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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경기광주 가볼만한곳] 유네스코문화유산 <남한산성>(신라 주장성) 행궁, 한남루, 좌전, 숭렬전, 암문, 남문, 다시 생각하는 병자호란

작성자연경|작성시간20.09.08|조회수1,421 목록 댓글 4

<남한산성(南漢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
백제와 신라와 조선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외부적으로는 병자호란을 치른 곳이니 청나라까지 4개국의 역사가 얽혀 있는 곳이다. 2012년 파괴되었던 행궁을 복원해서 산성의 모습이 온전해진 후, 2014년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산성에 오르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저절로 역사의 고리를 생각하게 한다. 이제는 가벼운 산행을 즐기며 기분전환도 할 수 있는 삶의 공간이 되어서, 역사의 무게를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스럽기도 하다.

주소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방문일 : 2020.9.3.


1. 알아보기

남한산성은 조선의 한양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인데,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에 조성된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로 추정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는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하고 있다.

1985년에 지표조사가 실시된 이래, 1998년부터 8차례에 걸쳐 행궁터 등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왕 때 도성이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성곽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3년(문무왕 1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혹은 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624년(인조 2)에 인조가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 공사를 끝마쳤다. 4문과 16암문(暗門), 성가퀴[女墻: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 1,897개, 옹성(甕城), 성랑(城廊), 우물, 샘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공사는 승려 각성이 도총섭(都摠攝)으로서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이들을 위해 7개의 절을 지었다. 사찰은 산성 축성에 동원된 8도 승군의 주석처이자, 승군이 군기와 화약을 비축하고 산성을 수비하는 곳이었다. 지금은 장경사(長慶寺)만 남아 있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 (삼전도는 남한산성이 아니라 송파 지역이다.)

1638년(인조 16)에는 온조왕묘를 건립하여 배향하였으며, 남단사 오른쪽에는 사직단, 북문 안의 동쪽 언덕에는 성황당, 서장대에는 기우제단을 두어 정기적으로 제의를 행하였다. 동문 안에는 1688년(숙종 14)에 유수 이세백이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할 것을 주장한 척화파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위패와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를 배향한 한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남한산성의 주봉은 해발 497.9m의 청량산이다.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적의 접근은 어렵고, 방어에 유리하다. 성벽 정상에 오르면 경사진 산자락 아래 서울 시가지가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다. 암문은 비밀통로다.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오늘날까지 여러 차례 보수를 하고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14년 세계문화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및 기타자료 참조)



2. 둘러보기
코로나로 각종 전각들이 닫혀 있어 주변을 돌아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담장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아쉬운 바깥 관람은 그림을 보며 상상으로 여행을 하는 와유보다 나을진대, 불평을 할 이유가 없었다. 행궁과 몇몇 유물은 이전에 몇 번 둘러본 기억이 있어, 기억과 합치니 많이 섭섭하지 않다. 더구나 요즘 지속된 장마 끝에도 이렇게 맑은 하늘과 청량한 공기를 접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둘러본다.

서장대는 공사 중이었고, 장경사는 미처 들르지 못했다. 다음에는 오늘 놓친 곳을 포함하여 산성 전체를 둘러보는 장정을 하기로 마음먹고, 오늘은 몇 군데만 우선 찾아본다. 코로나가 잠잠해져 문닫은 곳을 다 들러볼 수 있기를 빌면서.



1)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 하였으며, 1624년(인조 2) 9월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건립되었다. 1626년 6월 총융사 이서의 계책에 따라 완성된 것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유사시 왕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비 궁궐이었다. 다른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행궁의 규모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이다.

상궐에는 왕의 거처인 내행전과, 나인과 호위 무사의 거처인 남행각과 북행각이 있었으며, 하궐에는 왕이 신하와 함께 업무를 보는 외행전이 있었다. 상궐과 하궐을 포함하여 행궁을 구성했던 부속시설로 좌전(左殿), 우실(右室), 재덕당(在德堂), 한남루(漢南樓), 인화관(人和館) 등이 있었다.

일제시대와 6.25전쟁 등으로 파괴된 것을 1998년부터의 학술 및 발굴조사를 토대로 복원정비사업을 진행하여 2012년에 완공하였다.

남한산성 행궁 정문 누각 한남루. 정조 22년(1798), 광주 유수 홍억이 세운 2층 누문이다. 2010년 복원되었다.

*여러 각도에서 본 한남루 모습, 지붕 위 잡상의 모습이 선명하다.

*행궁 밖에 보관한, 발굴 당시의 유물 기와. 발견된 기와는 매우 큰데 무게가 보통의 기와의 4배가 넘는다.

*행궁 내부 이모저모

이성정. 행궁의 제일 위쪽이다.

*행궁 밖 담장을 끼고 바라본 모습

*좌전(左殿).1711년(숙종 37)에 종묘를 봉안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2004년에 복원하였다. 행궁 건너편에 있다.

*좌전을 끼고 뒷길로 올라 내려다본 전경. 소나무와 궁궐이 어울린 풍광이 압권이다.

*숭렬전(崇烈殿), 백제 시조 온조왕을 모시는 사당. 1625년(인조 3)에 왕명으로 지은 것이다. 당시 성곽을 축조한 이서(李曙)도 뒷날 함께 배향되었다. 현재는 본전(本殿)·동재(東齋)·서재(西齋)·외삼문(外三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조왕사에서 정조조 사액으로 1795년 숭렬로 이름이 바뀌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꿈에 청병의 기습을 알려준 온조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자, 온조왕이 다시 나타나 혼자는 외로우니 충직한 신하 한 명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다음날 이서 장군이 병사하였다. 인조는 온조왕이 데려갔다고 생각해 함께 사당에 모시도록 했다고 한다.

남한산성을 축조하여 자신을 지켜준 이서의 은공을 치하하려는 인조의 마음이 스며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매년 봄 가을 음력 2월과 8월에 제향을 모신다. 권위있는 의상, 정형화된 의식 절차 등이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9월에는 남한산성문화제가 열린다. 2019년에는 온조를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 정상에 오르면 남한산성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아래 가파른 곳 저 멀리가 서울시내, 삼전도 잠실도 보인다.

*알아보기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지에 축성된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17세기 초, 중국 만주족이 건설한 청(淸)나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남한산성은 승군(僧軍)이 동원되어 축성되었으며 이들이 산성을 지켰다. 남한산성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전해온 성제(城制)의 영향과 서구의 화기(火器) 도입에 따라 변화된 축성 기술의 양상을 반영하면서 당시의 방어적 군사 공학 개념의 총체를 구현한 성채이다.

오랜 세월 동안 지방의 도성이었으면서 아직도 대를 이어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인 남한산성의 성곽 안쪽에는 당시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군사·민간·종교 시설 건축물의 증거가 남아 있다. 남한산성은 한민족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 사이트 전재)


 

*제6암문(서암문). 암문은 원성 11곳, 봉암성 4곳, 한봉성 1곳 등 16곳이 설치되어, 우리나라 산성 중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암문 가운데 6곳은 평거식이고, 10곳은 홍예식이다. 이곳은 평거식이다.

암문은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비밀통로이다.

*남문. 4대문 중 제일 큰 문으로 중심이 되는 문이다.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바로 이 문으로 들어왔다.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라고 불렸다.


4. 생각해보기

병자호란 인조의 굴욕의 삼전도는 남한산성이 아니라 송파이다. 인조가 피신 온 남한산성은 청나라에게 포위되었고, 추가 몽진을 가려 했던 강화도까지 함락되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가 항복하였다.

패전 후 청태종의 요청에 의해 건립된 삼전도 굴욕의 비는 잠실에 있다. 삼전도 굴욕은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세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한 것이다. 굴욕은 삼전도 항복 행위 자체가 아니라, 병자호란 전쟁의 패배이다.

그래도 만일 화친을 하지 않았다면, 천 만 조선백성을 구할 수 있었을까, 혹시 중국 역사 속으로 편입되는 일은 없었을까. 물론 근본적으로는 숭명의 명분론을 중시하여 병자호란을 초래한 것 자체가 문제다. 전쟁 없이 청나라와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승전 이상의 성과를 얻었을 텐데 말이다.

청나라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이다. 섬세한 통제를 통하여 한족을 지배했지만, 실상 문화적으로는 점차 한족에게 동화되었다. 사고전서를 편찬하면서 수많은 학자를 동원하고, 매우 소극적인 학문인 고증학의 발달을 이룩했던 배경에는 통제된 언론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고, 급기야는 자신의 언어마저 소멸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 내몽고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중국 정부가 학교 교육에서 몽골어를 배제해나가는 데서 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만주어는 몽골어처럼 강제하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버렸다.

지금 만주족은 429만명(1982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인구로 한족에게 동화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만주족이 산해관을 넘어가지 않고 만주만 지키고 살았더라면 청나라가 아직 유지되고 있지 않을까.

자신들의 옛 만주땅은 봉금해서 사냥터로 남겨두었으나, 결국은 한족 이주자가 더 많은 땅이 되어 고토마저 지키지 못했다. 남의 것을 탐내는 사이, 내 것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주국만으로 만족했으면, 오늘날 중국의 강역이 줄어들었을 것이 아닌가.

더 재미있는 것은 지금 중국이 확보한 땅의 상당부분이 청나라가 편입했다는 것이다. 내몽골, 위구르, 티베트가 모두 청나라때 정복된 곳이다. 이곳은 지금 대부분 독립운동이 일어나거나, 강한 민족적 색채를 지니고 한족에 동화되지 않는 문제 지역이다. 다른 민족들도 중국에 복속시키면서 자신들도 산화해버렸다. 게다가 그것은 한족의 중국이 패권주의 국가의 대명사가 되도록 초석을 놓아준 셈이 되어버렸다.

명나라가 망하지 않은 채 근대가 이룩되었으면, 오늘날 중국의 횡포는 보지 않아도 좋았을지 모른다. 언어도 잃고 땅도 잃고 나라도 잃으면서 한족의 중국에게 모든 것을 희사했지만, 그 중국은 그것을 무기로 횡포를 부리며, 지금은 세계의 공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때 한국이 편입되지 않은 것은 화친 덕분이라고 보면 무리일까. 우리는 금수강산에 먹고 살기 풍부한 물자를 생산하는 땅으로 자족적인 나라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고도 잘살 수 있는 자연조건이 되는 나라이므로 패권주의적 사고에서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나라다.

병자호란 패배나 삼전도 굴욕의 교훈이 패권주의에의 동경이 아니라 인류 평화의 염원이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역사적 가정을 해보는 동기를 제공한다.



#남한산성 #광주가볼만한곳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행궁 #숭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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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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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중용 | 작성시간 20.09.08 차분하게 남한산성의 역사를 짚어주었습니다. 역사 유적 소개는 대충대충 흘려듣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연경선생의 말씀은 듣는 사람의 정신을 집중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교실에서 수업을 잘하는 선생님을 보는 듯합니다. 저도 남한산성에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인천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라 맘만 먹으면 언제든 다녀올 수 있어, 교외 산책 시 늘 후보에 오르는 곳입니다. 삼전도비는 잠실롯데월드 옆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직 실물을 보진 못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 곳도 가볼 생각입니다. 삼전도비 문장은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썼는데, 그 전말이 조선왕조실록에 적혀있습니다. 동도들과 한문 강독을 하면서 그 부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삼전도비는 조선왕조가 청나라한테 당한 치욕의 증거물이나, 삼전도비 문장만큼은 명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문을 쓴 이경석이 소론이라는 이유로 노론 세력들한테 두고두고 책잡혀 비난을 받은 것은 역사의 비극이자 희극입니다. 삼전도비문이 작성되는 과정을 보면 이경석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여야가 싸우는 걸 보면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난 것이겠지요.(1)
  • 작성자중용 | 작성시간 20.09.08 오늘 아침 바람이 잦아들기는 했으나, 베란다 창문을 흔드는 힘은 여전합니다. 공기가 요 며칠 사이에 차가워졌습니다. 벌써 가을의 문턱을 지나 가을속으로 진입한 모양새입니다. 하늘이 맑고 공기가 맑아 나들이 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저도 힘을 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겠습니다. 오늘 쓰신 글은 공력을 들인 명문이고, 사진도 마음을 뺏어가는 걸작입니다. 잘 읽고 잘 보았습니다. 어제 늦은 밤 설파선생께 聞講問道錄이라는 창조주권론 강의논평문을 보냈습니다. 문강문도록은 '설파 선생의 강의를 듣고 삶의 길을 물은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작명한 것이지요. (2)

    부기: "매우 소극적인 학문인 고증학의 발달을 이룩했던 배경에는 통제된 언론이 있었다. "는 말씀이 귀에 쏙 들어옵니다. 명나라 지식인들의 비판의식을 무디게 하기 위해 번쇄한 문헌학에 몰두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해방 후 미국에 가서 공부한 대부분의 우리나라 학자들이 비판의식을 상실하고 미국의 학문에 예속된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미국의 경제학이 역사와 사상 쪽을 등한히 하고, 수리경제학 통계경제학 중심인 것도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제국주의의 책략이 아닐까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박영미 | 작성시간 20.09.12 누워서 보다가 중용선생님 부기를 보고 깜짝 놀라서 본문 다시 읽었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어요~😥
  • 작성자연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9.09 마치 공자 앞에서 문자 쓴 기분입니다. 본문보다 나은 댓글입니다. 선생님의 댓글로 글이 온전해지고, 더 빛이 나는 거 같습니다. 항상 고마운 마음 갖고 있습니다. 청나라가 중원에 들어가 자신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은 역사의 큰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강역이 넓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힘을 갖는 것이 문제고, 문화도 패권주의 기반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행복을 위한 논리와 이에 기반한 문화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카타르시스가 아닌 신명풀이 문화가 힘을 얻어야 되는 것도 우리가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이듯 말이지요. 미국 유학도 그것이 패거리가 되고 권력이 되어 수직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 문제인 거 같습니다. 미국 유학을 잘 활용하는 시각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덕분에 글을 쓰는 데 더욱 고심해야 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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