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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4 위빠사나 수행의 사념처와 삼법인

작성자니콜(28기 화 오전)|작성시간26.06.16|조회수25 목록 댓글 1

이해한 바를 편한 언어로 쓰려니…부족함이 느껴지네요. 부족한 이해대로 썼습니다.

1 위빠사나 Vipassana
현상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즉 통찰Insight한다는 의미.
위빠사나 수행은 불교에서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행 방법’으로서 소개되는 명상법이기도 한데, 그 핵심은 뜻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관찰함으로서 어떤 것을 깨닫게 되는가가 위빠사나 수행의 방법이고 목적이라 할 수 있다.

2 사념처
초기 불교 경전이자 위빠사나의 핵심 경전인 사념처경/대념처경(마하 사띠빳따나 숫타)는 존재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위빠사나 수행의 방법을 설명하는데, ‘관찰을 통해 통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관찰의 핵심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사념처(네 가지 관찰 대상)이다.

몸(신), 느낌(수), 마음(심), 법(현실의 삶을 규정하는 틀, 여기서는 불교적 시스템 또는 범주화된 삶의 형식) 네 가지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 관찰의 결과를 통해 어떤 결론(무상, 고, 무아)에 이르는가가 핵심이다.

1)신념처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대한 관찰, 즉 아나빠나사띠를 비롯해 걷기, 앉기, 서기, 눕기 등의 인간의 신체가 기본적으로 행하는 거동들을 알아차리는 것을 뜻한다. 걸어가면서 ‘걷고 있음’을 알고, 누워있으면서 ‘누워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2)수념처수념처의 ‘수’는 느낌이다. 감정보다는 외부의 자극, 경험이 몸을 통해서 인지됐을 때 느끼는 감각에 가깝고, 즐거움/괴로움/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중립적 느낌으로 분류되는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념처이다. 그 느낌 이후에 무언가를 더 원하거나 피하고 싶다 하는 견해에 이르기 전 알아차리는 것이다.

3)심념처
심념처는 말 그대로 마음이다. 몸을 통해 경험한 것은 즉각적인 느낌을 일으킨 후, 어떤 마음의 상태를 만든다. 화난 마음, 욕심이 나는 마음, 졸린 마음, 위축되는 마음, 고귀한 마음 등이다.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는 ‘감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감정에 따라 휘둘리거나 행동하지 않고 그 감정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심념처다. ‘화난 마음이 일어났다’,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4)법념처
법념처는 조금 어려운 개념이다. 법념처의 법은 우리가 ‘법률’을 이야기할 때 쓰는 법 법자를 쓰고 있지만, 그보다는 삶의 규칙이나 인간의 삶의 규범화한 어떤 틀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 빨리어로는 담마라고 한다. 이 담마는 불교, 혹은 부처님이 살아가던 세상의 법칙이자 현상일 수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 그 자체일 수 있다.

사념처의 법념처에서 관찰해야 하는 항목은
오개/오취온/육내외처/칠각지/사성제 등인데, 이는 앞의 신, 수,심념을 관찰하며 드러나는 현상들의 총체적 형태이자 그것을 이해하는 틀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 법념처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낀 것과 그로인해 생겨난 마음을 통해 확립되는 사고 방식나 가치관 등을 다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수행이다. 요즘 흔히 말하는 ‘메타 인지’의 개념이라고 본다.

사념처 수행을 통해 진정으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를 제대로 통찰할 수 있게 되면, ‘모든 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오온의 작용일 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즉 삼법인이다.

3 삼법인
1)제행무상
존재하는 모든 행은 변한다, 즉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흔히 ’세월 참 무상하다‘라고 말할 때의 허무감 섞인 의미라기보다, ‘행=샹카라‘ 항상성이 없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행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해한 대로만 설명해보겠다.

사념처 수행에서 신,수,심,법념을 관찰하다보면 우리 몸의 작은 세포도, 감정도, 생각도, 의식도 모두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피부, 근육, 세포, 분자, 원자, 양자, 아원자까지 계속해서 더 작은 미립자의 세계를 살펴보면 매순간 그 구성 요소들이 개별적으로도 그들의 합인 구조적으로도 변화하고 있다. 제자리에 똑같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도 없다. 그 작은 구성요소들이 변한만큼 그 총합인 우리의 몸, 그 안에서 생겨나는 마음, 생각, 의식, 사고 방식, 인간 관계, 사회, 국가, 더 나아가 지구와 행성계와 우주까지 똑같은 상태인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다.

2)일체개고
제행무상은 필연적으로 일체개고로 연결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즐거움, 행복은 순간이다. 제행무상을 통해 알 수 있듯 즐거움도 행복도 찰나다. 그러니 맛있는 것을 먹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든, 아이를 낳아 기쁨을 경험하든 그 역시 다 변한다. 붙잡을 수 없고 지나가버린다. 그러니까 인생은 결국 고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것에 집착하든 그것은 떠나갈 것이고, 인생에 완벽한 만족이나 행복은 없다. 그래서 남는 것은 고dukkah이다. (이게 영원히 괴롭기만 하다는 의미는 아님.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만족의 근거가 될 것은 없다는 의미의 고통)

3)제법무아
삼법인에서 가장 핵심적인 결론이다. 이미 앞에서 존재하는 무엇도, 현상도 변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만족이나 행복은 없으므로 고만 남는다는 것도 알았다.
여기서 ‘일체개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제법무아로 연결되지 않는다. 일체개고는 인생이 고통 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집착으로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의미이므로, 지금 내가 고통을 느끼든 즐거움을 느끼든 그것은 순간일 뿐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기 쉽게 즐거움, 괴로움이라는 감각(수)으로 설명했지만 사념처의 신,수,심,법을 넣어보면 제법무아의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나는 키 165에 건강한 사람’, ’나는 착한 사람‘ , ’나는 관대한 사람‘, ’나는 나쁜 사람‘, ’나는 팔자가 서러운 사람‘, ’나는 이성적인 사람‘, ’나는 의로운 사람‘ 등 나라고 생각했던 실체를 생각해보자. 신체, 마음, 생각, 의식, 가치관 등 모든 구성 요소와 현상은 변하기 때문에, 결국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념처 수행을 하면 ‘진짜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하나의 답을 내릴 수밖에 없다. 무상에 대한 관찰의 결과로서 그 답이 제법무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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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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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말환 | 작성시간 26.06.18 new 니콜님, 과제 #4 를 자신이 지금 까지 배우고, 직접 수행 체험하면서, 알아차린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 너무 겸손할 피요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깊은 통찰로써,

    ********** 과제 마지막 부분에서, "사념처 수행을 하면 ‘진짜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하나의 답을 내릴 수밖에 없다.
    무상에 대한 관찰의 결과로서 그 답이 제법무아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곧 명상지도자로써, 욕구 욕망의 구속에서, 자유를, 존재의 실체를 자각하여 본 생사의 고로부터, 걸림없는 지혜의 안목,

    *일상을 보다 지혜롭고 자애로운 명상지도자로써, 그 자리를 잘 지켜가기를 바랍니다. 수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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