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과 신사(An Officer and a Gentleman)
최용현(수필가)
그윽한 눈빛과 약간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닌 은발의 노신사 리처드 기어가 언제 멋있지 않았을 때가 있었을까마는, 1982년에 만든 ‘사관과 신사(An Officer and a Gentleman)’ 속의 모습이 가장 멋있었지 않았나 싶다. 짧게 자른 머리에 하얀 해군제복을 입은 시크한 매력이 전 세계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지 않았던가.
이 영화는 당시의 시점에서 보면 꽤 야한 장면도 나오는, 흥행에도 성공한 청춘물이다. 연출을 맡은 테일러 핵포드 감독은 화끈하게 때려 부수는 영화가 아니더라도 할리우드에서 얼마든지 감명을 주면서 흥행에도 성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3년 후에 ‘백야(White Nights)’를 연출하여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원제목 ‘An Officer and a Gentleman’은 미국 해군의 장교후보생을 일컫는 말이라며, 이를 ‘사관과 신사’로 번역한 것은 오역(誤譯)이라는 의견도 있다. 생각하건대, 사관이 되는 과정과 신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적절하게 접목시킨 듯한 우리말 제목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어린 잭(리처드 기어 扮)는 엄마가 자살하자, 필리핀 해군기지에 수병으로 근무하고 있는 얼굴도 모르던 아버지를 찾아간다. 밤마다 창녀를 불러 술판을 벌이는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낸 잭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파일럿이 되려고 해군 항공사관학교에 입학한다.
흑인 교관 폴리(루이스 고셋 주니어 扮)는 걸핏하면 퇴소시킨다고 엄포를 놓으며 생도들을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잭은 오클라호마 출신의 시드(데이빗 키스 扮)와 친해져 단짝이 된다. 잭은 생도들이 쓰는 보급품을 싸게 구입, 손질해서 동료들에게 비싸게 파는 장사를 하다가 점호시간에 폴리에게 발각되어 퇴소당할 위기에 처한다.
자진퇴소를 거부한 잭은 진흙탕에서 얼굴까지 처박아가며 수백 번의 팔굽혀펴기를 해야 하는 등 폴리로부터 감내하기 힘들 정도의 체벌을 당한다. 폴리가 계속 퇴소를 종용하자, 잭은 여기서 나가면 갈 곳이 없다고 울먹이면서 절규한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던 폴리가 그때서야 잭을 풀어준다.
생도들을 위한 파티에서, 잭과 시드는 인근 제지공장에 다니는 여공 폴라(데브라 윙거 扮)와 리넷(리사 블런트 扮)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잭과 폴라는 서로 죽이 잘 맞아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가고, 시드는 리넷과 만나자마자 깊은 관계에 빠진다.
잭은 폴라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얘기를 해준다.
“내가 학교에 간 사이에 엄마가 약을 먹었어. 유서 한 장 없이…. 그래서 늘 죽은 엄마를 원망했어.”
폴라가 ‘상처가 컸겠네요.’라고 말하자, 잭은 ‘아니,’ 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 세상에 혼자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상처받을 게 없어.”
이 영화의 내공을 가늠할 수 있는 명대사가 아닌가.
외롭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오직 자신밖에 모르던 잭은 훈련과정이 계속됨에 따라 점점 마음도 열리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게 된다. 훈련 막바지쯤에는 수직벽 장애물을 통과하지 못하는 여자생도를 위해 자신의 신기록 수립까지 포기하고 그녀의 통과를 돕는 동료애를 발휘하기도 한다.
어느 날, 폴라는 잭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런데 폴라의 양아버지의 눈길이 시종일관 냉랭하다. 마치 ‘실컷 데리고 놀다가 졸업하면 나 몰라라 하고 혼자 도망칠 거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알고 보니 폴라의 생부가 그런(?) 사관생도였던 것이다.
졸업이 가까워오자, 잭은 혼자 고민하다가 폴라에게 이별을 고한다. 시드도 헤어지려고 하지만, 리넷이 임신했다고 하자 마음이 흔들린다. 사관생도였다가 죽은 형 때문에 낙심(落心)한 부모님을 위해 입학한 시드는 마침내 자신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 임관 2주를 남겨 놓고 자퇴한다.
시드는 반지를 사서 리넷의 집으로 달려가 청혼을 한다. 그러나 시드로부터 자퇴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리넷은 임신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내 꿈은 파일럿과 결혼하여 해외에서 근사하게 사는 것’이라며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결국 시드는 목을 매고 만다.
큰 충격을 받은 잭은 시드의 자퇴를 말리지 않은 교관 폴리를 찾아가 퇴소를 각오하고 결투를 신청한다. 마침내 잭과 폴라는 일대일로 육박전을 벌이고,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둘 다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진다. 계급장을 떼고 붙었으니 문책은 없었다.
드디어 모든 훈련과정이 끝나고, 잭은 다른 생도들과 함께 소위로 임관한다. 폴리는 임관한 생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깍듯이 경례를 붙인다. 잭이 ‘당신을 절대 못 잊을 거예요.’라고 말하자, 폴리는 ‘알지요.’라면서 약간 목이 멘 듯 ‘썩 꺼지시오.’라고 말한다. 괜스레 울컥해지는 장면이다.
잭은 교관 폴리가 새로 입학한 생도들에게 자신들이 입학할 때와 똑같이 겁주고 공갈(?)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오토바이를 타고 제지공장으로 향한다. 멋진 해군장교복을 입은 잭이 폴라를 안고 나오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열렬히 박수를 치는 폴라의 어머니와 동료들 사이에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리넷….
이 영화에서 교관 폴리 역을 맡아 열연을 한 흑인 하사관 루이스 고셋 주니어는 오스카와 골든글러브의 남우조연상을 석권한다. 조 카커와 제니퍼 원즈 듀오의 하모니가 심금을 울리는 주제곡 ‘Up Where We Belong’은 영국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에서 주제가상을 받았다. 요즘도 영화음악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곡이다.
사관학교 주변에는 생도를 꼬셔서(?) 신분상승을 하려는 여자들이 우글거린다. 그런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는 리넷은 임신까지 했지만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폴라는 어머니조차도 딸이 자신처럼 버림받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맺어진다. 폴라와 잭은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이것이 이 영화의 숨은 메시지가 아닐까.
광화문에 있는 첫 직장을 다니던 서른 즈음, 우리 과의 여직원과 함께 이 영화를 보던 기억이 새롭다. 한 세대쯤의 세월이 흘러갔다. 풋풋한 문학소녀였던 그녀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나처럼 늙어가고 있을까….*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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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영석 작성시간 12.07.23 오래간만에 추억이 새록새록한 영화를 되살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매우 인상깊게 본 영화엿습니다...사관생을 꿈꾸던 제가 키가 작아서 포기해야 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혼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저런 멋진 사람이 사관생도지...아암...포기하길 잘 했지> 하면서요...ㅎㅎㅎㅎ
더운 여름입니다...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따오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7.24 사관생도를 꿈꾸셨는데, 키가 작아서 포기하셨다는 얘기는... 예상을 뒤엎는 반전입니다.
마치 제가 대학4학년 때 경찰간부후보생 공부를 하려다가 포기한 것에 버금가는...ㅎㅎㅎ
저렇게 멋진 리처드 기어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거나 아니면 조상들이 엄청난 공덕을 쌓은 거겠죠.
8월달 귀국 때는 서울에서 얼굴 함 보입시더... -
답댓글 작성자조영석 작성시간 12.07.24 서울에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일정이 어떻게 될지 잘 모릅니다...8월1일부터 3일까지는 비원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비원게스트하우스에 예약해 두었습니다...4일 오후에는 의정부 쪽으로 가서 자고, 5일 이후는 미정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따오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7.25 8월 5일은 일요일이라 그렇고, 8월 6일(월)이나 7일(화) 저녁쯤이 좋겠네요. 그때까지 목사님이 서울에 계신다면...
서울총책인 짱과 의논해서 서울모임을 주선해볼께요.
아불 선배님, 풀꽃 시인 등도 함 모이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때가 한창 휴가시즌이라 어떨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