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듣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고대문학의 황금기를 탐험하는 지도,
단테의 신곡이 안겨주는 책읽기의 즐거움
신곡이라고, 너 이즘 망가졌냐?
이런, 설 연휴에 단테와 지내겠다는데 대뜸 혀 차는 소리다.
다리 짓는 일을 하는 이 친구는 고흐의 ‘황색예수’를 최고의 명작으로 치면서도
종교에 대해서는 지독한 안티다. 정말 다행스러운 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거야.
다리에서 죽었어봐. 그럼 사람들이 십자가가 아니라 다리에다 절을 해대겠지.
다리 설계하는 나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성직자로 불렸을 테고. 이건 정말 끔찍해…….
종횡무진 고전을 훝어 나가는 단테
하여튼 신곡이 종교서적이라는 선입견은 이 친구만 그런 게 아닌 듯하다.
단테가 신곡을 쓴 중세가 종교적인 아우라에 에둘려 있었고
신곡의 배경 역시 지옥 연옥 천국이니 말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신곡을 읽는 즐거움은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오히려 그 휘장을 한 겹 벗겨냈을 때
신곡은 비로소 모험과 열정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가득 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짧게 말하면 신곡은 중세 이전 고대문학의 황금기를 탐험하는 지도이다.
그 안에서는 율리시즈가 다시 항해를 떠나며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고 그리스 신화가 재구성된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많은 이야기를 잠언과도 같은 3줄의 시로 표현하거나
길어야 한 페이지 정도로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킬레스가 애국심 때문에 죽었다고? 애국은 무슨 얼어 죽을,
아킬레스는 트로이 성위에서 내려다보는 폴리세네 공주에게 한 방에 간 거야.
그래서 뒤꽁무니를 쫒다 화살에 맞은 거라고.
세미라미스는 정말 바람둥이였어.
명색이 여왕이 자기 편하자고 매춘합법화가 말이 되냐고.
카르타고의 디도 있잖아. 그 여자는 정말 괜찮았어.
사랑하는 남자가 떠났다고 절벽에서 몸을 던지잖아…….
최초의 남극 탐험은 율리시즈 ?
율리시즈(제26곡)는 한 술 더 뜬다. 페넬로페? 물론 사랑했지.
하지만 내가 여자 치마폭에서 늙는다는 게 말이나 되. 당연히 아니지.
‘인간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노라’
그렇게 폼 나게 몇 마디 하니까 친구들이 그냥 따라붙더라고.
그래서 다 끌고 바다로 떠났지.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가 좌현으로 계속 내려갔어.
남십자성을 보며 5개월쯤 가니 남쪽 끝이었지…….
이런, 최초 남극탐험은 아문젠이 아니라 율리시즈로 바꿔야겠군.
아무튼 그렇게 종횡무진 고전을 훓어나가는 단테의 더듬이를 따라가다 보면
당체 지루할 틈이 없다.
현재는 산 자의 몫, 신이 뭘 알겠어
중간중간 농담처럼 날리는 멘트도 심상찮다.
죄인의 강(제10곡)에서 만난 카발칸테가 아들 안부를 묻자 단테는 의아해한다.
아니,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다 안다는 영혼이 그걸 몰라서 물어?
그는 ‘노안이라서 멀리 있는 건 잘 봐도 가까이 있는 건 볼 수 없다’며 슬쩍 비껴간다.
하지만 이건 정말 놀라운 물음이다. 여기에는 20세기 실존주의까지 이어진 ‘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내 행동인가 아니면 신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이 담겨져 있으니 말이다. 단테는 이렇게 잘라 말한다.
현재는 산 자의 몫이지, 지금 나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하는 거라구.
신이 뭘 알겠어…….
노래를 눈으로 부를 수야 없지 않은가
그렇게 놀랍고 흥미 있는 이야기가 신곡에는 가득 차 있지만
정작 신곡을 다시 읽으려는 건 그 뿐만은 아니다.
신곡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이고 책읽기의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연휴가 시작되면 나는 방문을 닫고 천천히 책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다지오,
베토벤 황제 2악장을 틀어놓고 신곡을 낭송해나갈 것이다.
시는 노래니까. 노래를 눈으로 부를 수야 없지 않은가.
베토벤의 아다지오와 동조된 내 목소리는 아테네 시민 앞에서
율리시즈를 읊조리는 호메로스처럼 내 서재를 다시 꿈꾸게 할 것이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가을아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2.21 오홋 ~ 봄왈츠님
미학에 대한 포스가 대단하시네요. 봄왈츠님이 찾아낼 동양의 신화를 기다려봐야겠네요.
저는 연휴 8일째 들어가네요..... 아직 하루 남았어요....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요하네스브람스 작성시간 15.02.21 오마나
단테를 읽고싶게 만드는 저 에세이 ㅎㅎ
저두 문명과지하공간 다 읽으면
천천히 읽을테야요 -
답댓글 작성자가을아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2.21 네 ~ 바쁘면 지옥편만 먼저 읽어보세요. 연옥이나 천국은 좀 지루해......ㅋㅋ
-
작성자봄왈츠 작성시간 15.02.21 시간만 흘려보냈습니다 아련하게 그러나 소년같은 글 깊이 읽고 갑니다
마지막 남은 연휴도 즐겁게 보내세요
느낌 주셔서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을아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11.17 네ᆢ봄왈츠님의 댓글 읽으면서
다시 저 감성이 터질듯한 시간의 글읽기를 되씹고 있습니다
장난 아니었겠어요, 봄왈츠님의 멋진 시간, 그 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