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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작품들

니체: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888)

작성자마실가|작성시간19.04.09|조회수945 목록 댓글 2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Wie man wird, was man ist, 1888)󰡕(출판 1908) 해제

P. Champromis,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 2008-2009. (P.2190.)

샹프로미(Pierre Champromis, s.d.) 프랑스인으로 니체 탐구자. 독일 본에서(1952-1953)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에서(1954-) 가르쳤다..

-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쉰여섯)

 

* 자기도취에서 글을 썼다고 해야 할까? 마라톤에서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자기 에너지의 활성화에서 달린다고 한다. 니체가 글을 죽 전개해 오다가 󰡔안티크리스트󰡕(1888C)에 이어서 이 작품을 쓸 때 스스로 도취에 빠지지 않았나 한다. 물론 그의 병세가 심해지는 시기로 진입하는 시기이니까. 도취는 술이나 약물에 의한 취기(l'ivresse)와 다르고 또한 각성하고 난 뒤 최면중의 사실을 모르는 자기최면과도 다르다. 이런 도취에서 심층으로 자기 자신의 권능의 발현을 느끼고 행동할 때 그때는 환희일 것이다. 아마도 니체가 자기도취에서 권능의 환희를 맛보았을 수 있다. 15년 이상 글을 쓰면서,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지속해서 표출할 수 있었다면(비밀의 5처럼), 그는 오랜 단련 또는 운력(運力)을 시행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52NLI)

흥미로운 점이 있다. 비인격성에 대한 주체에서 인격성의 주체로 바꾸는 것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사람들은 .. 라고 말했다고 하지 않고, “나는 ..라고 말한다고 했다고 벩송이 강조한다. 니체도 여기서 나는 ..하다라고 말한다. 니체도 이제 내가 말한다. 그리고 행동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행동의 활용론(pragmatique)을 마지막으로 󰡔권능의 의지󰡕로 모아볼 수 있다고 여긴 것이 니체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에 반대하는 디오니소스이다. (52NLI)

 

#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Wie man wird, was man ist)󰡕(1888D, 출판 1908) 해제

- [니체의 마지막 저술이다, 이 다음은 부분적이고, 또는 여러 글들을 모은 것이라 한다. 즉 그래도 이것은 정신이 맑을 때 쓴 것인 셈이다.]

이 작품은 자신의 주저(Hauptwerk, oeuvre principale)의 출판을 진행하게 되는 니체 자신의 소개서인 셈이다. 그 주저의 첫째 작품인 󰡔안티크리스트(Der Antichrist: Fluch auf das Christentum)󰡕(1888C)는 이미 쓰여졌다. 이 작품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왜 나는 매우 현명한가(Warum ich so weise bin, Pourquoi je suis si sage),

왜 나는 매우 능숙[신중]한가(Warum ich so klug bin, Pourquoi je suis si [avisé]),

왜 나는 매우 좋은 책을 쓰는가(Warum ich so gute Bücher schreibe, Pourquoi j'écris de si bons livres),

왜 나는 운명인가(Warum ich ein Schicksal bin, Pourquoi je suis un destin)

이런 도발적인 ()제목들은 부분적으로 니체의 욕망에 의해 설명된다. 즉 니체는 벌써 조금씩 무시되어 가는 자기 작품들에 관하여 주의를 끌려고 했다. 그러나 이 제목들은 게다가 사유의 논리를 변질하지 않고서, 원문 속에 똑같이 나타나는 과대망상(une mégalomanie)을 또한 폭로한다.

만일 니체가 매우 현명(si sage)하다면, 그것은 그가 생명의 몰락과 상승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오류없는 육감(un flair infaillible)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는 두 가지를 인식한다. 왜냐하면 그가 둘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유전에 의해서, 마치 그의 변화하는 건강에 의해서처럼, 높이(de hautes, [상층])와 바닥(de bas, [심층])의 교대[가 있다.]

만일 그가 매우 능숙(si habile)”하다면, 그것은 그가 자기 정신적 삶의 조건들을 발견할 줄 안다는 점이다. 이 조건들이란 이성적 섭생[지식습득], 자극하는 기후[학문적 풍토], 휴식[정신의 기분풀이] 등이다. 이 휴식은 몇몇 좋은 작가들(특히 프랑스인)을 읽는데 있다. 이리하여 한 존재는 그 자신이 누구이라는[인격성] 것을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조금씩 자기 임무를, 즉 가치들을 되돌려 놓았던 임무를 의식하면서, 누구인가[인격, 주체]가 되었다. 이러한 것을 고려하건데, 그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이 그 임무에 봉사했던 것이다. [그 임무란] 그의 좌우명(sa devise)운명애(amor fati, 運命愛)이다.

만일 니체가 매우 좋은 책들(si bons livres)을 쓴다면, 그것은 그가 독일 언어의 거장이며, 당대 통용되는 심리학의 순진함을 폭로하는 심리학자라는 것이다. 그는 이 좋은 책들을 검토하고 보니, 이제는 자기 사유를 지배하고 있는 관념[사상]들을 그 책들의 내용들에 연결시키고 있고, 또 특히 자기의 󰡔짜라투스트라󰡕라는 작품을 고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니체가 결국에는 하나의 운명(un destin)이라면, 그것은 그가 인류성 속에서 위기를 부추기려는 것이다. [위기의 부추김은] 모든 가치들로부터 급변, 즉 도덕적 가치로부터 시작하는 급변(le retournement)[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도덕 그 자체로서 간주된 도덕에는, 즉 크리스트교적 도덕, 아뇨(non)라고 말한다. 크리스트교 도덕은 법률[법칙]으로서 인간에 반자연을 부여한다. 반자연이란 신체의 경멸, 성관심(sexualité)의 경멸, 본능들의 경멸 등이다. 이런 도덕은 퇴폐의 이상을, 즉 자기 자신의 희생(l’abnégation, 헌신) 가르쳤다. 이런 도덕은 생의 미래를 오직 보장하는 환영(le bienvenue, 기대)을 단죄하고, 박대들(les malvenues, 달갑잖은 일들)을 주장한다.

그리고 작자는 자기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결론 맺는다. “사람들은 나를 이해했을까? 십자가에 못박힌 자에 반대하는 디오니소스.” (P. Champromis)

(2:26, 52NLI)

 

*참조 1. ****이 책의 내용(목차)

Die restlichen Kapitel sind wie folgt überschrieben: Plan de l'ouvrage

[Avant-propos]

Warum ich so weise bin [Pourquoi je suis si sage

Warum ich so klug bin [Pourquoi je suis si avisé

Warum ich so gute Bücher schreibe [Pourquoi j'écris de si bons livres.

Die Geburt der Tragödie [L'Origine de la tragédie

Die Unzeitgemässen [Les Considérations inactuelles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Humain, trop humain

Morgenröthe [Aurore

Die fröhliche Wissenschaft [Le Gai savoir

Also sprach Zarathustra [Ainsi parlait Zarathoustra.

Jenseits von Gut und Böse [Par-delà le bien et le mal

Genealogie der Moral [Généalogie de la morale

Götzen-Dämmerung [Le Crépuscule des idoles

Der Fall Wagner [Le Cas Wagner

Warum ich ein Schicksal bin [Pourquoi je suis un destin

 

 

참조 2.********

인식의 모든 모험이 다시 허락 되었다.

우리의 바다가 다시 열렸다.

 

너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면,

너의 삶은 오늘 이 순간부터

새로운 가능성의 바다로 열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다.

 

필연적인 것을

단순히 감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은폐는 더 더욱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

 

- 이 사람을 보라 -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 사람을 보라>, 라틴어가 원문인데 그것은 ‘Ecce Homo’. ‘요한복음’ 195절에 보면,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채찍질하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후 성난 군중들 앞에서 피투성이 예수를 가리키며 이렇게 외친다. “에케 호모”, 이 사람을 보라!‘는 뜻이다. 광기어린 군중들이 일제히 외친다. “십자가에 매달아라!”(“Lass ihn Kreuzien.”) / en, Behold the Man,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1470년쯤에 그린 에케 호모’(Behold the man)는 끔찍하다.

(Hieronymus Bosch, Jerome Bosch, 1450-1516) 네덜란드의 화가. 상상 속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로 유명하다.

동시대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에케 호모는 또 어떠한가. 1509년 작 동판화에서 예수는 뒤러의 섬세한 칼날을 당한다.

 

이 서문(󰡔이 사람을 보라󰡕)에서 자신의 다른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수천년 간을 퍼져나갈 목소리를 지닌 이 책은 존재하는 것 중 최고의 책이며, 진정 높은 공기의 책이다. 인간의 만사가 그 책의 밑에 아득하게 놓여 있다.”

 

첨부파일 책1844니체1888D이사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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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마실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4.14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Jerome Bosch, 1450경-1516) 네덜란드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다.] 비슷한 시대에 작가가 왜 그렸을까? 르네상스인데...
  • 작성자마실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4.29 <이 사람을 보라(Ἰδού ὁ ἄνθρωπος)>, 라틴어로 ‘Ecce Homo’다. ‘요한복음’ 19장 5절에 보면,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채찍질하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후 성난 군중들 앞에서 피투성이 예수를 가리키며 이렇게 외친다. “에케 호모”, 즉 ’이 사람을 보라!‘는 뜻이다. 19장 6절에 광기어린 군중들이 일제히 외친다. “십자가에 매달아라!”(σταύρωσον σταύρωσον. - lat. crucifige crucifige).
    요한 19:5, Ἰδού ὁ ἄνθρωπος / Idoύ ho anthrôpos, lat. Ecce Homo, fr, « voici l'homme », deu. „Siehe, der Mensch“, en. Behold the Man, / 19:6 σταύρωσον σταύρωσον. - crucifige crucifige, fr. Crucifiez-le, deu. Lass ihn Kreuzien, Kreuzige, kreuzige ihn!, Crucify him, and crucify him. (53O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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