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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산문 기타

소설-길 위에서 쓴 편지(수정본)

작성자우령차|작성시간05.06.29|조회수145 목록 댓글 2
 


길 위에서 쓴 편지


김 종 호                  


“전쟁이 끝난 후 그곳에서 살았다. 50년대 후반이니까 네가 태어나기 한 참 전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내가 주로 그곳에서 화전을 일궈 일을 했고, 가끔 너희 작은 아버지와 고모도 와서 일을 하곤 했다. 고모와 막내 삼촌은 그때 무척 어렸었지.”

아버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 차분한 목소리에 그 당시의 그곳, 허궁다리에서 있었던 일들의 대강을 내게 들려주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왜 허궁다리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짐작을 한다고 할지라도 다만 가난이라는 당시의 환경 탓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도 그 당시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주로 허궁다리에 올라가서 사는 일이 많았다. 허궁다리에다 벌려놓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을 하다보면 하루해가 어떻게 넘어가는지도 몰랐다.”



가을 나무들은 서서히 붉은 기운을 토해내고 있었다.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북풍과 서풍을 가늠할 수 있을 뿐,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가는 문제사항이 아니었다. 다만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는 계곡에 접어드는 환상 아닌 환상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이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그 어디쯤에 일명 허궁다리라는 곳이 있을 것이다. 처음 ‘허궁다리’라는 이름을 듣는 사람들은 허궁에 뜬 다리를 연상하게 되지만 실은 다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다만 그곳의 지형이 허궁에 뜬 것과 같으면서 큰 웅덩이 모양으로 골짜기의 지형이 형성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의 어머니가 어느 날 내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땅을 밟으면 서리 내린 땅을 밟는 느낌처럼 푹푹 들어가는 까닭으로 허궁다리라고 부른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7년이 되었다. 당시 나는 22세였고 아버지는 57세였다. 내가 아버지와 더불어 살던 22년 그해 겨울 동안 나의 머릿속에서 허궁다리는 풀리지 않은 실타래로  얽혀 있었다. 그해 겨울 12월 24일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의식을 잃은 것이 나에게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지만 아버지가 심심풀이 삼아 들려준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 심장이 박동질을 할 때마다 움직이고 있었다. 허궁다리의 실체를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다면 내가 세상에서 만난 아버지의 그늘진 얼굴을 씻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참 많이도 변했다. 내가 이곳을 다시 찾은 지가 50년이 넘는구나. 그때는 내 나이 20대 초반이니 참으로 혈기왕성했던 시절이었는데..........”

청량리 작은 아버지가 허궁다리 길로 들어서면서 내뱉는 말이었다. 상도동 작은 아버지는 저는 다리를 이끌고 따라오면서 이곳저곳을 휘돌아볼 뿐 말이 없다. 작은 계곡물 앞에서 일행 세 사람이 발길을 멈추었다. 아버지의 형제들 가운데 청량리에 사는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의 바로 아랫 동생으로 나에겐 첫째 작은 아버지가 되고, 상도동의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 형제 가운데 막내로서 내겐 셋째 작은 아버지가 된다. 둘째 작은 아버지는 일찍이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고모 한 분이 서울 양재동에 살고 있다.

“형님, 여기가 허궁다리에서 내려오는 물 맞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계곡의 모양새는 똑같네요. 그렇지요 형님?”

상도동 작은 아버지도 허궁다리를 찾아들면서 어렸을 때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는 얼굴이다. 당시 상도동 작은 아버지의 나이는 9세였다. 허궁다리에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주로 생활했던 까닭으로 어린 삼촌은 아침에 눈을 뜨면 친구들을 찾아 아랫마을로 내려갔다가 해가 떨어지면 어머니를 찾아 허궁다리를 쏜살처럼 뛰어 올라왔다고 한다. 허궁다리에서 아랫마을까지의 길은 대충 어림잡아 시오리 길에 해당되어 빠른 걸음으로도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지금 오르고 있는 허궁다리 길은 어젯저녁의 술자리에서 전격적으로 결정되었다. 추석을 맞아 서울에서 고향에 내려온 작은 아버지 두 분께 허궁다리에 대한 그 동안 나의 궁금증을 풀어놓았던 것이 빌미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허궁다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었다. 39년 동안 이 마을에서 줄곧 살면서 앞산 뒷산을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산과 계곡의 지형을 익히며 쏘다녀 보았지만 그 허궁다리는 가 볼 수 없었다. 산에서 약초며 산짐승을 잡는 마을 형들한테 물어보아도 쉽사리 어디쯤 위치하니까 가보라는 소리를 듣는 대신 한결같이 혼자서는 절대로 가지 말라는 말뿐이었다. 지형이 너무나 험한 관계로 잘못 찾아들어갔다가는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고 산속에서 헤매다보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이유였다. 시골에서만 자라온 내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는 생각은 해보질 못했지만 막상 허궁다리를 찾아 떠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내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되곤 했다.

얼마 전 나는 원주지역을 비롯해 치악산 일대의 지명 연구에 관심이 많은 인근 S대의 국어국문학과 김여진(金與眞) 교수를 찾았다. 허궁다리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풀어놓고 이와 관련된 자료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구해보고 싶은 심사였다. 그러나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김 교수를 통해 허궁다리에 대한 실체를 찾았다기보다는 더 깊은 미궁으로 빠져듦을 느낄 뿐이었다.

“거 아주 독특한 지명처럼 보입니다. 허궁이라......허궁다리.......제 생각으론 아마도 그곳에 넓은 평지 비슷한 것이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이것이 김 교수가 내게 건넨 말의 전부였다. 김 교수는 언제고 그곳을 찾게 되면 내게도 알려달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

김 교수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낸다는 원주지역의 산악회 등산 전문가 박 모씨를 소개해 주었다. 박 모씨는 치악산만 전문으로 산행을 즐기는 사람으로, 박 모씨가 모른다면 허궁다리는 없는 곳에 가까울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내가 만난 박 모씨 역시 허궁다리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했다. 다만 남대봉 남쪽 어디쯤 아니겠느냐는 여운만 남겼다.

김 교수와 등산 전문가 박 모씨가 말한 것은 지금까지 내가 조사한 치악산과 관련된 자료에 다 나와 있는 것이었다. 그 모든 자료 속에 허궁다리만 빠져있었다. 찾으면 찾을수록 미궁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허궁다리는 아버지의 생전 말씀을 토대로 마을에서 허궁다리를 기억하는 사람을 동행하여 찾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이다. 성남리에서 서북 방향으로 치악산 상원사 가는 길이 있다. 성남리는 동쪽과 서쪽으로 치악산 줄기가 높게 뻗어있어 마을에서 올려다보면 산밖에 보이는 것이 없고 그 능선으로 굽이굽이 하늘 모양을 가늠할 수 있는 곳이다. 상원사를 오르는 서북 방향에서 서쪽으로 절골이 있는데 절골에서 치악산 시명봉을 오르는 길 어디쯤에 허궁다리는 위치하고 있었다. 치악산을 오르는 길은 주로 상원골을 통해 등산객의 발걸음이 잦을 뿐 절골로 통하는 길은 없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절골에서 화전을 일구어 살았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 골짜기 초입에 두어 집이 민박과 향토음식점을 겸하고 있을 뿐 계곡은 첩첩히 골짜기와 나무로 막혀 샛길마저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추석날 저녁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작은 아버지 두 분이 소주를 몇 잔 하고 있을 때 허궁다리를 가보고는 싶은데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 못가 봤다는 조카의 이야기를 듣고 선뜻 청량리 작은 아버지가 동행할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그럼, 내일 추석 차례를 일찍 끝내자마자 허궁다리를 가보도록 하자. 나도 하두 오랜만이라서 그 길을 찾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나무가 많이 들어서고 인적이 없더래도 그 길은 찾을 수 있겠지요. 형님.”

상도동 작은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허궁다리에 대한 두 분의 궁금증은 내가 느끼는 이상으로 대단한 것으로 느껴졌다. 50여년 가까이 그곳을 떠난 이후 한번도 가보지 못한 허궁다리에 대한 감회가 두 분에게 몹시도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궁다리의 실체를 내일이면 대면하게 된다는 설렘으로 나는 잠을 좀체 이룰 수 없었다. 나의 아내 될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기로 약속한 전날 밤보다도 가슴이 뛰었다. 신비 그 자체로 39년 동안 가려졌던 허궁다리의 실체를 내일이면 볼 수 있다는 느낌은 아버지의 삶에서 전쟁 중 수여받았다는 화랑무공훈장의 실체만큼이나 감동으로 다가왔다.

“내가 육이오 사변 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알겠냐? 화랑무공훈장을 아무한테나 주는 줄 아냐, 목숨을 바꿔야 훈장을 주는 거여, 목숨을 바꾼다는 것을 짐작이나 니가 할 수 있겠니.” 하면서 6 ․ 25와 관련된 전쟁이야기만 아버지 입에서 나오면 화랑무공훈장은 빠질 수 없는 아버지의 안주였다. 그러나 집안 그 어느 구석에도 화랑무공훈장의 실체는 발견할 수 없었다.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랑무공훈장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의 무용담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집안 식구들 조차도 아버지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참 답답한 놈들이구만, 내가 화랑훈장을 받은 것을 믿지 않다니, 애이 빌어먹을 놈들아, 내 마누라조차도 믿질 않으니, 원......내 새끼들이라고 믿겠어........” 하면서 연거푸 담배를 태웠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1년 동안 세운상가 4층에서 전자기술을 배우고 있을 때 아버지가 내게 들려준 화랑무공훈장의 실체를 찾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버지의 말씀이 거짓일리는 없을 것인데, 거짓이 아니라면 그 실체가 어디엔가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후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나는 수첩에 적어두었던 아버지의 군번과 소속부대 이름을 들고 군 관계 기관을 찾아 나섰다. 보훈청과 육군본부 등을 찾아다니는 가운데 정부종합청사 훈장 관계 부서를 찾으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군 관계자의 그 답변을 들은 뒤부터 내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5월의 햇볕 탓일 수도 있었지만 머리에서 빈혈이 일어나는 것처럼 서울거리가 어지러웠다. 아버지의 화랑무공훈장은 정말로 사실인가, 사실이 아니라면, 사실이라면......이 말을 되내이면서 나는 광화문 네거리의 정부종합청사를 들어섰고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12층으로 올라갔다.

“아버님의 이름과 군번을 적어주십시오.” 담당 공무원의 말을 전해 듣고 작은 메모지에 아버지의 이름과 군번을 적는 나의 손끝이 요동치면서 떨렸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목이 말랐다. 컴퓨터에 입력 작업을 끝내고 마지막 키를 누르면서 담당 공무원은 회전의자를 뒤로 돌리면서 웃음 띤 얼굴로 내게 말했다.

“예, 아버지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으신 것이 확실합니다. 증명서를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내려가셔서 춘천보훈지청에 접수를 하시면 보훈혜택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날의 감동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보훈혜택은 차치하고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술자리에서 내뱉은 말씀의 모든 것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었다. 훈장수여 증명서를 손에 넣고 정부종합청사를 내려오는 내내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의 인생이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너무나 왜소하고 비루하게 늙어버린 아버지의 청춘이 내 심장에서 뛰고 있었다.

그날 나는 서울에서의 일을 뒤로 미루고 원주 고향집으로 내려 왔다. 아버지에게 아버지 삶의 얼룩이면서도 찬란한 광채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저녁 늦게 집으로 들어온 아버지에게 나는 소주를 준비해 두었다가 한 잔 올렸다. 아버지의 술 마시는 모습을 몹시도 싫어했던 내가 내민 소줏병을 보시고 오히려 아버지가 의아스런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동안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훈장수여 증명서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먼 산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에 깊이 잠기는 듯 하면서 소주만을 연거푸 삼키셨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는 듯 하더니 두 볼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네 놈이 내 새끼라는 것이 확실하구나, 이봐, 내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지?” 옆에 앉아서 듣고 있던 어머니에게 건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눈물에 섞여 구슬프면서도 자랑스럽게 내게 들려왔다. 아버지는 쓴 소주를 드실만한 삶을 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아버지의 삶에서 숨겨졌던 그 하나가 확인된 것이었다. 



  추석차례를 마치자마자 나는 등산용 배낭을 챙겼다. 추석 음식 가운데 떡 몇 가지와 과일을 간식용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장비를 꾸렸다. 술을 좋아하시는 두 분을 위해서 소주를 두병 넣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리 연세가 드셨다고 할지라도 두병은 조금 모자란 느낌이 들어서 한 병 더 넣었다. 허궁다리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될 나의 목줄기에서도 소주를 간절히 원할 것 같은 생각이 한편에서 밀어닥쳤기 때문이었다. 배낭은 잠깐 사이에 몇 가지의 음식으로 가득찼다.

절골로 들어서는 초입새부터 나는 골짜기의 앞만 보고 길을 재촉했다. 처음 가는 길이라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 없었고 가을철이라 해가 일찍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으로 입구부터 감상에 젖어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분 작은 아버지도 나의 그런 생각을 알았는지 부지런히 나의 뒤를 따라오셨다. 나의 발걸음은 무거우면서도 무척 가벼웠다.

  길은 없었다. 인적이 끊긴지 오래된 까닭으로 희미하게 나무들 사이로 약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들의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 계곡의 입구에서 올려다 본 허궁다리로 가는 길은 나무만으로 가득찬 지형일 뿐 그 구체적인 윤곽을 잡아내기가 힘들었다. 절골로 접어들고 마지막 인가(人家)를 지나 30분가량 골짜기를 따라 올라왔을 때 앞서 걷는 나를 보고,

“동호야, 그 길이 아닌 것 같다. 허궁다리는 왼쪽 골짜기로 올라가야할 것 같다.”

상도동 작은 아버지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양편 능선을 자세히 훑어보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쪽 골짜기는 무척 작아보이는데요. 그곳에 그렇게 큰 골짜기가 안에 있을까요.”

“허궁다리는 들어가는 입구는 작은데 막상 그곳에 들어가면 골짜기 하나가 허허벌판처럼 넓다.”

상도동 아버지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우리들 일행 세 사람은 오르던 길을 바꿔 옆 골짜기로 접어들기로 했다. 청량리 작은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길은 더욱 더 험했다. 조금 전까지 오르던 길은 그래도 조그만 샛길로 길 모양새라도 있었는데 이곳은 완전히 산속을 헤매는 그 자체였다. 골짜기의 한허리를 넘어서니까 옛 길 형태를 갖춘 길이 나왔다.

“여기봐라. 이곳이 맞다. 이 길이 허궁다리로 오르는 길이 분명하다. 이 길이 옛날 삼판차가 오르내리던 길이다. 여기 이 돌들을 봐라.”

이곳까지 삼판차가 오르내렸다는 것이 내겐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길의 윤곽을 더듬어 보니 트럭이 오고 갈 수 있는 길임에 틀림이 없었다. 큼지막한 돌들로 석축을 쌓아올려 길을 만들고 그 길 위에 작은 돌들이 채워져 있었다. 흙길은 듬성듬성 비로 씻기고 장맛비에 쓸려갔지만 돌로 만든 길은 수십 년이 넘도록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게 보이는 모든 흔적들은 아버지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요즘처럼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이 길은 손과 발이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노역의 현장임이 분명했다.

  두 분 작은 아버지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끔 가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한숨을 길게 내뱉는다. 그리고 길을 한번 쭉 올려다보고 다시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는다.

“오늘 동호 덕분에 허궁다리를 다 와보게 되었구나. 나도 하두 오랜만이라서 길이 어사무사했는데 막상 올라와보니 그때 그 길 생각이 나는구나.”

“조금 더 가면 아마 굴바위라는 곳이 나오지않나요, 형님?”

“그래 맞아, 굴바위라는 데가 있지. 비가 오면 그곳에 들어가 쉬어가기도 하고, 지금도 굴바위가 그대로 있을지 모르겠다. 그곳까지만 가면 허궁다리로 들어가는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길 양편으로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보면서 나는 걸었다.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왼편으로 보였다. 물의 양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예전에는 더 많은 물이 흘러 내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물이 있었기에 그곳에서 3년 동안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추수를 하면 어떻게 곡물을 내다 팔았는지가 궁금했다. 차가 이곳까지 매번 들어와서 곡물을 실어냈는지 아니면 지게로 운송을 했는지 그 당시 그분들이 첩첩산중에서 살은 생활방식이 참으로 궁금했다.

“차가 여기까지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 대개 지게로 져서 신림까지 옮겼고 가끔가다가 저 아랫마을까지 장사꾼들이 와서 차로 실어갈 때도 있긴 했지. 삼판차가 아마 여기 들어 온 것은 우리가 여기 살다가 마지막으로 이사를 갈 때가 처음이었을 게야.”

청량리 작은 아버지가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내가 모르는 궁금증을 조금 풀어주었다. 청량리 작은 아버지는 그 당시 원주에서 일등상사로 제대를 몇 달 앞 둔 군인이었다. 그러나 당시 생활에 대하여 들으면 들을수록 나의 궁금증은 늘어만 갔다. 세세히 그 모든 것을 캐물을 수가 없어서 나 혼자 생각만으로 길을 따라 올랐다. 상도동 작은 아버지도 말이 없이 고개를 땅에 묻고 걷기만 하였다. 두 분에게 있어서도 그 옛날 생각이 불현듯 많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두 분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되었고 두 분의 큰 형이 되는 나의 아버지도 오래전에 이 세상을 등졌다. 만약 지금까지 나의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나는 분명히 아버지와 이 길을 찾아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특별히 아버지와 그 어떤 곳을 다녀본 기억이 없다. 이를테면 산을 같이 가본다든지 무슨 사찰을 구경하는 일은 없었다. 여행이라는 것을 아버지와 같이 떠난 기억이 없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 시간까지 나는 아버지와 같이 살았지만 아버지 삶의 한 순간도 여유로운 생활이 아니었기에 아버지는 아버지의 삶대로 이어졌고 나는 나대로의 학교 생활이 전부였다.

“당시 형님........그러니까 너희 아버지가 참 고생 많이 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 연세는 많으셨는데다가 우리 형제들은 많이 있어서.........형님과 형수께서 참으로 고생 많이 하시면서 우리 형제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아버지가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오면 당신의 형제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를 듣곤 했다. 5년 6개월 6 ․ 25 전쟁에 참전한 이야기의 내력만큼이나 가난으로 인해 고생한 아버지의 말은 어린 나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죽은 전우의 시체들을 방호벽으로 쌓고 총을 쏠 수밖에 없는 상황만큼이나 형제들 때문에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으로 힘든 일을 마다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삶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뒤 살아남아 아들 앞에서 증언하는 모습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술에 취하면 반복되는 아버지의 말은 나의 귀를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당시 내겐 지겨운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아버지의 삶이 안타까워서 아버지 몰래 눈물이 흘렀고 아버지의 형제들은 도대체 뭘 했기에 나의 아버지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었나 하는 원망이 가슴에 사무치기도 했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면서 청량리 작은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당시 우리 형제들 가운데 지금 셋째는 아주 어렸고 또 양재동 사는 고모도 어렸을 때라서 여기저기 친구들과 어울리기 바빴다. 나도 제대를 앞두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서 여기저기 일합네 하면서 돌아다닐 때였지. 형님만 그때 전쟁 끝나고 집에 돌아오셔서 어떻게 살 수가 없으니까 허궁다리에 들어와서 아버지 어머니하고 화전을 일구고 숯가마를 해서 사셨던 거지. 너희 죽은 둘째 작은 아버지가 그때 무슨 기자가 된다고 하다가 사기를 당해서 많은 빚을 지게 됐는데, 형님이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으니까 이곳에 와서 3년 동안 화전을 일구고 숯을 만들어 팔어서 그 빚을 갚은 거지.”

중얼중얼 흘러나오는 청량리 작은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땅만 보고 걸었다. 무슨 주기도문처럼 나의 귀를 어지럽혔다. 아버지의 생전에 너무나 많이 들었던, 허궁다리에 들어와 화전을 개간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그 이야기였다. 3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나의 아버지가 이 길을 몇 번을 오르내렸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침 저녁으로 지게 가득 곡물이나 숯을 짊어지고 배낭 하나만으로도 땀이 흐르는 이 길을 고무신이 닳도록 오르내리면서 내뱉은 한숨과 담배연기가 골짜기 가득 안개가 되어 서려 있는 것만 같았다. 나도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닦아내는 손수건 때문인지 눈이 많이 아렸다.   

말이 없이 걷기만 하던 상도동 작은 아버지가 입을 떼었다.

“형님, 여기쯤이 굴바위가 있던 곳 아닌가요?”

“그래, 여기가 굴바위다. 그때 그 모양대로구먼.”

당시 이곳 굴바위는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쉬어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비가 많이 쏟아지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곳에 들어와 급한 비를 피해갔다. 굴바위 앞 편은 커다란 바위들로 쌓여 있어서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일만큼 큰 구멍이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곳은 편편한 개울이었다. 그런데 50년대 후반 어느 해 큰 비가 내렸는데 상상도 못할 폭우였다고 한다. 그 비로 시명봉 아래쪽 남쪽 능선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면서 쏟아진 돌덤이가 여기까지 내리덮은 것이라고 한다. 산의 흙과 돌이 3―4킬로미터의 골짜기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때 이곳에만 오면 여기서부터 시명봉 못미쳐까지 훤했었다. 몇 해가 지나도록 나무 한그루도 자라지 않았다. 떠내려 온 돌로 덮여 있어서 계곡이 하얗게 보일만큼 대단했지.”

청량리 작은 아버지는 하얗게 보이던 그 때의 계곡 형세를 찾으려는 듯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폭우로 유실된 산비탈은 보이지 않았다. 50여 년 전의 그곳은 나무로 뒤덮여 계곡과 계곡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변해 있었다.

이곳 굴바위를 지나면서 세 갈래 길이 나왔다. 시명봉으로 오르는 골짜기와 허궁다리로 향하는 갈림길이었다. 시명봉으로 오르는 골짜기는 물이 말라 있어서 개울의 돌들이 가을 햇살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허궁다리 계곡에서는 맑은 물이 제법 많이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계곡의 물이 끊어지지 않고 흘러내려오는 것은 그 계곡 안 어디쯤에 생명을 잉태하는 무엇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옛날에도 여기서 이렇게 쉬어서 가던 곳이다. 시명봉 길로 오르는 사람과 허궁다리로 가는 우리 집안 식구들이 지나가다 만나서 아랫마을과 읍내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쉬는 곳이었다.”

청량리와 상도동의 작은 아버지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지금 앉은 바위가 50여 년 전에도 그대로 있었다고 했다. 나는 세 갈래 길의 가운데 바위에 앉은 작은 아버지들을 중심으로 해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과일이라도 하나 드시겠냐고 여쭈니까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두 분의 머릿속에는 옛날 그 시절 이곳을 오가면서 몸에 밴 기억의 언저리를 더듬고 있는 것처럼 내겐 보였다. 50여년 만에 처음 옛 기억을 더듬어 찾아온 두 분의 연세는 60대 중반과 50대 후반이다. 열 살 이전과 스무 살 무렵에 있었던 삶의 방식을 40이 되어가는 조카인 내게 속으로 묻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흑백 사진으로만 본 아버지의 20대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도 이곳에서 허궁다리로 오를 때마다, 허궁다리에서 내려가는 길마다 이곳에서 쉬었을 것이다. 그리고 흐르는 물로 젊은 가슴의 갈증을 씻고 씻었을 것이다. 나도 문득 갈증이 느껴졌다. 흐르는 물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시큼한 물방울이 눈에서 떨어져 이내 물에 휩싸여 흘러갔다. 흐르는 물에 씻겨 내려가는 나의 눈물방울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다만 흘렀다.



10여 분간 앉아서 쉬던 두 분이 몸을 털고 일어났다. 허궁다리로 향하는 골짜기의 첫 입새였다. 이곳부터 허궁다리라고 했다. 허궁다리에는 다른 사람은 없었고 우리 집안 식구들만 모여서 한 골짜기 전체를 화전으로 일궈 살았던 곳이라고 했다. 허궁다리에 우리 집안 식구만 모여 일을 하던 골짜기라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허궁다리에 대한 나의 기억엔 그래도 몇 몇 세대의 사람들이 이웃을 하여 살면서 화전을 부쳤던 곳으로 생각했었다.

허궁다리의 골짜기 입구로 들어서면서부터 두 분의 얼굴은 조금 상기된 표정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1시간여 동안 산으로 오른 힘듦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곳부터 전개되는 허궁다리의 옛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궁다리 입구는 참나무로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일년을 자라도 흔적이 거의 없을 만큼 조금씩 자라는, 그래서 더욱 야무지게 크는 물푸레나무도 굵게 기둥을 세워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었다.

“아...... 예전 여기는 나무 하나 없는 텅 빈 골짜기었는데.........  이곳에 나무가 이렇게도 커 있단 말인가.” 작은 아버지의 탄식이 쏟아졌다.

“내일 모레 내 나이 칠십이니 나무들도 50여 년 동안 이렇게 커버렸구나. 여기부터 골짜기 안쪽까지 훤했었는데.......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를 분간할 수가 없게 되었구나.”

문 밖을 나서면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청량리 작은 아버지의 눈동자는 우거진 숲을 보면서 조금씩 풀어지는 듯 했다. 오르던 발길을 멈추고 바위에 앉아 숨을 돌리더니,

“광준아, 니가 먼저 올라가서 집터 있던 곳을 찾아봐라. 아마 지금도 있을 것이다. 집터 있던 아래 어디쯤에 형님이 숯을 굽던 숯가마터가 있을 텐데 그곳도 있나 없나 찾아봐라.”

상도동 작은 아버지에게 먼저 올라가서 집터를 찾아보라고 청량리의 작은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청량리 작은 아버지가 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 어디가 어디인지를 가늠할 수 없는 숲에 시선을 돌렸다. 산마루턱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까지 덮은 나무들은 누군가로부터 이 골짜기가 허궁다리로 명명되기 이전의 모습을 뽐내기라도 하듯 그 원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청량리 작은 아버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목소리를 높여,

“광준아, 뭐가 있냐? 뭐가 보이니?” 앞서 오른 상도동 작은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마도 그 지형을 찾는데 정신이 몰입된 것 같았다. 길을 따라 조금씩 오르면서 청량리 작은 아버지는 동생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윗편 어디쯤에서 상도동 작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빨리 올라오세요. 여기 뭐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힘든 걸음을 재촉하여 상도동 작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 올랐다.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기억의 그림자로 만들어진 길을 찾아 숲으로 들어가는 방법뿐이었다. 얼마만큼을 올랐을 무렵 상도동 작은 아버지가 반쯤 타버린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청량리 작은 아버지가 움푹하게 돌로 둘러쳐진 곳을 보더니,

“여기가 얘 아버지, 형님이 숯을 굽던 가마터구나. 지붕 모양은 하나도 없는데 그 바닥 형체는 50년이 넘어도 그대로 있구나.” 하시면서 숯가마터로 들어가더니 나무 꼬챙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조금 기다리는 사이 무엇인가 시커먼 것이 나왔다.

“봐라, 그때 형님이 만들던 그 숯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냐.” 하시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숯 가마터 가운데에 우뚝 서서 자라고 있는 참나무를 청량리 작은 아버지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50년 동안 헤어져 있다가 만난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청량리 작은 아버지의 입에서 신음소리처럼 작게 흘러나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뿐 참나무는 말이 없다.

“광준아, 여기서 조금만 더 오르면 집터가 나올 것이다. 그 당시 집이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 숯가마가 있었으니 조금만 더 올라가면 틀림없이 집터가 있을 것이다.”

작은 아버지 두 분이 숯 가마터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나는 우두커니 숯가마터만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숯을 굽는 아버지의 모습이 선연하게 비춰왔다. 여름과 겨울을 가리지 않고 숯가마 앞에서 뜨거운 열기에 땀을 쏟는 아버지의 젊은 그림자가 내 곁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을 가린 지금의 참나무가 당시엔 아버지의 톱질에 의해 하나하나 베어졌을 것이다. 가까운 곳의 참나무가 베어져 숯가마에 들어가면 조금 더 먼 곳의 참나무가 베어져 숯가마에 들어가 숯이 되고 그 숯은 아버지의 등에 얹혀 지전이 되어 돌아왔을 것이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골짜기의 참나무는 아버지의 손에 의해 하나도 남김없이 베어졌다. 베어진 나무토막들은 이른 새벽부터 해질 무렵까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으로 산비탈을 따라 아래로 굴려지고 굴릴 수 없는 곳은 지게로 옮겨져 숯가마에 들어가 타올랐다. 마침내 허궁다리 계곡을 가득 채웠던 참나무는 서 있는 나무보다 누워버린 나무가 더 많게 되었다. 그 후부터 계곡의 능선이 한 줄로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참나무 사이를 가득 채웠던 잡목과 잡초들은 화전을 일구는 사이 불에 타올라 거름이 되었다. 봄과 여름, 해질녘이면 산은 불길에 타올랐다. 계곡 전체가 연기로 가득 찼다. 몇 해 사이에 한 골짜기가 화전으로 바뀌어 대부분의 밭에 이팥을 심었다. 집터 옆엔 옥수수를 심고 콩을 심었다. 가을걷이한 이팥은 30가마를 넘었다. 팥은 본래 낱알이 작은데 이팥은 특히 더 작은 팥의 일종으로 개간한 생땅에 심으면 수확이 좋았다. 이팥은 예전에도 쌀 한가마 보다 더 가격이 좋았다고 하니 어림짐작으로도 목돈임을 할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허궁다리 계곡 전체에 이팥을 심는데 허리를 펼 시간이 없었고 숯가마에 참나무를 세우고 불이 사그러들기를 기다리는 사이 날이 밝으면 지게에 숯을 가득지고 읍내에 내다 몰래 팔았다. 당시에도 몰래 숯을 굽는 일은 불법에 해당되는 까닭으로 드러내놓고 상거래를 할 수 없었다.

“형님, 집텃자리가 있는 것 같아요. 빨리 와봐요.”

상도동 작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집터를 찾은 것 같았다. 나는 부랴부랴 청량리 작은 아버지와 함께 집터가 있다는 곳으로 가보았다. 50여 년 전의 집터 자리가 그대로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밀려와 가슴이 뛰었다.

“맞다. 여기가 그 집터다. 아.......그런데 집의 형체는 다 사그러들었구나.” 했다. 청량리 작은 아버지는 이곳을 떠날 당시 살던 집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두고 떠났으므로 그 형체의 일부가 아직도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았다. 구들이 놓인 자리를 가리키면서 이곳이 부엌이고 저곳이 굴뚝이 있던 자리라고 설명을 하였다. 대략 5평 정도로 작게 보이는 집터의 윤곽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방으로 쓰던 구들 위의 흙엔 칡덩굴과 다래덩굴들이 얽혀 있었다. 이곳에서도 허궁다리 전체의 지형은 가늠해 볼 수 없었다. 너무나 많은 나무들로 인해 집터가 있던 자리만을 볼 수 있을 뿐 계곡의 어디쯤에 이 집이 위치하고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상도동 작은 아버지는 연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청량리 작은 아버지는 집이 있던 자리의 여기저기를 나무 사이를 헤치면서 다녔다. 허궁다리까지 올라오는 험한 산길이 작은 아버지의 근력에 부쳤으련만 수색견을 연상케 할 만큼 몸은 민첩했고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목표물을 놓치지 않으려는 동물적인 본능을 나는 보았다.

나는 부엌이 있었다는 자리에 들어가 아궁이가 있던 곳을 더듬었다. 나의 어머니가 이곳에서 여러 해 동안 불을 지피면서 밥을 했다. 갓 시집온 새댁이었으니 나의 어머니의 얼굴과 손은 여리고 여리게 고왔을 것이다. 밥을 짓는 냄새가 어느 구석에서 나의 코끝으로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깨진 사기그릇이 한 조각 부엌 귀퉁이에 있다. 빨간 꽃무늬 바탕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먼 곳을 바라보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 사기 그릇이 누군가에 의해서 깨어지기까지 나의 어머니는 닦고 또 닦으며 산에서 뜯어온 나물을 버무려 반찬을 올렸을 것이다.

  사진기를 꺼내어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머물던 집을 사진기에 담았다. 나무들이 많은 까닭에 온전하게 집터의 모습을 찍을 수는 없었다. 가려진 부분은 어쩔 수 없고 담겨진 모습이라도 나의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다. 다람쥐들이 집터 위에서 자란 나무를 타고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나타난 허궁다리는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꽃과 새들이 어우러진 무릉도원처럼 느껴졌다. 누구든 나뭇잎 하나를 떨어뜨리면 가을이 오고, 누구든 풀잎을 뜯어 한 획을 그으면 한 폭의 그림이 만들어지는 세상 아닌 세상처럼 보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을 자리를 찾았다. 젊은 내가 시장기를 느끼는 것을 보면 두 분 작은 아버지도 속이 출출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집터 바로 옆에 작은 내가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물의 양으로 보아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워낙 고지대이다 보니 물의 지형이 바뀌지 않고 처음 그대로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물길도 예전에 보던 그대로이구나. 내가 어렸을 때 저기에서 미역을 감곤했다.” 상도동 작은 아버지의 설명이었다. 당시 9세였던 작은 아버지는 더운 날이면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바로 윗편에서 나의 어머니께서 주로 쌀을 씻고 채소를 손질하던 곳이라고 했다. 50여 년 전의 그 돌 위를 따라 물은 그대로 흘러내린다고 했다.

아버지와 막내 작은 아버지의 나이 차이가 많은 관계로 나의 어머니는 막내 작은 아버지를 아들처럼 생각하면서 생활했다고 했다. 상도동 막내 작은 아버지의 당시 나이가 9세였으니 충분히 있을 법한 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상도동 작은 아버지는 지금도 나의 어머니한테는 가장 허물없는 시동생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한다.

배낭을 풀어 음식을 내놓았다. 깊은 산속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작은 아버지 두 분과 나 세 사람이 음식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소주를 먼저 한 잔 올렸다. 단 숨에 잔을 비우셨다. 이곳이 전부 허허벌판 같았다고 했다. 이곳에서 보면 시명봉 능선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다시 한 잔을 따라 올렸다. 작은 아버지 두 분은 단 숨에 술잔을 또다시 비우셨다. 빈속에 술이 들어간 탓인지 두 분 작은 아버지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옛 집터는 그대로인데 그 때 그 사람들은 간 곳을 모르겠구나. 형님께서 살아계셔서 이 자리에 계셨으면 얼마나 감회가 새로우실까. 왜 그렇게 일찍 돌아가셔가지고......” 청량리 작은 아버지가 울음을 머금고 내뱉는 말이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침묵의 마디마디를 따라 청량리 작은 아버지의 눈은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고 늙은 고목나무를 적시는 빗줄기처럼 주름진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깊은 골짜기의 하루해가 습기를 머금고 일찍 기울고 있었다.

작은 실개천 옆에는 바위들이 한쪽 산을 덮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커다란 돌들이 첩첩히 쌓여 있었다. 인적이 끊긴 그늘진 숲에는 푸른 이끼가 돌들을 가득 덮고 자라고 있었다. 그 한켠 바위 아래 그 옛날 것으로 보이는 토종벌통을 놓던 자리가 있었다. 벌통 자리를 보자 할아버지가 벌을 치던 바위라고 청량리 작은 아버지가 덧붙였다. 바위의 바로 아래,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움푹 들어간 곳에 밥상처럼 평평한 돌판이 놓여 있었다. 50여 년 전의 벌을 치던 나무통은 간 곳을 모르게 사라졌지만 벌통을 받쳐 이고 있던 자리는 눈과 비를 한 번도 맞은 자욱이 없이 그대로였다. 녹음을 가르고 들어온 희미한 햇살이 광선처럼 흰돌판의 맨살을 비춰주고 있었다.

  50여 년 전의 흔적은 모두 없어졌다. 그래도 견고한 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터는 그 형체를 지운 채 그 흔적 위에 구들만을 남겨 놓았다. 아버지가 골짜기의 참나무를 베어 며칠이고 불을 태우던 숯가마터도 그 터만을 남겨놓은 채 숲의 일부가 되었다. 허궁다리 골짜기 전체에 불을 놓아 화전으로 일궈 이팥을 생산하던 그 땅엔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참나무로 빽빽하게 우거졌다. 한 가족의 웃음소리와 슬픔이 어우러져 항상 사람소리로 가득했던 허궁다리엔 나무들의 흔들림을 따라 새들의 노랫소리가 정겹다. 집터의 구들을 뚫고 뿌리를 내린 다래덩굴엔 다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할아버지가 허궁다리 이곳 틀거리로 만든 집에서 환갑잔치를 하고 그 해 겨울의 북풍이 몰아치기 전 아버지는 세간 살림을 챙겨 본 집으로 내려갔다. 환갑잔치에서 가장 귀한 음식은 통조림 한통이었다. 잔치에 어울리게 통조림은 별표 모양으로 윗부분이 정성스럽게 잘려져 개봉되어 있었다. 50여 년의 세월을 넘어 녹이 쓴 통조림통은 빈 터 돌담 위에 남아 어느 날인가 빈 마음으로 이곳을 다시 찾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기울어지는 허궁다리의 옛 집터가 있던 자리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청량리 작은 아버지였다. 청량리 작은 아버지는 칡과 다래덩굴로 얽힌 집터의 구들위에 무릎을 꿇고 술잔 가득 소주를 붓고 몇 번이나 절을 올리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제삿날 절을 올리는 청량리 작은 아버지의 모습보다 더 엄숙하고 간절한 것이었다. 절을 하는 청량리 작은 아버지의 허리가 점점 땅에 가깝게 무너져 내리는 듯 하더니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위가 반쪽으로 금이 가고 참나무가 꺾이면서 토해내는 비명처럼 들렸다. 숲 속의 미물까지도 일어나 청량리 작은 아버지의 울음소리에 눈물을 흘리는 듯 허궁다리 전체는 비가 내렸다. 울음소리는 해가 완전히 산 능선을 넘어서 계곡이 어둠에 휩싸일 때까지 계속 되었다.

허궁다리가 어둠에 가득 차면서 틀거리로 만든 집 한 채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남포 불도 아닌 관솔불이 고콜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관솔불이 타오르면서 솔향기가 진하게 허궁다리에 넘쳐났다. 관솔불은 그 빛이 점점 밝아지면서 온 방을 밝히고 허궁다리의 구석구석을 밝히기 시작했다. 관솔불은 보름날의 달빛보다 더 밝고 따뜻했다. 리트머스 시험지에 드러나는 물질의 표백처럼 허궁다리가 50여 년 동안 품고 있던 숨겨진 원상들이 밝게 드러나고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오던 길을 되물어 하산하는 세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되묻는 말에 누구의 답변도 없었다. 다만 허궁다리의 계곡 능선만이 달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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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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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읊조림 | 작성시간 05.07.28 배낭하나 달랑 짊어지고 성큼 성큼 과거로 향하는 주인공 얼굴에 과거와 현재의 바람이 엇갈리며 어지럽게 소용돌이 치고 있다. 기쁨도 슬픔도 아닌것이 흐느낌이 되는구나.....
  • 작성자무도인 | 작성시간 06.03.27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허궁다리의 실체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을 숨긴 채 유지되는 긴장감과 마치 들풀의 향내가 코끝을 스치는 촌길을 걸어가는 듯한 아늑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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