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희재언니...

작성자강혜경|작성시간04.02.01|조회수227 목록 댓글 2
산문집 교정지를 출판사에 넘기고 돌아오는 길. 빈집의 열쇠구멍에 열쇠를 맞추는데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문을 열려는 손길을 멈추고 잠시 문밖에 서 있었다. 열쇠 수리라고 써진 노란 딱지가 커다랗게 확대되어 시야를 메웠다. 택시에서 내릴 때만 해도 어서 방안으로 들어가 눕고만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그 마음에 무엇이 턱 걸려 넘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와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어깨에 걸려 있던 가방을 세면기 위에 내려놓았다. 수돗물을 틀자 물방울이 가방에 튀어 올랐다. 가방을 욕조 위에 옮겨놓았다. 무엇이었나, 피곤한 내 마음에 걸려진 문장은?
손바닥을 펼쳐 거울 속에 비춰보았다. 이 손으로 내가 무얼 했었던가. 나와 내 손과 거울 속의 내 눈이 부딪쳤다. 얼른 손을 내려 흘러내리고 있는 수돗물에 담갔다.
흐르는 물.
물 속에 담가진 손가락들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무엇을 만지고 있거나 붙잡고 있거나 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보이는 나의 손. 열 개의 손가락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외로움. 어쩌자고 이렇게 생긴 꼴로 여기에 옹기종기 모여서 끊임없이 움싯거리고 있는지.
물이 세면기를 넘쳐 흘렀다. 물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버튼을 눌렀다. 고였던 물이 수도관을 타고 빠져나가는 소리가 말할 수 없이 고적하게 들렸다. 수돗물을 잠그고 잠시 거울을 들여다봤다. 마음조차 끝간 데 없이 고적해졌다. 한 발짝도 움직이기가 싫다. 그대로 가방에 얹어진 욕조에 등을 대고 발을 뻗고 앉았다. 좁은 세면장이 광야 같다. 발끝으로 열려져 있는 문을 밀었더니 문이 닫히며 어두워졌다.

무엇이었나, 아까 현관문을 열 적에 내 마음에 날을 들이댄 숨겨진 문장들은?

......낯선 침묵.

그 침묵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수도관을 타고 어둠 속을 다시 거슬러 돌아오는 고적한 물소리 속에 섞인 발짝 소리. 찰박찰박......맨발인가......찰박찰박......달빛을 거슬러, 심해를 거슬러, 그물을 거슬러, 개펄을 거슬러......찰박찰박......어디서 본듯한 얌전한 종아리......찰박찰박......잔꽃무늬 플레어 치마......찰박찰박.

무슨 말을 하려고 나를 불렀니?
끝낼 일이 있어.
무슨?
이게 마지막이야. 난 이제 열아홉도 아니고 서른셋이야. 이 글을 시작할 때는 글이 끝날 무렵이면 옛날 얘기를 했다고, 그러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어. 그런데 아니야.
......

언니 손에 달려 있어.
......
그날 아침 얘기를 해줘.
......
왜 내게 문을 잠그라고 했지?
......
왜 하필이면 나였어?
......
그곳을 떠나와서도 언니와 비슷한 사람을 보거나 그 방과 비슷한 방을 보게 되면 내 가슴은 뛰고 숨이 막히곤 했지. 갑자기 멍해지거나 안절부절못했지. 주위가 산만해지고 잠이 깨면 다시 잠들지 못했어. 때때로 갑자기 어린애가 돼버린 것같이 판단력이 흐려지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그 사람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기도 했어......책을 읽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졌고 ......다리를 지날 때는 그 난간 밑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지......커튼자락이나 빨랫줄 따위들이 내게 달려드는 것 같기도 했어. 알아? 언니는 나의 장애였어. 그와 행복했다가도 그를 밀어내게 하는 관계맺기의 장애였어......지나친 각성상태가 주는 피로는 언니가 더 잘 알겠지......그곳엘 다시는 가지 않았지. 그 근처에도. 그러나 내 머릿속엔 공장들과 노동자들 전철역이며 가리봉동 시장이며 공단 입구 독산동이며 구로동이란 단어의 이미지들이 방죽처럼 고여 있었어......자, 언니 손에 달려 있어......왜 하필이면 나였지?
......
왜 나였어?
......
나는 겨우 열아홉이었어.



나는 그녀와의 그날 아침의 일을 송두리째 빼는 표시를 했다. 인쇄되기 직전에 지워지는 문장들.

지워진 문장들 속에 그녀가 서 있다.

그 사람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같다고, 왜 그는 아무 말도 안 하느냐고, 열아홉의 나, 희재언니에게 묻는다. 희재언닌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그 사람이 왜 말을 안 한단 날이니? 노래도 얼마나 잘 부르는데 그래?"
희재언니가 오히려 내게 반문한다.
"말하는 걸 본 적이 없는걸."
더구나 노래라니?
"아니야, 그 사람 말 잘한단다. 노래두."

두 사람 사이의 말이란 진희의상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의상실의 내부에서 치수대로 옷본을 뜨는 그와, 그가 만든 옷본으로 바느질을 하는 그녀. 그들 사이의 대화는 본뜬 옷감과 바느질이 된 옷 사이에 흐르고 있었는지도. 휴식시간에 그 사람이 입술에 무는 담배에 그녀가 불을 붙여주는 사이에, 혹은 바느질에 몰두해 있는 그녀의 머리에 묻어 있는 실밥을 떼어내주는 그의 손길 사이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무명의 말들이 그들 사이엔 있었다.

......한번도 제대로 그의 얼굴을 바라본 적이 없는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말하기란 어렵다. 내게 있어 그 사람은 빨랫줄에 널린 남자 작업복, 희재언니의 부엌 선반에 놓인 낯선 구두로만 남아 있으니. 이따금 나와 마주쳐도 고갤 돌리는 그 사람을 희재언닌 어렸을 적부터 돌봐주지 않아서 그런다,고 변호한다.




......책을 읽어내리는 내 가슴으로 비가 주욱주욱 내렸다...말을 하고 싶다고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고 소리치며 글자키를 마구 눌러댔다...가슴이 먹먹해지듯 답답해옴을 느낀다...글자키를 눌러대는 내 손의 움직임이 맘에 들지 않는 듯 난 더욱 성질이 난 마음으로 글자키에 내가 줄 수 있는 온갖 손의 힘을 모아 마치 무언가를 정복하려듯 눌러댔다...글자키는 계속 어긋나 있었고 난 그 모든 글자키가 맘에 들지를 않아 중간에 오르게 치어진 글자까지 마구 지워댔다...그러다가 내 손길이 충격을 받은 듯 갑작스레이 멈뜻 조심스러워졌다...그건 항상 희미하게만 웃어대던 희재언니가 다시 내 마음안에서 희미하게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에서였다...전에는 몰랐다...단지 앞글에서 희재언니가 죽을 것 같은 암시가 보여져 난 내게 그 책을 권해준 조교에게 "미나야, 혹시 희재언니 죽니?"라고 문다...난 그 순간 그 암시를 읽어낸 내 재치를 확인하고픈 장난스러움이었다...그때는 몰랐다...희재언니의 죽음이 이렇게 처절하게 내 가슴에 비를 쏴이 내릴지...그러한 두려움이 갑작스레이 나를 엄습해오며 글자키 하나 하나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내 희망이 마구 쏫구쳤다...갑자기 또다시 앞이 희미해진다...글자키를 틀리지 않고 치려면 눈을 똑바로 뜨고 손에 걸친 두려움을 없애야 하는데 희재언니는 내 가슴에 다시금 비를 쏫구친다...며칠 전 난 진실이라는 단어를 나의 틀에 가두어두고만 있던 난...그 진실이라는 것이 내가 그다지도 바라보고팠던 진실 그 자체로 투명하게 비추이는 같은 이름과 같은 생명으로...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색감과 너무나도 다른 형상으로 변장을 하여 내 앞에 이렇게 나타날 줄을 몰랐다...그 변장을 한 진실의 모습을 처음의 나는 어린아이가 길가에 떨어진 사탕을 줍고 기뻐하듯 그 진가치를 모르고 단지 그 사탕을 발견한 기쁨에 젖어만 있었다...그것이 얼마나 달콤한 사탕임을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진실인지를 확인하기 전에 난 그 깊이를 모르고 단지 기뻐하고 감동에 겨워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그렇게 진실은 내가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순간에 너무나도 조용히 그렇게 진실은 내게 다가왔다...내가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 사이 진실은 내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변장된 모습에서 가면을 하나 하나 벗겨내기 시작했다...하지만 그 가면을 벗겨내고 화르한 빛을 비추이며 본체를 드러냈을 때 내 가슴에는 다시 비가 주욱주욱 내리기 시작했다...진실은 내게 밝은 웃음으로 두팔을 한껏 벌리듯 찾아왔건만 난 마치 어린아이가 사탕을 빼앗겨 꺼억 꺼억거리듯 책에 얼굴을 파묻고 만다...가슴에 내리는 비를 내 마른 가슴에 토양삼아 한참을 적시고 있을 즈음에 그 진실은 희미하게 사라져갔다...항상 희미하게 웃으며 희미하게 사라져 간 희재언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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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저씨 | 작성시간 04.02.02 마치 인간의 마음을 손전등으로 환하게 비춰보면서 정확하게 읽어나가는 탁월한 심리묘의 글입니다. 다만, 주변사물의 변화에 여지없이 파고 들어가는 그 심리의 칼끗 같은 주시가 과연 왜 필요한가 하는 원인에 대한 나와 그 사물의 관계에서 좀더 명확하게 들어나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작성자아저씨 | 작성시간 04.02.02 그 원인은 좀더 큰 틀에서 도덕성 또는 공동체적인 가치 더 나아가 미학적 가치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사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간 날카로운 심리묘사가 돋보였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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