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또 브리앙이 잠들어있는 그랑베 섬에 파도가 밀려오듯, 인생의 파도도 예고없이 다가오는 것이겠지요.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주인공 나탈리는 어느 날 남편 하인츠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떠나겠다는 이별 통보를 받습니다. 슈만과 브람스를 들으며 플라톤과 쇼펜하우어, 니체, 푸코를 논하던 이 철학자 부부는 한나 아렌트와 귄터 슈테른이 그랬듯이 곧 헤어지게 됩니다. 고등학교 철학교사로서 바쁜 일상 속에 틈틈히 보살폈던 어머니는 결국 요양병원 신세를 지게 되고, 거기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이들도 각자 독립하고, 아끼는 제자 파비앵 마저 공동체 삶을 실험하기 위해 알프스 산자락 베르꼬흐(Vercors)로 떠나고, 이제 나탈리 주변에는 어머니가 기르던 검은고양이 판도라만 남게 되죠. 설상가상으로 집필진으로 참여하던 철학교과서 개정 작업이 대중적 인기가 줄었다는 이유로 중단되고, 변화된 현실을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익숙한 모든 것들을 떠나 보낸 후에도 나탈리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학생들과 "진리는 어떻게 확정되는가" 에 대해 토론하며 알랭의 <행복론>과 엔첸스 베르거의 <급진적 패배자>를 읽습니다. 남편의 떠남과 동시에 반쯤 비어버린 책꽂이에서 밑줄까지 쳐가며 읽던 레비나스 <어려운 자유>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하인츠를 원망하지만, 하인츠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미처 못갖고 왔다고 말하자 그 책을 찾아줍니다. 빈 곳이 어디 책꽂이 뿐이겠냐마는 상실로 인한 마음의 빈서판은 머지 않아 다른 책들로 채워질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탈리와 하인츠는 그렇게 표상의 세계를 떠나 점점 의지의 세계로 가까이 다가겠지요.
나탈리는 정성들여 꽃밭을 가꾸고 휴가 때만 되면 가족들과 함께 찾았던 브르타뉴 별장 대신 파비앵의 공동체 마을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옛 제자와 반갑게 랑데뷰하지만 우디 거스리의 <My Dady>만을 들으며 유나바머의 테러리즘과 지젝의 사회주의이론에 경도되어 있는 파비앵과 거리감을 재확인하게 되죠. 나탈리는 68세대로서 한때는 혁명을 꿈꿔 보았으나 스탈린 공산주의의 교조적인 경직성을 목도하고 한발 물러난 구시대 지식인이자 기득권 세대입니다. 그녀가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을 지지하는 것은 어쩜 당연해 보입니다. 반면 파비앵은 사회변혁을 추구하며 세입자 권익운동에 동참하다 아예 이념에 맞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시골로 내려온 신세대 지식인입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변화된 현실을 모른다고, 혁명적 유토피아 대신 생명주의에 관심을 가져보라 가르치고, 제자는 틀을 깨지 않는 안일하고 소극적인 스승의 소시민적 부르주아성에 대해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묘한 긴장감을 유발하거나 파국의 상황을 맞이할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비판적 성찰력은 상생의 성찰력으로 대치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검은 고양이 판도라를 통해 그 단서를 발견하게 되죠.
성숙한 자유인으로 떠나는 길에는 슈베르트의 가곡 <물위에서 노래함>, 도노반의 <Deep Peace>, 플리트우즈의 <Unchained Melody>가 함께 흐르죠.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이 보여주듯 나탈리 주위에도 낡은 것은 가고 새로운 것이 다가옵니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딸의 아이가 태어나고 파비앵 농장에는 당나귀가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자신의 타자에게 나즈막이 <맑은 시냇물가>를 불러주는 나탈리는 돌봄노동을 통해 만남을 이어가고 사랑을 나누고 행복을 찾아가겠죠. 그러나 그 행복은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하자면 행복은 행복하기 직전까지만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덧붙임) 영화 속 스틸사진이 프리드리히의 <안개위의 방랑자>를 닮았길래 나란히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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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율리시즈 작성시간 16.10.15 pure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크리슈나무르티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를 한번 정독해 보세요. 이것을 보면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이해를 못할 수도, 이해만 할 수도, 공감까지 할 수도 있는 여러 선택지가 있는데 소감을 듣고 싶네요.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은 그 토대를 이해하면 대부분의 저작들이 쏙쏙 들어오고 그 토대가 이해가 안되면 모두가 이해가 잘 안되는 독특함이 있는데 어찌됬든 그 사상을 이해하면 개개인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윤택하고 풍성해 질 것은 분명합니다. 퓨어님은 책을 잘 보시겠지만 기회가 되면 소감이라든가 궁금한 점에 대해 같이 얘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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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pur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10.15 율리시즈 크리슈나무르티의 그 책은 오래 전 대학 다닐 때 읽어보았는데 기억이 잘 나질 안네요. 다시 한번 읽어보고 이야기 나누어 보아요. 흥미로운 대화가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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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산유화 작성시간 16.10.11 영화 후기, 댓글, 또 댓글 쓰신 두 분 모두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ㅎㅎㅎ
저는 영화는 보았고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쓸 말은 없슴다. ㅠㅠ -
답댓글 작성자pur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10.11 원래는 고수는 아무말 안하고도 감동을 표현하는 분이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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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가을아침 작성시간 16.12.23 참 멋진 영화입니다
예고편을 몇번 보면서 본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만 흐르는군요.소개글 그리고
퓨어와 율리님의 생각까지 모두 잘 읽었습니다
굿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