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후박나무님이 제법 오래 전에 쓴 글 [이중표 교수의 [불교의 이해와 실천] 비판]에 나오는 내용이다.
새삼 다 시 올리는 게 조금은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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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함경과 니까야의 비교
1).6입처에 관한 경전
12처를 허망한 마음상태로 보는 사상적인 이유는 12연기와 반야심경에 대한 오해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경전의 해석에서도 유래한다. 여기서는 일단 경전에서 사용되는 āyatana의 일반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12연기와 반야심경은 뒤에 다루도록 하겠다.
이중표 교수는 다음과 같은 잡아함경(二三九, 二四○)를 인용하여 6입이 번뇌에 묶여 있는 허망한 마음 이라고 설명한다.
我今當說結所繫法及結法。云何結所繫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結所繫法。云何結法。謂欲貪。是名結法。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번뇌에 묶여 있는 것과, 묶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하리라. 어떤 것이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인가? 眼色,耳聲, 鼻香, 舌味, 身觸, 意法 이것이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이라 부른다. 어떤 것이 묶고 있는 것인가? 욕탐, 이것을 묶고 있는 것이라고 부른다.”p.222
世尊告諸比丘。我今當說所取法及取法。云何所取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所取法。云何取法。謂欲貪。是名取法。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시되 “내가이제 취해지는 법과 취하는 법을 이야기하리라. 어떤 것이 취해지는 법인가? 眼色,耳聲, 鼻香, 舌味, 身觸, 意法 이것을 취해지는 법이라 부른다. 어떤 것이 취하는 법인가? 욕탐, 이것이 취하는 법이다.”p.224
위 경전에 상응하는 상윳따 니까야의 [속박경]과 [취착경]을 소개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속박되는 것(saññojaniyā dhammā)과 속박하는 것(saññojanaṃ)에 대하여 설하겠다.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물질(수상행식)은 속박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욕탐이 그것을 속박하는 것이다."(SN.Ⅲ.167)
"비구들이여, 나는 취착되는 것(upādāniyā dhamma)과 취착하는 것(upādānaṃ)에 대하여 설하겠다.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물질(수상행식)은 취착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욕탐은 그것을 취착하는 것이다."(SN.Ⅲ.167)
위와 같은 경전을 니까야에 비교해 보니 속박되는 것, 속박하는 것은 수동과 능동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잡아함의 ‘묶여 있는 것’(結所繫法), ‘묶고 있는 것’(結法)은 수동과 능동을 살려서 ‘묶이는 것’과 ‘묶는 것’ 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전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12처는 욕탐이라는 번뇌에 묶여있는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라는 해석은 터무니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眼과 色이 ‘묶이는 것’이라고 해서 眼과 色이 서로에게 묶이는 것은 아니다. 眼이 욕탐에 묶이고 色이 욕탐에 묶이는 것들이다. 묶는 것은 욕탐이다.
위 경전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는 상윳따니까야의 [꼿티까 경]을 보면 ‘묶이는 것’과 ‘묶는 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가 있다.
[꼿티까] ��벗이여, 싸리뿟따여,
눈이 형상들에게 묶인 것인가,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귀가 소리들에 묶인 것입니까? 소리들이 귀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코가 냄새들에 묶인 것입니까? 냄새들이 코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혀가 맛들에 묶인 것입니까? 맛들이 혀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몸이 감촉들에 묶인 것입니까? 감촉들이 몸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마노가 법들에 묶인 것입니까? 법들이 마노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까여,
눈이 형상들에 묶인 것도 아니고 형상들이 눈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chandarāgo)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귀가 소리들에 묶인 것도 소리들이 귀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코가 냄새들에 묶인 것도 냄새들이 코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혀가 맛들에 묶인 것도 맛들이 혀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몸이 감촉들에 묶인 것도 감촉들이 몸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마노가 법에 묶인 것도 법이 마노에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예를 들어 검은 소와 흰 소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줄에 묶여 있다고 합시다. 누군가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다던가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옳게 말하는 것입니까?��
[꼿티따]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벗이여,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지 않고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줄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이와 같이 눈이 형상들에게 묶인 것도 아니고 형상들이 눈에게 묶인 것도 아닙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탐이 생겨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중략
[싸리뿟따] ��벗이여, 눈이 형상들에 묶이고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다면, 올바로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청정한 삶을 시설할 수 없습니다.
벗 이여, 눈이 형상들에 묶이지 않고 형상들이 눈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 양자를 조건으로 욕 탐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것은 거기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로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청정한 삶을 시설할 수 있습니다.........중략
벗이여, 세존께서도 눈이 있습니다. 세존은 그 눈으로 형상을 봅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욕탐이 없으므로 세존의 마음은 잘 해탈되어 있습니다. (SN.Ⅳ.163)
위에서 이중표교수가 해석한 묶여 있는 것(結所繫法)과, 취해지는 법(所取法)이란 내입처와 외입처로 나누어진 12처를 말한다. 이들은 각각 욕탐에 묶여지는 법이다. 내입처와 외입처의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난 욕탐은 묶는 법(結法)이고 취하는 법(取法)이다. 이중표 교수는 12처를 욕탐에 ‘묶이는 법’으로 보지 않고 ‘번뇌에 묶여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12처를 “허망한 마음”으로 오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니까야의 설명은 분명하다. “눈과 형상이 서로 묶여 있다는 말은 맞지 않다,// 후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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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후박님을 답답하게 느끼는 이유는 이 교수가 안과 색 등 2법을 욕탐이라 하는 이유를..
“12처는 욕탐이라는 번뇌에 묶여있는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라는
해석은 터무니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眼과 色이 ‘묶이는 것’이라고 해서 眼과 色이 서로에게 묶이는 것은 아니다. 眼이 욕탐에 묶이고 色이 욕탐에 묶이는 것들이다. 묶는 것은 욕탐이다.//후박
이라 하여 <239경> <240경> 내용을 분석 설명하면서 반박하고 있는데..
그것부터 답답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교수가 2법을 욕탐이라 하는 이유는 <239경>을 보면서 하는 말이 아닌..
<214경>등에 보이듯 2법은 마음을 연해 생긴 것이고,
그 때 마음은 12연기법 유전문에서 보듯 무명임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12연기법 유전문에 나오는 행, 식, 명색, 6입, 촉.. 모두를 무명에서 생겼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욕탐이 있다는 것이기에.
욕탐이 있기에 번뇌 괴로움이 점점 더 증장하게 된다는 게 유전문이다.
하여 중생은 살아갈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괴로움이 적어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쌓여 간다.
이교수는 안과 색 등 2법은 욕탐에 묶여 있는 우리 마음[심연생]이라 했는데..
<S35:232 꼿티따 경> 경에는
4. 도반 꼿티따여, 눈이 형색들의 족쇄도 아니고 형색들이 눈의
족쇄도 아닙니다. 이 둘을 반연(원인. 조건)하여 거기서 일어나는 욕탐이 바로 족쇄입니다.
이라 하여.. 안과 색은 욕탐(=족쇄)가 아닌 그 둘을 묶고 있는 욕탐이 따로 있다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나는 저 <S35:232 꼿티따 경>이 잘못이라고 하기 보다는..
"<S35:232 꼿티따 경>은 최상승경이 아니다" 라고 하련다..()..
가능성이나 사실 여부는 일단 보류하고..
하나는 안과 색을 멸할 수 없는 실유로 본다 하고,
다른 하나는 안과 색을 멸할 수 있는 심연생이라고 한다면..
어느 게 더 수승한 법이라고 해야 하나?..
단 안과 색 12처는 멸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하여 안과 색이 멸해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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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솔잎향 작성시간 15.02.28 meong 님 불교에서의 멸은 아주 중요 함니다. 무엇이 있어 같고 멸하는 것이 아님니다. 멸은 우리는 밖에 대상이 있고 내가 있어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밖에 대상과 나와 둘이 아님을 가르 침니다. 이부분이 아주 중요 합니다. 어떤 것도 홀로 존재 하지 않는 다는 가르침을 이해 하여야 멸이라는 말을 이해 할수 있습니다. 멸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마음이 뭔지 알아야 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있는 줄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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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솔잎향 작성시간 15.02.28 우리가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마음이 없다는 가르침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마음이 없다는 가르침이 바로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서 샛별보고 깨달으신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입니다. 12연기의 정형구가 있지요?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부처님께서는 역관으로 부텨 있는 것을 소멸해가셨습니다. 멸은 멸한다고 해서 멸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자의 뜻으로 따라가면 부처님의 뜻을 천년 만년 가도 이해 하기 어렵습니다. 멸은 우리의 의식 상태 가 일어 나는 현상을 잡을 래야 잡을수 없고 가질래야 가질수 없다는 것을 뜻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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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솔잎향 작성시간 15.02.28 비사부불에 사대를 빌려 몸이라 하고 마음은 경계따라 일어 난다고 하셨습니다. 멸이라는 말은 마음이 없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고 그마음이 어떻게서 일어 나는 가를 알면 마음은 멸할래야 멸할수도 없고 가질래야 가질수도 없는 것을 알것이며 이 없는 마음을 우리는 있다고 착각하여 집착하여 고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수는 중도,고락중도 유무중도 자작타작중도 단상중도 일이중도 중에 다른 것은 모두 이론 적이지만 고락중도는 실천적중도인 우리의 삶을 뜻합니다. 이런 모든 존재의 실상을 타파 하는 것을 가르치려는 말이 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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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랑 작성시간 15.03.02 <잡239,240> 과
니까야<꼿티카경> 은 서로 상응 경도 아니지만
ㅎ님이 <잡239,240> 을 < 꼿티카경> 에
비유된 것은 번지수가 다른거네요.
<잡 239,240> 은 12처 외내입처를 설명하는 경이고
<꼿티카경> 은
근경에 기저한 일반적인 인식을 설명하는 것
일 뿐인데요.
이 경들에
안과 색이 모두 쓰여 있는데
처와 근을 동일하게 보고 문제 삼은 경우네요. -
작성자혜정 작성시간 15.07.07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