는 완전한 자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소송온도에서 오는 차이로 청자는 1250도씨에서 산화와 환원과정을 거치면서
  • 작성자관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9.11 완성되어 지는데 그릇의 기벽이 두꺼운 편입니다. 굽는 과정에서 터지거나 주저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백자는 1300도 이상에서 구워지기 때문에 단단한 자기형태를 얻을 수 있으며 코발트 안료로 청화백자를 생산하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분원을 설치하고 도화서 화원이 참석해서 채색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 작성자김지환 | 작성시간 16.09.11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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