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

작성자오돌|작성시간03.12.18|조회수80 목록 댓글 11
33.
저녁을 먹고 고샅을 거닐고 있으니 파수 할머니가 비닐봉지를 하나 들고 나오신다.
‘머 하는가?’
‘안녕하세요. 바람 좀 쐬려고요.’
‘그럼 요리 와봐’
‘어디 가시는데요.’
‘좋은데. 우리 할매들 모인데.’
어딜 가시나 했더니, 예전에 마을 회관으로 쓰던 곳으로 가신다. 겨울에는 기름보일러를 때는 새로 지은 마을 회관에 모이지 않는다. 구들이 깔려 군불을 때면 후끈거리는 예전의 회관에 할머니들이 모이는 모양이다. 문풍지가 발린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잔치가 따로 없다. 오늘 김장을 한 마산 할머니 댁의 김치가 한보시기가 있다. 거기에 포도며, 파수 할머니가 가져오신 떡이 있다. 소주 한 병을 꺼내 젊은이가 왔다고 종이컵 가득 따라주신다. 저녁을 드시면 할머니들이 모여 흉도 보고, 새댁들 칭찬도 하며 겨울밤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신단다. 이웃과 함께 늙어 가는 어르신들을 보니 아름다움이 젖어온다.
마산 할머니 김장 김치 간이 덜됐다고 흉도 보고, 새로 시집 온 중국 새댁이 참하니 시어머니 따라 김장 김치 버무리는 칭찬도 하고, 김치 세통 담았더니 자식이 와서 홀라당 다 줘 버린 이야기며 끝없이 이어지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얼굴만이 아니라 가슴까지 벌그스레 취한다.

도시에 살면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진다. 그게 쉽고 편하게 사는 법을 가르친다. 자판기에 동전만 넣으면 커피가 나오고, 렌지만 돌리면 쌀밥을 먹을 수 있으니 편하다 못해 사람을 게을러지게 한다. 하지만 그 편함 속을 파고드는 무서운 적은 우리의 철학이다. 빠르고 급한 것을 찾는 습관.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보는 눈. 땀보다는 편하게 얻으려는 마음. 이 모든 것이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진 생활 철학이 된다. 결국 돈이면 해결 된다는 돈 중심의 사회를 살아가게 된다.
곶감의 달콤함을 맛보려면, 감나무에서 감이 열리기까지의 자연의 흐름을 깨달아야 하고, 장대로 하나씩 가지를 꺾는 노력, 그리고 껍질을 벗기고, 줄에 매달아야 한다. 이것이 끝난 뒤부터가 중요하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쭈글쭈글하게 곶감이 되기까지의 기다림. 한 알의 곶감을 먹으려고 한달씩 처마에 매달린 감의 변화를 사랑의 마음으로 기다리는 시간. 이미 곶감의 맛보다 더 큰 것을 뱃속에 채울 수 있다. 어디 곶감만이겠는가. 식혜를 만드는 것도, 도토리묵을 쑤어 먹는 것도, 장아찌를 담는 것도, 술을 담가 먹는 것도 먹는 기쁨보다 기다림에서 얻어지는 기쁨과 여유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늘 돈이면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들을 이제 노동뿐만 아니라 기다림의 마음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오늘 먹는 곶감이 군것질거리로 보이겠는가. 이미 곶감에는 어찌 세상을 살아야하는가를 가르쳐주는 선생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행위를 하면 결과를 곧바로 바란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컵에 다 받아지기도 전에 컵이 나오는 문에 손을 넣고 들여다보는 조급증에 시달리는 삶. 그런 삶은 사람관계에서도 내가 하나 베풀면 너도 내게 하나 줘야 한다는 계산식이 깔려 있다. 거기에 우정과 사랑도 계산이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맘을 메마르게 하고, 절벽으로 삶을 내모는 거다.
먹을 것을 심고, 만들고, 삭이고, 우려내는 것은 삶을 깊게 하고, 여유를 주며, 사랑을 싹트게 한다. 날마다 자식을 키우듯 밭에 나가 시금치 싹이 크는 걸 지켜보며 나는 자란 뒤에 맛있게 먹을 시금치를 보는 것이 아니다. 세상살이를 배운다. 급하고 메마른 마음으로 허우적대던 지난날을 밭의 물을 주며 반성한다. 자연과 함께 자연에서 배우며 자연스레 사는 것은 가장 미래지향적인 삶이다. 철학이 있는 삶이며, 노동의 삶이다.
편하게 벌어먹고 사는 것은 꿈일 뿐 그런 삶을 살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거다. 설령 그런 삶을 사는 혜택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꼭 아름답거나 행복하다고 느낄 수는 없을 거다. 누리지도 못할 꿈같은 편한 삶을 찾다보니 늘 돈에 끌려 다니며 허덕이며 산다.
사람이 지배하지 못할 돈 중심, 쉬운 삶을 쫓아다니느니, 스스로 흙에 땀을 심고 기쁨의 철학을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삶을 사는 게 옳지 않을까. 자연의 삶은 파괴의 개발이나 파괴의 과학 아닌 미래를 아름답게 하는 자연스런 사람의 삶이다. 자연의 삶에서는 늘 바쁘게 쫓기며 몸을 헤치며 사는 삶이 아니라, 기다림의 아름다움이 묻어나서 몸에 힘과 기쁨을 주는 삶이다.
오늘 회관에서 소주를 한 잔 걸치고 집에 들어와 처마에 매달린 곶감을 보며 철학 선생을 만났다. (200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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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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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길용 | 작성시간 03.12.19 냉괄내라는 단어는 처음 들었습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전에 외할머니댁에 가서 화로를 보았습니다. 화로에 둘러앉아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하지만 청국장은 압니다. 며칠전에도 청국장찌개 끓여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담북장, 담복장등은 사투리군요. ^^
  • 작성자김길용 | 작성시간 03.12.19 그런데요.. 제주도에는 청국장이 없습니다. 저의 처가 청국장찌개를 처음 끓여 보고 냄새를 처음 맡아 보았답니다. "별로 고약하지 않네!"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 작성자김길용 | 작성시간 03.12.19 어릴때 저희 집에서도 청국장은 띄워 먹었습니다. 그땐 꽤 싫어했던것 같고요.
  • 작성자김길용 | 작성시간 03.12.19 지금 국어사전을 찾아 보니 담북장은 있더군요.
  • 작성자큰하늘 | 작성시간 03.12.21 우리 음식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거부하는 모습을 봅니다. 담북장의 구수한 냄새를 마치 지독한 냄새로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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