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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글제국스키일지

山 그리고 눈...

작성자파우더|작성시간05.03.04|조회수209 목록 댓글 17
웃기는 날씨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게끔 이곳은 요즘 해질 무렵이면 눈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거짓말처럼 눈이 그치구요...

오늘 아침 문득 창 밖을 보면서 눈이란 게 참 묘한 거로구나 하는 생각을 새
삼스럽게 했습니다. 복잡하고 지저분 해진 세상에 세례라도 하듯 모든 걸 덮
어주고 씻어 주는 게 눈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렇다면 내가 이제껏 저지른
죄의 사함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이런저런 생각들...

이곳 Tahoe에서 보내는 게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여기 있는 동안 모글을 등
안시 해서 오늘은 모글을 하루 종일 탈 요량으로 서울에서 가져 온 ogasaka를
들고 산에 올라 갔습니다.

오늘 산 위는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잔뜩 끼어서 거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
습니다. 게다가 간 밤에 온 눈으로 인해 모글들이 다 없어져 버리고-없어진 게
아니라 덮혀진 거겠죠- trail이건 off trail이건 전부 파우더로 변해있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곤돌라 옆에 오가사카를 세워두고 베이스까지 다시
내려 가서 여기 와서 산 armada를 들고 다시 올라왔습니다. 어차피 한국에
다시 돌아가면 모글을 탈 수 있을테니 마지막으로 파우더나 신나게 탈 생각을
하고 말입니다.

시야가 너무 좋지 않아서 문제이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즐겁게 스키를 탈 수는
있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게 끝도 없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어서 아무도 밟지 않은 말 그대로의 파우더를 찾아 스키
장의 경계까지 갔거든요.

제가 스키를 타는 Heavenly라는 곳은 북미에서 가장 큰 스키장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그런 데까지는 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넓은
산에 나 혼자 덩그러니 있다고 생각을 하니 겁이 날만도 했을 텐데, 그런 생각
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아무도 밟지 않은 파우더와 가슴 떨
리는 경사가 내게 손짓을 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Heavenly 스키장의 꼭대기는 10000 ft.가 조금 넘습니다. 대개 구름이 발 아래
포진해 있을 정도입니다. 그 높고 넓은 산과 가도가도 끝이 없는 파우더는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안개가 너무 많아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 빼놓고 말입니다.

사단이 난 것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1시간 정도 내려온 후였습니다. 더 이상
갈 길이 없는 겁니다. 왼쪽으로는 까마득하게 계곡의 물의 졸졸 흐르고 앞으로
는 더 이상 전진 할 수 없는 절벽이었습니다. 게다가 나무들까지 빽빽하게 들어
서 있더군요.

내가 길을 잃은 거로군... 하는 생각으로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를
궁리하며 주머니에 넣고 온 쵸콜릿을 하나 꺼내 먹었습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군...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물이 흐르는 계곡이니까 저것만 따라가면 밑으로 내려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
으로 계곡까지 절벽 같은 곳을 겁을 잔뜩 먹고 내려갔습니다. 계곡 가까이에
빽빽하게 자라 있는 조그만 나무들과 얼마 전에 산불이 났는지 타다만 나무들
이 쓰러져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스키를 신고는 더 이상 접근이 불가능 하더군요.

그래도 스키를 벗어 들고는 발이 푹푹 빠지는 눈과 잡목들을 헤치고 계곡으로
접근을 했습니다. 눈이 쌓인 산에서는 부츠를 신은 것보다 스키를 신는 것이 훨
씬 유리합니다. 하지만 끝까지 스키를 고집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정말 죽을 수
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과감히 스키를 버렸습니다. 지금도 내
armada arv는 그 이름 모를 계곡 근처 잡목들 사이에 버려져 있을 겁니다.
불쌍한 놈... 주인 잘못 만나서 거기서 썩겠구나...

계곡을 철퍽이며 걸어가다 자빠지다 별 쑈를 다 하면서 내려가는데 옷이 젖어서
무겁기도 하고 이러다 다치면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에 전화기를 꺼내들어
911에 구조요청을 했습니다. 근데 전화가 걸리는 순간 배터리가 엥꼬가 되데요.
참 설상가상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겁니다. 무슨 영화에 나오는
장면 같죠? 근데 실상은 더 절박할 수 있답니다.

혼자 헤쳐나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계곡 넘어 반대 편 산으로 올라가
상황을 보기로 했습니다. 계곡으로는 더 이상 전진을 할 수 없었거든요. 스키
부츠를 신고 암벽 등반 해 보신 적 있습니까? 전 오늘 해봤습니다. 어땠냐구요?
힘들죠 뭐...

나약한 인간이란 게 위기 상황에 직면을 하면 의례 하는 짓이라는 게 기돕니다.
한 번만 살려달라고 했죠 뭐... 웃기는 얘기지만 제 40여년의 인생을 되돌아 보
게도 됩디다. 사람이란 게 참...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건지...

목이 너무 말라서 눈을 좀 집어 먹었습니다. 거 뭐 맛이 그닥 나쁘지는 않습디다.
낑낑 대고 개고생을 하며 간신히 산 위를 기어 올라갔더니 아까 와는 비교도
안 되게 걷기에 편한 길 아닌 길이 나오더군요. 스키를 두고 온 건너 편 계곡을
쳐다보며 입맛만 쩍쩍 다셨죠. 그 와중에도 스키를 갖고 왔으면 여기서부터 또
타고 갈 수 있을 텐데 하며 말이죠. 근데 스키를 들고는 절대 올라올 수 없었습
니다.

헤매이다 해가 질 무렵에 구사일생으로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하고는 이
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도발이 받았는지 길이 나오더군요. 감사
합니다 했죠 뭐. 발 푹푹 빠지며 두 시간 좀 넘게 내려오니 차들이 다니는 길이
나오더군요.

나라도 개꼴을 한 놈을 보고는 차 태워 줄 생각 안 하겠다 하는 생각을 했지만
도저히 호텔까지 걸어 갈 수가 없어서 길 위에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
습니다. 옷은 젖었지만 주머니 안의 담배는 괜찮더라구요. 역시 프레데터는
훌륭한 옷입니다. 음...

길 위에 앉아 있는 꼴이 불쌍했는지, 어떤 mexican이 달달 거리는 차를 내 앞에
세워줘서 숙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저를 한참이나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더
군요. 나라도 그랬을 겁니다.

내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어보니 곤돌라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이라고 하더군요.
20마일이면 30킬로 정도야? 참 어이가 없데요. 도대체 산에서 헤맨거는 얼마
인 걸까요?

나중에 유럽이나 북미 쪽에 파우더 스키를 타러 갈 요량이시라면 꼭 ski school
에 mountain adventure라는 프로그램에 등록하셔서 거기 있는 instructor들과
같이 다니시길 권장하는 바입니다. 저처럼 길 잃은 개꼴은 하지 마시구요.
cat skiing은 가이드가 따라 붙지만 일반적인 스키장에서 off trail을 잘 못 들어
섰다가는 정말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길도 모르잖아요.

정말 잊지 못 할 하루였습니다. 창 밖에는 지금도 눈이 오네요...


p.s. 곤돌라 옆에 세워둔 ogasaka는 누군가 집어가겠죠. 스키장에 연락을 해보
니 위에는 아무도 없다네요. 난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타고 LA로 가야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연기를 할 수도 없고, 연기를 하자니 그 비용도 만만찮고... 이럴 줄
알았으면 에어한테 인심이나 쓸 걸...


p.p.s 근데 이거 여기다 써도 되나요? 게시판에 쓰는 건 웬지 X팔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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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조영민 | 작성시간 05.02.22 생각만 해도 정말 오싹~!!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ㅋㅋ
  • 작성자풀향기^^ | 작성시간 05.02.22 정말 간절히 간절히 하는 기도는 들어준다고 합니다. 고생하셨어요. 글을 읽는 동안 제가 마치 길을 잃은듯 무서웠는데 파우더님은 더 하셨겠죠! 모처럼 여행에 잊지못할 추억하나 남기셨네요 비록 구사일생의 이야기지만 말이죠 ^^ 남은 시간 좋은 여행하시기 바랍니다. ~
  • 작성자beemp | 작성시간 05.02.23 큰일 날뻔 했군요...마치 제가 10여년전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스키타다 절벽에서 떨어져 기절해 있던 것 같은.....ㅋㅋㅋ 시간이 지나면 즐거운 추억이 됩니다. 으음.....리노가 그나마 파우더님을 도와준듯....^^
  • 작성자바람둥이^^ | 작성시간 05.02.23 오.. 자갸~ 빨랑와~ 보고잡당~ ♡
  • 작성자바람순이^^ | 작성시간 05.02.23 오홀~ 정말 무서웠겠다...-_-;; 그때 그렇게 절박하고 죽을꺼 같은 상황에 옆에 연인이 같이 있었으면 더 힘이 났을지도 모르는데...아닌가? 연인을 보호해야하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까??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의 주인공은?? 혹시 파우더님 자갸~♡ ?? 흠... 대장님 자갸~♡ 무사히 귀국하셔서 용평에서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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