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 주인공이란 말이 아트만이라고 비판하는 강병균씨가 보아야 할 경전
노랑
강병균이라는 분이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
잘 사용하는 '참나', '주인공','본래면목' 이런 말을 사용했다고
선사라는 사람들이 아트만에 쩔어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글이 많치만 몇개만 가져 왔습니다.
[그러면 참나는 常住不滅(상주불멸).不生不滅(불생불멸).永生不滅(영생불멸)의 실체가 된다. 이것이 바로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이다. 부처님이 극렬하게 비판하는 아트만이다. ; 강병균 글에서]
[혜국 스님은 다음과 같이 '主人公'론을 펼쳤다. (유튜브 14원각경 제6청정혜보살장 참조)
"寂滅(적멸)의 세계는 惺惺寂寂(성성적적)의 세계이다. 깨어있고 고요한 그 자리를 깨달으면 부처이며 누구나 그 부처를 모시고 있다. 寂滅(적멸)은 이름이 끊어진 자리이다.地水火風(지수화풍)을 빌려 만든 몸뚱이나 虛空(허공)이 듣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듣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런데 분명히 듣고 있는 놈이 있는데, 그게 寂滅(적멸)이다. 우리 몸 안에 들을 줄 아는 놈이 있다. 누군가 듣고 있다. 몸뚱이나 귀가 아니다. 죽은 사람은 귀가 있어도 못 알아듣는다. 안에서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있다. 그게 寂滅(적멸)이다."
寂滅論(적멸론)과 唯我論(유아론.아트만론)이 뒤죽박죽된 주장이다. 우리 몸 안에 들을 줄 아는 놈이 있는데, 그놈이 적멸이고 그 적멸이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정확히 '機械(기계) 속의 幽靈(유령)이다. '몸이라는 기계' 속에 들어앉아 귓구멍을 통해서 듣는 '주인공이라는 유령' ! 또, 듣는 것이 緣起現狀(연기현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발언이기도 하다. 혜국 스님의 이 발언은 앞서 소개한 경봉 스님의 발언과 궤를 같이한다.
"참으로 나(참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昭昭靈靈(소소영영)한 그 자리'가 바로 곧 나의 몸을 運轉(운전)하고 다니는 運轉手(운전수)요 나의 '主人公'인 것이다."
즉 '주인공은 몸(기계)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사(유령)이다'라는 말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선사들은 혜국 스님과 경봉 스님같이 생각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불교가 唯我論(유아론)이 되어버렸다고 통탄하는 이유이다. : 강병균 글에서]
혜국스님이나 경봉스님이나 무엇인가를 전달하기위해 사용한 평범한 일상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참나', '주인공', 이라고 했다고 유아론자 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강병균씨는 무엇을 혼돈하고 있는 걸까요?
전재성씨 논문 '무아에 비추어진 자아' 글에 부합되는 좋은 내용이 있어 옮겨 왔으니 아래글을 보세요.
http://cafe.daum.net/mobuddhism/NNzs/614
무아에 비추어진 자아 / 전재성
... (중략)
초기경전에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속의 ‘그대 자신을 그대의 섬으로 하고 그 대 자신을 그대의 피난처로 하지 다른 누구도 그대의 피난처로 하지 말라.’는 경구가 있다. 이 경구를 불교에서 영원한 자아를 찾아내려는 사람들은 ‘자아를 등불로 하고 자아를 피난처로 삼으라.’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부처님이 이러한 말씀하게 된 맥락을 살펴보면, 여기서 말한 자신이나 자아라는 것은 감추어진 영원한 자아나 형이상학적인 불변의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여래’에게는 감추어진 사권이 없다는 것과 ‘내’가 승단을 이끌어간다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난다여,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나는 안팎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師拳)은 없다. 아난다여, 어떤 사람이 ‘내가 수행승의 승단을 이끌어간다’라든가,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지시를 받는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수행승의 승단에 관하여 어떠한 공표를 해야 할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나 여래는 이와 같이 ‘내가 수행승의 승단을 이끌어 간다.’라든가,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지시를 받는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여래가 수행승의 승단과 관련하여 어떤 공표를 하겠는가? …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말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말라.”
붓다가 아난다에게 전하려고 했던 가르침은 아주 명백하다. 너 자신을 섬으로 하라는 것은 감추어진 형이상학적인 자아나 아트만을 섬으로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일상적 의미의 자신이라는 말로 ‘지각과 더불어 의식이 있는 이 육척단신의 몸’을 뜻하고 그것은 곧 무아적으로 연기되는 정신ㆍ신체적 존재의 다발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까무라 하지메와 같은 학자는 위의 가르침이 ‘초기불교에서 아트만을 부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가 자신을 합리화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율장의 이야기였다.
붓다는 베나레스 근처의 우루벨라로 가는 길목 숲 속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어느 날 젊은 왕자 30여명이 젊은 아내들을 데리고 그 숲 속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 중에 결혼하지 않은 한 왕자는 창녀를 데리고 왔다.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동안 그녀는 귀중품을 훔쳐서 달아났다. 그들은 숲 속에서 그녀를 찾아 헤매다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붓다를 보고는 그 여인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붓다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들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을 때에 붓다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붓다] “젊은이들이여, 무엇을 생각하는가? 어느 것이 그대들에게 이로운 것인가?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인가?”
나까무라 하지메는 이 대화가 형이상학적 자아 또는 아트만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초기불교의 자아가 챤도갸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 ‘이 범천의 도읍지안에 있는 작은 연꽃을 한 주거지의 그 내부에 조그마한 빈터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아트만,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Chand-Upan. viii.3)라는 우파니샤드의 형이상학적 자아를 계승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논의했듯이 부처님은 명백히 형이상학적 자아에 대해 부정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우파니샤드적인 진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의미의 자아, 즉 ‘지각과 더불어 의식이 있는 이 육척단신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측면에서는 무아적 자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그러한 설법 다음에 부처님은 결코 아트만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으며, 단지 다르마에 대한 통찰이나 네 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와 같은 위빠싸나 수행을 강조한 것을 볼 때에 무아적으로 연기되는 정신ㆍ신체적 존재의 다발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의 자아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전재성씨 논문의 제목이 가르쳐 주듯이 '나' 란 우파니샤트 적인 아트만(진아)가 아니라
일상적인 자아 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경전을 보겠습니다.
<잡아함경 785> <M117>
어떤 것이 바른 소견인가. 바른 소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정견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견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속의 정견인가? 선행과 악행의 과보가 있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있고, 부모가 있으며,
세간에는 다음 생을 받지 않는 아라한阿羅漢이 있다고 보는 것이 세속의 정견이다.
어떤 것이 출세간의 정견인가?
훌륭한 제자가 고苦를 고苦로 사유하고,
집集을 집集으로, 멸滅을 멸滅로, 도道를 도道로 사유하되,
번뇌가 없는(無漏) 사유思惟에 상응하는 법法을 선택하고,
분별하고, 추구하면서 지혜롭게 관찰하는 것이 출세간의 정견이다.
何等為正見。謂正見有二種。有正見。是 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有正見。是聖.出世 間。無漏.無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為正 見有漏.有取。向於善趣。若彼見有施.有說。 乃至知世間有阿羅漢。不受後有。是名世 間正見。世.俗。有漏.有取。向於善趣。何等為正 見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 謂聖弟子苦苦思惟。集.滅.道道思惟。無漏思 惟相應。於法選擇。分別推求。覺知黠慧。開覺觀察。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sāsavā punnabhāgiyā upadhivepakkā?
‘Atthi dinnaṃ, atthi yiṭṭhaṃ, atthi hutaṃ, atthi sukat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
atthi ayaṃ loko, atthi paro loko, atthi mātā, atthi pitā,
atthi sattā opapātikā, atthi loke samaṇabrāhmaṇā sammaggatā sammāpaṭipannā
ye imanca lokaṃ paranca lokaṃ sayaṃ abhinnā sacchikatvā pavedentī’ti –
ayaṃ, bhikkhave, sammādiṭṭhi sāsavā punnabhāgiyā upadhivepakkā.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ṅgā?
Yā kho, bhikkhave, ariyacittassa anāsavacittassa ariyamaggasamaṅgino ariyamaggaṃ bhāvayato
pannā pannindriyaṃ pannābalaṃ dhammavicayasambojjhaṅgo sammādiṭṭhi maggaṅgaṃ [maggaṅgā (sī. pī.)]
–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ṅgā.
<M117>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Sammādiṭṭhiṃpahaṃ [sammādiṭṭhimahaṃ (ka.) evaṃ sammāsaṅkappaṃpahaṃkyādīsupi], bhikkhave,
dvāyaṃ [dvayaṃ (sī. syā. kaṃ. pī.) ṭīkā oloketabbā] vadāmi –
atthi, bhikkhave, sammādiṭṭhi sāsavā puññabhāgiyā upadhivepakkā;
atthi, bhikkhave, 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ṅgā.
6.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나는 바른 견해는 두 가지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가 있고,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가 있다."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sāsavā puññabhāgiyā upadhivepakkā?
‘Atthi dinnaṃ, atthi yiṭṭhaṃ, atthi hutaṃ, atthi sukat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
atthi ayaṃ loko, atthi paro loko, atthi mātā, atthi pitā,
atthi sattā opapātikā, atthi loke samaṇabrāhmaṇā sammaggatā sammāpaṭipannā
ye imañca lokaṃ parañca lokaṃ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ī’ti –
ayaṃ, bhikkhave, sammādiṭṭhi sāsavā puññabhāgiyā upadhivepakkā.
7.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보시도 있고 공물도 있고 제사(헌공)도 있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도 있고 과보도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화생하는 중생도 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선언하는,
덕스럽고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 ‧ 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있다.'라고 하는 것이
번뇌에 물들 수 있고 공덕의 편에 있으며 재생의 근거를 가져오는 바른 견해이다."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ṅgā?
Yā kho, bhikkhave, ariyacittassa anāsavacittassa ariyamaggasamaṅgino ariyamaggaṃ bhāvayato
paññā paññindriyaṃ paññābalaṃ dhammavicayasambojjhaṅgo sammādiṭṭhi maggaṅgaṃ [maggaṅgā (sī. pī.)]
–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ṅgā.
8.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마음을 가졌고 번뇌 없는 마음을 가졌으며
성스러운 도를 구족하여 성스러운 도를 닦는 자가 있으니,
그가 가진 통찰지, 통찰지의 기능, 통찰지의 힘,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 바른 견해,
도의 구성요소 - 이것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이다."
So micchādiṭṭhiyā pahānāya vāyamati, sammādiṭṭhiyā, upasampadāya,
svāssa [svāyaṃ (ka.)] hoti sammāvāyāmo.
So sato micchādiṭṭhiṃ pajahati, sato sammādiṭṭhiṃ upasampajja viharati,
sāssa [sāyaṃ (ka.)] hoti sammāsati.
Itiyime [itime (sī.), itissime (syā. kaṃ. pī.)] tayo dhammā sammādiṭṭhiṃ anuparidhāvanti anuparivattanti,
seyyathidaṃ – sammādiṭṭhi, sammāvāyāmo, sammāsati.
9.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바른 견해를 구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른 정진이다.
그는 마음챙겨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마음챙겨 바른 견해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그의 바른 마음챙김이다.
이처럼 이 세 가지 법이 바른 견해를 따르고 에워싸나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이다."
<잡아함 293 > <T 2, p. 83c, sūtra No. 293. (No Pali counterpart. For Skt. version, see Tripāṭhi, sūtra 11. CSA vol. 2, pp. 25-26; FSA vol. 1, pp. 563-564.)>
이와 같이 두 법이 있으니, 이른바 함이 있는 법과 함이 없는 법이다.
함이 있는 법이란 나기도 하고 혹은 머무르기도 하며 혹은 달라지기도 하고 혹은 소멸하기도 하는 것이다.
함이 없는 법이란 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으며 달라지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니,
이것을 비구의 모든 행의 괴로움이 적멸해져서 열반에 드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如此二法。謂有為.無為。有為者若生.若住.若異.若滅。
無為者不生.不住.不異.不滅。是名比丘諸行苦寂滅涅槃。
"These two dharmas are namely the compounded and the uncompounded.
"The compounded is arising, persisting, changing, passing away.
The uncompounded is not arising, not persisting, not changing, not passing away.
위 경전들은 정견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비록 번뇌는 있지만 '있는 것'을 ' 있다'고 말하는 세간의 정견과
또하나는 번뇌를 없앤 '무아'의 견지에서 보는 출세간의 정견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경전입니다.
여기서 노란줄을 친 것들이 세간의 정견인데 불교는 무아론이니
'있다'고 하면 유견에 빠진다 하면서 실체론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남의 다리 긁는 격 입니다.
한편, '참나', '주인공' 이러한 말은
'깨달아 진리를 얻은 나', '깨달은 마음' 으로 지극히 평범한 말로써 깨달은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을 깨달은 자로써 부처님을 '있다'고 인정하고 경배합니다.
그런데 강병균씨는
[참나는 常住不滅(상주불멸).不生不滅(불생불멸).永生不滅(영생불멸)의 실체가 된다.
이것이 바로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이다. : 강병균]
라고 '참나'를 실체론이라고 하는데 일반언어로
'깨달은 나는 영원하다', '열반을 얻은 나는 영원하다', '깨달은 마음은 영원하다'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즉, 스님들이 말하는 ' 참나, '주인공' 이란 언어는
[....그런데 분명히 듣고 있는 놈이 있는데, 그게 寂滅(적멸)이다 ; 혜국스님]
선정상태를 나름대로 전달하기 위한 '있다는 것'을 '있다'고 설명하는
세속의 정견으로써의 일상언어 일 뿐인데
[듣는 것이 緣起現狀(연기현상)] 이라고
출세간의 정견을 비유하며 아트만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본문의
[[붓다] “젊은이들이여, 무엇을 생각하는가?
어느 것이 그대들에게 이로운 것인가?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인가?”] 에서도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 했다고 아트만이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강병균씨는 번뇌를 없앤
출세간(무아)의 관점에서 평범한 일상언어를 이해하니 사단이 난 것 입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유명하다는 스님들을 비판한다는 우월의식이 더 많아 보입니다.
강병균씨의 이런 의도는 원글을 보면
참나 주인공 이란 말을 비판하기보다 스님들을 깍아내려는 의도가 역력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스님들을 비판한 과보는
분명히 따르리라 봅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한자선생 작성시간 18.12.16 모든 사람들이 다 종교관 인생관 생사관이 다릅니다.
강교수님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 생각대로 살면 됩니다.
강교수님 글을 올리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올리는 것뿐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다 각자 개인의지에 달려있습니다. -
작성자은정 작성시간 18.12.17 본인 말잔치거리로 선사/중생을 함부로 비방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 차이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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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12.17 사람은 다 자기 생각대로 살면 됩니다.
강교수님 글을 올리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올리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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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하고 글 올리시는 분이
수행이 깊으신
스님들을 땡중 운운하며
ㅉㅉ 거리면서 비웃고
욕하고 다니십니까?
님은 이 과보를 받을 것 입니다. -
작성자해공 작성시간 19.01.08 아비담마에 따르면 실제로 있는 것은 4가지 입니다. 즉 물질, 마음, 마음부수, 닙바나죠. 물질, 마음, 마음부수를 오온이라고 요약하면, 오온과 닙바나가 있을 뿐입니다. 닙바나의 체험은 수행의 정점이므로 체험하지 못한 입장에선 논외로 치더라도, 오온의 체험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오온은 너무나 빨리 생멸하고 있는데, 이런 생멸을 체험하는 것조차 엄청난 수행의 경지니까요. 제 견해로는 석존의 무아설은 이 생멸 체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관념이 유인책은 될 수 있지만 관념만으론 불법을 1도 깨닫지 못합니다. 제행무상이란 관념 지도를 그린 것과 제행무상의 체험은 전혀 다른 것이죠. 지도는 실제 풍경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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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6.02 각묵스님은 아비담마를 생명처런 여기시지만 아바담마, 아비달마는 부파불교의 한갈래로써 교리가
존재론적으로 설명되어 부처님의 정법과 어긋나요. 해서 청전도론, 구사론은 정법이 아니에요. 예로 이 논서들은 오온을 사람 인간으로 설명하는데 니까야나 아함경 어디에도 오온을 사람, 인간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오온은 중생의 5가지 번뇌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불교를 티파하기 위해 탄생한것이 대승불교이고
용수의 중론이죠. 용수는 아비담마가 애지중지하는 찰나설, 사연설 모두 문제 삼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