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루나 칼럼 >
[나의 금강경 공부 21]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나니
글 |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금강경>(제11분);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하여 설명해 준다면, --- 이게,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금은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해서 얻는 복덕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고 부처는 말씀하셨다.
금은보화 한 주먹만 보시(布施)해도 엄청나게 많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우주에 가득한 금은보화를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많은 복덕을 받게 해준다는 4구게(四句偈)가 있다고? 그 사구게는 도대체 무엇일까?
복덕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해탈의 길로 인도해주지 않는다. 복덕을 많이 받으면, 죽은 후, 천상에 태어나거나 혹은 좋은 운명을 갖고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열반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복덕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 생과 사의 윤회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생사(生死)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남은 노병사(老病死)가 있기에 태어남은 고통이다. 다시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해탈해야만 한다. 사구게는 해탈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해주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사구게가 우주에 가득 찬 금은보화로 보시하는 것보다도 더 좋다는 것이다. 복덕도 좋지만 해탈을 하도록 부처는 우리에게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사구게
금강경 제5분: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
왜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이, 혹은 모든 형상이 다 허망하다고 했을까? 그리고 모든 형상이 다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곧 여래를 본다고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불교에 삼법인이라는 게 있다. 1) 일체는 무상(無常)하다. 2) 일체는 고(苦)이다. 그리고 3) 일체는 무아(無我)이다.
일체가 무상하다는 것은, 모든 것은 변치 않고 항상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해간다. ‘나’라는 실체가 없기에 또한 나도 변해간다. 내가 엄마 자궁 속에서 인연 따라 태아가 되었다. 그리고 태어났다. 태어난 후 소위 ‘나’라고 하는 나는 항상 변해왔다. 30이 되고, 60이 되고 80이 되었다. 30의 나하고 태아의 나하고는 다른 것이다. 60 때의 나하고 30 때의 나 또한 다른 것이다. 태아하고 30세하고는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라고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령 씨가 나무로 자랐을 경우, 씨하고 나무는 같지 않으면서도 또한 다르지도 않다. 불교에서는 연속성을 말한다. 태아하고 30, 60, 그리고 80은 연속되어 오면서 항상 변해오고 있는 것이다. 변치않는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기에 부처는 무아(無我)라고 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은, 해탈해놓고 보면, 다 허상이라는 것이다.
천국에 갔다 온 사람들
절벽에서 떨어졌거나 혹은 심장마비가 생겨 의식을 잃은 경우가 있다.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리고 살아난다. 의식에서 회복된 후, 어떤 사람들은 그 사이에 천국에 갔다 왔다고 보고하는 사람들이 있다. “천당에 갔다” 온 사람들이 쓴 책을 읽어보았다. 천당에 가서, 예전에 죽었던 부모며 조부모며 친구들을 천당에서 만나보았다고 보고한다. 이처럼 ‘나’라고 하는 변치 않는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 더러 많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천당에 갔다 왔다는 그 자체가 허망인 것이다. 천국에서 만나보았다는 사람들이 또한 다 허상인 것이다. 태아였었을 때의 ‘나’가 지금 현재의 ‘나’가 아니듯이, 우리가 죽고 난 후 천당에 가 있는 ‘나’라는 형상은 지금의 ‘나’하고 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 천당에 있는 ‘나’는 다른 형상으로 생겼을 것이다. 결코 지상의 사람들이 전연 알아볼 수 없는 다른 형태의 형상일 것이다. 우리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듯, 전생에 같이 살았었던 사람들을 지금 우리가 서로 알아보지 못하듯, 천당에 가면, 지구에서 살았었던 우리라는 것을 서로 기억하지 못한다. 천당에서 자기 부모를 만났다는 것은 다 허망이고 허상인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천체
영어로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말이 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믿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옳은 말인지? 한번 따져 보자.
우리 눈에 태양이 아침이면 뜨고, 그리고 중천을 지나 저녁이면 서산으로 넘어간다. 우리 눈에는 분명히 태양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일평생 살아오면서 지구가 움직이는 것을 전연 느껴본 적이 없다.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항상 조용히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천체과학자들은 내가 느끼는 것하고는 정반대로 말을 한다. 내 눈에 움직이고 있는 태양은 안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지구가 오히려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태양은 가만히 한 자리에 있는데, 지구가 스스로 뱅뱅 돌면서 오히려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막힌 사실인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보이는 것이 오히려 허상이고 망상인 것이다.
태양은 우리 눈에 농구공 정도로 작게 보인다. 그런데 실제는 지구보다 엄청나게 크다. 태양의 크기는 지구 109개를 옆으로 나란히 놓아야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태양의 부피는 130만개의 지구가 차지하는 공간과 같다고 했다. 밤에 보이는 별들도, 우리 눈에 아주 작게 보인다고 해서 아주 작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별들도 태양 못지않게 엄청나게 커다란 항성인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하늘천정이 하늘 끝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 눈에 보이는 하늘 천정을 너머서, 훨씬 더 넓은 하늘이 무한히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우주는 아직도 끝이 없다고 했다. 지금도 우주는 태양빛의 속도로 매순간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주도 태어난 이상, 어느 땐가는 또한 없어져버릴 날이 올 것이다.
태양도 매일 변해가고 있다. 태양이 46억 년 전에 생겨났다. 태양이 생겨남과 동시에 태양계가 생긴 것이다. 64억년이 지나면, 태양의 표면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할 것이라고 천체과학자들은 말한다. 78억년이 지나면 태양의 수명이 다한다. 태양도 죽어 없어져버린다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태어난 것, 만들어진 것, 생겨난 것, 모든 것들은 한번 만들어졌으면, 인연 따라 어느 땐가는 꼭 없어져버리는 것, 이게 바로 무상(無常)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이, 지금은 형상이지만, 따지고 보면 다들 비어있는 허상일 뿐이다.
청담스님의 설법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열여섯 글자 안에 금강경의 핵심은 물론 반야 6백부 전체의 뜻을 유감없이 표현했다는 뜻에서 반야제일게라고도 합니다. 그 게송의 뜻은 “모양으로 있는 모든 것,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이 모든 현상이 상(相)이 아닌 줄을 직관할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고 마음을 깨친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무릇 있는바 모양(凡所有相)이란 현상계를 말하고, 이때에 현상은 모든 생각, 안 보이는 모든 것까지 다 포함해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만분의 1초도 가만히 있는 것은 하나로 없습니다. 질량변화를 쉴 새 없이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믿을 수 없는 허망상(虛妄相)입니다. 이것이 다 우리의 맘을 속이는 것입니다.(皆是虛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로구나.”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육신인 나는 가짜입니다. 앞으로 계속 얼마나 살아 있을지 그걸 생각하고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착하게 됩니다. 남편이 작은 여자를 얻어 속을 썩이더라도, “누가 먼저 죽을지 모른다. 내가 전생에 남편에게 속을 썩여서 나에게 복수하는 것이니, 달게 빚이나 갚자.” 이렇게 자꾸 생각하면 이게 곧 지혜입니다. 이것이 곧 사람이 배워야 할 지식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면 모든 것이 상(相)이 아닌 것으로 보게 됩니다.(若見諸相非相). “이 세상에 미련이라고 남을만한 사건이란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허망인 줄 아는 것이다. 그러면 곧 여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마음자리가 없어지도록 육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육체와 무서운 연애를 한 셈입니다. 그 어느 누구한테 어느 무엇에게보다도 다시 없이 이 몸뚱이를 소중히 여겨 아끼고 거두고 하루라도 더 살리려고 합니다. 몸뚱이는 ‘나’가 아닙니다. 곧 자기를 자꾸 정리해서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육체의 생각을 정리하면 마음자리를 발견합니다.(卽見如來).
무비스님의 <금강경 강의>
무릇 있는바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합니다. 세상만사가 허망한 것은 보통 사람들도 다 느끼는 바입니다. 이 세상 만물은 다 인연으로 잠깐 얽혀 있습니다. 분해하면 실체가 없어집니다.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육신이 뿔뿔이 흩어지듯이, 컴퓨터도 여러 가지 부속품을 다 하나하나 분해해버리면 없어져 버립니다. 공(空)을 이해하는데 크게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현상만 보는 것은 중생 소견입니다. 설명을 듣고 나름대로의 사유(思惟)를 통해서 공을 이해하는 이는 소승의 성문 연각입니다. 문화재 감별사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척 알듯이 보자마자 공인 줄 아는 것이 대승보살입니다. 모든 형상에서 형상 아닌 것으로 보는 중도정견(中道正見)으로 여래를 본다는 것은 대승 보살의 안목입니다.
‘세간은 공이다’라는 부처의 말씀
아난다가 부처님께 물었다. “세간은 공이다”라고 말씀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부처는 다음처럼 대답하셨다.
아난다야, ‘나’와 ‘내 것’이란 완전히 없기 때문에 세간을 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와 내 것이 완전히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가령 눈은 ‘나’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다. 빛 곧 형체 있는 물건은 나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다. 눈의 알음알이(識)는 나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근(根-눈)과 경(境-물체)과 식(識)과 식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는 촉(觸)도 나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다. 촉에서 생기는 수(受-감각)도 나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다. 그 밖이 귀· 코· 혀· 몸· 뜻과 그것들의 경(境)과 그것들의 식(識)과 또 그 셋의 화합인 촉과 감각도, 모두 나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나와 내 것은 완전히 없다는 이유에서, ‘세간은 공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우리말 팔만대장경”에서)
꽃이 아름답다. 내 눈에 꽃이 아름답게 보인다. 내 눈에 보이지만, 꽃은 나도 아니고 또 내 것도 아닌 것이다. 저기 있는 집, 얼마나 멋지게 지어졌는가? 그런데 저 집이 내 눈에 보이지만, 저 집은 나도 아니고 그리고 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세간은 공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창·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창·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다.” 이 말은 영가스님(665-713)이 지은 <증도가>(證道歌)의 41번 구절입니다.
다음은 성철스님(1912-1993)의 해설입니다.
도를 성취하면 칼과 탕으로 목을 천번 만번 끊는다 해도 항상 태연하여 조금도 겁낼 것이 없어 대자유자재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구마라집(344-413) 스님의 제자에 승조(384-413)법사가 있습니다. 승조법사의 자격과 재질이 특이하고 뛰어났으므로 그 당시 요진(姚秦)나라 임금이 승조법사를 환속시켜 재상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스님이 머리를 기르고 재상이 되어 정치를 한다면 천하에 명재상이 되어 백성들이 편안할 것이니 환속해서 부디 재상직을 맡아 주시오.”
하지만 승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재상이 다 무엇이냐! 일국의 재상이란 꿈속의 꿈이고 어린애 잠꼬대 같은 소리다. 나는 무상대로를 얻어 영원토록 자유자재하여 일체 중생을 위해 살 뿐이다.”
임금이 아무리 권해도 듣지 않으므로 마침내 스님을 옥에 가두러버렸습니다.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라고 위협을 했습니다. 그래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나중에, 왕이 정말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안 승조법사는, “나를 꼭 죽이려면 일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그는 <보장론>(寶藏論)이란 책을 한 권 썼다. <조론>(肇論)이라고도 한다. 그 문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불법의 진리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 팔만대장경에도 들어 있는 책입니다. 일주일 뒤에 형틀에 올려놓고 죽이려 하니 게송을 읊었습니다.
사대(四大)는 원래 주인이 없음이요
오음은 본래 비었음이라
머리를 흰 칼날 아래 내미니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 같도다.
자기로서는 사대가 주인이 없고 오음은 본래 비어 일체가 다 공함을 깨쳐서 불생불명하고 쌍차쌍조한 대도(大道)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허공은 열 번 쪼개고 부술 수 있어도 자기는 죽일 수 없다는 것이며, 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칼로 천번 만번 내리쳐도 자기한테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창과 칼을 만날지라도 항상 탄탄하다’는 것은 승조법사의 이러한 경계를 말한 것입니다.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뜻만이 아니라, 자성을 깨치면 영원토록 손익이 없고 생멸이 없는 경계를 ‘항상 탄탄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성을 확철히 깨치면, 허상만 죽을 뿐 ‘참나’는 죽지 않는다고 성철스님은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무아가 아니라 자아(참 나)라는 게 있다는 말일까? 불교는 ”있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없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승조는 도를 깨치신 분이니까, 열반에 들어가셨을 것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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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진보문사모 작성시간 22.05.22 형상이 있는 불교 게시판이 허망하면 글을 쓰지 말아야합니까?
불교라는 종교는 형상이 없어서 허망하지 않을까요?
불교가 허망하다면 다른 종교로 가야 합니까?
불교교리도 다 허망하면 ,,, 뭘 어케 해야 하는지요?
불교교리가 철학적으로도 벗어난다면 그것을 바보 잡는게 불교학자들이 해야하는 사명입니다.
허망한건 중넘들이 억대 도박을 하고
중넘이 목탁을 두드리니까 동네 사람이 시끄럽다고하자 때려죽렸지요.
침 허망한 중넘 입니다. -
작성자진보문사모 작성시간 22.05.23 기독교 삼위일체에 의하면 예수는 신이될수 있고 우리는 신이될수 없다면 이것은 진리가 아님니다.
진리는 수만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게 진리이지요. 잎은 파랗고 태양은 뜨겁다. 해에 안가보아도 누구나 아는 진리 입니다.
그러나 예수 한사람만 신이될수있고 우리는 될수가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님니다.
이런 상식에서 밧어나는 교리들이 사람을 이중인격으로 만듬니다.
잘못된 교리들을 뒤집어엎으려면 전체를 개혁해야하니 못합니다.
그러나 비판은 새로운 현실적 실질적 상식에 맞는 교리 철학을 만들어 나갈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