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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현명한 자를 기용한 위 문후

작성자관운|작성시간17.10.08|조회수130 목록 댓글 1


현명한 자를 기용한 위 문후

 

 

 

 

 


 

 

 

 

사람을 쓰면 의심치 않았던 위문후

 

 

주 위열왕周威烈王 23(403)에 이미 진나라의 한3는 주 천자의 책명을 받아 나뉘어져 한, , 위의 3개의 신흥국가가 되었다. 나라에서 이런 역사적 변화를 주도한 군주는 위 문후魏文侯였다. 이 해 그는 이미 22년째 집정하고 있었다. 이후 16년을 재위하면서 계속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위나라의 경제를 발전시켜 전국战国 초기에 강성한 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발전 과정 속에서 현명한 자를 존중하고尊贤 능력 있는 자를 기용하는任能 것은 위나라 번영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위문후의 존현尊贤은 매우 지극하였다. 그의 스승 전자방田子方제후들이 남에게 교만하면 그 나라를 잃는다. 대부들이 교만하면 그 가문을 잃는다.”고 가르쳤고 위문후는 이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그는 당시 위나라의 현인 단간목段干木에 대해 더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지극한 예로 대하였다.

 

위문후가 단간목을 찾을 때는 항상 수레에서 내렸다. 하인이 군주께서 왜 수레에서 내리십니까물으니, “여기는 단간목의 집이 아닌가단간목은 현자일세. 어찌 내가 감히 수레에서 내리지 않겠는가내가 듣기로는 단간목은 자신으로 나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고 하네. 헌데 어찌 내가 교만하겠는가? 단간목은 덕에 빛나고 나는 땅에 빛나네, 단간목이 의가 많다면 나는 재산이 많을 뿐이네,”라 하였다. 하인이 그러면 군주께서는 그를 재상으로 삼지 않으십니까?”하니 위문후는 그를 재상으로 청하였고 단간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군주는 지극한 예를 다하면서 계속 그를 방문하였다.

 

이것이 현인에 대한 존중이며 재상을 거절해도 예를 다했다. 전해지기로, 위문후는 단간목을 보러 와서 겸손히 가르침을 청하였고 나태해질 까 서서 듣고 감히 쉬지를 않았다.立倦而不敢息고 한다. 그의 이런 행위는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고 더불어 칭송하기를, ‘우리 군주는 바름을 좋아하네 단간목을 공경함이여. 우리 군주는 충성을 좋아하네 단간목을 엄숙히 대함이여.’”라 하였다. 동시에 적들을 두렵게 하여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사마당司马唐이 진의 군주에게 단간목은 현자인데 위나라가 그를 예로써 대하니 천하가 다 압니다. 군사동원은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라 하여 진은 그렇게 여기고 병사를 거두어 공격하지 않았다.

 

후대인들은 위문후가 단간목을 예로써 대한 일을 용병에 능했다.”고 보고 그를 그 형상은 볼 수 없어도 그 공은 이미 이루었다.”고 평하였다.

 

위문후의 존현尊贤은 모양새가 아니라 실재로 재능에 따른 임용이 있었다. 그의 사람 임용은 장점을 채용하고 채용을 하면 의심하지 않는 점이 최대의 특징이었다.

 

오기吴起는 당시 유명한 군사가였지만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노나라 장군이었는데 제나라가 노나라를 치자 노나라는 그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제나라에 맞서게 하였다. 하지만 오기의 처자는 제나라 사람이었으므로 노나라에서 논의 끝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오기는 처자를 죽이고 제나라와 함께 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노나라 사졸로 장군이 되어 장차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이기겠다.“고 하였다. 노나라가 승리를 했지만 많은 험담이 만들어졌다. 오기는 노나라 군주의 의심을 받아들일 수 없어 위나라로 투항했다.

 

문후는 이극李克에게 물었다. “오기는 어떤 사람인가?” 이극은 탐욕스럽고 호색하지만 용병에는 사마양저司马穰苴도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극도 오기에 관한 험담을 대략 듣고 있었다. 그래서 탐욕스럽고 호색하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의 군사적 재능을 지우지는 않았다. 위문후 역시 오기의 결함을 따지지 않고 오기를 장군으로 삼아 진을 공격해서 다섯 개의 성을 빼앗았다.”

 

후에 오기의 기용은 그에 대한 불공정한 시각을 바로 잡았다. 그는 장군이 되어 사졸의 최하급자와 함께 입고 먹었으며, 누우려고 자리를 준비하지 않았고, 행진에도 말을 타지 않았으며 몸소 식량을 등에 메고 사졸들과 더불어 노고를 나누었다.” 결국 위문후는 그의 뛰어난 용병술뿐 아니라 청렴 공평하여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를 서하수西河守로 임명하여 진나라와 한나라에 대항케 했다.”

 

위문후의 사람 채용은 성실했으며 의심이 없었다. 악양乐羊은 위나라의 능력이 있는 대장이다. 위문후가 악양에게 중산국中山国 토벌을 명하였지만 2년이 지나도 공략하지 못해 조정 관료들의 논의가 분분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악양의 아들 악서乐舒가 중산국의 총신이므로 중산국을 격파해 자식을 망치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악양과 중산국이 몰래 결탁했으며 그렇지 않고서는 악양의 능력으로 그 작디 작은 중산국을 공략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위문후의 악양에 대한 신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악양은 아들의 구원요청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중산국을 격파했다. 악양이 오랫동안 포위하여 공격치 않은 것은 고립무원의 중산국 군주 희굴姬窟이 성안 백성들의 어려움을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악양은 개선하여 돌아오자 문후는 그에 대한 비방 문서 한 상자를 보여주었다.” 악양은 위문후가 자신을 의심치 않은 진심에 감동받아 두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는 신의 공이 아니라 주군의 힘이십니다’”라 하였다.

 

위문후의 존현尊贤과 임능任能그리고 기용하면 의심치 않는 행동은 당시에 매우 높은 성망을 받았다. 많은 인재들이 모두 위나라로 몰려왔다. 자하子夏전자방田子方단간목段干木오기吴起이리李悝서문표西門豹 등 정치 군사 인재들의 도움으로 위나라는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를 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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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관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0.08 오래전에 통도사 방장스님으로 있던 월하스님이 저에 둘째 할아버지에게 글을 한점 써 주셨는데 '사람이 의심스러우면 쓰지말고 사람을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 위 문후의 말이었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둘째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제가 다시 장황을 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도 자식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저에게는 삼존이 되지만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일본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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