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한말 석학(碩學)으로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치다
公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관동(官洞) 출신으로 1861년(철종 12) 1월 18일 순호(順浩)공의 장자로 태아나 뒤에 백부(伯父) 휘 원호(元浩)의 계자(系子)로 출사(出嗣)하였다. 자(字)는 희백(希伯), 호는 오암(悟庵)으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휘 선(銑)의 손자이며, 칠송공(七松公)의 12대 종손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고 슬기로웠으며, 성품이 맑고 충직(忠直)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또한 몸가짐이 신중(愼重)하고 절의(節義)를 중히 여겼으며, 기국(器局)과 식견(識見)이 뛰어나서 뭇 사람을 포용할 만하여 보는 사람마다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일찍이 삼희당(三希堂) 윤석봉(尹錫鳳) 선생 문하에 들어가 수학(受學)하였으며, 뒤에 한말(韓末)의 거유(巨儒)인 중암 김평묵(重庵金平黙)선생 문하(門下)에 들어가 폐백을 드리고 제자가 되어 당대(當代)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높은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천거되어 성균관 교수 겸 박사(博士)에 제수(除授)되었으며, 뒤에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로 승차(陞差)하였다.
公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서 1895년(고종32) 을미의병(乙未義兵) 항쟁(抗爭)을 시작으로 하여 1922년에 일본 제국의회(日本帝國議會)에 독립 청원(獨立請願)을 하기까지 일생을 조국의 광복(光復)을 위해 몸 바쳐 온 애국투사(愛國鬪士)이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功勳)을 기리어 1977년 12월 13일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追敍)하였다가, 1992년 8월 15일 자명(字名)인 경희백(慶希伯)으로 활약한 의병장(義兵將) 공적을 공인(公認)하여 건국훈장애국장(建國勳章愛國章)을 추서하였다.
公의 문집과 저서(著書)가 많이 있었으나 한일합방 후 일부가 왜경(倭警)에 의하여 압류되고, 남아 있던 가전문집(家傳文集)마저 6.25동란으로 모두 소실(燒失)되었다. 현재 전하는 公의 글은 문중의 행장록(行狀錄)과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파산(破産)을 당하고 고향을 떠나면서 지었다는 관동이별곡(官洞離別曲) 필사본(筆寫本)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구한말(舊韓末)의 거유(巨儒)인 성재(省齋) 유기일(柳基一) 선생에게 보낸 서한문(書翰文)이 강원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암선생문집(重庵先生文集)에 김평묵(金平黙) 선생의 행장록과 여러 편의 서한문(書翰文)이 수록되어 있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여흥 민씨(閔氏)로 참봉 익훈(翼勳)공의 따님이며, 슬하에 우국지사(憂國之士) 우현(愚顯), 독립 유공자(獨立有功者) 구현(九顯)공 형제를 두었다.
公은 1928년 10월 9일 향년 68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관동(官洞) 원봉(圓峰) 신좌(申坐) 안장(安葬)되었다.
2. 을미의병(乙未義兵)을 일으키다 투옥되다
1895년(고종 32) 10월 7일, 일제(日帝)에 의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는 국치(國恥)를 당하자, 가산(家産)을 군자금(軍資金)으로 하여 유응두(柳應斗), 홍재구(洪在龜), 경문수(慶文秀) 선생등과 같이 강원도 철원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거사(擧事)를 앞두고 철원 군수 이응렬(李應烈)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경성옥(京城獄)에 수감되었다가 고종(高宗)의 특사(特赦)로 석방되었다. 이때에 모친(母親) 풍천 임씨(任氏)가 옥중(獄中)의 아들에게 글로서 경계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신하로써 의로운 일이다. 불행하게도 몸이 검은 쇠사슬에 묶이었으나, 누가 그 원통함을 알지 못하겠느냐? 그렇다고 구차하게 살겠느냐? 사는 것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니, 죽어서 충성(忠誠)된 혼과 의로운 넋이 되는 것이 옳도다. 구차하게 살아서는 용렬(庸劣)하고 더러운 사람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비록 칼날을 앞에 들이댄다 하더라도 조금도 꺾이거나 굽히지 말고, 엄하게 바로 물리쳐서 왜인들로 하여금 간담을 땅에 떨어트리게 한다면 너희가 비록 죽어서 돌아온다 하더라도 내 마땅히 웃음으로써 맞이하겠노라.」
하였다.
3. 관동의병장(關東義兵將)으로 왜적과 항쟁하다
1895년 1월 15일 단발령이 내려지자, 일제(日帝)의 만행(蠻行)을 더 이상 좌시(坐視)할 수 없다고 판단한 公은 희백(希伯)이란 자명(字名)으로 분연히 일어나, 박성묵(朴性黙), 강두동(姜斗東), 김종명(金鐘鳴), 홍재구(洪在龜) 선생 등과 같이 원주 횡성 지방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대장(大將)에 추대되어 일제(日帝)에 항거하였다.
公은 <박성묵> 선생과 함께 500여명의 의병(義兵)을 이끌고, 포고문(布告文)과 격문(檄文) 등으로 항일의식(抗日意識)을 고취시키는 한편, 왜병들과 교전(交戰)을 하다가 마침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전하고 말았다.
이때에 격전(激戰)의 와중(渦中)에서 중상(重傷)을 입었으나,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탈출하여 수년간 은신(隱身)하며 요양(療養)하였다.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김승학 지음)와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지음) 등에 의하면 의병장(義兵將)이었던 公은 격전(激戰)의 와중에서 순국(殉國)하였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당시의 전황(戰況)이 얼마나 처절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4. 구국상소(救國上疏)를 올려 망국 조약(條約)의 무효화 투쟁을 하다.
일본이 강압으로 제일차 한일의정서(第一次韓日議政書)를 체결하자, 公은 1905년 1월, 당대(當代)의 문사(文士)들인 김동필(金東弼), 전덕원(全德元), 강원형, 이상린(李相麟)선생 등과 대한 13도유약소(大韓13道儒約所)를 조직하고, 전국의 유림신사(儒林紳士)들과 연명(連名)으로 구국상소(救國上疏)를 올려 망국조약(亡國條約)의 파기(破棄)를 주청(奏請)하였다.
또한 일본공사관(日本公使館)에 항의 공한(公翰)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 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이의 시정을 촉구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公使館)에 일제(日帝)의 교활한 침략 정책을 규탄하는 공한을 보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日帝)가 무력으로 고종 황제(高宗皇帝)와 대신(大臣)을 겁박하여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國權)을 박탈하자, 대한유약소(大韓儒約所)의 동지들과 상소(上疏)를 올려 조약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이에 파기(破棄)와 조약 체결에 동의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을 주청하였다. 그 상소에 말하기를,
(前略) 지금 이 오조약(五條約)이라는 것은 한 나라를 영영 망하게 하는 기틀입니다. 더구나 황상(皇上)께서 불가(不可)라 하고, 정부주무(政府主務)의 참정대신(參政大臣)들이 불가라 하고, 국민들이 모두 불가라 하는데, 가자(可字)를 쓰는 대신을 어찌 폐하(陛下)의 신하(臣下)라 하고 정부대신(政府大臣)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齋純)이 외교(外交)를 맡은 주무 대신(主務大臣)으로써 “일제(日帝)에 의하여” 라고는 하지만, 머리를 숙이고 인장을 찍었으니, 어찌 매국(賣國)의 죄목(罪目)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외에 여러 대신들도 처음부터 저들의 앞잡이가 되어 오다가 오늘의 화(禍)를 조성하였고, 반역(反逆)의 행동이 결국은 가(可)자를 쓰는 자리에서 드러났으니, 무치(無恥)도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열성조(列聖朝)와 황상 폐하(皇上陛下)의 역신(逆臣)이오니, 국법(國法)이 있는데, 어찌 법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만일 그대로 둔다면 삼천리강토(疆土)가 다시 대한(大韓)의 소유가 될 수 없사오니, 장차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어디에 두시렵니까? 억만 백성(億萬百姓)을 뉘 집으로 보내어 노예를 만들려는 것입니까?(後略)
라고 하였다.
또한 대한유약소의 유림대표(儒林代表)들과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의 무효화투쟁계획(無效化鬪爭計劃)을 세우고, 박탈당한 국권(國權)의 회복을 위하여 전 민족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보내는 한편 각국 공사관(公使館)에 공한(公翰)을 보내 국제신의(國際信義)를 배반한 일제의 침략만행을 규탄하는 일을 도모하다가 김연식(金璉植), 박성준(朴聖俊) 등의 밀고(密告)로 체포되어 옥고(獄苦)를 치렀다.
5. 전국 의병 특사로 청나라에 밀파되다
1907년 9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한국 군대가 해산되는 망국적(亡國的)의 치욕을 당하자, 公은 허위(許蔿), 왕회종(王會種), 김진묵(金溱黙) 선생등과 같이 적성, 연천 삭령 등 임진강 유역을 근거지로 경기 의병군(京畿義兵軍)을 창설(創設)하고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서울의 점령을 목적으로 이은찬(李殷贊) 선생의 관동 창의군(關東倡義軍)과 “왕산 허위” 선생이 이끄는 경기 의병군이 <13도 창의군>을 창설할 때에 왕산 허위(旺山許蔿) 선생과 함께 참여하여 막료(幕僚)로써 활약하였다.
그러나 13도 창의군의 서울 탈환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의병부대들이 적성(積城), 삭령(朔寧), 연천(連川) 등 임진강(臨津江) 유역으로 집결하여 허위(許蔿) 선생을 총대장(總大將)으로 전국의병 연합부대를 창설하였다. 이때에 公은 군무(軍務)를 관장하는 막료(幕僚)로 활약하였는데, 일제(日帝)는 오암공(悟庵公:경현수)에게 귀순하면 “관찰사(觀察使)의 벼슬을 주겠다”고 하며 회유(懷柔)를 하였다 전한다.
1908년 2월, 전국의병군(全國義兵軍)은 지속적인 무력 항쟁을 위하여 청국(淸國)에 군사원조(軍事援助)를 요청하기로 하고, 오암공(悟菴公)을 교섭특사(交涉特使)로 밀파(密派)하였다. 公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중국 정부(中國政府) 요로에 조선의 실정과 간악한 일제(日帝)의 만행(蠻行)을 폭로하는 한편,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사 원조를 강력히 요청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의병 총대장인 <왕산 허위> 선생이 순국(殉國)하고, 연합의병군 마저 해산(解散)된 뒤였다. 公은 국운(國運)을 한탄하며 오랫동안의 여독(旅毒)과 의병 항쟁 때 입은 전상(戰傷)의 후유증(後遺症)으로 수년간 요양(療養)을 하였다.
6. 만세 운동과 3.1운동 1주년 기념 투쟁계획을 추진하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국상(國喪)을 당하여서는 장자 우현(愚顯)과 상경하여 청년유림역사대(儒林力士隊)를 조직하고, 청량리에서 만세 시위(示威)를 일으켜 <우현>이 "종로경무서"에 체포 구금되었다.
公은 1920년 3월 1일을 기해 새로운 민족운동(民族運動)의 길을 트기 위하여 이달(李達), 김영만(金榮萬), 이중각(李重珏), 백초월(白初月) 선생 등과 같이 “3.1운동 1주년기념 독립시위투쟁계획(獨立示威鬪爭計劃)을 세우고, 전국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전민족의 재궐기(再蹶起)를 호소하는 한편, 일본 제국의회(日本帝國議會)에 독립 청원서(獨立請願書)를 보내려다가 왜경(倭警)에 발각되어 1920년 3월 17일 서울 검사국(檢事局)으로 송치(送致)되어 옥고(獄苦)를 겪었다.
7. 미국 상하원 극동시찰단에 신명서(伸明書)를 전달하다
1920년 8월 26일에 미국 상하원(美國上下院)의 극동시찰단(極東視察團) 일행이 조선(朝鮮)의 정황을 살펴보기 위해 경성(京城)을 방문하자, 왜경(倭警)의 눈을 피해 이들을 접견(接見)하고, 조선의 억울한 실상과 일본(日本)의 비인도적(非人道的)인 식민지정책(植民地政策)을 폭로(暴露)하였다. 이때에 전달한 신명서(伸明書)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前略) 일본이 본래 인(仁)을 버리고, 의(義)를 업신여기며, 욕심이 끝이 없고 폭(暴)을 행하는 일종(一種)의 이족(異族)으로써 우리 땅을 이(利)로 여기며, 우리 물자를 탐내며, 우리의 허약한 것을 틈타 처음에는 동맹(同盟)으로 달래고 중간에는 보호(保護)로써 가칭(假稱)하고, 나중에는 강탈(强奪)로써 하다가 오히려 부족하여 흉담독수(凶膽毒手)로서 우리 군부(君父)와 군모(君母)를 살해(殺害)하였다.
또한 사모(詐謀)와 교계(巧計)로써 인민의 고혈(膏血)을 착취하고, 학정(虐政)과 폭위(暴威)로서 종족(種族)을 멸망케 하여 삼천리강토로 하여금 장차 황량한 광야(曠野)로 만들어 인적(人跡)이 없도록 이르게 하니, 그 심사를 보건대 금수가 아니고 무엇이랴.(下略)
하며,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의 부당함과 고종 황제(高宗皇帝)의 서거(逝去)하신 사실 등이 기술된 신명서(伸明書)를 전달하고, 이를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한 미국대통령에게 반드시 전하여 조선(朝鮮)의 자주독립이 이루어지도록 지원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신명서(伸明書)는 서문(序文)을 비롯하여 다음의 7개항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너무 방대(尨大)하여 이를 생략(省略)하고 주제(主題)만 기술(記述)하였다.
제1절, 조선의 건국내력(建國來歷)
제2절, 조선의 종교와 정치(政治)
제3절, 일본의 정황(政況)
제4절, 한일관계(韓日關係)의 시말(始末)
제5절, 합방(合邦) 후 일적(日賊)의 만행(蠻行)
제6절, 선황(先皇)의 붕서사실(崩逝事實)
제7절, 독립만세시(獨立萬世時) 일적(日賊)의 만행
8. 일본의회 대표단에 독립청원(獨立請願)을 하다
1922년 8월, 일본 제국의회(日本帝國議會) 대의사(代議士) 황천오랑(荒川五郞) 등 일행이 조선의 민정(民情)을 시찰하기 위해 내한(來韓)하였다.
公은 이들이 국내 인사를 만나 전국의 물의(物議)를 듣기 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병원(鄭秉源), 신긍선(申肯善), 이호영(李虎榮), 윤길병(尹吉炳), 이승호(李勝浩) 등 제씨(諸氏)와 함께 경동여관(현 조선호텔)에서 이들을 만나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였다.
公은 이때에 한민족(韓民族)의 대일(對日) 감정과 조선의 자주독립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폐(說幣)와 구폐(救弊)의 통쾌한 논리로 역설하고, 수년 내에 일본이 패망할 것이 자명(自明)하므로 조선의 정황을 제국의회(帝國議會)에 정확히 보고하여 조선의 자주 독립이 이루어지도록 도와 줄 것을 청원하였다.
9. 공적 비문은 서울대학교 이응백(李應百) 교수가 짓다
공적비(功績碑)의 비문은 서울대학교 교수(敎授)인 문학박사(文學博士) 이응백 선생이 지었는데, 그 글은 이러하다.
나라의 주권(主權)이 외세의 침략으로 위태로울 때 나라 있음만을 알고, 집안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며, 민족이 있음만을 알고 내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신명(身命)과 가산을 바쳐 국권(國權)을 지키려다 통한(痛恨)의 생애를 마치신 애국지사(愛國志士)가 여기 누워 계시니, 바로 오암 경현수(悟庵慶賢秀)선생이시다.
公의 관향(貫鄕)은 청주로 시조는 고려조 평장사(平章事) 진(珍)이요, 청원부원군 복흥(淸原府院君復興)은 21대조가 되시고, 부제학(副提學) 섬(暹)은 12대조가 되시며,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선(銑)은 조부가 되시니. 1861년(辛酉) 정월 28일 파주군 적성면 구읍리 관동에서 순호공(順浩公)의 장자로 출생하시어 후에 백부 원호공(元浩公)에게 출사(出嗣)하시다.
일찍이 아우 문수(文秀)와 함께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黙)선생에게 수학(受學)하여 공맹(孔孟)의 도(道)와 정주(程朱)의 법을 익히고, 성균관 교수에 제수(除授)되어서는 이 나라 동량(棟樑) 양성에 심혈을 기울리시다.
을미년(乙未年) 민비 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이 일어나자, 분노를 참을 길 없어 아우 문수(文秀:成均館博士), 홍재구(洪在龜), 유기일(柳基一), 유응두(柳應斗) 선생등과 철원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고종(高宗)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 후 나라의 운명이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위태로워지매 원주 의병진(義兵陳)의 이인영(李麟榮) 선생등과 기병(起兵)하는 한편 고종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중국 혁명당(中國革命黨)에 군사원조 교섭특사(交涉特使)로 밀파되어 활약하고, 귀국하여서는 전국 유약소(全國儒約所)의 경문수(慶文秀), 유인석(柳麟錫), 전덕원(全德元)선생 등과 같이 궁문 밖에서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上疏)를 올리는 한편 일본의 간계를 폭로하는 격문(檄文)을 각국 공관(公館)에 비밀히 보내다가 발각되어 재차 구금의 몸이 되시다.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성균관 교수직을 사퇴하시고는 향리로 돌아와 왕산 허위(旺山許蔿), 김진묵(金溱黙)선생 등과 손잡고 적성, 삭령, 안협, 토산 등지에서 일군(日軍)과 싸우는 한편 관동지방에 산재해 있던 각 의병진(各義兵陳)을 통합하여 연합의병대를 조직하고, 세전(世傳)되던 가산을 군자금으로 쾌척(快擲)하였다.
기미년(己未年) 고종의 국상(國喪)을 당하여서는 장자 우현(愚顯)과 상경하여 유림역사대(儒林力士隊)를 조직하고, 청량리에서 만세 시위 중 <우현>이 종로경무서에 연행되었다. 이듬해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서는 “신조선” 주간(主幹)인 이 달(李達)선생을 비롯하여 김영만(金榮萬), 백의수(白義洙:初月) 등과 의거(義擧)를 모의하다가 일경(日警)에게 탐지되어 경성 검사국(京城檢査局)에 송치되었다.
1920년 8월에는 미국의회(美國議會) 극동시찰단이 내방하자,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를 규탄하는 신명서(申明書)를 수교(手交)하고, 국권회복(國權恢復)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1922년 8월에는 일본 대의사(代議士) 황천오랑(荒川五郞) 일행의 민정 시찰단을 맞아 윤길병(尹吉炳), 전 문(全文), 신긍선(申肯善) 동지들과 더불어 공동여관(恭洞旅館:현조선호텔)에서 만나 자주독립(自主獨立)의 필요성과 일본의 신의 배반을 통박(痛駁)하였다.
반평생을 오직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동분서주(東奔西走)하시던 公께서 드디어 1928년(戊辰) 10월 9일 한(恨) 서린 임종을 고하시니 향년 68이시다.
후학(後學)들이 포천 운담사(抱川雲潭祠)에 우암(尤庵)과 그리고 오암(悟庵) 선생을 함께 배향(配享)하는 발문(跋文)에 “그 글은 춘추(春秋)의 강목(綱目)이요, 그 법은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이라”고 적어 公의 학덕(學德)과 인품(人品)을 칭송하였다.
公이 가신지 반세기 만인 1977년 公의 구국 공적이 공인(公認)되어 대통령표창이 추서됨에 보훈처(保勳處)의 후원과 후손 및 후학(後學)들이 한 조각돌을 다듬고, 그 공적을 새기어 公께서 일군(日軍)과 싸우시던 저 푸른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세우니, 公의 곧은 충절(忠節)과 숭고한 구국정신(救國情神)은 강산(江山)과 더불어 영원히 기억되리라.
〔追記〕증손 창선(曾孫昌善)이 정부에 청원(請願)하여 1922년 8월 15일, 자명(字名) 경희백(慶希白)으로 활약한 의병장(義兵將) 공적을 공인받아 건국훈장애국장(建國勳章愛國章)이 추서(追敍)되었다.
1986년 4월 13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교수 문학박사(文學博士) 이응백(李應百) 짓고
건립위원장 한국일보사 논설고문(論說顧問) 윤종현(尹宗鉉) 세움
〔참고문헌〕청주경씨족보(하권p563). 청주경씨선세행장록(운담사배향문). 독립운동사(제 1권,제2권). 독립운동사자료집(제2집,제6집), 한국독립사(김승학편), 명치백년사, 월간 선봉(고려선봉사), 중암선생문집.
公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관동(官洞) 출신으로 1861년(철종 12) 1월 18일 순호(順浩)공의 장자로 태아나 뒤에 백부(伯父) 휘 원호(元浩)의 계자(系子)로 출사(出嗣)하였다. 자(字)는 희백(希伯), 호는 오암(悟庵)으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휘 선(銑)의 손자이며, 칠송공(七松公)의 12대 종손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고 슬기로웠으며, 성품이 맑고 충직(忠直)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또한 몸가짐이 신중(愼重)하고 절의(節義)를 중히 여겼으며, 기국(器局)과 식견(識見)이 뛰어나서 뭇 사람을 포용할 만하여 보는 사람마다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일찍이 삼희당(三希堂) 윤석봉(尹錫鳳) 선생 문하에 들어가 수학(受學)하였으며, 뒤에 한말(韓末)의 거유(巨儒)인 중암 김평묵(重庵金平黙)선생 문하(門下)에 들어가 폐백을 드리고 제자가 되어 당대(當代)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높은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천거되어 성균관 교수 겸 박사(博士)에 제수(除授)되었으며, 뒤에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로 승차(陞差)하였다.
公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서 1895년(고종32) 을미의병(乙未義兵) 항쟁(抗爭)을 시작으로 하여 1922년에 일본 제국의회(日本帝國議會)에 독립 청원(獨立請願)을 하기까지 일생을 조국의 광복(光復)을 위해 몸 바쳐 온 애국투사(愛國鬪士)이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功勳)을 기리어 1977년 12월 13일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追敍)하였다가, 1992년 8월 15일 자명(字名)인 경희백(慶希伯)으로 활약한 의병장(義兵將) 공적을 공인(公認)하여 건국훈장애국장(建國勳章愛國章)을 추서하였다.
公의 문집과 저서(著書)가 많이 있었으나 한일합방 후 일부가 왜경(倭警)에 의하여 압류되고, 남아 있던 가전문집(家傳文集)마저 6.25동란으로 모두 소실(燒失)되었다. 현재 전하는 公의 글은 문중의 행장록(行狀錄)과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파산(破産)을 당하고 고향을 떠나면서 지었다는 관동이별곡(官洞離別曲) 필사본(筆寫本)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구한말(舊韓末)의 거유(巨儒)인 성재(省齋) 유기일(柳基一) 선생에게 보낸 서한문(書翰文)이 강원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암선생문집(重庵先生文集)에 김평묵(金平黙) 선생의 행장록과 여러 편의 서한문(書翰文)이 수록되어 있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여흥 민씨(閔氏)로 참봉 익훈(翼勳)공의 따님이며, 슬하에 우국지사(憂國之士) 우현(愚顯), 독립 유공자(獨立有功者) 구현(九顯)공 형제를 두었다.
公은 1928년 10월 9일 향년 68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관동(官洞) 원봉(圓峰) 신좌(申坐) 안장(安葬)되었다.
2. 을미의병(乙未義兵)을 일으키다 투옥되다
1895년(고종 32) 10월 7일, 일제(日帝)에 의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는 국치(國恥)를 당하자, 가산(家産)을 군자금(軍資金)으로 하여 유응두(柳應斗), 홍재구(洪在龜), 경문수(慶文秀) 선생등과 같이 강원도 철원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거사(擧事)를 앞두고 철원 군수 이응렬(李應烈)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경성옥(京城獄)에 수감되었다가 고종(高宗)의 특사(特赦)로 석방되었다. 이때에 모친(母親) 풍천 임씨(任氏)가 옥중(獄中)의 아들에게 글로서 경계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신하로써 의로운 일이다. 불행하게도 몸이 검은 쇠사슬에 묶이었으나, 누가 그 원통함을 알지 못하겠느냐? 그렇다고 구차하게 살겠느냐? 사는 것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니, 죽어서 충성(忠誠)된 혼과 의로운 넋이 되는 것이 옳도다. 구차하게 살아서는 용렬(庸劣)하고 더러운 사람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비록 칼날을 앞에 들이댄다 하더라도 조금도 꺾이거나 굽히지 말고, 엄하게 바로 물리쳐서 왜인들로 하여금 간담을 땅에 떨어트리게 한다면 너희가 비록 죽어서 돌아온다 하더라도 내 마땅히 웃음으로써 맞이하겠노라.」
하였다.
3. 관동의병장(關東義兵將)으로 왜적과 항쟁하다
1895년 1월 15일 단발령이 내려지자, 일제(日帝)의 만행(蠻行)을 더 이상 좌시(坐視)할 수 없다고 판단한 公은 희백(希伯)이란 자명(字名)으로 분연히 일어나, 박성묵(朴性黙), 강두동(姜斗東), 김종명(金鐘鳴), 홍재구(洪在龜) 선생 등과 같이 원주 횡성 지방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대장(大將)에 추대되어 일제(日帝)에 항거하였다.
公은 <박성묵> 선생과 함께 500여명의 의병(義兵)을 이끌고, 포고문(布告文)과 격문(檄文) 등으로 항일의식(抗日意識)을 고취시키는 한편, 왜병들과 교전(交戰)을 하다가 마침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전하고 말았다.
이때에 격전(激戰)의 와중(渦中)에서 중상(重傷)을 입었으나,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탈출하여 수년간 은신(隱身)하며 요양(療養)하였다.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김승학 지음)와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지음) 등에 의하면 의병장(義兵將)이었던 公은 격전(激戰)의 와중에서 순국(殉國)하였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당시의 전황(戰況)이 얼마나 처절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4. 구국상소(救國上疏)를 올려 망국 조약(條約)의 무효화 투쟁을 하다.
일본이 강압으로 제일차 한일의정서(第一次韓日議政書)를 체결하자, 公은 1905년 1월, 당대(當代)의 문사(文士)들인 김동필(金東弼), 전덕원(全德元), 강원형, 이상린(李相麟)선생 등과 대한 13도유약소(大韓13道儒約所)를 조직하고, 전국의 유림신사(儒林紳士)들과 연명(連名)으로 구국상소(救國上疏)를 올려 망국조약(亡國條約)의 파기(破棄)를 주청(奏請)하였다.
또한 일본공사관(日本公使館)에 항의 공한(公翰)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 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이의 시정을 촉구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公使館)에 일제(日帝)의 교활한 침략 정책을 규탄하는 공한을 보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日帝)가 무력으로 고종 황제(高宗皇帝)와 대신(大臣)을 겁박하여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國權)을 박탈하자, 대한유약소(大韓儒約所)의 동지들과 상소(上疏)를 올려 조약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이에 파기(破棄)와 조약 체결에 동의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을 주청하였다. 그 상소에 말하기를,
(前略) 지금 이 오조약(五條約)이라는 것은 한 나라를 영영 망하게 하는 기틀입니다. 더구나 황상(皇上)께서 불가(不可)라 하고, 정부주무(政府主務)의 참정대신(參政大臣)들이 불가라 하고, 국민들이 모두 불가라 하는데, 가자(可字)를 쓰는 대신을 어찌 폐하(陛下)의 신하(臣下)라 하고 정부대신(政府大臣)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齋純)이 외교(外交)를 맡은 주무 대신(主務大臣)으로써 “일제(日帝)에 의하여” 라고는 하지만, 머리를 숙이고 인장을 찍었으니, 어찌 매국(賣國)의 죄목(罪目)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외에 여러 대신들도 처음부터 저들의 앞잡이가 되어 오다가 오늘의 화(禍)를 조성하였고, 반역(反逆)의 행동이 결국은 가(可)자를 쓰는 자리에서 드러났으니, 무치(無恥)도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열성조(列聖朝)와 황상 폐하(皇上陛下)의 역신(逆臣)이오니, 국법(國法)이 있는데, 어찌 법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만일 그대로 둔다면 삼천리강토(疆土)가 다시 대한(大韓)의 소유가 될 수 없사오니, 장차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어디에 두시렵니까? 억만 백성(億萬百姓)을 뉘 집으로 보내어 노예를 만들려는 것입니까?(後略)
라고 하였다.
또한 대한유약소의 유림대표(儒林代表)들과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의 무효화투쟁계획(無效化鬪爭計劃)을 세우고, 박탈당한 국권(國權)의 회복을 위하여 전 민족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보내는 한편 각국 공사관(公使館)에 공한(公翰)을 보내 국제신의(國際信義)를 배반한 일제의 침략만행을 규탄하는 일을 도모하다가 김연식(金璉植), 박성준(朴聖俊) 등의 밀고(密告)로 체포되어 옥고(獄苦)를 치렀다.
5. 전국 의병 특사로 청나라에 밀파되다
1907년 9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한국 군대가 해산되는 망국적(亡國的)의 치욕을 당하자, 公은 허위(許蔿), 왕회종(王會種), 김진묵(金溱黙) 선생등과 같이 적성, 연천 삭령 등 임진강 유역을 근거지로 경기 의병군(京畿義兵軍)을 창설(創設)하고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서울의 점령을 목적으로 이은찬(李殷贊) 선생의 관동 창의군(關東倡義軍)과 “왕산 허위” 선생이 이끄는 경기 의병군이 <13도 창의군>을 창설할 때에 왕산 허위(旺山許蔿) 선생과 함께 참여하여 막료(幕僚)로써 활약하였다.
그러나 13도 창의군의 서울 탈환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의병부대들이 적성(積城), 삭령(朔寧), 연천(連川) 등 임진강(臨津江) 유역으로 집결하여 허위(許蔿) 선생을 총대장(總大將)으로 전국의병 연합부대를 창설하였다. 이때에 公은 군무(軍務)를 관장하는 막료(幕僚)로 활약하였는데, 일제(日帝)는 오암공(悟庵公:경현수)에게 귀순하면 “관찰사(觀察使)의 벼슬을 주겠다”고 하며 회유(懷柔)를 하였다 전한다.
1908년 2월, 전국의병군(全國義兵軍)은 지속적인 무력 항쟁을 위하여 청국(淸國)에 군사원조(軍事援助)를 요청하기로 하고, 오암공(悟菴公)을 교섭특사(交涉特使)로 밀파(密派)하였다. 公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중국 정부(中國政府) 요로에 조선의 실정과 간악한 일제(日帝)의 만행(蠻行)을 폭로하는 한편,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사 원조를 강력히 요청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의병 총대장인 <왕산 허위> 선생이 순국(殉國)하고, 연합의병군 마저 해산(解散)된 뒤였다. 公은 국운(國運)을 한탄하며 오랫동안의 여독(旅毒)과 의병 항쟁 때 입은 전상(戰傷)의 후유증(後遺症)으로 수년간 요양(療養)을 하였다.
6. 만세 운동과 3.1운동 1주년 기념 투쟁계획을 추진하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국상(國喪)을 당하여서는 장자 우현(愚顯)과 상경하여 청년유림역사대(儒林力士隊)를 조직하고, 청량리에서 만세 시위(示威)를 일으켜 <우현>이 "종로경무서"에 체포 구금되었다.
公은 1920년 3월 1일을 기해 새로운 민족운동(民族運動)의 길을 트기 위하여 이달(李達), 김영만(金榮萬), 이중각(李重珏), 백초월(白初月) 선생 등과 같이 “3.1운동 1주년기념 독립시위투쟁계획(獨立示威鬪爭計劃)을 세우고, 전국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전민족의 재궐기(再蹶起)를 호소하는 한편, 일본 제국의회(日本帝國議會)에 독립 청원서(獨立請願書)를 보내려다가 왜경(倭警)에 발각되어 1920년 3월 17일 서울 검사국(檢事局)으로 송치(送致)되어 옥고(獄苦)를 겪었다.
7. 미국 상하원 극동시찰단에 신명서(伸明書)를 전달하다
1920년 8월 26일에 미국 상하원(美國上下院)의 극동시찰단(極東視察團) 일행이 조선(朝鮮)의 정황을 살펴보기 위해 경성(京城)을 방문하자, 왜경(倭警)의 눈을 피해 이들을 접견(接見)하고, 조선의 억울한 실상과 일본(日本)의 비인도적(非人道的)인 식민지정책(植民地政策)을 폭로(暴露)하였다. 이때에 전달한 신명서(伸明書)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前略) 일본이 본래 인(仁)을 버리고, 의(義)를 업신여기며, 욕심이 끝이 없고 폭(暴)을 행하는 일종(一種)의 이족(異族)으로써 우리 땅을 이(利)로 여기며, 우리 물자를 탐내며, 우리의 허약한 것을 틈타 처음에는 동맹(同盟)으로 달래고 중간에는 보호(保護)로써 가칭(假稱)하고, 나중에는 강탈(强奪)로써 하다가 오히려 부족하여 흉담독수(凶膽毒手)로서 우리 군부(君父)와 군모(君母)를 살해(殺害)하였다.
또한 사모(詐謀)와 교계(巧計)로써 인민의 고혈(膏血)을 착취하고, 학정(虐政)과 폭위(暴威)로서 종족(種族)을 멸망케 하여 삼천리강토로 하여금 장차 황량한 광야(曠野)로 만들어 인적(人跡)이 없도록 이르게 하니, 그 심사를 보건대 금수가 아니고 무엇이랴.(下略)
하며,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의 부당함과 고종 황제(高宗皇帝)의 서거(逝去)하신 사실 등이 기술된 신명서(伸明書)를 전달하고, 이를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한 미국대통령에게 반드시 전하여 조선(朝鮮)의 자주독립이 이루어지도록 지원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신명서(伸明書)는 서문(序文)을 비롯하여 다음의 7개항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너무 방대(尨大)하여 이를 생략(省略)하고 주제(主題)만 기술(記述)하였다.
제1절, 조선의 건국내력(建國來歷)
제2절, 조선의 종교와 정치(政治)
제3절, 일본의 정황(政況)
제4절, 한일관계(韓日關係)의 시말(始末)
제5절, 합방(合邦) 후 일적(日賊)의 만행(蠻行)
제6절, 선황(先皇)의 붕서사실(崩逝事實)
제7절, 독립만세시(獨立萬世時) 일적(日賊)의 만행
8. 일본의회 대표단에 독립청원(獨立請願)을 하다
1922년 8월, 일본 제국의회(日本帝國議會) 대의사(代議士) 황천오랑(荒川五郞) 등 일행이 조선의 민정(民情)을 시찰하기 위해 내한(來韓)하였다.
公은 이들이 국내 인사를 만나 전국의 물의(物議)를 듣기 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병원(鄭秉源), 신긍선(申肯善), 이호영(李虎榮), 윤길병(尹吉炳), 이승호(李勝浩) 등 제씨(諸氏)와 함께 경동여관(현 조선호텔)에서 이들을 만나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였다.
公은 이때에 한민족(韓民族)의 대일(對日) 감정과 조선의 자주독립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폐(說幣)와 구폐(救弊)의 통쾌한 논리로 역설하고, 수년 내에 일본이 패망할 것이 자명(自明)하므로 조선의 정황을 제국의회(帝國議會)에 정확히 보고하여 조선의 자주 독립이 이루어지도록 도와 줄 것을 청원하였다.
9. 공적 비문은 서울대학교 이응백(李應百) 교수가 짓다
공적비(功績碑)의 비문은 서울대학교 교수(敎授)인 문학박사(文學博士) 이응백 선생이 지었는데, 그 글은 이러하다.
나라의 주권(主權)이 외세의 침략으로 위태로울 때 나라 있음만을 알고, 집안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며, 민족이 있음만을 알고 내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신명(身命)과 가산을 바쳐 국권(國權)을 지키려다 통한(痛恨)의 생애를 마치신 애국지사(愛國志士)가 여기 누워 계시니, 바로 오암 경현수(悟庵慶賢秀)선생이시다.
公의 관향(貫鄕)은 청주로 시조는 고려조 평장사(平章事) 진(珍)이요, 청원부원군 복흥(淸原府院君復興)은 21대조가 되시고, 부제학(副提學) 섬(暹)은 12대조가 되시며,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선(銑)은 조부가 되시니. 1861년(辛酉) 정월 28일 파주군 적성면 구읍리 관동에서 순호공(順浩公)의 장자로 출생하시어 후에 백부 원호공(元浩公)에게 출사(出嗣)하시다.
일찍이 아우 문수(文秀)와 함께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黙)선생에게 수학(受學)하여 공맹(孔孟)의 도(道)와 정주(程朱)의 법을 익히고, 성균관 교수에 제수(除授)되어서는 이 나라 동량(棟樑) 양성에 심혈을 기울리시다.
을미년(乙未年) 민비 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이 일어나자, 분노를 참을 길 없어 아우 문수(文秀:成均館博士), 홍재구(洪在龜), 유기일(柳基一), 유응두(柳應斗) 선생등과 철원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고종(高宗)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 후 나라의 운명이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위태로워지매 원주 의병진(義兵陳)의 이인영(李麟榮) 선생등과 기병(起兵)하는 한편 고종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중국 혁명당(中國革命黨)에 군사원조 교섭특사(交涉特使)로 밀파되어 활약하고, 귀국하여서는 전국 유약소(全國儒約所)의 경문수(慶文秀), 유인석(柳麟錫), 전덕원(全德元)선생 등과 같이 궁문 밖에서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上疏)를 올리는 한편 일본의 간계를 폭로하는 격문(檄文)을 각국 공관(公館)에 비밀히 보내다가 발각되어 재차 구금의 몸이 되시다.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성균관 교수직을 사퇴하시고는 향리로 돌아와 왕산 허위(旺山許蔿), 김진묵(金溱黙)선생 등과 손잡고 적성, 삭령, 안협, 토산 등지에서 일군(日軍)과 싸우는 한편 관동지방에 산재해 있던 각 의병진(各義兵陳)을 통합하여 연합의병대를 조직하고, 세전(世傳)되던 가산을 군자금으로 쾌척(快擲)하였다.
기미년(己未年) 고종의 국상(國喪)을 당하여서는 장자 우현(愚顯)과 상경하여 유림역사대(儒林力士隊)를 조직하고, 청량리에서 만세 시위 중 <우현>이 종로경무서에 연행되었다. 이듬해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서는 “신조선” 주간(主幹)인 이 달(李達)선생을 비롯하여 김영만(金榮萬), 백의수(白義洙:初月) 등과 의거(義擧)를 모의하다가 일경(日警)에게 탐지되어 경성 검사국(京城檢査局)에 송치되었다.
1920년 8월에는 미국의회(美國議會) 극동시찰단이 내방하자,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를 규탄하는 신명서(申明書)를 수교(手交)하고, 국권회복(國權恢復)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1922년 8월에는 일본 대의사(代議士) 황천오랑(荒川五郞) 일행의 민정 시찰단을 맞아 윤길병(尹吉炳), 전 문(全文), 신긍선(申肯善) 동지들과 더불어 공동여관(恭洞旅館:현조선호텔)에서 만나 자주독립(自主獨立)의 필요성과 일본의 신의 배반을 통박(痛駁)하였다.
반평생을 오직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동분서주(東奔西走)하시던 公께서 드디어 1928년(戊辰) 10월 9일 한(恨) 서린 임종을 고하시니 향년 68이시다.
후학(後學)들이 포천 운담사(抱川雲潭祠)에 우암(尤庵)과 그리고 오암(悟庵) 선생을 함께 배향(配享)하는 발문(跋文)에 “그 글은 춘추(春秋)의 강목(綱目)이요, 그 법은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이라”고 적어 公의 학덕(學德)과 인품(人品)을 칭송하였다.
公이 가신지 반세기 만인 1977년 公의 구국 공적이 공인(公認)되어 대통령표창이 추서됨에 보훈처(保勳處)의 후원과 후손 및 후학(後學)들이 한 조각돌을 다듬고, 그 공적을 새기어 公께서 일군(日軍)과 싸우시던 저 푸른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세우니, 公의 곧은 충절(忠節)과 숭고한 구국정신(救國情神)은 강산(江山)과 더불어 영원히 기억되리라.
〔追記〕증손 창선(曾孫昌善)이 정부에 청원(請願)하여 1922년 8월 15일, 자명(字名) 경희백(慶希白)으로 활약한 의병장(義兵將) 공적을 공인받아 건국훈장애국장(建國勳章愛國章)이 추서(追敍)되었다.
1986년 4월 13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교수 문학박사(文學博士) 이응백(李應百) 짓고
건립위원장 한국일보사 논설고문(論說顧問) 윤종현(尹宗鉉) 세움
〔참고문헌〕청주경씨족보(하권p563). 청주경씨선세행장록(운담사배향문). 독립운동사(제 1권,제2권). 독립운동사자료집(제2집,제6집), 한국독립사(김승학편), 명치백년사, 월간 선봉(고려선봉사), 중암선생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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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石泉(相顯) 작성시간 05.03.26 感謝합니다! 후송(後松)님께서 선조(先祖)님들의 빛나는 행장(行狀)을 자세(仔細)히 올려주셔서 후손(後孫)들께서는 긍지(矜持)를 갖고 매진(邁進)하여 선세(先世)의 행장(行狀)을 반듯이 더욱 계승발전(繼承發展)시킬것입니다! 淸州慶氏 宗親 여러분! 힘차게 약진(躍進)합시다! 그리고 정상(頂上)에서 건배(乾杯)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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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慶濟運 작성시간 05.11.23 숙부님의 이런 열정을 어렸을때부터 보아왔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가문의 영광입니다. 저또한 이나라에 도움이 되는 학자의길을 가고자 다시 한번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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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雲影 작성시간 07.07.31 제가 이제야 족보를 살펴보니 公의 子愚顯님은 1882~1950의 향년 69세이시며 孫 奎福님은 1903~1951의 향년연 49세이시며 曾孫 大善님은 1932~1986의 향년 55세이시며 高孫인 濟元님은 1962년생으로 현존하고 있군요. 칠송공파 종손의 世系가 이?게 내려옴을 알수 있습니다만 제원(濟元)님의 주소를 알고 싶습니다. 각 소종중의 종손들의 근황을 살펴보려 합니다. 아시는분의 연락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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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경동현 작성시간 07.10.01 춘천에서 근무할 때 주 1회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였는 데 훈장인 분이 후배이지만 습재선생(이소응, 의암 유인석선생과 동시대 인물로 의병활동)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었습니다. 관련 책을 소개하는 데 위의 賢자 秀자 님의 서한이 포함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문실력이 짧아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서한이 있는 것을 보고 기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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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앨범쟁이 작성시간 16.08.08 안녕하세요. 저는 독립유공자의 사적지를 탐방하는 사람입니다. 적성면 구읍리 청주경씨 묘역에 있는 경현수선생 공적비 위치를 알수없을까요?
부탁드립니다. 박원연 010-37695-4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