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부품이 조립되기 전에는 자동차라고 불리지 않듯이, 색수상행식 다섯가지가 모여있기 전에는 [나(我)]라고 불릴 수 없다.
그런 [나(我)]는 모여있는 5온 가운데 어디에 있는가?..
<잡. 33. 비아경>을 보면..
"만일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니라. 그런데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가 그런 것에 대해 과연 '이것은 나다. 나와 다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상·행·식도 그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존재하는 모든 색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 일체는 모두 나[我]가
아니요, 나와 다르지도 않으며,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하느니라. 수·상·행·식도
그와 같으니라.
비구들아,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이 5수음(受陰)에 대하여 '그것은 나[我]도 아니요, 내 것[我所]도 아니다'라고 사실 그대로 관찰하느니라.
<33경>이 나오게 된 배경은 5온은 내가 아니며 나의 것이 아닌데.. 세간에서는 물론 종교 안에서도 당연히 [나(我)]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어 그것을 깨뜨리고 바로잡으려는 게 된다.
그것을 [5온 무아]라고 하는데.. 5온 무아에서 새로 생긴 병이 있으니..
무아라는 말에 걸려 '분명히 무언가가 있는 데 [아무것도 없다]하니 그것은 아니다' 하며, 가아(假我)를 말하며 진아를 세운다.
에이 :
출세간의 정견은 무아다?
(단순하게) 오온이 내가 아니다?
밥은 드시는지, 물은 마시고.. 호흡은 하시는지? 여기서는 무엇으로 말하고 보고
글을 쓰는지.
무아가 아니라 내가 아닌 가아(假我)가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불교의 목적도 무아가 아니라 진아를 깨치는 것이구요.
라는 식의 반론이 들어온다.
에이는 [나(我)]는 누구든 분명 있는 데 왜 부처님의 후광에 숨어 무아를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33경>을 잘 보면 에이의 질문이 잘못임을 알 수 있다.
<33. 비아경>에서는 5온(5취온)이 없다고 하는 게 아니다. 5취온에는 색 외에 수, 상, 행 식온이 있기에 보고 듣고 느끼고 종합 판단하고 기억하고 있다. 5온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말을 하고, 호흡을 한다
그것을 에이를 포함한 세간에서는 [나(我)]가 하는 짓으로 보기에..
세존은 묻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나(我)]라고 하는 것은 5온 어디에 있는가?.. 5온은 없는 게 아니나 [나(我)]는 없지 않은가? 하고..
그리고 5온을 들여다 보아라 무엇 하나 실재하는 게 있는지..
5온은 실재하는 게 없기에 무아요, 세간에서 [나(我)]라고 하는 게 없기에 비아요, 무아라 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자아라고 하는 것은 실은 가아(假我)다. 자아는 없다. 자아가 있다는 꿈에서 깨어나라.
그런데 그 말은 들은 후세의 불자들 가운데 가아를 가짜 나라고 하면서.. 곧 가짜 나가 존재한다고 알면서..
가짜 나가 아닌 참나(眞我)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참나를 찾는 게 불교라고 아는 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에이같이 생각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밥을 먹고, 접촉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생명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작용은 나라는 자아가 생기기 전에 있는 행이다.
그런 행을 에이는 [나(我)]가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생명작용(5온)=참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괴로움은 5온을 취해 나(=가아, 5취온)에게 생기는 것으로 파악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렇게 알아도 별 지장이 없다는 것은 힌두교나 자이나교를 포함한 인도 수행자 사이에서 성인으로 존경받는 분들이 나오는 것으로 증명된다.
문제는 부처님과 같은 아라한이 되려는 이들이나 부처님 가르침의 참 뜻을 알려는 학인에게 있다.
즉 다수가 아닌 소수에게만 관심을 끈다는 것인데, 여기서 이 내용을 논하는 것은 21세기라는 열린 사회에서 불교가 세상에 나와있는 진리나 종교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이것이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세존은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을 똑같이 보고 듣는다.
다만 범부들이 알아채는 것과 다르게 바라 볼 뿐이다.
비구들아, 세간에는 세간법(世間法)이 있어, 나는 그것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사람들을 위해 분별하고 연설하고 나타내 보이지만 세간의 눈먼 장님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 허물이 아니니라.
비구들아, '세간의 세간법을 나는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고 분별하고 나타내 보이지만, 저 세간의 눈먼 장님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구들아, 색이란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니, 이것이 세간의 세간법이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도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니, 이것이 세간의 세간법이니라.
비구들아, 이러한 세간의 세간법을 나는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사람들을 위해 분별하고 연설하고 나타내 보이지만 저 세간의 눈먼
장님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저 눈먼 장님들이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것을 낸들 어떻게 하겠는가?" <잡. 37. 아경>
5온의 신구의 3행을 나의 행으로 아는 것을 5취온 행이라 한다.
그런 5(취)온은 내가 아니다 라고 하면 5취온은 사라지고 5온만 남는 것으로 아는데..
5취온이 사라지면 5온이라 하는 것 역시 무상하고 무아임을 깨쳐 5온이란 것 마저도 멸하게 된다.
그렇다 하여 '5온이라 불리는 것(프레 5온)'마져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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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효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9.11 <잡. 33. 비아경>에 보이듯 무아(비아)는 힌두교의 아트만만이 아닌 일반인들이 자아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아 an-atman를 힌두교의 아트만 atman을 부정하는 것 an 이라고 좁게 말하면.. 무아의 뜻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글은 [근분불교교설]에 올린 내용을 대폭(?^^) 수정해 올린 것으로..
나찾님의 무아와 참나를 보면서 생각해 본 것입니다.. -
작성자효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9.11 석가 세존께서는 무아를 깨치면 번뇌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듯이 고멸이 성취되는 겁니다.
세존께서는 제자들이 고멸하기를 목표로 세워 공부하고 고멸한 이후 삶은 그들 몫으로 분명하게 남겨둔 것으로 봅니다.
그러기에 부처가 된 이후를 물으면 무기를 하십니다.
무아를 깨친 것을 달리 말하면 열반이 됩니다. 그러니 제자가 열반 이후를 물으면 무기를 하지만..
그 때 무기 뜻은 "나를 보아라" 로 충분한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 부처님의 삶을 상락아정이라 하면 틀린 게 됩니까?..^^
그 말은 무아를 달리 말하면 상락아정이라 할 수 있지만.. 제자들에게 무아 그 이상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셨다는 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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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효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9.11 다시 정리해 보면..
1) 부처님 당시 종교에서는 상락아정을 목표로 가르치고 있었다.
2) 부처님은 상락아정을 부정하니 무상고무아가 그것이다.
3) 그런데 무상고무아가 곧 상락아정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상락아정에서 시작해 다시 상락아정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가르치면 혼란만 더욱 야기되는 게 아닌지요?..^^
이 혼란을 해소하는 방법 가운데 1)과 2)는 근본불교가 되고, -> 3)은 말하지 않음.
2)와 3)은 대승불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 대승의 상락아정은 세간에서 아는 상락아정과 뜻이 같지 않다. -
답댓글 작성자효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9.11 새벽산사 하하하^^
그것은 대승경전에 나오는 말이 아닌..
근본교설(불교가 아닙니다..^^)에서는 무아를 곧 열반이라 가르치는데..
대승경전인 열반경에서는 열반을 상락아정으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고로 [3) 그런데 무상고무아가 곧 상락아정이다] 이라는 게 되는데..
그리되면 혼란이라는 거지요..^^ -
작성자효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9.11 이거.. 말이 말을 확대 생산하고 있습니다.
끊어야만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