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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자의 이야기

내가 내 머리를 자르다

작성자ChungjaKim|작성시간11.06.21|조회수133 목록 댓글 12

 

벌써 닷새째 물이 안 나온다. 비키 아줌마가 물을 길어다 쓰고 있다.

처음에는 이런 상태가 참으로 불편했었는데, “아, 또 물이 안 나오네”하며 산다.

이제 적응이 되어가고 있는 증거다. 물은 길어오면 되지만, 전기가 안 들어오면

그때는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7명의 학생들이 오기 전에 자가발전기를

하나 구입할 생각이다. 그 많은 식구들의 음식을 숯불을 피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삶의 불편함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3개월 동안 건축해서 지난 금요일에 개관한 윌리로 유스센터 행사를 끝내고나니

마음이 뿌듯했다. 그래서 토요일은 집에서 쉬며 집 안 일을 좀 하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알고 보니 머리가 길어져서 산뜻함이

사라진 것이었다. 한국에서 자른 머리가 거의 두 달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 미장원이 없으니 릴롱궤에나 가야지 머리를 자를 수 있을 텐데,

한국에서 학생들이 도착하려면 아직도 3주나 더 기다려야한다. 이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내 스스로 해결하리라 결심하고는 가장 잘 드는 가위를 골라보니

종이 자르는 가위 밖에 없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내 머리 내가 자르기”를 결국 아프리카 땅에서 시작 했다.

마른 머리를 자르면 머리카락이 많아서 지저분할 테니까, 우선 머리를 적셔서 빗은 다음에

가위를 대고 앞머리부터 조금씩 조심스럽게 잘랐더니 그리 흉하지 않게 되었다.

문제는 뒷머리였는데, 그것도 조금씩 앞으로 당겨서 무사히 머리 전체가 2센티는

줄어들었다. 머리를 샴푸하고 난 후, 드라이를 했더니 미장원에서 나온 사람처럼 다시

산뜻해져 버린 것이 아닌가! “와우 ! 나는 이제 내 머리도 내가 자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취해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든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필리4,11) 라는 사도바울의

말씀이 마음에 와서 닿는다. 이것이 진정 자유함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한국 여성들은 외모를 가꾸는 일에 많은 시간과 물질을 쓰고 있다. 요즘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까지, 심지어 아이들까지, 온 나라가 외모를 치장하느라 정신이 없다.

하느님이 주신 얼굴, 몸매 다 뜯어고쳐가며, 몸부림치며 아름다움을 추구 한다.

과연 그들이 아름다운가? 누가 누군지 분별이 안 되는 억지로 만들어낸 얼굴들,

개성과 자연스러움이 없는 인위적인 아름다움에는 생명력을 느끼지 못한다.

내적인 아름다움이 없는 외모는 마치 조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던 때도 나는 학생들이 연주회 전에 미장원을 가서 화장하고

머리를 하는데 거금을 쓰는 것을 보아왔다. 모든 음대학생들이 그렇게들 하고 있다.

연주회의 성과 보다는 얼만큼 예쁘게 보이는가에 한국 음대학생들은 더 많은 관심들을

쓰고 있는듯하다. 독일음대학생들과 비교할 때 너무도 다른 차원에서 음악을 하고 있다.

 

나는 다행스럽게 나의 젊은 시절을 독일에서 보내면서 그들의 진솔된 삶을 배울 수가

있었다. 자기 자신의 분수 이상으로 사치하는 것은 나에게는 가장 혐오스런 일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그 어느 나라 보다 더 호화스런 백화점 가는 것이 참으로 불편하다.

나는 그 비싼 물건들을 살 경제적인 여유도 없거니와 그런 비싼 물건들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도 크다. 고급브랜드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외국에 나와서 쓰는 외화는 천문학적인

숫자라고 한다. 내가 한국에서 가르칠 때, 나의 학생들은 내가 어떤 브랜드를 입는지 나의

옷들을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나는 브랜드가 필요 없다,

내가 브랜드다”라고 반 농담으로 말해줬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40년을 무대에서 노래했지만, 다른 가수들이 그렇게 쉽게, 즐겨 입는 유명디자이너의 옷들을

내가 맟쳐 입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명한 미용실에 가서 나의 얼굴과 머리를 맡겨본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안목으로,큰 돈 들이지 않고 품위 있게

연주가의 삶을 살아왔고 또 끝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성악가들이 나처럼 살아가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지향하는

사치스러움은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이를 조금은 절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내가 어떻게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도 나의 품위를 잃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렇게 훈련된 나의 과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자른 머리를 보고도 부끄러움 대신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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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ChungjaKim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6.23 율리엣다 자매님, 자매님의 답글에서 참으로 신선함을 느낍니다. 자신에 대한 진솔한 성찰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지요. 보잘것 없는 나의 글을 통해서 그 누구의 삶이 작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지요.!
    그 마음에 감사해요.
  • 작성자펠라 | 작성시간 11.06.23 이젠 정말로 못하시는게 없는 만능인이 시네요.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에 무엇이든 용기있게 잘 해내시는 거겠죠?
    저도 함께 응원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ChungjaKim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6.23 사랑하는 펠라, 오랫만이에요.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이제는 스스로하지 못하는게 없을정도로
    아프리카 삶에 적응을 하고있어요. 물론 하느님의 은총이지요. 따듯한 답글에 늘 고마워요.
  • 작성자아기사슴 | 작성시간 11.06.24 수도자들이 혼자 머리를 자른다고 하시더니 이제 교수님도 수도자가 다 되셨습니다. 혼자하심을 축하드립니다. 그래도 아름다울것입니다.,
  • 작성자ChungjaKim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6.24 아기사슴님, 고마워요. 수도자까지는 아직 못되지만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힘을 키우고 있는 중이지요.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지만 한편 살아남으려는 엄청난 본능을 갖고 있어요. 누구나 이런 상황에 닥치면 할 수 있겠죠.
    다만 그것 때문에 마음의 평화가 깨어지지 않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도가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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