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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사실4 - 자연의 주름

작성자괴목|작성시간26.06.16|조회수47 목록 댓글 2

 

 

 

 

펼쳐진 자연과 주름 잡힌 자연

 

#여기 끌어온 모든 그림은 chatGPT에 글줄을 입력하여 출력한 것들이다.

#다시 읽어보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세계가 생각났는데, 쓰는 과정에서는 전혀 연관하지 않았다. 어쨌든 베르그송은 프랑스철학, 이라는 작은 책에서 쇼펜하우어를 이렇게 칭했다. “그러나 위대한 독일 사상가들은 (심지어 라이프니츠나 칸트조차도) 심리학적 통찰력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거나, 적어도 거의 드러내지 않았고, (게다가 18세기 프랑스 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은) 쇼펜하우어는 아마도 심리학자이기도 했던 유일한 독일 형이상학자일 것이다. 반면에 위대한 프랑스 철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영혼을 예리하고 통찰력 있게 관찰한 인물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 없다. 데카르트와 말브랑슈의 형이상학적 사변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통찰력 있는 심리학 연구를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미독. 이런 논문도 있더라. 이서규, 쇼펜하우어의 자연개념에 대한 고찰. 이런 책도 있더라. Arnaud François, Bergson, Schopenhauer, Nietzsche. Volonté et réalité,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08,

#다시 읽어보니 들뢰즈의 이 글도 떠올랐다. 역시 쓰는 과정에서는 전혀 연관하지 않았다. “La méthode de dramatisation”

#의지의 네 층위를 더 철학사적으로 읽는다면, 플라토니즘, 메가라학파, 퀴레네학파, 퀴니코스학파에 접근할 수 있다. 별론이지만 실은 한번 접은 형태로 배치해야 한다. 음악으로는 낭만주의 이후에 흐름 그 자체의 자연을 표현해내고자 한 음악가들의 노력을 주목해야 한다. 사티, 포레, 몸포우, 드뷔시, 스크랴빈스키....

#그러나 지금 가장 필요한 사유는 생태학과의 접목이다.

 

 

창공에서 바라본 산하는 더없이 넓고 평평하게 펼쳐져 있지만, 깊이 내려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산에서 숲으로 숲에서 땅으로, 자연의 상세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주름잡혀 있다. 그런데 이를 고추해보면 펼쳐진 자연이 차근차근 주름 잡혀가는 것이 아니다. 보자, 우리가 생태학으로부터 복잡하게 얽혀 구불거린다고 하는 그 지점도 기실은, 예컨대 분자생물학자가 고찰을 시작하면 평평하게 펼쳐져서 이리저리 배열할 수 있는 평면처럼 먼저 여겨지다가, 그가 관찰을 심화하면, 유전자 등등 증언해야 하는 특이성들이 돌출하는 주름잡힌 세계로 다시 변한다. 그가 한 단계씩 나아가며 더 깊숙이 들어갈 때마다 그의 의식에서 자연은 펼쳐졌다 주름잡히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관점의 경첩은 진정한 경험론자가 생에서부터 생을 사유할 때도, 우리가 생의 비극으로부터 그 사건들인 우리의 체험들, 그 체험들로부터 정념들을 목도할 때도, 마찬가지로 접혔다가 펼쳐지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은 그 자체로 있지만, 생명은 그 자체로 있지 않고, 생명이 자연과 더불어서 무엇을 하려는 그 순간부터 즉시 자연은 제 이중성을 드러낸다. 자연은 한편으로는 가장 관념적인 전체로서 단순하게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실재적인 전체로서 순수하게 현전한다. 한편 자연은 어떤 것들도 자신의 부분으로 삼는 가장 단순한 한 운영이며, 다른 한편 자연은 어떤 운영도 그저 일어나는 사건들의 생기로 삼는 가장 순수한 한 사실이다. 한편으로 자연은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기계적 총체이고, 한편으로 자연은 어떻게든 전개되고 있는 생기적 상세이다. 그 극단에서는 한편의 자연은 사유할 수는 있을 뿐 묘사할 수 없고, 한편의 자연은 묘사할 수 있을 뿐 사유할 수 없다. 자연의 어디에 파묻혀 있든, 헤매는 자들에게, 이러한 자연의 두 이중성은 번갈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오니, 말하자면 분열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이 역시 난점이다. 이 이중성은 분열증 자체의 의지를 통해서 돌파해야 한다.

 

펼쳐진 자연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다. 펼쳐진 자연 그 자체에는 스스로 있고자 하는 차가운 원리 외에는 어떠한 도덕적 준거도 없다. 만약에 우리가 우주를 드넓게만 상상해서 생명과 생명적 에너지조차 다른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펼쳐진 무한 속의 부분들로만 보고자 한다면, 지극히 물리적인 현상의 항구성만을 보게 될 것이다. 많은 이론물리학자들이 빠져있는 세계관이다. 이 관점에서는, 별들 가운데 지구에 한 시기 있었던 인류세의 정신적 소산들은 펼쳐진 우주를 더나 덜 굴곡지게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높이 사더라도 약간 유별난 물리적 현상일 뿐이라고 볼 것이다. 물리적 현상일 뿐이므로, 결국 이들에게 실체는 물리이다. 코나투스처럼 그것이 문리인 형이상학자의 궤가 마찬가지로 있겠다. 에너지 원리로서 펼쳐진 자연은, 예를 들면, 우주가 팽창하든 축소되든 스스로를 다르게 증대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 안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특이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자기를 반복해서 따른 것이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 미래 없이, 즉 어떠한 것도 기억하지 않은 채 원리로만 존재하는 것이 펼쳐진 자연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름잡힌 자연을 사유할 때는, 우리는 여러 방향들이 도처에서 태어나면서 들끓는 세계를 만난다. 앞서 들었던 조감과 망원의 예를 다시 상기해도 좋다. 주름잡힌 자연은 당연히 평평하지 않았고, 이 자연은 어떤 방향으로 구불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방향이 있는 구불거림은 자연이 차이가 나는 높낮이의 생성들을 끌어안고 있는 바의 모습이고, 어떤 방향과 생성되는 높낮이가 있다는 것은 풀어 말하자면 어느 쪽으로인가 향하는 향방이 있고 구별되는 높낮이들의 깊이가 있다는 것이니, 줄여 말하자면 깊이와 방향을 지닌 자연이 곧 주름잡힌 자연이다.

 

이렇게 생성하는 깊이와 생성하는 방향은 생생한 자연의 가장 사실에 가까운 운동이다. 이러한 자연의 깊이와 방향이 곧 자연의 의지이다. 주름잡힌 자연의 모든 특질들이 앞서 말한 펼쳐진 자연과는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다르다. 자연의 의지는 물리적 사실이 아니라 심리적 사실이며, 어떤 경향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존재는 기 존재성과 차이가 나는 어떠한 경향을 기대할 수 있다. 이는 도덕적 힘이기도하기에, 자연의 영혼에 대한 논의는 원시 신화이든 근대적 영혼론이든 모두 이 깊이와 방향으로서 자연의 의지에 기댄다.

 

, 주름잡힌 자연은 의지하며 스스로를 증대한다. 한 원리가 새로운 형식을 입는 것은 유사 증대일 뿐이다. 원리 자체가 우연하게나 우연하지 않게 창출되는 것이 진정 증대이다. 어떤 한 의지는 한때는 어두웠던 지성이 혁명적 열광 속에서 새로운 생의 원리를 도입하는 쪽으로 한 생명체를 밀어붙이기도 했다. 자연을 그렇게 구부러뜨리기를 거듭한 지성사의 정점에 인류가 있다. , 우리는 더 나은 것을 그 의지와 더불어 꿈꾸고 생각할 수 있다고 의욕하면서, 유인원과도 원시인류와도 심지어는 전세대와도 다른 원리를 문명에 도입한다. 나는 지금 너무나 거칠게 말했지만, 이 말들에는 정체이든, 사상이든, 발명품이든, 인간이 발명하고 발견하고 세공한 온갖 것들의 흥망성쇠가 축약되어 있다, 즉 주름잡혀있다.

 

의지란 자신의 깊이를 자신의 방향으로부터 얻는 하나의 힘이다. 그런데 자기자신으로부터 발하여 바깥으로 향하는 바, 즉 자연의 표현 문제는 방향의 문제에 가장 근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자아는 여러 차이가 나는 깊이로 자신을 표현한다. 곧 그 한 방향이 힘받는 여러 층위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자아로부터 바깥으로 온몸을 뒤흔들어놓는 분기탱천이 일어나는 깊은 존재성의 층위가 있고, 바깥으로 좋은 인격의 예의바른 웃음을 빌려오는 얕은 존재성의 층위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방향이란 한 직선의 간단한 가로지름을 뜻하지 않는다. 자연의 방향이란 : 상충되는 것들도 있고 순응하는 것들도 있는 여러 방향들이 그럼에도 어떤 쪽으로 기울어서 만들어내는 한 경향성이며,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한 다발의 방향이다. 분노하거나 예의바르거나 모두 한 사람 안에서 밖으로 발산하는 성질이다. 또한 여러 층위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의 의지는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심원한 순수기억으로부터, 추억, 지각까지 이르기의 구별되는 양태의 층들을 지닌다. 순수자아와 사회적인 자아는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분노와 예의바름이 다르듯이, 한 층위가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좋은 배우는 그 와중에 분노와 예의바름이 함께 진동하게 하듯이, 이 양태적 층위화는 모두 한 방향안에서 함께 공명한다.

 

 

 

 

요컨대 한 다발의 동일한 방향 안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의지의 목표들이 공연한다 : 가상적 목표들, 잠재적 목표들, 현행적 목표들, 현현한 목표들.

가상적 목표들은 가장 순수한 의지이다. 가장 평평한 의지 장이다. 우리는 일반성을 구축할 때 이 순수성에 기대려 이 가상적 목표들을 언급한다. 형이상학적 틀이라면 있음과 없음, 윤리학적 틀이라면 옳음과 그름, 미학적 틀이라면 좋음과 나쁨 등등을 나열할 수 있다. 이렇게 두가지 가림들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때에 따라서 가상적 목표로서 가림들은 얼마든지 더 많이 고안할 수 있다. 예를 들면 ; 필연인 것, 우발인 것, 불가능한 것, 가능한 것, 이렇게는 네 가지 가림들이다. 그러나 가상적 목표들 그 자체는 심지어 이미 일어난 사실들의 후행적인 반성이 복기해낸 평평한 구조로 느껴진다. 그 정도로 이 자체는 어떠한 현현하는 사실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옳음 그 자체의 모양은 무엇인가. 그뿐만이 아니라, 옮음과 그름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 옳음과 그름을 알아서 삶에 녹이지 않는다면 그저 옮음과 그름인 어떤 것이다. 그처럼 이 자체가 삶이 진화하며 현현하도록 배경에서 압력을 가한다고 볼 수도 없을 만큼 차갑다. 바로 그 때문에 생명의 진화나 역사의 변천 등속과 별개인 절대 불변의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이러한 가상적 목표들의 구조에 집착한다. 가장 순수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잠재적 목표들은 의지의 있음이다. 평평하면서도 주름이 잡혀있는 의지 장이다. 현존이 잠재적 목표를 품는다면 무엇에 대한 의향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단순히 우리가 좋음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음이 있는 것이며, 싫음이 아니라, 싫음이 있는 것이다. 이 의향들은 충분히 생이 어떠하게 현현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허나, 아직은 순수한 정념원으로서 그를 즐겁게 하는 것에 대한 너울거리는 감각일 뿐이다(simulacre). 이 감각은 순수 자아의 뒤섞인 감각들에서 나와 막 방향을 잡고서 지각에게 도달해야 할 곳을 계속 가리켜 보인다. 그는 이 욕망에 따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음미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현존이 이 정념원을 예컨대 내 취향은....”이라는 말 아래에 깨끗이 정리해내고자 하는 욕심에 빠지게 되면, 이러한 욕구는 순수한 자아의 혼융된 감각이 아니라 반대로 자아가 야망하는 잘 정돈된 사회적 입지의 반영으로 변질되어버리기 쉽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이를 충분히 이용한다.

현행적 목표들은 의지를 가진다. 주름만 잡혀 있는 의지 장이다. 의지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욕망하는 대로 세계에 주름을 새기려 노력한다. 이 속에서 욕망들의 질서를 헤아리고, 포기해야 할 것과 추구해야 할 것을 정신은 헤아린다. 아직 이 목표는 실현되지 않았고, 이 주름에 대한 구상만이 그의 정신에 있다. 이는 정념보다는 지성이 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지성은 이렇게 의지를 가다듬는 작업 속에서 가장 빛난다. 그는 세계의 진화에 자신을 밀어 넣어서 잊히지 않는 한 자리를 잡으려 한다.

현현한 목표들은 의지한다. 주름이 잡히고 뭉쳐져 있는 의지 장이다. 현존이 의지할 때, 현존은 단순히 자아로부터 세계로 향하는 의지의 시초 운동들만을 체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궤적들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 본 그는 이제 우주에서 세계로부터 자아를 볼 수 있다. 그러니 그러한 방향이 태어나는 내내 우주에 일으키는 파동들, 세계의 접힘들 자체를 볼 수 있고, 이를 통해서 한 단위의 한 묶음의 방향을 비로소 확인한다. 이 때문에 여기에서 의지를 가진 자는 의지의 일방향 운동이 아니라, 치솟으면서 가라앉는 이중적인 왕복운동을 자각할 것이다. 진정 사람이 의지를 가질 때란, 그저 자아를 실현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우주에서 타자들과 더불어서 그 의지 자체를 다루는 진화의 한 장을 새길 때이다.

 

 

 

저녁눈을 읽어보자. ‘저녁눈은 자연의 의지를 표현한다.

 

저녁 눈

 

박 용 래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말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에만 다니며 붐비다

 

 

여기에도 또한 자연의 네 가지 목표들의 공현전이 있다. 앞서 일컬은 자연이 그런 바, 저녁눈도 멀리서 보아서는 거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평한 한 현상이라, 판판하므로 깊이를 나타내는 네 층위들은 증언할 가치를 다소 잃는다. 이 시를 멀리서 쉬이 보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니, 이 자연의 현상, 저녁눈은 짧고도 평이한 적요를 선사한다. 그러나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저녁눈은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주름 잡힌 한 현황이다. 작금의 자연은 그 정도의 감수성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우리가 어떤 방면에서 이 자연을 접하느냐에 따라서 자연의 깊이가 돌연 일어난다.

 

자연에 가상하는 목표눈인 세계눈이다. 자연의 잠재하는 목표눈이 있는 세계눈일 수 있다. 자연의 현행하는 목표눈을 가지는 세계눈일 수 있는 곳이 있다. 자연의 현현한 목표눈이 하는 세계눈이 내린다.

 

 

나는 이 의지의 층위들을 이 순서대로 다룰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 이 순서대로, 가상적인 것에서부터 현실적인 것으로 단계로 전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컨대 누군가는 눈만을 다루고 있는 이 시에서 자연의 형이상학적 운동을 바로 읽어내는 사건을 맞이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누군가는 눈인 세계 안에서 그 눈 일부를 곧바로 눈이 하는 세계로 전환하여 눈을 가지는 세계와 눈이 있는 세계를 내포하는 사유를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앞서 제시한 공현전에 기대어 자연을 체험하려 자연의 의지들을 가로지르는 방식들은, 더 낫고 덜 낫고 없이, 허다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바르고 강력하다는, 그래서 심리학자와 형이상학자가 모두 가장 흔히 다루는 자연의 전개는 생이 생명으로 생명이 생명체로 생명체가 생애로 차차로 미분화되는 것이겠으나, 우리에게 이 회로도를 불현듯 사유하게 하는 사건은 예컨대 우주의 생에서 내 생애는 돌연변이와 같이 일어났다는 사념에 빠질 때일 수 있다. 문학은 이 실존의 사건을 얼마나 많이 다루는가.

 

그리하여 있다. 자연으로서 눈인 의지. 눈인 세계. 저녁눈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세계. 마침 지금 여기가 오직 눈 그 자체로서만 태어나다. 세계의 모든 굴곡들을 뒤로하고 저녁눈이 세계를 뒤덮기 시작하다. 눈인 세계가 눈이 아닌 세계를 철저하게 밀어내다. 의미가 크게 요동치지 않는 순수한 문장의 반복은 이런 절대성을 드러낸다. 다른 아무 변경들도 끼어들 수 없이 그저 눈이 내리다. 모든 것을 뒤로 물리면서 순수하게 앞으로만 나아가는 지속, 곧 자연의 을 저녁눈은 그만큼 단순하게 표현한다.

자연으로서 눈이 있는 의지. 눈이 내릴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어느 곳에도 어느 때에도 얼마큼이든 눈은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어디에 언제 얼마큼 눈이 내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모든 것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눈과 자연을 나타낼 수 없으므로, 그러한 혼융이 자연에서 눈의 일부만을, 4행으로, 겨우 병렬하게 한다. 하지만 이 속에서도 이렇게나 단호한 생명력이 4행으로나 세계를 이끌었다. 모든 것일 수 있었으나, 하필 눈이었던, 차라리 자연의 어떤 정념의 힘이, 우주를 이쪽 방향으로 이끈다.

자연으로서 눈이 내리는 의지. 눈이 내리고 있는 세계가 있다. 눈이 수놓는 세계. , 눈의 자연이 특정하는 시공들이 있으니, 눈의 장소들이 점점이 무수하게 세상에 새겨지는 것이다. 이는 이 시의 특장인데, 우리는 저녁눈이 간소하게 나타내는 것만을 읽을 수 있으므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시 안에서만은 오직 눈은 네 군데에서만 내린다고 상상할 수도 있을 정도로, 이 시화(詩話)에는 이만큼만 있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눈이 내리는 만큼만 이만큼의 세계를 가진다. 그래서 지성은 이제 자연의 세부를 다시 점유해보고자 의지하면서 질서를 잡아본다. 이제 눈송이들은 그저 내리지 않는다. 이 차라리 생체인 것들은 분별되는 성질의 차이를 만들어 내면서 세계를 다른 감각의 음조로 잘 칠해간다. 시각에서 말집 호롱불 밑에’, ‘조랑말 발굽 밑에’, 청각으로 여물 써는 소리에’, 그리고 지각으로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자연으로서 눈이 하는 의지. 눈이 하는 세계가 있다. 끊임없이 다른 시공을 조명하며 그 자체가 하나의 차이가 되어 내리는 눈송이들이지만, 사실, 끊임없이 눈이라는 하나가, 눈이라는 한 자연만이 반복되어 붐비고있다, 눈이 하고 있다. 하나의 눈이 다르게 내리는 것을 보는 것, 성질을 나타내는 부분만 간신히 다른 문장이 반복되는 것을 읽는 것은 바로 다가오는 쉬운 일이지만,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이란 말은 불가사의한 모순이지 않은가. 반복된다면 차이가 없는 것이고, 차이가 있다는 것은 반복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창공에서 창일(漲溢)하는 눈송이를 보라. 하나의 자연이 끝없이, 눈송이가 날리며 한 하늘 아래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 내듯이, 역시 자연이 자신을-미분화하며-자기를-벗어나는 신비한 정체성을 지닌다는 것을 우리에게 표명한다. 이 정체성에 대한 사유야말로 자연스러운 운동의 형이상학에 대한 직관이다. 자연은 전체 세계를 일반화하여 기억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쪼개서 미분화하여 감각한다. 저녁눈을 잘 사유해보면, 이 자연의 이중적인 두 운동이 그대로 드러난다. 강설은 접히면서 동시에 열리는 자연의 의지이다. 한편으로 이 강설의 성질은 시각에서 말집 호롱불 밑” “조랑말 발굽 밑청각으로 여물 써는 소리청각에서 지각으로 변두리 빈터만더 구체로 변화하며 접혀가지만, 같은 문장을 달리 보면, 장소에서 말집 호롱불 밑에” “조랑말 발굽 밑에감각으로 여물 써는 소리에감각에서 운동으로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순수로 변동하며 열려간다. 차이를 만드는 반복, 우리 생애는 이 두 운동의 중첩이 아니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의지의 우주들은 네 개의 층위로 이루어진 표현체에 이르게 되니, 표현하기란 이 층위들을 때때로 튀어오르면서 점점더 주름잡히며 현현하는 작동이다. 층위들을 각각 도약하면서 점점더 의지의 파동들은 입자처럼, 개체처럼 드러난다. 가장 평평한 것은 가상적 목표이고, 가장 주름잡힌 것은 현현한 목표이다. 따라서 그 층위들의 다른 이름인 의지의 목표들은 활성화된 상태로서 네 가지 연속적인 현존 양식들을 띠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내딛는 단계는 중요하다. 우리는 진화의 심층들의 공존을 제안한다. 더는 단지 다른 의식적 층위들 가운데 한 결의 층위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진화는 자율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의식 대상으로 나타나며, 우리는 그것의 생생한 표현하기들을 실사(實査)해보려 시도한다. 그리고 우주적 의식 모델-생을 깁는 운동들을 진화 모델-의의를 생성하는 운동들로 전환하는 가운데, 의식의 활성화 정도들은 양태화 단들이 되며, 진화의 근거로 배치되어, 예컨대 생으로부터의 생애와 같은, 평평한 것으로부터 주름들을, 우주로부터의 작은 흐름들(미시 통시성micro-diachronie), 마치 진화 기계처럼, 분절한다. 바로 이 때문에, 즉 그것들의 양태들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의도적 목표들의 양태화 단계들이 현존의 양식들로서 있으며, 그 양태화들이 자연 속에 개체의 시도들로 표현되는 것이 진화이다. 자연을 평평하게만 본다면 마치 모든 생명체는 결국에 죽는 것처럼 개체의 생에는 그저 시간에 휩쓸려서 결국에는 평평하게 퍼지는 것이지만, 이렇게 주름이 잡히는 과정을 따라갈 수 있다면 생애란 자연을 약간이나마 들어올려서 들썩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스스로를 바깥에서만 주름잡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도 천연히 함께 주름잡는다. , 면의 주름은 면 밖에 있는 음영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고, 면 자체 안에 있는 주름 잡음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주름 잡힌 면이 우리에게 가리키는 것은 면 자체가 이미 주름을 잡을 수 있는 유연한 면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 없으니, 그렇지 않은 주름의 진행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이러한 현존 양식들은 바깥으로 드러난 표현하기일 뿐만 아니라, 또한 안으로 가둔 몸체적 실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파동이 입자를 이루었을 때, 마치 주름에서 그와 함께 다른 주름을 만들 수 있는 유연한 면이 바로 이 면이라는 것을 동시에 알아채듯이, 입자에서 다른 입자를 만들 수 있는 잠재적인 파동이 바로 이 현전이라는 것을 동시에 깨닫는다. 달리 말해, 그 파동으로부터 입자로의 혹은 그 연속성으로부터 개체로의 드러남과 (co-présence)공현전하는 바, 입자로부터 파동으로의 혹은 개체로부터 연속성으로의 가둠이 있다. 이에 따라, 모든 첨단에서 우주적 의식이 생생한 발명에 집중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저변에서 진화의 심급인 몸 안에 그 힘이 함께 육화되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어떠한 존재도 설명될 수 없다. 길게 생에서는 진화의 바탕이 되는, 짧게 생애에서는 내적 충동의 근거가 되는 원인성들로서 그 힘들이 그래서 마땅히 의식과 더불어 몸체 안에 있는 것이다. 애써서, 우리가 이 몸으로서의 기억이 그 첨단으로 드러날 때를 제하고, 그 자체만을 순전히 다루고자 상정한다면, 그 기억은 안으로 깊숙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적 실재는 물론이고 자연의 오롯하게 드러난 실재로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순간 이 긴장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실재는 몸체적 유형의 가둠이다. 살은 접혔다 펼쳐지기를 반복하는 이 충동들의 흔적을 표정처럼 나타내고, 가둔다.

 

 

 

 

 

복류(伏流)하는 의지 la nature virtuelle 가상하는/잠세하는

저류(底流)하는 의지 la nature potentielle - 잠재하는

표류(漂流)하는 의지 la nautre actuelle - 현행하는

와류(渦流)하는 의지 la nature réalisée - 현현하는

 

virtuel

1938, 앙토냉 아르토는 자신의 에세이 모음집 연극과 그 이중에서 연극 속 인물과 사물의 환영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가상현실(réalité virtuell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3][4]. 프랑스의 이 이론가이자 극작가의 이 저작에서 **“가상현실”**이라는 어구가 출판물상 처음으로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5].

https://fr.wikipedia.org/wiki/R%C3%A9alit%C3%A9_virtuelle

-라틴어 virtus는 덕목과 관련된 말이었지만, 여기서 힘이있는 뜻에서 출아하여서, 20세기 초에서야 지금의 가상적인 의미가 생겼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철학용어론에 편입되어 잠세의 의미를 띤 것은 그리 오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리해서 말해보자면, 근세가 드러낸 한 켜의 심층이다. 그리고 말의 어원을 생각하면 가상의 의미도 오역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너울거림으로서 표현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심층의 의미가 완전히 지워지는 것이 불만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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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물밤 | 작성시간 26.06.16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요즘 수학-물리학의 변형학(trasforamtion)을 읽고 있소.
    생물학에서 변형론은 1807년 라마르크가 쓴 것인데 아마도 뷔퐁의 계열(수학에서 급수)의 영향이라고 한다.

    꽁트가 칸트의 선험적 변증론에서 수학적 철학을(수학과 물리학)의 결합으로 범주와 개념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정역학과 동역학을 결합하는 방식에서는 여러 함수들(방정식)들을 만든다.
    대표적으로 허수를 포함하는 방정식인데, 이것의 이용은 열역학, 파동역학, 전자기학 등에서 적용(응용)된다.

    아마도
    당시 생물학 쪽에서 자연의 조직화(phusis + logos)[번역은 생리학]인데
    콩트가 사회조직화(socio + logos) 사회학을 만든다.
    사회학이 마치 4사람이면 4차원 다섯이면 5차원 ... 으로 확장(팽창)된다면 수학적 도식을 만들 수 있을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오고
    꽁트와 다른 길로 현실 동역학의 차원을 고차원으로 다루면서
    차원을 높여서도 그래프를 그릴 수 있는 편미분 방정식을 만든다.
    차원 높은 사회가 조직화된다면 어떤 사회일까?
    AI가 그린 표면의 3차원은 아닐것이다.
  • 작성자물밤 | 작성시간 26.06.16
    쇼펜하우어 대한 벩송의 견해는
    집에가서 찾아보고, .. 나중에

    우선,
    며칠전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해석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쇼펜하우어가 불교의 열반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은
    알려진 해석인데

    쇼펜하우어(1788-1860)가 당대의 프랑스 사상에서 말하는
    심리학(프쉬케 + 로고스)로 확장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앵글로색슨과 프랑스 사상계의 합작으로 18959년 인류학이 등장하고

    인간의 심성(le mental)을 이성(지성)과 감성(감정)구별된
    인간의 경험적 심리에 대한 탐구로서 심성과 심정(공감)은 레비브륄에서 나온다.
    쇼펜하우어도 공감을 말했지만, 고대철학의 심파테이아이고
    벩송이 말하는 공감은 플로티노스 신아이스테시스에 가까울 것이다.

    어째거나 프랑스 사상사에서
    19세기 후반에 안으로 탐구에서 3가지 조직화가 있다.
    자연, 사회, 영혼 이다. 그리고 각 학문들이 따로 성립한다.
    여기서 조건들과 규정작업은 칸트의 선험적 분석론과 다르다.

    앵글로 색슨에서 세 학문은 거의 칸트의 범주와 도식화에 맞추는 경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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