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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1송지은 작성시간11.12.01 4·19혁명은 전쟁 이후 부실한 한국 사회를 타도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원조에 지나치게 의존하였고, 경제 발전에 대한 의지 역시 미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더욱이 정치적으로 독재가 이루어졌기에 시민의 반반은 더욱더 거세졌고 마침내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지도층이 시민과 원활한 소통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혁명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4·19혁명은 지도층이 자신을 위한 정치가 아닌, 시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4·19혁명은 시민들이 자신의 의사를 드러냈고, 이를 통해 혁명을 성공시킨 훌륭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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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1고대훈 작성시간11.12.01 4.19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부패에 항거하고, 그를 하야시킨 사건입니다. 특별한 준비나 앞으로의 대책이 없었다는 것이 한계이지만, 민주국가 국민으로서 자신들의 주권을 행사했다는데 크게 의의가 있습니다. 해방 이후 유입된 민주주의는 한반도에 쉽게 정착되지 못했습니다. 4.19혁명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주적인 민주의식을 보여준 역사적 사례입니다. 우리도 민주적 참여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 중 하나는 투표입니다.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으로, 마땅히 참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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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1 신동화 작성시간11.12.01 4.19혁명으로 싹튼 민주주의 운동은 5.16 군사 쿠데타로 무참하게 잘려나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4.19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4.19혁명이 비록 미완의 혁명이지만 학생들의 주도로 국민이 하나 되었다는 점과 혁명 후 민주주의 운동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70년대의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에 반대한 민주화 운동, 80년대의 광주 민주화 운동과 6월항쟁이 바로 4.19혁명이 계승되어 나타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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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1신정섭 작성시간11.12.01 4.19 혁명이 일어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입니다. 이로 인해서 이승만 정권은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었고, 이는 결국 4.19 혁명이라는 정권의 교체라는 현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성장했음을 엿볼 수 있는데요, 이런 성장한 의식 수준을 바탕으로 국민들 개개인이 주권재민의 의미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 바로 4.19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렇듯 실천적인 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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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1 노시헌 작성시간11.12.01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맞섰던 4·19혁명. 왜 사람들은 이 사건에 주목하는 것일까요? ‘학생들이 주도하여서’라는 관점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당시 왕정에 가까운 절대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정부에 맞선 항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어, 6.25동란마저 겪고 난 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나라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권력을 잡기 위해 부정선거마저 감행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불의에 맞서 질서를 바로잡으려 했다는 열정과 실천의식 때문에 4·19혁명은 더욱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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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1최진희 작성시간11.12.02 4·19혁명은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하였지만, 학생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입니다. 독재정권에서 반기를 드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정치를 올바르게 바꾸고자 했던 마음이 4·19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항쟁한 결과 이승만 정권은 물러나게 됩니다. 주체적으로 모여 잘못된 정치를 바꾸고자 했던 그 용기와 신념을 우리 모두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앞으로 이런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부는 정부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각자 맡은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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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1 홍여진 작성시간11.12.03 왕정에 익숙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 장기독재에 이렇다 할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48년 우리 정부가 수립되고부터 약 12년 가까이 한 통치자가 통치하였고, 여든이 넘은 고령의 나이였기 때문에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감행한 것이 3.15 부정선거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민중들은 불만이 있어도 제대로 표출해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반기를 든 것이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본분은 시위와 데모가 아닌 학업이었지만, 그들은 부조리한 현실에 직접 맞부딪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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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11 홍여진 작성시간11.12.03 나라의 미래가 될 인재들이 사회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모습은 그 당시 우리나라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되지만, 그들이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순응하였다면, 우리나라는 지금의 민주사회를 이룩할 수 없는, 정체된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학생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시위와 데모에 참가했던 학생들의 모습을 우리는 더는 볼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곧 기성세대가 될 우리가 사회의 부조리함을 일소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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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1 박연숙 작성시간11.12.03 저는 발표를 들으면서 4·19혁명의 한계점에 주목했습니다. 학생의 주도에 의해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였지만, 이는 표면적 문제 해결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조직과 이론이 결여되었다고 하였는데, 학생들이 주도하였지만, 그 뒤를 따라 충분한 이론을 교육받은 시민의 조직적인 참여가 뒷받침되었다면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더 빨리 싹트게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론들에 대한 교육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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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1임소연 작성시간11.12.04 4.19혁명을 미완성의 혁명이라고도 불리지만, 저는 미완성이 아닌 시작을 여는 혁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생의 신분으로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 내고 후에 6월 혁명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시작하는 아침의 혁명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공동체 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은 약할 수 있으나, 여러 사람이 뭉치면 강해집니다. 이런 의식속에서 4.10혁명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삶에 가장 근본적인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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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1 강은진 작성시간11.12.04 광복 이후 우리는 5·10총선거와 7·14헌법제정을 거쳐 이승만을 초대대통령으로 하는 공화정 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공화정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초대 정부는 수많은 부정부패, 비리 등을 일삼았고 헌법을 바꿔가면서까지 독재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곪아있던 정부에 대한 불신은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터지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였습니다. 4·19혁명은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의 외침이었습니다. 4·19혁명을 통해 결국 이승만 정권은 물러났고 장면내각이 들어서게 됩니다. 4·19혁명은 시민의 근대적 의식을 볼 수 있는 사건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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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11 강은진 작성시간11.12.04 국민의 주체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민의 희생적인 민주화운동에도 다음 정권은 어떠한 구체적인 방향이 없이 그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됩니다. 그래서 4·19는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4·19혁명은 정신은 있었지만, 그 정신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과 정신은 5·18 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 으로 전승되어 우리는 드디어 우리들의 손으로 민주화를 이룩해냈습니다. 실패가 없이는 성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4·19를 겪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값진 나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