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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업보와 윤회와 관련된 글 중에서

작성자파초|작성시간12.01.03|조회수316 목록 댓글 44

우리의 삶은 업을 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업을 짓는 자와 그 업의 과보를 받는 자가 동일한 존재라고 한다면 상견이고 서로 다른 존재라고 한다면 단견이다. 이와 같은 단견과 상견에 빠지는 것은 자아가 시간적인 존속성을 가지고 공간 속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적 존속성을 가지고 공간 속에 존재하는 '자아의 존속�'이 죽음을 통해 단절된다고 믿는 것이 단견이고, 사후에도 끊임없이 존속한다고 믿는 것이 상견이다.

 

붓다는 시간적 존속성을 가지고 공간 속에 존재하는 자아를 부정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업을 짓는 자이거나 보를 받는 자가 아니라 업보 그 자체이다. 이와 같은 '업보로서의 자아'가 무아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무아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통해 형성된 여러 가지 체험의 내용을 자아라고 집착한다. 업을 지어 보는 받는 자아가 있다는 중생들의 생각은 무아의 실상을 알지 못한 무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업보로서의 자아를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이라고 부른다. 아뢰야식은 전에 지은 선악업의 결과이며 앞으로 지을 업의 종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뢰야식을 중생은 내적 자아로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아뢰야식은 불변의 내적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업보와 무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잡아함경>에서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고 한 것을 유식학에서는 업보로서의 아뢰야식은 있으나, 아뢰야식이 중생들의 불변의 내적 자아는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을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무아의 여래장'은 '업보로서의 아뢰야식'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존재현실로 드러나는 모든 것은 '업보로서의 마음' 즉 아뢰야식이 전변한 것이다. <80권 화엄경>에서는 모든 존재현상은 업이 근본이 되고, 모든 업은 마음이 근본이 된다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업의 근본이 되며,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생각함으로써, 대승불교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마음으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마음으로 파악된 인간은, 스스로의 마음으로 업을 지어, 현재의 자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가는 존재이다. 마음은 업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만든다. 부처님은 그 마음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세계를 만들고, 중생은 그 마음으로 중생과 중생의 세계를 만든다. 부처님이든, 중생이든, 자기와 세계를 만들어 가는 마음의 측면에서 보면 차별이 없다. 중생은 단지 자신이 그와 같은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창조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알든, 알지 못하든, 모든 인간은 창조적인 삶을 살고 있다. 중생이 중생의 세계를 만드는 것도 창조적인 삶의 결과이고, 부처님이 부처님의 세계를 만드는 것도 창조적인 삶의 결과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 실현한 사람이다. <60권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든 부처님들은 일체가 마음에서 변화한 것임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그는 참된 부처님을 본 것이다.

마음이 이 몸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이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닌지라

일체의 불사를 지음에 더없이 자재하다.

만약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거든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하라.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든다"

 

중생은 자신과 세계가 창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아와 세계를 분별하고, 자기와 남을 분별하여, 스스로의 분별에 의한 망상의 세계에서 허망한 자아에 묶여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나 부처님은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자아와 세계가 '한마음(일심)'임을 깨닫고 망상과 허망한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타의 분별이 없는 동체자비로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이와 같이 깨닫고 깨닫지 못한 차이는 있으나, 창조적인 삶으로서의 마음은 중생과 부처님의 차별이 없다. 중생의 마음, 즉 아뢰야식을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도 부처님과 다름없는 창조적인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 마음이 여래를 만들기 때문에 '여래를 만드는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중생의 마음을 여래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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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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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초심 | 작성시간 12.01.05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잔다.. 에서

    내가 배가 고프니 내가 밥을 먹는다.
    내가 졸리니 내가 잔다 고..

    꼭 [나]를 삽입해야만 합니까?..^^
  • 작성자투덜이77 | 작성시간 12.01.05 초심님 설명중에 "업이 있으면 업보가 나타납니다." 하셨는데. 업과 업보사이는 얼마의 시간이 흐르는 것 까지 업보라 해야 할까요. ^^ 전 짓는자와 받는자를 논하기전에 그것이 확실하지 않으면 짓는자 받는자는 희론이라 봅니다.
  • 작성자초심 | 작성시간 12.01.06 태양이 무너지는 것을 보지 않는 한 난 태양이 소멸한다는 것을 믿지 않겠다고 하면.. 그것이 억지인가요?..^^
    인과법 역시 석가 부처님이나 누군가가 만든 게 아니라고 봅니다. 인과법을 의심한다며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의심한다고 하지않을 겁니다.
    인과 과를 업과 업보라 한다면 점프가 너무 심한 것일까요?
  • 작성자초심 | 작성시간 12.01.07 [나]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요?..
    아무리 [무아]가 참이라 해도 지금 여기에 [나]가 없다면 무엇이 [무아]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나]가 분명히 있는 것은 무명이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하여 무명을 깨치면 그 [나]가 없음을 분명히 안다는 거지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무아]가 참이라 하여 지금여기에 [나]가 없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그 [나]라는 자는 무명이 멸하지 않는 한.. 죽건 말건 식물인간이건 천국에 간 인간이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 답댓글 작성자혜 천 | 작성시간 12.0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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