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표 범위 : 10장 사림세력의 등장
2. 발표 주제 : 붕당정치, 그리고 양란
3. 관련 연표 :
연도 | 한국사 | 세계사 | 비고 |
1492 | 콜럼버스 1차 항해 | ||
1497 | 아메리고 베스푸치 1차 항해 | ||
1498 | 무오 사화 | ||
1504 | 갑자 사화 | ||
1506 | 중종 반정 | ||
1516 |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출간 | ||
1519 | 기묘 사화 | ||
1545 | 을사 사화 | ||
1564 | 셰익스피어 탄생 | ||
1575 | 붕당의 발생 | ||
1590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통일 | ||
1592 | 임진 왜란 | ||
1627 | 병자 호란 | ||
* 연표는 주제와 관련된 주요 사실을 중심으로 사건이 발생한 월일까지 최대한 자세히 작성합니다.
개인 선정 중요 사실
우선순위 | 중요 사실 | 선정 이유 | |
1 | 1592 | 임진왜란 | 한반도 역사의 손에 꼽을 큰 전쟁이었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이 전쟁을 통해 우리 의병들의 민족 정신과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 그리고 조선의 뛰어난 조선 기술을 엿볼 수 있다. |
2 | 1627 | 병자호란 | 후금, 청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했다. 이 전쟁으로 조선의 왕자와 비빈은 포로가 되고 우리 민족은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스러운 역사를 경험했다. |
3 | 1575 | 붕당의 발생 | 의도는 좋았으나 붕당의 본질 훼손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처하지 못했다. 붕당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고, 주변 국의 정세를 잘 파악했다면 양란의 결과는, 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붕당정치, 그리고 양란
201419514 윤리교육과 이다솜
1. 사림의 등장
조선 초기,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지배해 온 양반사대부 중에서도 훈구세력이라도 불리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조선 사회를 움직여 왔다. 훈구세력이란 이성계를 도와 건국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인데 정도전, 조준 등 국왕을 보좌하여 조선의 제도를 정비하는데 참여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워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집권세력이었다. 또한 이들은 관찬사업에 참여한 관학자들이다.
성종은 커져가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여느 왕조가 그랬듯이, 아래에서 세력이 커지면,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세력들을 등용했는데 이 때 에는 그것이 사림이였다. 사림은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재야의 독서인군을 일컫는데, 이들은 중앙에 진출하기 보단, 향촌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도덕적 수양을 중요시했던 사림은, 무지막지하게 토지를 넑히고 방납제도로 농민을 괴롭혔던 훈구세력에 자연히 비판적인 경향을 나타내었다.
2. 붕당의 발생
붕당정치란 관료들이 서로 파벌을 일으켜 정권을 다투는 정치를 말한다. 중앙을 장악한 사림들이 서로 다른 학문적,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 대립하려 정권을 다투었다. 선조 8년인 1575년에 명종비의 동생 심의겸을 김효원 등 신진 사림들이 척신으로 몰아 배척하였다. 심의겸을 따르는 사람들 또한 사림들이었다. 이렇게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사림들을 동인,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기성관료들을 서인이라 한다. 이것이 붕당의 첫 시발점이다. 동인은 이황과 조식 등의 문인이 많고 서인은 이이가 대표적인데, 이후 서인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건의한 건저의사건을 토대로, 동인은 또 서인에 대한 온건파 남인, 강건파 북인으로 나뉘었다.
3.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1)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
일본의 전국시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습하였다. 안으로의 정비와 준비를 끝냈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연히 바깥 세상에 눈을 돌렸을 것이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그는 많은 무장들의 힘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적인 통일과 안전을 더욱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1592년부터 98년까지 일제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였다. 임금은 도망을 가고 조선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순신 장군과 여러 의병들의 투쟁 덕에 왜를 내쫓는데 성공했다.
2) 병자호란의 전개 과정
왜란을 겪은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서인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인조는 즉위 하자마자 친명배금 정책을 펼친다. 그 후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을 침략하였다. 본인을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금의 태종은 군신의 관계를 거절한 조선을 재침략하고 참패한 조선은 왕자와 많은 백성을 볼모로 보내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어야 했다.
3) 양란의 공통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후금은 점차 중국 내에서의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을 때, 사림들은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얻기 위해 파를 나누어 권력을 다투며 타락했다. 두 나라의 조선 침략은 어쩌면 예측가능하고,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은 양란을 대처하지 못했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4. 공동 삶의 원리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자
임진왜란을 겪고도 이들은 본인들의 이익에 눈멀어 비슷한 실수로 병자호란에서 치욕적인 역사를 남긴다. 이것은 현재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기에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지만, 선입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실수를 깨닫고 반성하며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명품으로 거듭날 것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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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늘당신과함께할 작성시간 14.11.12 * 이종덕 : 댓글이 소략합니다. 좀 더 보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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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08문성민 작성시간 14.11.02 붕당정치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현대적이고 역사를 앞서 갔다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권모 술수와 암투가 판을 칠 때, 권력자에 대한 견제와 동시에 일당 집권이 불가능한 붕당 정치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좋은 제도도 결국에는 주변국의 정세와 민생은 무시한 채로 초심을 잃게 되고 점점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변하게 되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주를 이루게 되었고 결국 정치적인 후진성을 띄게 되었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배울 점을 시사하는데 아무리 좋은 생각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일을 진행하더라도 초심을 잃게 된다면 결국 뜻한 바를 이루지도 못하고 후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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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늘당신과함께할 작성시간 14.11.06 * 이다솜 : 1) 양 란 / 양란 -> * 일관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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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14 이다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11.12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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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늘당신과함께할 작성시간 14.11.24 * 과제 수행 : 이다솜 김지연 임선영 이송민 장세연 이종덕 문성민 이상 총7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