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제탑(平濟塔)속의 백제(百濟) 호구(戶口)』 에 대하여
2021년 04월 23일
○ “부여(扶餘)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五層) 석탑(石塔)과 평제탑(平濟塔)”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整理)중이었는데, 마침 “대륙조선사연구회”를 방문(訪問)했다가 ‘백제(百濟)인구(人口)’에 대한 회원(會員)님의 글이 있기에 “평제탑(平濟塔)에 기록(記錄)된 백제(百濟) 호수(戶數)”에 대해 몇 가지 정리(整理)를 해 본 것이다. 혹시(或是)라도 오해(誤解)없으시길 바랍니다.
[1] 백제(百濟)의 망후(亡後)의 인구(人口)에 대한 기록(記錄)을 보면,
《三國史記.百濟本紀:國本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서는, “37군(郡). 성(城) 200. 76만호(萬戶)”》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서(唐書)를 따른 것이다.
《舊唐書卷四.本紀第四.高宗.上:八月庚辰,蘇定方等討平百濟,中略,國分為五部,郡三十七,城二百,戶七十六萬.中略. : 구당서(舊唐書) 본기(本紀)에서는, “37군(郡). 성(城) 200. 76만호(萬戶)》라고 하였다.
76만호(萬戶)라는 호수(戶數)는, 구(口) 380만(萬)∼418만(萬)【1호(戶)당 5∼5.5인】 정도(程度)의 백성(百姓)들이 있었다고 보아지는데, 봉건왕조(封建王朝)임을 감안(勘案)한다면, 이 숫자에 노예(奴隸), 또는 노비(奴婢), 천인(賤人)들은 포함(包含)되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구당서(舊唐書)’의 기록(記錄)과 ‘당(唐)과 신라(新羅)’의 공격(攻擊)으로 백제(百濟)가 무너지자, 많은 유민(遺民)들이 ‘고려(高麗), 돌궐(突厥), 말갈(靺鞨)’로 투항(投降)했다는 기록(記錄)에 따르면, 백제(百濟) 망후(亡後) 구(口)는, 최소(最小) “5백만(百萬)∼6백만(百萬)” 이상(以上)으로 추측(推測)할 수 있다.
[2] 『평제탑[平濟塔]』 이라고 하면, ‘반도(半島) 백제(百濟)’를 증거(證據)하고, 이를 증명(證明)하기 위한 것인데, 바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평정(平定)한 것을 기념(記念)하여 세운 탑(塔)이라는 뜻으로, ‘부여(扶餘)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五層) 석탑(石塔)’을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說明)하면서,
[평제탑(平濟塔). (명사) (고적)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을 달리 이르는 말. 탑의 1층 옥신에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이렇게 이른다.] 고 하였다.
● 그러나 ‘필자(筆者)’는, 『오히려 이러한 평제탑(平濟塔)이 반도(半島)백제(百濟)를 부정(否定)하며, ‘대륙(大陸)백제(百濟)’를 증거(證據)하는, 물증(物證)이 되어버렸다.』고 주장(主張)한다.
[3] 평제탑(平濟塔)의 비문(碑文) :〈大唐平百濟國碑銘:顯慶五年歲在庚申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洛州河南權懷素書〉의 내용(內容) 중에서
『凡置五都督卅七州二百五十縣戶卄四萬口六百卄萬各齊編戶 : 무릇 5도독(都督), 37주(州), 250현(縣)을 두고 “호(戶) 24만, 口 620만”을 각각 편호(編戶)로 정리하였다.』고 하였다. 【당서(唐書)에는, 37주(州)가 아닌 37군(郡)이라고 하였다.】
➊ 두산백과 / [백제의 인구와 사회구조]에서는 : 《즉, 1호당 5명 안팎이라는 평균치에 비추어볼 때, 24만호는 120만 명에 해당하는 수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5배가 넘는 620만 명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마침 『“육(六)자와 일(一)자”는 글자 모양도 유사하기에 620만 명은 120만 명의 잘못일 개연성이 높다.”』 고 설명하고 있다.》
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당평백제국비(唐平百濟國碑)]에서는, 《“호구는 74만호 620만에 달할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하였는데, 어디에 74만호가 있다고 하였는지, 알 수 없는 설명(說明)을 하고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설명(說明)하는 백제(百濟)의 인구(人口)에 대해서는, “대부분(大部分)이 불가능(不可能)하다”는 것에 초점(焦點)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제(百濟) 인구(人口)가 그 당시(當時) ‘구(口) 620만(萬)이었다.’고 하면, 신라(新羅) 역시 이에 비등(比等)했을 것이고, 고구려(高駒驪)는 이 보다 더 많았던 것으로 추산(推算)됨으로, 이 세 나라(三國)의 인구(人口)는, “2천만(千萬)”에 가까워야 하며,
이후(以後) 고려(高麗)가 통일환영(統一環瀛)을 이뤘으니, 반도(半島) 땅의 구(口)는, ‘수천(數千)만을 능가(凌駕)’했을 것이며, 수백(數百)년이 흐른,
고황제(高皇帝)의 조선왕조(朝鮮王朝) 전성기(全盛期)로 보는, 세종(世宗) 또는 성종(成宗)때에는, 상상초월(想像超越) 5천만(千萬)이상(以上)의 인구대국(人口大國)이어야 그 설명(說明)이 가능(可能)해진다.
그래서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어떻게 하든 호수(戶數)나 인구(人口)를 줄여 설명(說明)하려 하는 것이다.
●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말하는, 그런 가능성(可能性)이 있을까? 『결코, 절대로 그럴 가능성(可能性)은 없다.』고 필자(筆者)는 주장(主張)한다. 즉(卽),
[4] 『호(戶) 24만에, 구(口) 620만』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호(戶) 24만’이라면, 구(口)는,『1 호당 5명 또는 5.5명으로 계산하면 기껏해야 ‘일백(一百)만∼일백(一百)이십(二十)만’』이다. 무슨 놈의 6백2십만? “5도독부(都督府). 37주(州), 250현(縣). 성(城) 200” 이라는 숫자는 ‘폼’ 잡자고 만든 것이 아닌 만큼, 호수(戶數)는, “일백(一百)만”이 넘어야 가능(可能)한 수치(數値)다. 즉(卽)
“口 620만”이란 기록(記錄)은, 백제(百濟) 망(亡) 시를 말하는 것이다. 서력(西曆) 660 년(年) 8월 백제(百濟)가 ‘당(唐)과 신라(新羅)’에 의해 망(亡)할 때, 도처(到處)에서 치열(熾熱)한 전투(戰鬪)가 벌어져 전사자(戰死者)나 행방불명(行方不明), 고려(高麗)와 돌궐(突厥)등으로 투항(投降)한 백성(百姓)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기록(記錄)에 따르면,
『구(口) 620만(萬)』이란, 당시(當時) 백제(百濟) 땅에 실재(實在)했던 백성(百姓)들을 말하는 것일 뿐, “망전(亡前)의 인구는, 일천(一千)만이 넘었을 것이다.”라고 추정(推定)할 수 있다.
‘반도(半島)백제(百濟)였다.’면 : “경기도(京畿道) 일부(一部) 및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를 영토(領土)로 했던 백제의 당시(當時) 인구(人口)가 700-900만(萬)이상(以上)이 되었다고 했을 때, 고려(高麗)와 뒤를 이는 조선시대(朝鮮時代)의 “경기도(京畿道) 일부(一部) 및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 땅의 구(口)는 “수천(數千)만”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이로 보면 ‘반도(半島)백제(百濟)’란 말은, 희극(戲劇)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 인구(人口)속으로 들어가 보자.
[5] 『凡置五都督卅七州二百五十縣戶卄四萬口六百卄萬各齊編戶 : 무릇 5도독(都督) 37주(州) 250현(縣)을 두고, “호(戶) 24만, 口 620만”을 각각 편호(編戶)로 정리하였다.』에서 … …
“호(戶) 24만, 구(口) 620만”이라는 숫자는, 앞의 호수(戶數) “24만”이 잘못된 것이다. 【반도(半島)백제(百濟)를 만들기 위해 고의적(故意的)으로 훼손(毁損), 또는 글자를 삭제(削除)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당(唐)나라 때의 “1개 현(縣)”은, 대략(大略) 5,000호(戶)로 보고 있는데, 5,000호(戶)라면 : 620만(萬) ÷ 5,000호(戶)= “124만 호(戶)”가 된다.
이렇게 계산(計算)을 해보면, 24만호(萬戶)란, 124만호(萬戶)를 말하는 것이다. 즉(卽) “일(一)”자(字)를 삭제(削除) 또는 조작(造作)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또 250현(縣) × 5,000호(戶) = 125만호(萬戶)가 된다. 즉 ‘1만호(萬戶)’ 차이(差異)밖에 나지 않는다.
● 따라서 “호(戶) 24만(萬)”이란, “호(戶) 124만(萬)”이 올바른 것이다.
이에 대해 누구도 반론(反論)한다거나 고찰(考察)했다거나 하는 주장(主張)은 없고, 뒤의 “구(口) 6,200,000”을 이해(理解)할 수 없는 기록(記錄)이라는 식(式)으로, 매도(賣渡)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당시(當時)의 백제(百濟) “인구(人口)가 620만” 이라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拒否反應), 알레르기를 일으킬 정도다. 이걸 인정(認定)한다면 “반도(半島) 백제(百濟)는 없었다.”는 것으로 결론(決論)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현(縣)의 호수(戶數)는, 당서(唐書)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신당서(新唐書)지리지(地理志) :開元二十八年戶部帳,凡郡府三百二十有八,縣千五百七十三,戶八百四十一萬二千八百七十一,口四千八百一十四萬三千六百九,》하고 하였다.
즉(卽) “1” 개 현(縣)당 호수(戶數)는, “5,348”이다. 통상적(通常的)으로 봉건왕조(封建王朝) 때의 ‘1’ 현(縣)의 호수(戶數) 5,000호(戶)를 기준(基準)하고 있으며, 1호(戶) 당, 구(口)는 5∼5.5가 평균치(平均値)로 보고 있다.
● 따라서 위의 “24만(萬) 호(戶)”는, “124만(萬) 호(戶)” 되어야 정상적(正常的)이며, 〈戶 124만(萬) × 口 5 = 口 6,200,000 〉이 되는 것이다.
이를 “1개 현(縣) 5,000호(戶)”로 계산(計算)하면, 정확하게 “구(口) 6,200,000”이 된다. 이게 객관적(客觀的)이며, 합리적(合理的)인 논거(論據)가 될 수 있는 것이다.
[6] “반도(半島)백제(百濟)는 없었다.” 이게 역사적(歷史的) 사실이다.
여러 차례에 백제(百濟)와 관련된 해설(解說)을 이어왔지만, 백제(百濟)를 지칭(指稱)하여, 당(唐)때의 것으로 발굴(發掘)된 명문(銘文)속에서는, “택국(澤國)”이라고 했고, 또는 “남국(南國)”이라고도 했다. “택국(澤國)이나 남국(南國)”이 반도(半島) 땅이 될 수 있나?
또한 북로(北虜)는, 『수차례에 걸쳐 백제를 공격(攻擊)했으나, 실패(失敗)하자 드디어 수십만(數十萬) 기병(騎兵)을 출정(出征)시켜 설욕(雪辱)하려 했으나, 백제(百濟)가 길목을 차단(遮斷), 매복(埋伏)후, 기습(奇襲) 선제공격(先制攻擊)을 펼쳐, 북로(北虜) 기병(騎兵) 수십만(數十萬)을, 괴멸(壞滅)시켰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전하고 있다.
백제(百濟)의 유민(遺民)들이 돌궐(突厥)로 망명(亡名)했다거나,
‘신라(新羅)와 발해(渤海)와 말갈(靺鞨)’에 의해 그 땅이 나누어져 나라의 계통(系統)이 마침내 단절되었다.[而其地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國系遂絶]는 이야기는,
‘반도(半島)백제(百濟)’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말해준다. 즉(卽) “반도(半島)백제(百濟)”란 없었다.
2021년 04월 23일 [글쓴이 : 문무(文武)]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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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04.23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의 문집속에서는,
백제의 마지막 도성이었던 "부여"에 약 "15만여 호"가 있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5만여호'라면 '75만명 이상이 살고 있었던 대도회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헐적으로 나오는 조선왕조시대의 인구숫자는,
반도 조선이란 프레임을 깔아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
경주(동경) 역시 똑같은 사안으로 8세기에 일백만이 넘는 백성들이 살았다고 했을 때,
반도 경주가 그럴 만한 지형지세가 되는가? 하다못해 정황적인 이야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용만(의주) 역시도 조선시대에 대도회지로 5만호가 살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런 정황이나 물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반도조선'이란 이야기는,
옛 조선왕조를 한낱 모퉁이 땅에 살고 있었던 '미개한 제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걸 무슨 영광인 냥 하는 사가들을 보면......욕이 튀어 나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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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04.23 일제 제국주의자들의 망령은,
대한민국의 하늘을 덮고 있다. 지금도 말이다.
사학계뿐만 아니라, 정치판은 대표적으로 일제 잔재의 쓰레기들이 널려 있다고 봐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생각하면 할 수록 분노가 치민다. 해방 후 7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일제의 쓰레기들이 판을 치고 있다니 말이다.
일제의 쓰레기들은 대한민국을 혼란을 부추긴다.
일제 잔재는 가차없이 미련없이버려야 한다.
모든 면에서 지금 열도는 지금 침몰중이다.
침몰중인 열도를 위해 부역자들이 나설 참인가?
그대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침몰중인 열도를 끌어올려 놓을 수 없다.
이제 일제의 잔재는 쓰레기 통속으로 던져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