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俯)
자(字) 백공(伯共) 호(號) 어촌(漁村)
서기1352년 임진(壬辰) 12월(月) 1일생이시며 서기1376년 생원(生員)으로 동년(同年)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시고 관(官)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예부(禮部)시랑(侍郞) (예조총랑)
집현전(集賢殿)태학(太學)사(士)를 역임(歷任)하시었다
고려(高麗)말(末)조정이 혼미스러워지자 벼슬을 그만두시고 杜門洞에 은거하시다가 수원 광덕으로 落鄕蟄居하시었다.
조선왕조 개국이후 이태조께서 누차 부르시었으나 不仕(불사)하시다가태조 7년 간곡한 왕명을 거절치 못하시고 조정에나가시어 성균제주 大司成(대사성)을 하시었다.태종조에서
가정대부(嘉靖大夫) 우군(右軍)동지(同知) 총제(摠制) 한성윤(漢城尹) 보문각제학을 거쳐 한성판윤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하시었다.
정보은 이목은 등의 제현(諸賢)과 가까이 하시고 그 외 문인등과 교우(交友)하시면서 시문(詩文)에 뛰어나시고 특(特)히 초서(草書)에 능하시어 필원(筆苑)록(錄)의 수제(首題)가 되셧으며 세칭 필랄종왕이라고 칭송 되시었다. 한산군 이장 신도비와 이태조의 왕사무학탄사의
탑비를 쓰셨으며 이탑비는 현재 양주회엄사에 남아있다.
서기1383년 전의 부령으로 계실 때 태상(太常) 연의(筵議)에서 이인임의 익(謚)호(號)를 논하셨다.
어촌께서 정고보의 삼명(三命)지의를 본받아 이름을 부(俯), 자를 백공이라고 스스로 지었다고 하시니 목은께서 백공설을 짓고 또 제백공자설후라는 시를 지어 그 뜻을 높이 기리시었다. 또 문헌록에 고려의 명류를 표방한 팔청가운데 으뜸이라고 전하여 진다.
서기1416년 순국하시었으며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광덕산 남쪽기슭 자좌지원이며 묘소옆 심복사는 어촌공의 재관(齋官)사찰(寺刹)이다.
배(配)는 군부인(郡夫人) 능성구씨로 묘는 합장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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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孔 慶 佑(八二世孫) 작성시간 04.04.27 상세한 자료 감사합니다. 어촌제를 참배하고 온 이후라 내용이 훨씬 이해하기 쉽군요.아쉬운점이 있다면 제실 옆의 사택이 너무 관리가 안되어서 안타까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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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곡부 작성시간 05.02.01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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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곰병장 작성시간 20.08.09 공부 어촌공에 대하여 공부 합시다 내가 조사 연구한 결과 어촌공은 1352년 11월 에 출생 하시고
1416년 천추사로 중국에 가셔서 중국 남경 회동관에서 7월 29일 병사하고
황태자의 허락으로 燒骨 후 1416년 10월7일 還骨, 경기 여주. 능서면 에 안장 현재
실고 상태로, 평택시 현덕면 더목리 神伏寺 좌변 묘는 가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