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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역사]

[발표자료]전제왕권의 성립- 발해의 건국에 담겨있는 민족의 정통성은 무엇인가? (태백산맥 모둠)

작성자09김다운|작성시간09.09.27|조회수417 목록 댓글 43

 

 태백산맥   모둠 선정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발전] 大 중요 사실


우선순위

중요 사실

선정 이유

1

 698년

발해건국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당, 말갈 등의 문화가 융합된 사회였다. 발해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고분을 들 수 있는데, 정효 공주의 무덤은 고구려의 무덤과 비슷하다. 또, 발해의 유적지에서 나온 기와, 석등 등은 발해문화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발해는 고구려가 망한 후 만주지역을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로 유지시켰으며,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여 고구려의 혼을 만주에 심었다.

2

685년 

9주5소경

신라는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지방 제도를 정비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9주 5소경 이 완성되었는데, 9주는 옛 신라 땅에 셋, 고구려 당에 셋을 주고 장관을 도독이라 하였다. 통일 전에 군주라 부르던 장관의 이름이 도독으로 바뀐 것은 점차 지방 조직이 군사적인 성격에서 행정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말해 준다. 5소경은 경주가 통일된 영토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점을 보완하기 위한 정치. 군사적인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소경에는 사신을 보내 다스리게 하고, 중앙의 귀족들로 하여금 옮겨 가 살도록 하였다. 이것은 지방의 정치. 문화의 중심을 이룸과 동시에 지방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내는 두 가지 효과를 함께 가져왔다.

3

676년 

신라의 삼국통일

비록 당나라와 연합하여 이룬 것이고,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은 뿔뿔히 흩어진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킨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확충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분명한 의의가 있다.

4

682년 

신라의 국학설립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국가제도를 정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국학의 설립은 유학 교육을 위한 목적이 우선이었고, 관리를 양성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신분에 의해서 관직에 진출하였던 시기에서 이제는 학문에 중점을 두고 관리를 선발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으로 중요한 역사적 함의가 있다.

5

 722년

정전 지급

신라 성덕왕 때(722)부터 매정에게 지급된 토지로 신라의 민정문서에 의하면, 남자는 연령별로 정, 조자, 추자 등으로 구분했는데, 정전의 정은 바로 이 문서의 정에 해당된다. 이것은 일부 무전 농민에게 국유지나 진전 등을 지급하였음을 뜻한다. 이울러, 농민 소유의 토지를 국가에서 직접 관장한다는 것이며, 역역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뜻한다. 정전의 시행 방법, 내용 등 구체적인 것은 잘 밝혀져 있지 않으나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국가가 일반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한 것은 통일신라 때 정전의 지급이 유일한 기록임에 그 의의가 있다.

6

751년 

석굴암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뛰어난 가치가 있다. 아주 단단해 조각하기 힘든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석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화강암으로 제작하고 위를 흙으로 덮었다. 티벳 지방 등에서 볼 수 있는 석굴을 흉내 낸 것인데 건축, 수리, 기하학, 예술이 종합적으로 어울려 완성된 통일신라 예술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주요 문화유산 중 하나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7

 788년

독서삼품과

통일신라시대의 관료선발방법의 하나인 독서삼품과의 실시는 성적을 기준으로 관리를 등용한 만큼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이 설치된 이래 유교적 교육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골품제와 같은 폐쇄적인 계급구조에 갇혀 있던 신라사회에서 유학적 소양을 갖춘 관리가 정식으로 선발되었다는 데서도 이 제도의 의의는 크다.

 8

828년 

 청해진

청해진은 지정학적으로 당, 일본과의 해상무역을 장악하기위한 해로상의 요지로 신라 해상무역의 중심지로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상당한 독자성을 지닌 조직이었다. 청해진 설치는 한국 해양사 발전의 선구자(개방과 개척정신에 의한 세계화 의식 선양), 국제 해양교역기지 건설(세계 해양무역의 중심지), 국제무역활동의 신기원(사무역을 통한 한,중,일 등 국제적 네트워크 형성과 경제, 외교, 문화면의 성과를 거둠), 군사, 행정, 경제적 독립성이 보장된 해상세력으로 성장 등 다양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다음 발표

      가. 발표자 :          노란      

    나. 발표 제목 : 고려 시대 사상들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나?     

    다. 발표 내용(200字내외) : 고려 시대에는 여러 사상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발표를 통해 어떻게 색다른 사상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었는지 알아보고, 사상의 어우러짐 속에 배어 있는 공존의, 나아가 공동 삶의 요건과 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발표 주제 : 발해의 건국에 담겨있는 민족의 정통성은 무엇인가?

2. 발표자 : 윤리교육과 김다운 (태백산맥 모둠)

3. 연표 :

 

 

연월일

한국사

세계사

비고

676

신라 삼국통일

 

 

682 

국학 설치

 

 

685

9주 5소경 설치

 

 

698

발해 건국

 

 

722

신라, 정전 지급

 

 

771

 

카를루스 대제, 프랑크 왕국 통일

 

828

장보고, 청해진 설치

 

 

834

백관의 복색 제도 공포

 

 

900

견훤, 후백제 건국

 

 

901

궁예, 후고구려 건국

 

 

907

 

당 멸망, 오대의 시작

 

916

 

거란 건국

 

918

왕건, 고려 건국

 

 

926

발해 멸망

 

 

935

신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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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09 김진휘 | 작성시간 09.09.28 발해는 말갈족과 고구려인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이질적인 두 민족의 결합이죠. 하지만, 결국 이질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을 일으켜 발해 멸망의 원인이 됩니다. 얘기하자면 '이질'을 '동질'로 바꾸지 못한 것이 분열을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발해의 멸망을 통해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질'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통일 신라는 민중들을 통합하는 방법을 알았기에, '이질'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았기에 오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역설적으로 민중 간의 이질성을 극복하기 위해 '현명한 리더'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 작성자09 유대진 | 작성시간 09.09.29 새로운 눈으로 발해의 문화를 보자고 했습니다. 발해 멸망의 원인은 부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해는 멸망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눈이란 우리 과거의 역사를 새로운 인식인 '조화'로써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화를 통해 현대적 의의를 부여해보겠습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이혼문제 역시 부조화의 원인입니다. 부부끼리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혼문제 말고도,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건물, 자연, 사람 등등. 조화가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조화라는 단어를 통해 나의 주변에 있는
  • 작성자09 유대진 | 작성시간 09.09.29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관계를 규정함으로써, 과거나 현재나 중요한 것은 시간차를 뛰어넘고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작성자08 이유리 | 작성시간 09.10.05 발해의 건국은 거란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발해를 건국한 고구려의 유민들은 고구려를 부흥한다는 뚜렷한 자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신라와 당은 모국인 고구려를 멸망시킨 적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서로 교류도 이루어지게 되지요. 국제관계에서는 고립된 것보다 교류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라와 발해 사이는 더 발전하지 못하여 아쉽습니다. 민족적 동류의식을 지니고 발해와 신라가 교류했다면 어땠을까요? 감정상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서로에게 더 발전적이었을 겁니다. 발해도, 신라도 결코 폐쇄적인 국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고인 물이 썩는다는 말이 계속 떠오릅니다.
  • 작성자08 이유리 | 작성시간 09.10.05 서로 이웃 나라였는데 둘 사이에는 너무 소극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중요할 텐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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