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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주검들 그 시간들 속으로가는 경주 왕릉답사(2)

작성자해누리(김복자)|작성시간11.08.26|조회수73 목록 댓글 8

 

 

 

 

 

 

 

원성왕(元聖王)!

휘는 경신(敬信)이고 내물왕의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며,

비(妃)는 각간(角干) 김신술(金神述)의 딸 연화부인(蓮花夫人: 淑貞夫人)이다  

 

김경신은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그 공로로 선덕왕 즉위시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후사가 없어 의논하든 중 왕이 족자(族子) 주원(周元)이 홍수로 알천(閼川)을 건너오지 못하자

이를 하늘의 뜻으로 믿은 대신들이 상대등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다.

 

위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인다.

주원은 태종무열왕의 6세손이다. 둘은 왕위다툼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주원이 아들 김헌창이 후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김경신(신라 38대 원성왕)은 왕이 되기 전에 복두(모자)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는

12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김경신은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라는 불길한 꿈 해몽을 듣고 불안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럴 때 여삼이라는 사람은 만나기를 거듭 청하여 "이는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여삼은 "복두를 벗는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라고 전혀 다르게 해몽했다. 

이야기야 어찌되었건,

기록엔 또하나 원성왕이 왕이 될만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다.
 

 

 

 

 

왕릉은 잘 정비가 되어 둘레에 세워 놓았던 담장도 헐고 주차장도 잘 정비해두었다.

방학을 맞이하여 많은 학생들이 문화유적 답사를 왔다.

우르르 몰려 다니면서 선생님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까만은

과연 해설사 선생님은 어떻게 아이들에게 전달을 하고 계실까?

 

원래 이곳은 곡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지만,

왕이 승하하자 이곳을 절의 자리를 옮기고 이곳에 왕의 릉을 세웠다고 한다.

 

물이 흘러 관을 걸어서 릉을 세웠다고 괘릉이라고 하는데,

절이 있을 당시에는 물이 없었단 말인가?  절도 그럼 물 위에 걸어 세웠던 절일까?

대게 절은 용이 놀던곳을 메우고 숯으로 덮어 절을 짓는 다는 전설이 비일비재한데

곡사는 그렇지않고 릉으로 바뀌면서도 물이 흘러나와 관을 걸었더란 말인지?

 

 

 

 

 

나란히 서 계신 문인과 무인이라고 한다.

무인은 서역인이라고 하고 문인은 신라인이라고 대게는 소개를 한다.

이를 달리보는 역사가의 주장은,

문인과 무인의 구분이 없고

우리가 문인이라고 하는 분의 관을 보면 관앞에 벌이 새겨져 있다.

 

 

 

"무인이 착용하는 대수장포(大袖長袍)라는 큰 소매를 간춘 긴 도포 차림을 한 데다,

갑옷을 걸쳤으며, 더구나 문인들이 휴대하는 홀(笏) 대신 무인들이 드는 장검(長劍)을 잡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이것이 무인상임을 최종 확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라에서 괘릉이 축조되던 그 무렵 중국 당나라 사회에서 이미 벌을 도안한 관이 사용되었으며,

더구나 이런 관은 무인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라에서 괘릉이 축조되던 그 무렵 중국 당나라 사회에서 이미 벌을 도안한 관이 사용되었으며,

더구나 이런 관은 무인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예컨대 1995-96년 중국 샨시성고고연구소(陝西省考古硏究所)가 발굴한

예종(睿宗)의 아들 장혜태자(惠莊太子) 묘에 그려진 벽화에서는

벌을 장식한 관을 쓴 사람의그림이 발견됐다.

나아가 7세기 초반 당나라에서 
"조정에 대봉무사(大蜂武士)와 중봉적강(中蜂赤强),

흑불량(黑不梁)이 있다"면서 "벌에는 독침이 있는데 이것으로 위험을 막으니

이런 까닭에 (벌이란 곤충은) 무사(武士)의 상징이다"고 했다.

이를 통해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벌은 무인의 상징물이었으며,

그런 까닭에 벌이라는 명칭을 활용해 무사의 계급을 나누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 박물관대학 삼족오님글 인터넷 발췌-

 

 

이런 주장을 보면서 우리는 아직도 그들이 문인인지 무인인지

신라인인지 서역인인지 중국인인지를 구분짓고 있다.

역사는 지금의 잣대로 이야기하면 안된다고 말을 하면서도 모든 기준은 지금의 잣대로 세운다.

 

 

 

 

 

 

 

 

 

 

 

 

내 기준으로 아무리 봐라봐도 나 또한 그가 신라인이라고 느껴지지 않으며,

그의 복장 속에는 칼이 숨겨져 있고, 뒷태는 무장의 복장이지 않은가?

 

 

 

 

 

 

 

 

 

 

 

 

 

 

 

 

담장을 없애고 나니 저 멀리 대나무 숲이 보이고 능역이 훨씬 넓어보인다.

능의 십이지신상중 말이 서 있는 곳이 정남향이라고 한다.

그 앞에서 멀리 대신들이 서 있던 즐비하게 서 있는 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좌를 빼앗았건,  차지했건, 만들었건, 명분을 세웠던...

그는 신라의 왕이라고 말한다.

 

 

발길은 다시 안강의 흥덕왕릉으로 옮기고자 한다.

 

 

 

 

 

 

구형동 방형분

 

어떻게 이런 네모난 무덤을 만들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십이지신상을 새긴것과 무덤의 구조와 형태로 볼때 이 무덤은 왕가의 분묘로 보는 견해가 많다.

 

 

 

 

 

입구가 열려 있는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안상이 새겨져 있는 석관을 볼 수 있다.

횡혈식석실묘의 내부를 잘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출입구로 들어가보며 신문왕릉의 門를 새겨두었던 갑석을 생각해 보았다.

그곳에도 이렇게 출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주인공이 사라진 빈 무덤을 두고,

우리는 시대를 논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발길을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흥덕왕릉으로 옮기기로 했다.

여름날씨임에도 시간이 늦은 관계로 하늘은 어둑 어둑 흐려지기 시작했다.

흥덕왕릉의 입구는 솔나무 숲으로 예쁘게 숨겨져 있는 릉같은 느낌이다.

 

답사지로 흥덕왕릉을 몇번을 오갔는지

으쓱한 저녁시간에는 또 다른 느낌이다.

 

 

 

 

 

신라 제42대 왕(826∼836)으로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수종(秀宗) 또는 경휘(景暉)·수승(秀升)이다.

헌덕왕의 동생으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金氏)이다.

할머니는 각간(角干) 신술(神述)의 딸인 숙정부인(淑貞夫人金氏)이다.

비(妃)는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 김씨(章和夫人金氏)로 즉위한 해에 죽으니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되었다.

 

 

해상왕 장보고로 하여금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고

당나라에서 차를 들여오기도했으며,

김유신 장군을 흥무대왕으로 추대하였다.

 

 

 

 

 

 

 

왕은 장화부인이 죽으니 시녀도 곁에 두지 안았다고 한다.

“외짝 새도 제짝을 잃은 슬픔을 가지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차마 무정하게도 금방 다시 장가를 든다는 말인가?”

 

쓸쓸한 무덤 앞에 서니 저멀리 왕릉이 빼곡한 안강송에 둘러쳐저 있다.

이릉은 왕후가 먼저 묻힌 후에 흥덕왕을 이곳에 합장한 릉이다.

릉의 구조나 형태는 괘릉과 많이 흡사하지만 많이 발전된 모습을 보이며,

릉 주위의 사자를 릉 둘레에 세웠다.

 

 

허리 굽어진 도래솔 숲속 천년의 사랑이 여기 누워있다.

살아 살아 생에서 못다한 사랑을 죽어서 이루는 영혼들이여!

죽음으로도 갈라 놓을 수 없는 사랑의 주검이여!

 

누구도 쉽게 근접할 수 없도록 도래솔로 이곳을 덮어놓고

문무를 겸비한 무장의 석상들이 이곳을 지키며,

석사자가 왕의 주위를 호위하고 있는구나!

 

사랑이여!

천년전에도

백년 후에도

영원할 사랑이여!

저 굽은 소나무 아래 펼쳐진 영원한 사랑이여....

애뜻한 사랑의 영혼이여...

 

 

서걱거리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낯설게 들린다.

스산한 주위의 바람소리..

저 높은 도래솔의 노래소리에 묻히고

주위는 아득히 멀어져가고

세상은 어둠으로 가는 시간에 우리도 발걸음을 현실의 세계로 돌아 온다

 

 

2011.8. 어느 여름날.

 

 

 

 

나 가거든 / 박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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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해누리(김복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8.29 좋은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 작성자백강(이상령) | 작성시간 11.08.29 엿장수님 팬이 또 늘었네... 잘 봤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해누리(김복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8.29 ㅎㅎㅎ 볼팬말잉교???
  • 작성자고답인 (6기, 최명수) | 작성시간 11.08.29 해누리님, 우리가 흔히 문인석으로 설명하는 석상이 무인석일 수 있다는 설명자료, 관심있게 잘 보았습니다. 좋은 내용이고 가설입니다. 신라왕릉 비정과 변화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신 분들의 글에서도 읽어본 적이 없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해누리(김복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8.29 아! 가설입니다. 인터넷글에는 많이 재기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두다가 가설입니다. 그렇지요???제가 쓴글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면 안될듯 합니다. 그저 저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놨을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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