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이 필연인지 우연인지 궁금합니다.
그전에 내가 생각하는 필연과 우연이 뭔지 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필연은 내가 나름으로 이유를 대면서 설명할 수 있다면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든가 그렇게 되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다든가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든가 하는 식의 필연은 거절합니다.
즉, 내 의미가 아닌 외부의 강압적인 의미로 말하는 필연은 거부합니다.
이건 상대를 운명이라는 관념으로 억압할 소지가 있고 그전에 그따위 운명은 나를 제어하고 통제하며 억누르는 것이며 자유도 아니고 주체도 아닌 노예로 만드는 것 이상은 아닙니다.
신이나 섭리나 초월적인 그 무엇이 나를 얽어매는 그 어떤 것에도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 할진데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은 역시나 허접한 시도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이건 이해하는 것부터 쉬운 게 아닙니다.
사랑은 운명과 필연이라는 이유로 상대를 자기의 소유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많으니까요.
정치인들이나 기업의 재벌들은 자기들의 명령에 의해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를 바라는데 이건 당연히 자기가 필연의 이유가 되기를 바라는 허접한 자들입니다.
신마저도 단호히 거부하는데 그따위 인간들이야 생각할 게 없죠. 즉, 필연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필연은 내가 이해하는 사물의 법칙입니다. 내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며 관법이고 세상 이치를 이해하는 그 방식대로 필연인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나 사실을 설명해야 하고 또 나에게 이해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어떤 논리를 만들어야 하고 합당한 원인과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런 능력을 배양하는 게 교육입니다. 또 자천입니다.
다른 사람이 납득하고 이해한 것을 배우는 게 아니라 내가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고력과 사고전개력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것입니다.
남에게 내 의사를 말하고 사물을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지 남에게 굴복하고 남의 것을 외우는 것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답을 외우는 게 아니라 나름의 논리와 근거로서 자기가 보는 방식이 있으며 그것을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익히는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를 찾는 것이야 우리들의 기본 욕망이지만 또 한편으로 상대적으로 지금 눈앞의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어떤 방법으로 자기의 주장을 펼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나와 의견이 다르고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더라도 그것이 논리적으로 완벽하다기보다 나름의 체계에서 그럴듯 하다면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편적인 것은 어느 정도이지 절대성은 없기도 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내 의견을 주장하기 전에 타인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아량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아량을 가지기 위해선 나 역시 엄밀하고 깊은 견해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하면 열등감과 피해의식으로 고집과 편벽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자신감은 내가 알고 보는 세계가 있으며 그만큼 내적 쌓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자신감이 나옵니다.
우린 서로 더 나아지려는 욕망으로 보편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니 서로 도울 수 있어야 하며 경쟁은 선의가 됩니다.
근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도구적인 이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욕구에 해당하는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성을 말하는데 물론 위의 나에 의한 필연이라는 것도 도구적 이성이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성의 능력으로 자기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구분해야할 것이 자기의 권익을 보호하고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필연을 정해가는 것은 틀린 건 아니지만 자천에서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천은 내가 성장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이익을 위하는 것은 궁극적으론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당장의 이익이나 이생만의 이득을 위하는 것이 자천은 아닙니다.
자천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되는데 다양한 차원과 공간과 시간에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살아서만이 아니고 죽어서도 통해야 하고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나 세상 전체나 신관들에게도 통해야 하고 오랜 시간을 지속할 있는 것이어야 하겠죠.
그런 진리에 가까운 것을 위하는 것인데 당연히 멀고 깊이 보면서 이성을 써야 하고 필연을 구해야 하겠죠.
즉, 근시적인 이기적이기만 해선 안 되는 길입니다. 또 성장을 위해 기만적인 이타성도 안 됩니다.
이기이타의 본의를 가지는 게 진짜이며 진짜만 통합니다. 이성으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용하든 욕구 자체를 비판하며 어떤 욕구를 해야 옳은지 고민하든 이성을 사용해서 자기를 위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 자기라는 것의 의미가 물론 관건이지만요.
어떤 방법(도덕적인), 어떤 것을 위해,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고 자천에 맞는 것이지만 처음부터 이런 것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다 달라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점점 나아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빠르면 좋지만 맘대로 되나요.
보편적인 사실이나 법은 없다고 보고 사고를 진행하는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에 의해 또는 내가 보기에 섭리나 숙명처럼 보이는 것들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이해 못하고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이지 그것이 보편이거나 절대이어서는 아닙니다.
나보다 강하고 위대하다고 해서 절대성을 인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강한 건 그냥 나보다 강한 것입니다.
내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이유나 이 세상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거나 하늘을 원망하고 신을 탓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그러한 초월적 압도적인 힘에 의한 절대적 법칙은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알아내지 못하는 견해가 부족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헷갈리면 안 됩니다.
이런 필연을 즉, 자기의 신념을 견지할 수 있는 견해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런 학문과 교육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천이 됩니다.
근데 학교에서처럼 시험이라는 필연을 위해 공부시키면 안 됩니다. 필연은 내가 만들어야 하는데 남이 주는 필연을 위해 내가 공부해야 하는 노예가 되게 해선 안 됩니다.
공부하는 이유는 나에게 있어야지 나 아닌 다른 것에서 오는 것이면 안 됩니다.
내가 필연을 찾고 그것을 위해 즐겁게 나아가는 자유를 가지며 살고 싶습니다. 또 보상이나 대가를 가지고 유혹하면서 회유시키는 것도 역시 안 됩니다.
이러한 내가 원하는 욕구인지 길들여지거나 남에 의해 욕구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있어야 하고
갖은 교묘한 술책을 알아내는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선택하고 분별하며 판단하는 능력을 교란하고 알아보지 못하게 하면 이미 인간으로서 자유의지는 사라진 것입니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바른 것인지 무엇이 의인지 스스로 알아내지 못한다면 이미 끝입니다.
그럼 우연은 뭔가요? 아마 이유 없고 원인 없는 마주침이나, 만남이나, 곁에 있거나, 이어져 있는 것이고, 내적인 이유를 가지지 못하고, 다른 것에 의지해서 있거나,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들일 거 같습니다.
나에게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것, 하지만 우린 우연히 일어난 것에서 의미를 주면서 필연을 찾아냅니다.
난 알면 필연이고 모르면 우연이라고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우연이 많다는 것은 자기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만큼 적다는 것이 됩니다.
또 그만큼 이해력도 부족해서 자기주위의 몇 가지를 제외하면 세상의 많은 것의 의미와 이유를 이해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 만난 지하철에서나 길거리에서의 많은 사람들이 대개는 우연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것을 우연이라는 것으로 밖에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 없어서입니다.
우연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그럴만한 이유와 원인들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니까요.
내가 비올 때 맞은 빗방울의 숫자가 우연일까요? 내가 오늘 스쳐지나간 많은 사람들의 숫자와 그 사람들의 만남과 그들의 옷이나 표정이나 길가의 돌, 흙, 먼지들이 모두 우연일까요?
이런 것도 내가 그러한 것의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런 것의 이유를 알 수 있다는 건가요?
글쎄요. 설명하라고 한다면 그럴만한 당위를 나름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왜냐하면 내가 이해하는 지식의 범위와 깊이와 방법과 원인과 근거라는 것과 목적이라는 것과 시공간적인 오고감과 너무도 다른 이해를 하니까 설명하기도 또 이해해주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그래도 조금씩 설명하기 위해 지금 이렇게 설명하고는 있습니다.
필연이라는 것이 내적 이유만 있으면 되고 의미를 내가 주는 것을 말한다고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요?
내 위주로 주위 모든 것의 그 자리와 그 시간에 있어야 하는 시간적인 소급과 형성되어간 유래들을 설명할 수
있으려면 내가 얼마나 다양한 방법과 범위에서 사물을 설명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견해를 가졌느냐 이고 또 관념형태도 얼마나 자유롭게 파괴와 재구성을 할 수 있느냐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걸 이용해서 필요에 따라 해체와 구성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감정과 관념도 다른 것으로 해체해서 재구성해봐야 합니다. 그것도 필요에 의해 해야 합니다.
어떨 때 우연이고 어떨 때 필연인지 명확하게 인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연과 필연은 같은 것인데 귀찮으면 우연이고 집중해서 뭔가 알려고 한다면 필연이 됩니다. 평소엔 다 우연입니다.
다만 필연이어야 하는 이유가 생기면 필연입니다.
사람들은 내적으론 필연이고 외적으론 우연입니다. 난 내적으론 우연이고 외적으론 필연입니다.
난 모든 게 우연인데 필연이라고 강요해 옵니다. 이게 남과 다른 점입니다. 즉 난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해야 할 뭔가도 없고 이루어야 할 목적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연입니다.
하지만 외부에선 이런 저런 것으로 나에게 이어지며 끊어지지 않으려고 항상 요구해 옵니다. 거기에 난 따르지만 내면에선 상관없습니다. 더 자세한 현실적 상황에서의 우연과 필연의 구분은 자기가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러한 내 입장에선 우연이나 필연도 하나의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관점이지 이런 개념자체가 없어도 별 아쉬움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즉, 자유롭지 않고 스스로를 억압하기 때문에 항상 다가오는 삶을 필연으로 만들며 힘들어합니다.
난 항상 바뀌고만 있어서 아니면 바뀌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는 상태로만 있어서 정체가 불분명하니 다가오는 것이 나를 억압하며 어떤 모습과 정해진 형태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것의 필연성이 근거 없고 무의미하며 나에겐 우연뿐이라서 별로 상관없습니다.
하나의 예로 난 수염을 기릅니다. 아니 깎지 않습니다. 아니 깎기도 하고 안 깎기도 합니다. 아니 애초에 수염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내 얼굴에 뭔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어느 정도 길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안 깎는다는 개념으로 사람들은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남들은 그걸 소재 삼으며 말하거나 관심을 보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깎아야 한다는 필연을 주려고 합니다. 길러도 된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르거나 깎는 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는 듯 하지만 이미 너무도 깊숙이 자유롭지 못하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내가 자천을 가르치면서 보니 참으로 어이없는 게 많습니다. 도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더 자유롭지 못합니다.
뭐가 그렇게도 깊이깊이 길들임을 당한건지 일반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상식이고 규제이며 윤리관이며 사고형식이 참으로 우려스러웠습니다.
난 신보다 절대자보다 그런 길들임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확인하며 길들이고 있는 힘이 무섭고 위대해 보입니다. 난 신이 부러운 게 아니라 그것이 부럽습니다.
그래서 질투 나서 그것과 싸우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데 재미있는 건 아무도 이런 맘을 모릅니다.
도를 위해서? 세상의 이로움을 위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이타? 자비? 이런 말도 길들여져 있는 그 관념을 이용해서 한 말입니다.
이런 말하면서 난 속으로 웃어요. 난 항상 상대가 길들여져 있는 그것을 이용해서 말하니까요. 그만큼 철저히 길들여져 있습니다. 길들여져 있는 게 뭔지도 모릅니다. 아니 안다고 말합니다. 그게 더 무섭습니다. 안다고 하면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안다고 하는 사람은 더는 바뀔 생각이 없다는 거니까요. 길들여져 있다는 걸, 아는 것이 이미 길들여진 걸 모른다는 역설이 됩니다.
그런 반응이 너무 규칙적이니까요. 이보다 더 무서운 건 길들여져 있다는 것도 알고 자긴 그래서 안 그러려고 한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건 사람을 좌절시킵니다.
아! 예~ 이게 내가 그럴 때 하는 대답입니다. 안 그러려고 했는데 왜 아직 그러고 있는지요? 어째야 하죠?
내가 힘들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그게 가슴이 아파서 몸이 힘들어서 삶이 고단해서 고통스러워서가 아닙니다. 내가 길들여져 가고 있는 게 힘듭니다. 나도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다보니 대부분 그들은 나를 길들이려고 합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게 맞다. 저게 맞다. 이거 해야 한다. 저거 해야 한다. 이건 뭐에요. 저건 뭐에요. 왜 그렇게 하세요? 이런 거 입어요. 저런 거 먹어요. 사랑해서, 나를 걱정해서, 나를 위해서, 이런 이유를 대면서 길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힘든 건 사람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니까요.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긴장해야 하고, 존중해야 하고, 노력해야 하고, 뭔가 해주어야 하고, 이렇게 항상 사람에게 맞추어서 나를 변형시켜야 하니까요.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야 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고 난 항상 남이 원하는 대로만 합니다.
하지만 이건 겉으로 보이는 정도이고 또 단기간의 일입니다. 내가 내적으론 우연이어서 자유롭고 아무것도 없지만 이미 정해놓은 내부와 외부가 있고 미래의 일이 있습니다. 즉, 난 꿈을 꿉니다.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필연으로 나를 이끌어갑니다. 내가 만든 필연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내가 그들을 필연으로 옭아매고 있기도 합니다. 필연은 미래를 오게 하는 힘도 되니까요. 그러한 의미로 나에게 오라는 요구입니다.
내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지금은 아무것도 안하는 듯합니다.
음흉함일 겁니다.
현일 박재봉 著 [땅인사람 2]
p60~67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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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다람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8.14 이런 글도 있네요...잘 이해가 안되지만, 뭔가 중요한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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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효진 작성시간 15.08.15 난 알면 필연이고 모르면 우연이라고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본문
언어의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해 이해하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로 봅니다.
그런데 시종에서 분명한 의미로 사용하는 언어를 임으로 그 뜻을 바꾸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동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필연과 우연은 분명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필연은 분명한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이 됩니다.
우연은 분명한 원인과 결과가 없습니다.
불교에서 우연과 필연을 설명하는 이유는
일체법은 우연이나 필연이 아닌 연기인 인연에 의해서 임을 밝히기 위해서 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다람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8.16 윗글은 불교와 관련이 없는 사람의 글입니다. 불교의 잣대로 볼 수도 있으나...글 그대로 의미가 있지 않은지요...
그렇게 해야만 하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좋은 지적으로 보입니다.
아마 그것까지 밝히지는 못한거로 보입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사람에게는 각자의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타인에게는 틀렸다고 보일 수가 있으나, 당사자에게는 쉽게 바꿀 수 없는 수도 많다고 보입니다.
이 때에 서로 어떻게 그 문제에 접근하느냐!가 인간관계의 관건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진리를 아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중요하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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