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사적지
문수산성(文殊山城)
주소 :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로 102-38(포내리)
사적 제139호 (1964. 8. 29 지정)
방문일 : 2020.9.17.
김포의 대표적인 사적지 문수산성과 덕포진을 살펴본다. 강화도 가느라 바빠 항상 지나치기만 했던 곳, 이곳이 강화도와 같은 아픔과 기쁨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와보고서야 알았다.
1. 알아보기
1) <문수산성>
역사 : 1694년(숙종 20년)에 축조, 1812년(순조 12)에 대규모로 중수한 대규모 석축산성이다. 바다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고, 강화도 방어를 위해 쌓아, 갑곶진(甲串鎭)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켰다. 순조12년 중수 시에 강화 유수 홍의호가 성의 북문인 취예루, 서문인 공해루, 남문인 희우루 등 3곳에 성문을 축조하여, 세 개의 성문과 3개의 문루와 3개의 아문이 있었다.
2014년에 문수산성을 보수하면서 신라식으로 추정되는 정상부 장대지 하단 50여m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곽이 발견되어 조선조 이전에 신라 시대에도 성벽을 쌓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명칭은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 때 산 정상에 창건된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에서 유래되었다.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軍)과 격전을 벌여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었다. 당시 김포 출신의 한성근이 조선팔도 포수들을 이끌고 프랑스 군에 맞섰다. 산성은 총 6km 중 4km가 남아 있다.
문수산성(文殊山成)의 남문은 희우루(喜雨樓)라 한다. 희우는 기쁨이 비처럼 내린다, 혹은 가뭄 끝에 내리는 기쁜 비, 단비를 말한다. 발굴과정에서 성문 기단석이 발견되어 육축부(陸築部, 문루 하부의 석재로 쌓은 부분)를 복원하고 누각을 지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으로 하였으며, 사방으로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두르고, 좌우에 협문을 두었다. 이 문은 염하를 건너가고 건너오는 사람들이 통행했던 문으로 강화도의 관문 역할을 했었다. 남문은 병인양요 때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북문인 취예루는 복원 전에는 무사석(武砂石, 네모반듯한 돌로 층을 지어 높이 쌓아올린 축석) 일부와 홍예석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3년과 1994년에 홍예 및 육축부를 보수하고 문루를 복원하였다.
희우루. 대문에 박힌 문정을 만나면 몇 갠가 세어보곤 한다. 중국에서는 보통 5개, 7개, 9개로 되어 있고 직급별로 숫자가 다르다. 9개는 황궁과 공자사당와 태산사당만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는 거 같다.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하는 거 같은데, 대개 9개보다 많다.
희우루에서 내려다 본 강화대교
2) 문수산
문수산은 김포에서 가장 높은 산(376m)이다. 비솔산, 비아산, 통진산 등으로도 불렸다. 김포의 북서쪽 끝자락 조강과 염하(鹽河)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서쪽은 염하 건너편의 강화도, 북쪽은 조강 넘어 북한 개성, 동쪽에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파주시, 고양시와 접하고 있다. 동쪽에서는 한강과 서울의 삼각산, 서쪽에서는 멀리 인천 앞바다, 북쪽에서는 개풍군을 바라다 볼 수 있다. 뛰어난 전망으로 ‘김포의 금강’이라고 한다.
문수산은 서울의 첫 번째 관문이면서 주교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분단의 최전선이어서 북한과 지척에서 대치하고 있으며, 4계절 북녘 땅의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해를 거쳐 염하강을 따라 올라오는 배와 대동강과 예성강을 따라 평양, 개성 등지에서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배를 모두 감제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 오래전부터 군사 전략상 비중 있는 요충지였다. 이것은 김포반도가 삼국 각축의 최전방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문수산에서 내려다본 북쪽 전경
3) <덕포진>
분류 : 사적 제292호
소재지 : 김포시 대곶면 덕포진로 103번길 224-4
강화만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인 손돌목에 설치한 조선시대의 군영이다.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 서구 열강과 치열하게 싸웠던 격전지이다.
1871년에 신미양요 시절 미국함대와 광성진(廣城津)전투가 벌어지자 강화 쪽의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과 함께 이곳 덕포진(德浦鎭)에서 일제히 포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두 양요를 겪은 뒤 1874년에는 덕포진에 안항동포대(鴈行洞砲臺)를 축조하였다.
덕포진 일대는 덕포진 테마관광단지로 개발 중이다. 역사문화체험장, 박물관, 덕포진 교육박물관 등이 있다.
덕포진 끝에 있는 손돌의 묘는 고려시대 뱃사공의 묘이다. 손돌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뱃길을 안내한 뱃사공인데 험한 물길에 불안을 느낀 왕이 그의 목을 베었다. 죽임을 당하면서도 안내해준 덕분에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후하게 장사를 치르게 한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조선시대 말까지 손돌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동안 중단되었으며 1970년부터 다시 지냈다. 1989년부터는 김포문화원이 주관하여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진혼제를 지낸다.
김포시는 문수산성, 문수산, 덕포진, 조강 등을 김포의 평화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갖고 있다.
덕포진의 포대
전시관. 코로나로 문을 닫았다.
손돌의 묘. 제사 사진.
4) <병인양요> 개요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이다. 1866년 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 박해 때 프랑스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만이 화를 면했다. 이 3명 중, 리델(Ridel)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최인서(崔仁瑞)·심순녀(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였다.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는 강경한 응징 보복의지를 보였다.
조선군이 문수산성에서 패한 후에 강화도의 관리·군인·백성이 모두 피난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양헌수가 덕포에서 비밀리에 심야 잠도작전(潛渡作戰)을 전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잠입하여 프랑스군과 격전을 벌려 대승을 거두었다. 프랑스군은 10월 14일 상륙 이래 거의 한달 동안 강화부를 점거했지만, 정신적·육체적으로 피로했기 때문에 정족산성을 재공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1월 10일 함대를 철수하여 싸움이 끝났다. 이 싸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 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로즈의 조선 원정은 11월 21일 제2차 원정이 끝날 때까지 무려 2개월여에 걸친 장기 원정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2. 생각해보기
1866년 병인양요는 천주교 문제로 일어난 전투이고, 한국의 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한 사건이다. 곧이어 일어난 1871년 신미양요와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신미양요는 통상 문제로 일어난 경제분쟁인 반면 병인양요는 종교 분쟁인 것이다. 거기다 문화재 약탈까지 더해졌는데, 150년이 된 지금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어서 정신적인 피해가 매우 큰 분쟁이라 할 수 있다.
살해당한 9명의 선교사를 위한 보복으로 조선인 9,000명을 살해하겠다고 선언하고 조선을 침범한 로즈 사령관은 조선인 천주교인들을 길잡이 삼아 강화도로 들어왔다. 침범의 명분이 책임자 처벌이 아니라, 종교와 관련없는 조선인 백성을 살해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거된 조선인들이 침략의 길잡이 노릇을 한 것이다.
이 상황은 종교 공동체와 국가 공동체가 대립하였을 때 종교인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게 한다. 종교인이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종교와 대립할 것인지, 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국가와 대립할 것인지가 선택지로 놓인 상황인 것이다. 길잡이들은 국가 침략 상황에서 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하여 국가 반역 쪽에 섰다.(물론 강압이 있었는지 구체적인 상황 파악이 필요하다.)
이런 선택의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모 정당의 젊은 의원이 ‘하나님의 통치’란 신정통치 하에서나 가능할 법한 말을 구호로 써서 문제가 된 바 있다. 이전에도 ‘서울시 봉헌’이나 기독교 하나님의 법이 국가의 법보다 우위라는 정치인들의 문제적 발언이 있어왔다. 국가와 종교의 대립 문제가 현재적 상황인 셈이다.
병인양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801년의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을 만난다. 황사영(1775~1801)은 흰 비단에 조선의 신유박해 천주교 탄압 사건을 적고, 대응책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참조) 백서는 북경 주교 구베아에게 보내려는 밀서로 제작되었다.
등골이 서늘한 제안이다. 첫 번째는 국가 주권을 무시해서 유교를 택한 나라의 종교정책을 바꾸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라를 말살해 달라는 요구이고, 세 번째는 조정과 백성을 향해 정변을 일으키라는 요청이다. 이완용보다 더 매국적인 언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 공동체와 국가공동체에서 전자를 택하고 국가를 말살하여 한 선례이다.
황사영은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같은 해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고, 이에 연루되어 정약용 정약전 형제도 강진으로 흑산도로 이배, 또는 유배되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이다. 과거에 합격한 황사영은 정약용의 형 정약종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교 입교하여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종교활동을 했다. 백서의 원본은 지금 로마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천주교에서는 1980년 그의 묘를 발굴하고 1998년에는 교황청에 제출한 '하느님의 종' 125위의 시복(諡福) 청원서에 순교자로서 포함하였다. 시복 선정에서는 최종 결정 순간에 제외되었다. 이러한 논란을 의식해서다.
종교 내부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종교 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 크다. 황사영의 대역죄는 단지 국왕에 대한 반역을 넘어서는 국가에 대한 반역이다. 국가 차원에서의 대역죄가 천주교에서는 순교로 언급되고 있는 것 자체부터 논란의 소지가 있다. 그러려면 최소한 사과나 해명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과문한 탓인지 사과나 해명을 했다는 말을 들은 바 없다.
당대 백성들은 이미 황사영의 죄를 대역죄로 인식하고 “나라 사람들이 죽일 만하다고”(승정원일기 고종 5년 무진 윤 4월 7일조) 하여 여론의 단죄가 먼저 있었다. 최근 종교적 행위가 방역의 문제를 야기하자 대중은 방역의 편을 들었다. 방역을 하지 않으면 생명을 보호할 수 없으므로 종교적 행위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와 종교가 맞설 때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는 아직 공론화된 적이 별로 없다. 헌법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대중 사회인식 차원에서 합의가 필요한 문제가 아닐까. 그런 합의가 없어서 신정 정치같은 발언이 계속되고 묵인되는 것이 아닐까 해서다. 그렇다면 공론화될 필요가 있다.
병인양요는 160여년 전에 끝났지만, 종교가 야기한 문제는 아직도 현재형이고, 약탈된 문화재의 반환도 미완인 채다. 그때 파괴된 문수산성은 아직도 복구하지 못하였다. 프랑스는 아직도 다수의 카톨릭교도의 국가이면서, 유럽문화의 핵심인 나라다. 병인양요 발발국가임에도 우리가 최대의 로망으로 삼는 프랑스가 우리의 선망에 대해 하는 보답은 이런 것이다. 한국은 어긋난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는, 중재자가 아니라 피해 당사자인 것이다.
문수산성을 지키느라 희생된 사람들, 태반은 종교인이 아니었을 그들의 희생의 의미는 종교적 영역 밖에 국가 수호의 차원에 있다. 이들의 희생은 국가와 종교 대립에서 얼마나 고려되었을까. 교과서에서나 배운 병인양요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보며, 역사 속에서 나처럼 살아왔을 인간을 생각해본다. 방역 1등국가라 해도, 이만하면 선진국이라 해도 생각하고 해결해야 할 기본적인 문제가 아직 너무 많다.
#김포가볼만한곳 #문수산성 #희우루 #덕포진 #병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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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중용 작성시간 20.10.08 국가와 종교가 맞설 때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가? 이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한다.
첫째, 현재 우리나라 환경에선 종교는 자발적인 선택 사항이지만, 국가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부모 중 한 사람이 외국인이거나 외국에서 태어나서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이상, 한국 사람이 되는 건 거의 필연이다.
둘째, 우리나라 환경에서 국가와 종교 중 어느 것이 개인이나 공동체 삶에 더 큰 영향을 줄까? 당연히 국가이다. 종교는 국가의 영향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다.
국가가 무너지면 개인이나 공동체 삶의 존립 자체가 붕괴되지만, 종교가 없어진다고 해서 삶의 존립 자체가 허물어진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다면 국가가 있고 나서 종교가 있는 것이지, 종교가 국가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이다.
코로나 방역에 종교가 국가의 시책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근래 일부 종교인들이 종교자유를 내세워 저항한 일이 있었다. 본말전도요, 자가당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한민국 사람은 어떤 종교의 종사자나 신도이기 전에, 국민으로 태어나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
작성자연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10.10 백번 동의합니다. 하나 너무 지당한 말씀도 가끔은 그것이 지당하다는 것을 논란을 통하여 확실히 해두는 과정도 필요한 거 같아 본문처럼 말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종교 관련 논의에 소극적이어서 분명하거나 부당한 것도 제대로 밝혀 말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유교 불교는 물론이고 이후 생겨난 종교들도 국가와의 대립이 문제된 적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래 이후는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고, 아직도 사회적 합의가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논란을 터부시하는 사회 관습상, 사회적 합의 과정을 통해서 부당하다고 보이는 생각도 정리하고, 사회적 합의를 수용하는 절차를 거치는 유연성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시원한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