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성군(橻城郡), 부성군(富城郡)에 대한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
[‘호서(湖西)=호우(湖右)’ 땅 홍주(洪州)는 대륙(大陸)?, 반도(半島)?]
2,025년 11월 14일
○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땅【반도(半島)=韓半島=朝鮮半島】의 옛 이름(古名)은 무엇이었을까?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다. 진솔(眞率)한 한마디는 “모른다”라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니, 조선반도(朝鮮半島)」니 하는 말은, 근세(近世)에 만들어지고 정착(定着)된 근세(近世)의 것으로 일반적(一般的)인 이름일 뿐이다. 「고유(固有)한 이름이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 「“반도(半島) 땅”은, 반만년(半萬年) 이상(以上)의 세월(歲月)을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버티고 있었다」라면 : 고대(古代)로부터 20세기(世紀)까지도 「동이(東夷)=구이(九夷)=한(馯 : 韓)=조선(朝鮮)을 대표(代表)하는 고유(固有)한 이름 또는 별칭(別稱)으로 불렸다」라는 고유명사(固有名詞)【고유지명(固有地名)】가 분명(分明)히 존재(存在)하고 있었을 것이나, 아는 사람이 없다. 누구도 모른다. “없다”라는 표현(表現)이 정확(正確)한 것이다.
「반도(半島) 땅」을 뭐라고 호칭(呼稱)했을까? 그저 두리뭉실 “동방(東方), 또는 해동(海東), 또는 진역(震域)” 등으로 불렸을까? 또 한편으로는, 즉(卽), 「반도(半島) 땅」이… …,
「동방(東方)의 땅」이 될 수 있을까? 그럼 서방(西方) 땅은?
「진역(震域)의 땅」이 될 수 있을까? 그럼 서역(西域) 땅은?
「우이(嵎夷=于夷)의 땅, 양곡(陽谷)의 땅」이 될 수 있을까? 그럼 음곡(陰谷) 땅은?
「해동(海東) 땅」이 될 수 있을까? 그럼 해서(海西) 땅은?
「동국(東國) 땅」이 될 수 있을까? 그럼 서국(西國) 땅은?
➥ 우리 카페(Cafe)에서 중요(重要)시하고 있는 곧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을 가르는 기준(基準)」은 : 「구라파(歐羅巴)와 아세아(亞細亞)의 가운데(中)【中央亞世亞】를 기준(基準) 한다.」 곧, 「기준(基準)에서 서(西)쪽은 서방(西方)이요, 기준(基準)에서 동(東)쪽은 동방(東方)이다.」이건 상식적(常識的)인 인간사(人間事)에서 진리(眞理)와 같은 이치(理致)다.
➥➥➥ 「진역(震域)」을 검색(檢索)하고 또 한자사전(漢字辭典)을 찾아보자 : 바로 「동쪽(東-)에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음에도… … 「오늘날의 중국(中國)【中华人民共和国, People's Republic of China)】에서는 「진역(震域)」은, 중국【中国, China : 중화(中華)】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강조(强調)하고 있다. “좀 벌레가 야금야금 갉아 먹듯 ‘옛 조선(朝鮮)의 강역(疆域)’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 「중원대륙(中原大陸)【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중원대륙(中原大陸)】의 옛 주인(主人)」은, 「동이(東夷)」【동이(東夷) : 구이(九夷)=한(馯=韓)=조선(朝鮮).】였다」라는 것을 인정(認定)하는 것이자, 이 자(者)들이, 이를 선취(先取)하는 것이다.
㈠ 여기서 우선(于先), 「동방(東方)」이란 “범위(範圍)”를 알아야 한다. 통상적(通常的)으로 “사해(四海)”란 4개의 바다(海)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海)와 같이 넓은 네 개의 땅”을 말하는 것이고, 이는 “서방(西方), 동방(東方), 북방(北方), 남방(南方)”의 사방(四方)」을 말하는 것이니만큼 “한반도(韓半島) 또는 조선반도(朝鮮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이야기다.
㈡ 여기에 “종족(種族)”을 더하면 바로 “동방종족(東方種族)”이 된다. 「동방종족(東方種族)이란 바로 동이(東夷)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곧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이며, 한(韓)을 말하는 것이다.」
「동방(東方)은 곧 반도(半島)」라는 인식(認識)은, 20세기(世紀) 초 일제(日帝)가 조선사(朝鮮史)를 반도(半島)에 심고, 만들면서 만들어낸 조작(造作)된 해설(解說)로, ‘한글’ 해설서(解說書)에서만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동방(東方)이 반도(半島)」란 말은, 서방【西方 : 서역(西域)】은 중국(中國)이 되는 것이고,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는 서서국(西西國)’이 되고, ‘구라파(歐羅巴)는 서서서국(西西西國)이 되어야 할까?’ 「한마디로 ‘뭐한 놈’들이 지랄발광(癎疾發狂)」을 떠는 짓이요, 「귀신(鬼神)이 된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할까, ‘씨 나락’ 까먹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㈢ 「해국도지(海國圖志) 국지총론(國地總論)」에서 이르기를 : 「중화(中華)는 총령(葱嶺) 동(東)에 있다【夫 中 華 在 蔥 嶺 之 東】」라고 하였는데, 또한 이르기를 「자고(自古)【예로부터】 이래(以來) 진단(震旦)은 중국(中國)【故 自 古 以 震 旦 為 中 國】」이라고 하였다. 곧,
➥ 「海國圖志 國地總論」 이르기를(曰) : 「총령(蔥嶺) : 곤륜(崑崙) : 불주산(不周山) : 아누달산(阿耨達山) : 천주(天柱)」라고 하였는데, 「夫中華在蔥嶺之東,則山脈自西來,愈西愈高,高至蔥嶺而止,西洋在蔥嶺西,則山脈自東往,愈東愈高,亦高自蔥嶺而始。山居東西正中。: 중화(中華)는 총령(蔥嶺)의 동(東)쪽에 있다. 산맥(山脈)이 서(西)쪽에서 오는데, 점점 서(西)쪽으로 점점 더 높게, 높은 것은 총령(葱嶺)에서 멎었는데, 서양(西洋)은 총령(蔥嶺)의 서(西)쪽이며, 산맥(山脈)은 동쪽으로 오고 가는데, 점점 동(東)쪽으로 점점 높게, 또한 높은 것은 총령(蔥嶺)에서 비롯된다. 산(山)【총령(葱嶺)】은 동서(東西)의 정(正)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라고 하였다.
「천주(天住)」라는 말은 : 옛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행성(行星)은 원형(圓形)이 아닌 사각형(四角形)의 형태(形態)로 되어 있다고 믿으며, 「“총령(葱嶺)=곤륜산(崑崙山)=불주산(不周山)”이 하늘(天)을 받치고 있는 기둥(柱)」이라고 하였고, 또한 「이곳이 세상(世上)의 중심(中心)」이라고 한 것이다.
➨ 그래서 「이곳【천주(天柱)=불주산(不周山)】을 중심(中心), 바로 중앙(中央)이 되는 것이고, 중앙(中央)의 서(西)쪽 땅을 서방(西方)이라 한 것이고, 중앙(中央)의 동(東)쪽 땅을 동방(東方)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초딩’들도 이해(理解)할만한 설명(說明)이 있음에도 「미친 척하는 자들이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다.
➨ 「동양(東洋)과 서양(西洋)【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을 나누던 또 하나의 기준(基準), 우랄산맥【Ural, 山脈=오랍산맥(烏拉山脈)】이다.」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烏拉山脈和烏拉河是亞洲和歐洲的分界線。它們將歐亞大陸分成了兩個大小不等的洲。烏拉山的森林區也是烏拉語系民族發源地。】
➥ 【“진단(震旦)”이란 바로 : “해가 뜨는 동방(東方)을 뜻하는 말이고, 또한 발해(渤海)의 동(東)쪽을 지칭(指稱)”하는 말이다. 곧 옛 조선(朝鮮)을 말하는 뜻이다. 진단(震旦)은 “한족(漢族)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는 말이다”】
❶ 「총령(葱嶺) 동(東)쪽은 “동양【東洋 : 동방(東方) : 동토(東土) : 동국(東國)】”이며, “중화(中華)=진단(震旦)”이다. 이곳에 사는 무리는 “동이(東夷), 구이(九夷), 한(韓)”이다.」라고 한 것이고,
➋ 「총령(葱嶺) 서(西)쪽은 “서양【西洋 : 서방(西方) : 서토(西土) : 서국(西國)】”이며, 이곳에 사는 무리는 “서이(西夷)=서융(西戎)”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구분(區分)한 것은 “총령(葱嶺)은, 천하(天下)의 중심(中心)에 서 있기 때문이고, 하늘(天)을 떠받치고 있는 천주(天柱)가 있는 가운데 땅이기 때문이다”라고 것이다.
➌ 이래서 「동방(東方)이 반도(半島)란 말은 잘못된 것 곧 큰 오류(誤謬)다」라는 것이고, 바로 일제(日帝)가 반도(半島)에 옛 조선(朝鮮)을 만들어 놓고, 식민통치(植民統治)를 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造作)된 역사(歷史)다.
「해동(海東)」이란 말 역시(亦是) 똑같은 경우(境遇)다. ‘한자사전(漢字辭典)’을 찾아보면 : 「해동(海東) : ‘발해(渤海)의 동쪽(東-)’이라는 뜻으로, 예전에 ‘우리나라’를 이르던 말」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나라”란 말은 곧 반도(半島)를 지칭(指稱)한다고 하는데, 이는 “20세기(世紀) 초(初)에 출현(出現)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일 뿐이다.
지세(地勢)를 보자. 「“발해(渤海)”의 동(東)쪽이 아닌 “황해(黃海)”의 동(東)쪽 땅이 한반도(韓半島) 땅이 된다.」이건 “초딩”들도 지도(地圖)를 보면서 : 두 손 번쩍 들어 “나요, 나요, 나요”할 것이다. 이 말은 「반도(半島) 사학(史學)은 ‘초딩’들 수준(水準)보다도 더 떨어진다」라는 이야기다.
「해동(海東)」이란 : 「지중해(地中海)의 동(東)쪽 땅을 지칭(指稱)한다.」 「북사(北史)에서 말하고 있는 “발해(渤海)는, 곧 지중해(地中海) + 흑해(黑海)”다.」
지중해(地中海)와 연결(連結)된 바다로 「흑해(黑海)는, “동발해(東渤海)”요, 서(西)쪽의 지중해(地中海)는, 서발해(西渤海)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당시(當時)의 이 기록(記錄)을 반박(反駁)할 수 있는, 반론(反論)할 수 있는 당시(當時)의 기록(記錄)이 있을까?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當時)에는 다 그렇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걸 두고… …“딴죽을 건 자(者)”는 말하기를 : 즉(卽), “猶” 자(字)를, “마치 ∼ 와 같다.” 또는 “그대로” 또는 “마땅히” 또는 “크게, 지나치게” 또는 “같다”라는 등(等)의 뜻이 있으니, 앞 또는 뒤의 구절(句節)을 함께 봐야 하는 것인데, “마치 발해(渤海)와 같다” 또는 “마땅히 발해(渤海)다” 또는 “발해(渤海)와 같다”라는 등등(等等)인데, “동(東)쪽 서(西)쪽을 서로 바라본다(相望)”라고 하였으니,
➞ ‘21세기(世紀) 발해(渤海)’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노릇이고, ➞ 또 동한(東漢)의 본기(本紀)에 기록(記錄)된 “주변(周邊) 6주(州)에 큰비가 내리니 발해(渤海)가 넘쳤다”라는 기록(記錄) 역시(亦是) ‘21세기(世紀) 발해(渤海)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이야기다.’
➥ 〈「지중해(地中海)와 흑해(黑海)」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행성(行星) 내에서 같은, 또는 유사(類似)한 곳을 찾을 수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곧 오직 단 하나뿐인 곳이다.」 「지중해(地中海)와 흑해(黑海)」와 같은 모습을 가진 곳이 있을까? 찾을 수 없다.
이러한 곳을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남(南)쪽 바다인 황해(黃海)의 “발해(渤海)와 같다”라고 한다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도대체 뭐가 “21세기(世紀) 발해(渤海)와 같다”라는 것인가? 「“같다”라는 말은, 모습이, 모양이, 형편(形便)이, 지세(地勢)가 두 곳이 유사(類似)하다는 뜻이다. 무엇이 같다는 뜻인가?」 설마 「해수(海水) 곧 바닷물이 같다」라는 뜻인가? … …정신(精神)을 좀 차리고, 냉정(冷靜)해져야 할 때다.
➥ 「“발해(渤海)”는, 고전(古典) 원전(原典)을 따라가 보면 : 후대(後代)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점진적(漸進的)으로 동(東)쪽으로 이동(移動)해 온 것을 볼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이동(移動)되었는지, 그 이유(理由)는 알 수 없다. 다만 필자(筆者)가 유추(類推)하는 것은 “동이(東夷)의 동진(東進)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첫 번째는, 지중해(地中海)와 흑해(黑海)를.
두 번째는, 신강성(新疆省)의 포창해(蒲昌海)를,
세 번째는, 돈황(燉煌)과 청해(靑海) 간(間)의 천리(千里)에 달했다는 내륙해(內陸海)로,
네 번째는,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남(南)쪽 발해(渤海)로, 이렇게 이동(移動)되었다고 보는 것인데… …「동이(東夷)의 중원대륙(中原大陸) 정착(定着)과 깊은 관련(關聯)이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서(史書)를 증보(增補) 또는 출판(出版) 과정(科程)에 목적(目的)을 가진 자(者)들에 의해 첨삭(添削) 또는 증산(增刪)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시대(時代)에 따라, 왕조(王朝)에 따라 지형지세(地形地勢)가 달라질 수 없는 일이다. 【특정(特定)한 곳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언제나 변함없는 그대로를 유지(維持)하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이용(利用)되어 다르게 표현(表現)된다는 뜻이다】
➍ 시황제(始皇帝) 당시(當時)엔, 9개(個)의 거대한 ‘릉(陵)=구릉(丘陵)’이 있어, 지명(地名)까지도 “구원(九原)”이라고 하고, 그리하여 구원군(九原郡)이라는 행정조직(行政組織)이 설치(設置)되었고, 군수(郡守) 곧 태수(太守)가 이곳을 다스렸는데, 곧 제후왕(諸侯王)이다.
➎ ‘시황제(始皇帝)’가 급사(急死), 호해(胡亥)가 이었지만, 진(秦)은 무너지고, 유방(劉邦)에 의해 한(漢)이 건국되었는데, 변(變)한 것이라고는 왕조(王朝) 성씨(姓氏) 바뀌었다는 것, 외(外)에는 변(變)한 것이 없다. 그런데 ‘구원군(九原郡)’이 ‘오원군(五原郡)’으로 개명(改名)되었는데, 개명(改名) 이유(理由)는, 그곳 땅에 5개(個)의 거대한 ‘릉(陵)=구릉(丘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참고(參考) : 「시황제(始皇帝)와 녹도서(錄圖書)」 : “고월(古月)의 참서(讖書)”를 보면 : 고월(古月)은, “호(胡)의 은어(隱語)”로 ‘호인(胡人)’을 가리키고, 참서(讖書)는 진시황(秦始皇) 32年【B,C 215年)】에 북변(北邊)을 순행할 때 동방(東方)의 해상에서 온 연(燕)나라 방사(方士) 노생(盧生)이 귀신의 예언서라면서 바친 “녹도서(錄圖書)”를 말하는 것인데… …그 책에 “진(秦)나라를 망칠 자(者)는 호(胡)이다【亡秦者, 胡也】”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호(胡)를 북쪽의 오랑캐로 알고는 몽염(蒙恬)에게 30만 대군(大軍)을 이끌고 가서 장성(長城)을 쌓게 하였는데, 진시황(秦始皇) 사후(死後)에 아들 “호해(胡亥)”가 2세 황제(皇帝)로 즉위(卽位)하여 결국 진(秦)나라를 망친 것을 보면, “호(胡)는 호해(胡亥)의 호(胡)”를 가리킨 것이었으니, 멸망(滅亡)의 원인(原因)은 외부(外部)에서가 아니라 담장 안에서 싹텄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史記 秦始皇本紀] : 인용(引用)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➏ 그렇다면 : 9개(個)의 거대한 ‘릉(陵)=구릉(丘陵)’이 왜 5개(個)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인간(人間)의 힘으로 무슨 재주로 바꿀 수 있겠는가? 이유(理由)는 쉽게 알 수 있다. 곧 「‘구원군(九原郡)’의 땅은, ‘오원군(五原郡)’의 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땅은, 그 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곧 「‘오원군(五原郡)’의 땅은, 옛 ‘구원군(九原郡)’의 땅이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이렇듯, 이걸【발해(渤海)】억지(抑止)로 이동(移動)시켜 수만리(數萬里) 동(東)쪽의 조그만 ‘황해(黃海)’ 바다에 갖다 놓고 이걸 ‘발해(渤海)’라고 한다면 : 모두가 “아예 미친놈들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요녕성(遼寧省)+산동성(山東省)” 등지(等地)에 섣달 열흘 비가 쏟아져 물바다가 되었다」라고 해서 ➞ 「황해(黃海)가 넘쳐 날 일은 없기 때문이다.」
➞ “바다(海)인 발해(渤海)가 넘쳤다”라는 경우(境遇)는, 그 바다의 해저(海底) 또는 가까운 곳에서 큰 지진(地震)이나 화산폭발(火山暴發)이 발생(發生)하면 쓰나미 곧 해일(海溢)이 일어나 큰 파도(波濤)가 만들어져 육지(陸地)로 넘쳐 오르는 경우(境遇)다.
➞ 그러나 “후한서(後漢書) 본기(本紀)”에서는 분명(分明)하게 기록(記錄)해 놓기를 : 「6주(州)에서 큰물이 나, 발해가 넘쳤다 : 六州大水, 勃海海溢」라고 하였다. 여기서 “6주(州)의 큰물과 발해(渤海)의 해일(海溢)은 별도(別途)의 것 즉 따로따로 발생(發生)한 것이 아니라 「6개(個) 주(州)에서 큰 홍수(洪水)가 나니, 발해(渤海)가 넘쳤다」라는 것으로 봐야 문맥상(文脈上) 올바른 것이다.
바다 또는 내륙(內陸)의 호수(湖水)로 빠지는 물이 한꺼번에 몰려드니, 강(江)과 하천(河川)의 둑(堤防)이 무너지고, 저지대(低地帶)는 침수(浸水)되는 것이다. 이건 “발해(渤海)가 넘친 것이 아니다.”
➥ 후한(後漢) 곧 동한(東漢)의 역사서(歷史書)인 “후한서(後漢書) 본기(本紀)”에서는 「발해(渤海)가 넘쳤다.」또는 「범람(氾濫)했다」라고 한 것이다.
【後漢書 : 孝桓皇帝 永康元年. 秋八月, 魏郡言嘉禾生, 甘露降。巴郡言黃龍見。六州大水, 勃海海溢。詔州郡賜溺死者七歲以上錢, 人二千;一家皆被害者, 悉為收斂;其亡失穀食, 稟人三斛】: 「발해(渤海)」 주변에 있던 6개 주(州)에서 홍수(洪水)가 났다고 하더라도 : 바다가 넘칠 수는 없다. 「발해(渤海)가 내륙(內陸) 호수(湖水)였다」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본기(本紀)’에는 : 「옛 고구려(高句驪), 부여(夫餘), 예맥(濊貊)과 발해(渤海)의 내륙해(內陸海), 중요(重要)하다고 판단(判斷)되는 “요수(遼水)=요하(遼河)”를 도하(渡河)하는 군대(軍隊)의 총사령관(總司令官) 직책(職責)이었으며, 조정(朝廷) 실세(實勢) 중의 실세(實勢)였다는 ‘도요장군(度遼將軍) 활동(活動) 영역(領域)’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 특히 ‘도요영(度遼營)’은, ‘요수(遼水)=요하(遼河)’를 건넌 토벌군(討伐軍)의 진영(陣營)으로 큰 전진기지(前進基地)였음은 능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도요영(度遼營)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었을까?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서(西)쪽의 요수(遼水)’와는“전혀 관계(關係)없는” “1” 만리(萬里) 서(西)쪽 땅과 그곳에 있었던 하천(河川) 중심(中心)이요, 그 북안(北岸)에 축조(築造)되어 있었다.】
이래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을 용서(容恕)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해설(歷史解說) 또는 번역(飜譯)’하면서, 그 내용(內容)을 훤하게 꿰뚫고 있으면서도 : 이때는 “침묵(沈默)은 금(金)이다.”라는 격언(格言)을 철저(徹底)하게 신봉(信奉), 실천(實踐)하고 있는 것에 놀라움뿐이다. 그래서 더욱 얄밉고, 더욱 용서(容恕)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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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군(橻城郡)이 부성군(富城郡)인가?
부성군(富城郡)이 추성군(橻城郡)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설명(說明)을 보다 보면 : 이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인간 삶의 발자취”가 아니라, 「귀신(鬼神)들의 씨 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동화(童話), 설화(說話)인지를 구분(區分)하지 못할 정도(程度)로 유치(有恥)하고, 수준(水準) 이하(以下)의 삼류(三流) 무협소설(武俠小說)과 같다.」
➥➥➥ 역사상(歷史上), 조선사(朝鮮史)에서… …“사서(史書) 기록용(記錄用) 행정조직(行政組織)”이 별도(別途)로 있고, “실제(實際) 통치(統治)했던 행정조직(行政組織)”이 또 별도(別到)로 있었다는 것인가?
황당(荒唐)하다 못해 아예∼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버릴 정도(程度)다. 「추성군(橻城郡)」은, 고대(古代) 역사(歷史) 지명(地名), 그러나 특정지역(特定地域)이 아니라 「역사서(歷史書)에만 존재(存在)하는 행정조직(行政組織)이라는 “AI” 설명(說明)은 무엇에 근거(根據)한 것인가? 아직 실험단계(實驗段階)여서 부정확(不正確)하다는 건가?」
그럼 「추성군(橻城郡) 태수(太守)【군수(郡守) : 군국제(郡國制) : 왕(王)과 같은 존재(存在)다】“김준(金峻)”」은 가상(假象)의 인물(人物)일까? 실존(實存)했던 인물(人物)일까? 삼국사기(三國史記)라는 사서(史書)를 만들기 위해 가짜로 만들어 놓은 행정조직(行政組織)이요, 가공(架空)의 인물(人物)이라는 건가?
더 나아가, 옛 봉건왕조(封建王朝) “진한(秦韓)➞진한(辰韓)➞사로(斯盧)➞사라(斯羅)➞신라(新羅)”는, 「허상(虛像)의 나라, 아니면 반도(半島)에 없었던 나라?」 삼차방정식(三次方程式)을 풀어 놓고 보면 : 「“진한(秦韓)➞진한(辰韓)➞사로(斯盧)➞사라(斯羅)➞신라(新羅)”」는, “반도(半島)와는 전혀 상관(相關)없는 ‘대륙(大陸) 왕조(王朝)’였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 실체(實體)를 밝혀보기로 하자.
○ 『추성군(橻城郡)』➥ AI [브리핑 실험 단계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 ‘정확(正確)하지 않다’라고 하면서도 검색창(檢索窓)에 첫 번째로 뜨게 만들어 놓은 것은, 뭔 까닭? 국민(國民)들을 농락(籠絡)해? 참 알 수 없는 우리 현실(現實)이다」
【’AI‘ 인용(引用) : 橻城郡(참성군)은 고대 한국의 지명으로, 현재의 특정 행정구역이 아니라 삼국시대와 그 이전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옛 군(郡) 이름입니다. 중략(中略)… … , 정확한 위치 비정(比定)은 사료마다 다르며, 일부 사서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각국의 영토 내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략(中略)… …, 참고사항 : 참성군(橻城郡)은 현재의 특정 도시나 군이 아니며, 고대 역사 연구에서 지명 해석과 위치 비정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나 현재의 행정구역과의 연결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없습니다. 요약하면, 橻城郡은 고대 한국의 옛 지명으로, 현재의 특정지역이 아니라 역사서에 등장하는 행정구역 이름입니다… …】라고 하니… … “이게 뭔 ’광견(狂犬)‘의 헛소리인가?
➨ 아무리 ’실험단계(實驗段階)의 것이라고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게 “이 나라” 오늘의 역사계(歷史界) 현실(現實)이다. 「뜻있는 분들은 : 아, 비통하다 : ‘오호통재(嗚呼痛哉)=오호애재(嗚呼=哀哉)’라」라고 하고도 남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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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例文] 「추성군 태수(橻城郡太守) 김준(金峻)」
(1) 고운집(孤雲集) 제1권 시(詩) : 留別西京金少尹 峻〔서경 김소윤 준(峻)과 작별하며 남겨 준 시〕
만나서 두 밤 자고 다시금 이별 / 相逢信宿又分離
갈림길에 또 갈림길 시름겹기만 / 愁見岐中更有岐
소진되려 하는 손안의 계수 향기 / 手裏桂香銷欲盡
헤어지면 누구와 속마음 얘기할지 / 別君無處話心期
[주-D001] 서경(西京) …… 시 : 김준(金峻)에 대해서는 일생이 미상인데, 《삼국사기》 권 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에 이르기를, “당나라 소종 경복 2년(893)에 납정절사(納旌節使)인 병부 시랑(兵部侍郞)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서 죽었으므로, 곧바로 「추성군 태수(橻城郡太守) 김준」을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하였는데, 이 시에 나오는 김준과 동일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출처(出處) : 한국고전종합DB】
(2) 삼국사기(三國史記) 列傳 第六 / 崔致遠 【“橻城郡”에 대한 기록(記錄) 유(有)】
〈唐 昭宗景福二年, 納旌節使兵部侍郎金處誨, 没於海, 即差橻城郡大校勘 守金峻, 爲告奏使. : 당 소종(昭宗) 경복(景福) [註 001] 2년(893)에 납정절사(納旌節使) 병부시랑(兵部侍郎) 김처회(金處誨)[註 002]가 바다에 빠져 죽자, [註 003] 곧 추성군(橻城郡) [註 004] 태수 김준(金峻) [註 005]을 차출하여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時致逺爲富城郡大守, 祗召爲賀正使. 以比歳饑荒, 因之盗賊交午, 道梗不果行. : 당시 최치원(崔致遠)은 부성군(富城郡) [註 006] 태수였는데, 마침 불러서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근년에 기근이 들어 그로 인해 도적이 여기저기 일어나 길이 막혀 결국 가지 못하였다【출처(出處) : 한국사데이터베이스】〉라고 하였는데,
◈ ‘문제(問題) 제기(提起)’는 : 「추성군(橻城郡) 태수(太守) 김준(金峻), 부성군(富城郡) 태수(太守) 최치원(崔致遠)」에 관한 것인데, 인물(人物)이 아닌 지명(地名)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바로 「추성군(橻城郡), 부성군(富城郡)」이라는 행정조직(行政組織)이 「실제(實際) 존재(存在)하며, 실제(實際) 조직(組織)으로 작동(作動)했느냐?」 하는 것이다. 봉건왕조(封建王朝) 군국제(郡國制) 체제(體制)로 보면 : 파견(派遣)된 왕사(王使)로 ‘그곳에 사는 모든 것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쥔 강력(强力)한 통치자(統治者)’였기 때문이다.
[本文 繼續] : 〈추성군(橻城郡) : 추성군(橻城郡)은 본서 지리지에 보이지 않으며 추성군(秋成郡)이 확인된다. 추성군(秋成郡)은 본래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오늘날의 전라남도 담양군으로 비정된다. 한편 추성군(橻城郡)을 혜성군(槥城郡)으로 보고, 현재의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 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782쪽). 바로가기〉
➥ 위의 지명(地名)을 보면 : “이해(理解)할 수 없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설명(說明)이다.” 「추성군(橻城郡)과 추성군(秋成郡)이 같을 수 없고, 또 추성군(橻城郡)과 혜성군(槥城郡) 역시(亦是) 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추성군(橻城郡) 태수(太守)」라고 했기 때문이고, 모두가 고증(考證)이나 증거(證據) 없는 자의적(恣意的)인 해설(解說)만을 하고 때문이다.
[本文 繼續] : 〈김준(金峻): 신라 진성왕 때 추성군 태수를 역임하였다. 이 외에 기록이 없어 생몰연대 및 가계를 알 수 없다.〉
[本文 繼續] : 〈부성군(富城郡) : 본래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는데 경덕왕이 부성군으로 고쳤다(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로 비정된다.〉라고 하였는데.
➥ “도대체 뭔 소리를, 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반도(半島)」 땅에서, 반만년(半萬年) 동안을 살아왔던 선대(先代), 그리고 그 후손(後孫)들인 반도(半島) 땅에 사는 국민(國民)들, “지들”이 사는 땅의 이름도 모르며 사는 “금수(禽獸)와 같은 무리”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바로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 말이다.
아무리 무지무식(無知無識)한 무리라고 하더라도 “지들”이 사는 ‘고을 이름’도 모르고 산다면…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죽어 무덤(墓地)으로 들어가야 한다. ➞ 그때 서야 비로소 이 나라가, 이 민족(民族)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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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東國輿地志 3권 忠淸道 右道 洪州鎭 / 면천군(沔川郡) 【추성군(橻城郡), 부성군(富城郡)은 모두 홍주(洪州)에 예속(隸屬)된 조직(組織)이다】홍주(洪州)를 보자. 과연(果然)…… ,
•••〈홍주(洪州) : 形勝 : 南鎭烏嶽,北連大津,東限諸山,西縈巨海。湖西鉅州。本朝曺偉《洪陽館記》:“洪,湖西鉅州,地沃而廣,民繁以庶” 烏山前峙,渤海右環。包山負野,地總一方。竝州志。: 남쪽은 오악(烏嶽)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북쪽은 대진(大津)과 닿아 있고 동쪽은 여러 산에 막혀 있고 서쪽은 큰 바다에 연결되어 있다. 호서의 큰 고을이다. 본조 조위(曺偉)의 〈홍양관기(洪陽館記)〉에 “홍주는 호서의 큰 고을로서 땅이 비옥하면서 넓고, 백성들이 번성하여 많다.”라고 하였다. 오산(烏山)이 앞에서 우뚝하고 발해(渤海)가 오른쪽으로 두르고 있다. 산을 안고 들을 지고 있어 지역이 한 방면을 총괄한다. 이상은 모두 주지(州志)에 실려 있다〉라고 하였으니… …,
➥ 이게 과연 ‘충청도(忠淸道) 홍주(洪州)’를 가리키는 설명(說明)일까? 홍주(洪州)는 호서(湖西)의 거주(鉅州)도 아니요, 더더구나 호수(湖水)의 서(西)쪽 땅도 아니다. 반도(半島) 땅에는 거대(鉅大)한 호수(湖水)는 존재(存在)한 적이 없다.
위의 「거주(鉅州)」를 예(例)를 들어보면 : ㈠ 鉅野洞庭(거야동정) : 거야(鋸野)는 태산(泰山) 동편에 있는 광야(廣野), 동정(洞庭)은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중국(中國) 제1(第一)의 호수(湖水)를 말하는 것이고, ㈡ 昆池碣石, 鉅野洞庭(곤지갈석, 거야동정) : 곤지(昆池)는 운남 곤명현(昆明縣)에 있고, 갈석(竭石)은 부평현(富平縣)에 있음. 거야(鋸野)는 태산(泰山) 동편에 있는 광야(廣野), 동정(洞庭)은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중국(中國) 제1(第一)의 호수(湖水)를 말하는 것이다. 【인용(引用) 출처(出處) : 네이버, 한자사전】
「반도(半島)의 홍주(洪州)」는, 「농촌(農村)의 읍내(邑內) 정도(程度)의 고을」이었음으로 “거주(鉅州)”라는 말은 해당(該當)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곧 「다른 곳의 대도회(大都會)를 차용(借用)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다. 강서(江西) 홍주(洪州)도, 우도(右道)에 속하며, 호서(湖西) 땅이고, 거주(鉅州)로써의 위상(位相)을 가진 곳이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 군명(郡名) : 〈혜군(槥郡), 혜성(槥城), 【‘혜(槥)’ 자는 세속에서는 ‘추(橻)’ 자로 쓴다. 혹 ‘유(杻)’ 자로 쓰기도 하는데, 잘못이다.】 면주(沔州)〉
➥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는 : 「면천(沔川)=면수(沔水)=‘沔水以北∼면양(沔陽)’=면주(沔州)」 : 「魚米之鄉」、「水鄉澤國」之稱。【沔水 : 漢江,亦稱漢水,又名襄河,古稱沔水。漢水位處長江中游左岸,發源於中國陝西省秦嶺南麓的沮水,幹流自西向東流經陝南和鄂西北,於武漢漢口注入長江[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옛 「백제국(百濟國)」을 지칭(指稱)하여 「남국(南國) 또는 택국(澤國)」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는데,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홍주(洪州) 면수(沔水)는 곧 한수(漢水)」를 말하는 것으로, 「장강(長江)에 들어가는 중하류(中下流)는 아열대기후(亞熱帶氣候)와 물(水)이 많으니 땅이 습(濕)하여 일찍이 백성(百姓)들은 산(山)에 집을 짓고 산다고 한 곳이자, 호수(湖水), 늪, 강하천(江河川)이 많아 택국(澤國)이라고 불렸다」라고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옛 백제(百濟) 땅이었던 곳이다. 바로 「魚米之鄉, 水鄉澤國之稱」이라고 불렸다고 한 곳이다.
➨ 옛 기록(記錄)에서 「택국(澤國)이라고 불린 나라는 백제(百濟)요,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동정호(洞庭湖)와 한수(漢水)와 장강(長江)이 함께 있는 땅이다.」 산천지리(山川地理), 기후대(氣候帶)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왜 백제(百濟)의 백성(百姓)들이 산(山)에 집을 짓고 살며, 백제(百濟)를 가리켜 남국(南國)이라 불리며 택국(澤國)이라는 별칭(別稱)으로 불렸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 「면주목(沔州牧)」 : 「낭관호(郞官湖)는 일명 남호(南湖)로,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한양(漢陽)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당(唐)나라 이백(李白)이 야랑(夜郞)’으로 귀양을 가 그의 친구 ‘상서랑(尙書郞) 장위(張謂), 면주 목(沔州牧) 두공(杜公), 한양 재(漢陽宰) 왕공(王公)’과 더불어 남호(南湖)에서 술을 마셨다. 장위가 이백에게 호수의 이름을 좋게 지어 영구히 전하게 할 것을 청하니, 이백이 술잔을 들어 물에다 붓고 나서 남호의 이름을 낭관호(郞官湖)로 개정하였다. 그리고 이백이 지은 〈범면주성남낭관호(泛沔州城南郞官湖)〉 시에 “사방에 앉은 사람이 청광에 취하니, 고래에 없는 즐거움을 누렸네. 낭관(郞官)이 이 물을 좋아하기에, 그로 인해 낭관호(郞官湖)로 불렀네.〔四坐醉淸光 爲歡古來無 郞官愛此水 因號郞官湖〕”라고 하였다.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DB]】
•••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홍주목(洪州牧) 산천(山川)에 이르기를 :
「嗚呼島。俗云芿盆島。水路二百餘里。周九十五里。土地甚饒,出楮、竹箭。有古城闕遺址,石砌宛然,今無居人。世以此爲田橫所入處。然《一統志》“萊州卽墨縣東北一百里有田橫島,去岸二十五里。橫衆五百人死於此”云,則以此爲田橫所入處者,非是。: 오호도(嗚呼島) 세속에서 잉분도(芿盆島)라고 한다. 물길로 200여 리 떨어져 있으며, 둘레가 95리이다. 토지가 매우 비옥하며 닥나무와 죽전(竹箭)이 생산된다. 옛 성궐의 유지(遺址)가 있어 돌계단이 완연한데, 지금은 거주자가 없다. 세상에서 이곳을 전횡(田橫)이 들어온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내주(萊州)는 바로 묵현(墨縣)이고, 동북쪽 100리 되는 곳에 전횡도(田橫島)가 있으니, 해안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전횡의 무리 500인이 이곳에서 죽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곳을 전횡이 들어온 곳이라는 것은, 맞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 전횡(田橫) : 전국 시대 제(齊)나라 전횡이 절해(絶海)의 고도(孤島)에 은신한 것을 말한다. 이 섬은 오호도(嗚呼島) 혹은 반양산(半洋山)으로 칭해진다. 전횡은 제왕(齊王)의 후예로서 진(秦)나라 말기에 자립하여 왕이 된 뒤에 형세가 불리해지자 부하 500여 인과 함께 이 섬으로 피해 들어갔는데, 그 뒤에 왕후(王侯)로 봉해 주겠다는 한고조(漢高祖)의 부름을 받고서 낙양(洛陽)으로 가던 도중에 머리를 굽혀 신하가 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면서 자결하자, 이 소식을 들은 섬 안의 500여 인 역시 모두 자살하여 그 뒤를 따랐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94 田橫列傳》[인용(引用)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DB]
➨➨ 반양산(半洋山)은 내주(萊州)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산 이름으로, 오호도(嗚呼島)라고도 한다. 한나라 초에 스스로 제(齊)나라 왕이 되었던 전횡(田橫)이 한고조(漢高祖)의 부름을 받고 낙양(洛陽)으로 가던 도중에 고조(高祖)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결하였다. 이에 전횡(田橫)의 문객 500명도 그의 뒤를 따라 반양산(半洋山)에서 자결하였다. 《史記 田儋列傳》《應製詩註》
➨➨➨ 만약(萬若) 「홍주(洪州) 관내(管內)에 오호도(鳴呼島)가 있었다」라면 : 홍주(洪州)는 반도(半島) 땅이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산동성(山東省) 또는 강소성(江蘇省) 등지(等地)의 지명(地名)이어야 한다.
••• 「碧骨池。在郡東。: 〈벽골지(碧骨池) 군(郡) 동쪽에 있다.〉그렇다면 아래를 보자.
➊ 東史綱目第二[上] 庚寅 / 庚寅, 新羅訖解王二十一年。高句麗美川王三十一年。百濟比流王二十七年。 : 鷄林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 계림에서 벽골지(碧骨池)를 처음 만들었다.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按今金堤郡。有碧骨池古址。此爲百濟所管。而此時濟都漢城西南內地。或爲新羅。所侵奪而然耶。; “안(按), 지금 김제군(金堤郡)에 벽골지의 옛터가 있는데, 이는 백제의 소관이나, 이때는 백제의 도읍이 한성(漢城)의 서남쪽 내지(內地)에 있었으므로, 혹 신라가 침탈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황당무계(荒唐無稽)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바로 이런 것이다.
➋ 〈벽골지를 만들다 ( 330년 (음) ) :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註 001]를 만들었는데, 그 둑의 길이가 1,800보(步)이다. [註 001] : 벽골지(碧骨池):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포교리에서 월승리에 걸쳐 있는 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金堤 碧骨堤)를 이른다. 『삼국유사』 왕력제1에는 329년의 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일찍부터 백제 후기에 축조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어 왔다(洪思俊, 7~8쪽). 하지만 1975년 발굴조사 당시 제방 바닥에서 채취한 탄화된 식물을 시료로 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에 따르면 대략 4세기 중엽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되어 이 기사의 내용과 일치한다(尹武炳, 11쪽). 또 발굴성과가 축적되면서 통해 4세기 축조설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다(최완규, 178~185쪽).
축조 주체와 관련해서는 이 당시는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백제의 기록이 신라본기에 잘못 들어온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병도 역주, 58쪽). 그렇게 본다면 이 일은 백제 비류왕 27년(330)의 사적이 신라본기로 잘못 편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근래에는 축조 기법이 마한 분구묘와 유사한 점을 들어 백제가 아니라 마한이 축조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최완규, 178~185쪽).
발굴조사 결과를 참조하면, 초축 당시 벽골제의 길이는 현존 벽골제와 비슷하지만 높이는 훨씬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성왕대 현존 높이로 증축되었고, 5개의 수문이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김주성, 277~281쪽). 벽골제의 기능은 초축 당시에는 방조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부가적으로 저수지의 기능을 겸했다고 추정된다. 다만 조선 태종대의 중수 이후에는 주로 저수지의 기능으로 전환되었다고 보인다(김주성, 281~288쪽)〉라고 하는데.... ....,
어떻게 ‘충청도(忠淸道) 면천군(沔川郡)’에 ‘벽골지(碧骨池)’가 있다는 말인가? 또 다른 벽골지(碧骨池)가 있었다는 것일까?
➥ 「면천(沔川)이란 ‘면수(沔水)’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한수(漢水)의 고명(古名) 곧 “옛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한수(漢水)는 두 곳에 있다.
첫째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섬서성(陝西省)으로부터 호북성(湖北省) 남북(南北)으로 관통(貫通)하여 장강(長江)과 합류(合流)하는 “면수(沔水) 곧 한수(漢水)인데, 중하류(中下流) 땅에는 많은 호수(湖水), 장강(長江)들이 함께 어우러져 지대는 낮으니 습기가 많고, 물이 많으며, 아열대기후(亞熱帶氣候)를 가진 곳으로 이곳을 지칭하여 남국(南國)이라 했고, 또 택국(澤國)이라는 별칭(別稱)으로도 불린 땅이다.」
둘째는, 「반도(半島) 허리를 흐르는 ‘한수(漢水)=한강(漢江)’으로 서해(西海)로 들어가는데, 이곳 주위를 ”남국(南國)이라 한 적도 없고, 더구나 이곳을 택국(澤國)이라는 별칭(別稱)으로도 불릴 적이 없다.」
➥ ‘면수(沔水)=면천(沔川)’이 면천군(沔川郡)에 있고, 이곳이 홍주(洪州) 관내(管內)라고 한다면 : 면천(沔川)이니 홍주(洪州)니 하는 지명(地名)은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차용(借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명(地名)의 유래(由來)가 그렇다는 것이다.
••• 伴月樓。在客館東. : 반월루(伴月樓) 객관 동쪽에 있다. ○ 본조 심수경(沈守慶)의 시에,
난간 밖의 못 안 고요하고 / 檻外池心靜
소나무 사이 곧은길 길게 나 있네 / 松間矢道長
대나무는 듬성하여 그림자 희미하고 / 竹疏微見影
연꽃은 시들어서 향기가 날락 말락 / 荷老細聞香
저물녘 바람 불어 더위 다 날아가고 / 薄晩風鏖暑
초가을 비 내려 서늘한 기운 북돋네 / 新秋雨助涼
변방의 나그네 바뀐 절기에 놀라 / 客邊驚節序
머리 긁적이며 석양에 서 있노라 / 搔首立斜陽 하였다.
➥ 「홍주(洪州)가 변방(邊方)의 땅이었다?」 이러한 지리지(地理志) 내용(內容)을 토대(土臺)로 보면 : ‘홍주(洪州)’는 반도(半島) 충청도(忠淸道) 땅이 될 수 없음은 너무도 명백(明白)한 것이다.
••• 명환(名宦) 신라 / 김준(金俊) 진성왕(眞聖王) 때에 ‘추성군태수(橻城郡太守)’가 되었다.
➥ 「추(橻)」 자(字)가 「고을 이름 추(橻)」라면 : “홍주(洪州) 관내(管內)”에 “추(橻)”라고 하는 고을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고을 이름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使用)되었다」라는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추(橻)”라는 글자가 바로 “고을 이름 추(橻)”자(字)이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는 후세(後世)들이 ‘역사(歷史) 무지렁이【국어사전 :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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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홍주(洪州)’ 편(篇)에서 이르기를 :
樓亭 : 繫風樓。在客館東。○ 李承召詩:“雲輕風緊近秋天,遠客登臨倍黯然。澤國正逢鱸膾美,故鄕遙憶雁書傳。千重碧樹分高下,一抹靑山擁後前。命駕欲歸歸未得,故應慙愧季鷹賢。” 〔新增〕 監司曺偉,改名迎薰。: 누정 : 계풍루(繫風樓) 객관 동쪽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구름은 가벼워지고 바람은 급히 불어 가을철 다가오는데, 먼 손 누정에 올라 보니 마음 갑절 어둡구나. 물 많은 고장에선 한창 농어회 맛나는 계절인데, 고향은 멀리 기러기 소식 전하여 주기 바라네. 천 겹 푸른 숲은 높고 낮게 나누어졌고, 한 줄기 푸른 산이 앞뒤를 싸안았구나. 행장 꾸려 돌아가려 해도 가지 못하는 이 몸, 그러므로 장계응(張季鷹)의 현명한 데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였다. 『신증』 감사(監司) 조위(曺偉)가 영훈루(迎薰樓)로 이름을 고쳤다.
➥ 「택국(澤國)」은, 「백제(百濟)의 별칭(別稱)이었다.」라는 설명(說明)은, 바로 옛 고전(古典)인 “사서(史書)”에서 말하고 있다.
••• 제영(題詠) : 睥睨連雲有古城。李承召詩:“高原如局勢寬平,云云。漠漠海山天欲暮,離離禾黍雨初晴。田間饁婦携兒去,隴上耕牛帶犢行。賽罷社林人盡醉,婆娑歸路暑風淸.” : 비예연운유고성(睥睨連雲有古城)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높은 평원 바둑판처럼 그 형세 펀펀한데, 비예가 구름과 연한 옛 성이 있구나. 아득히 포열해 있는 바다 위산에 날이 저물어 가고, 수북수북하게 올라온 벼 기장에는 비가 처음 개었다. 밭 사이로 들밥 이고 가는 촌 아낙네 어린아이 데리고 가고, 언덕 위에 밭가는 어미 소엔 송아지 따라다닌다. 동네 숲에서 모여 산신제는 끝나고 사람들은 모두 취했는데, 흔들거리고 돌아가는 길에는 더운 바람도 맑다.” 하였다.
➥ “높은 평원(平原) 곧 고원(高原)”은, 「보통(普通) 해발(海拔) 고도(高度) 600미터 이상(以上)에 있는 넓은 벌판【인용 출처(引用 出處) : 한자사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충청남도(忠淸南道) 서해(西海)의 바닷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홍성군(洪城郡)이 고원지대(高原地帶)에 있는 대도회(大都會)였다는 말과 같다.
이건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이곳 땅에 있는 최고봉(最高峰)이라고 하는 지리지(地理志)에서 “남쪽의 진(鎭)”이라고 하는 오서산(烏棲山)은 해발고도(海拔高度) ‘792’m이고, 성주산(聖住山)이 해발고도(海拔高度) ‘680’m【모두 보령군(保寧郡)에 소재(所在)】라고 하는데… …고원(高原)의 넓은 평원(平原)이라는 말, 반도(半島) 땅의 “홍주(洪州)”가 아니었다는 명백(明白)하고 확실(確實)한 고증자료(考證資料)이다. 기막히고 기막힌… …할 말을 잊게 만든다.
(5)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홍주(洪州) : 홍주목(洪州牧)
洪州: 牧使一人, 判官一人。 百濟時, 稱號未詳; 金氏地志, 亦不載, 唯高麗 太祖實錄, 十年丁亥三月, 王入運州, 【註云卽今洪州】 : 사(使) 1인, 판관(判官) 1인. 백제 때의 칭호(稱號)는 알 수 없다. 김씨[金富軾]의 지지(地志)에도 실리지 아니했고, 오직 《고려태조실록(高麗太祖實錄)》 10년 정해 3월에 왕이 운주(運州)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주(註)에 이르기를, “지금의 홍주(洪州)이다.”고 하였다.】
➥ 「신라(新羅)가 당군(唐軍)을 몰아내고 통일(統一)을 이루었다」라고… …인접국(隣接國)을 토벌(討伐)하려, 걸사표(乞師表)와 함께 온갖 아부(阿附)를 동원(動員), 외세(外勢)의 힘을 빌려 정복(征服)한 땅의 “거대(鉅大) 도회지(都會地) 행정조직(行政組織)이 소재(所在)하고 있는 그 땅의 이름도 모른다?” 지지(地志)에 기록(記錄)되지 않았다? 곧 「신라(新羅)라는 나라는 없었다」라는 뜻이다.
(6) 대동지지(大東地志) 홍주(洪州)
沿革 : 本百濟周留城, 唐改支潯州。 領縣九: 支潯, 己汶, 馬津, 于來, 解禮, 古魯, 平夷, 珊瑚, 隆化。 新羅合于任城郡。 高麗太祖析置運州。 成宗十四年, 置都團練使, 隷河南道。 顯宗三年, 改知州事, 九年改洪州。 領郡三: 大興, 槥城, 結城。 領縣十一: 高邱, 興陽, 驪陽, 新平, 保寧, 靑陽, 德豐, 伊山, 唐津, 貞海, 餘美。 恭愍王五年陞爲牧, 以王師僧普愚之鄕。 十七年降知州事, 二十年復爲牧。 本朝因之。 世祖朝置鎭。 管十九邑。 顯宗朝降洪陽縣, 尋復陞。 純祖朝降縣, 後復陞。
➥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도 “홍주(洪州)”는 없으며, “추성군(橻城郡)”도 없다.
(7)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 홍주(洪州)
〈建置沿革 / 本百濟地。高麗初,爲運州。高麗《太祖實錄》十年:“王入運州。” 註云:“卽今洪州。” ○ 按:今洪州, 百濟、新羅地志皆無見焉。此四傍諸小縣皆載於志,不應此州獨見漏脫。今州東大興縣境有古任存城,距州治僅十餘里。任存在百濟爲名城,新羅亦仍爲任城郡,皆非小屬縣之比。必是今州治百濟時爲任存城地,新羅爲任城郡地,而羅末或麗初,始於此置運州也。東史於凡郡縣之別置新邑者,則只云“某時爲某邑”,而不知記其前爲某邑地,以致如此者多。顯宗時,改爲洪州。恭愍王時,陞爲牧。本朝因之。世祖時,置鎭。今上時,降爲洪陽縣,尋復爲洪州。掌面二十七。〉라고 하였는데,
「본래(本來) ‘홍주(洪州)’는 백제(百濟) 땅이었으나, 그 유래(由來)나 위치(位置) 등은 신라지지(新羅地志)에서 모두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 “살펴보면 또는 생각해 보면” 하는 말은, 모두 후대인(後代人)들에 의해 기록(記錄)된 말로, 본래(本來)의 것이 될 수 없다. 곧 “홍주(洪州)라는 거대(巨大) 도회지(都會地)에 대한 기록(記錄)이 없다”라는 것은, ‘반도(半島)의 것이 될 수 없다’라는 뜻이자, ‘신라(新羅) 역시(亦是)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려(高麗) 초의 운주(運州)라고 하면서도 신라지지(新羅地志)에는 운주(運州)도 없고, 홍주(洪州)도 없었다는 뜻이 된다. 웃기는 이야기밖에 될 수 없는 일이다. 아래의 형승(形勝)을 보면 : 위 필자(筆者)의 이야기가 현실(現實)이 된다.
〈形勝 ; 南鎭烏嶽,北連大津,東限諸山,西縈巨海。: 남쪽은 오악(烏嶽)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북쪽은 대진(大津)과 닿아 있고 동쪽은 여러 산에 막혀 있고, 서쪽은 큰 바다에 둘러있다. 湖西鉅州。本朝曺偉, 洪陽館記:洪,湖西鉅州,地沃而廣,民繁以庶。: 호서의 큰 고을이다. 본조 조위(曺偉)의 홍양관기(洪陽館記)에 “홍주(洪州)는 호서(湖西)의 큰 고을로서 땅이 비옥하면서 넓고, 백성들이 번성하여 많다.”라고 하였다. 烏山前峙,渤海右環。: 오산(烏山)이 앞에 우뚝하고 발해(渤海)가 오른쪽을 두르고 있다. 包山負野,地總一方。竝州志。: 산을 안고 들을 지고 있어 지역이 한 방면을 총괄(總括)한다.〉라고 하였는데… …,
➊ ‘오늘날의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성군(洪城郡)’을 옛 ‘홍주(洪州)’라 했다는 것인데…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홍주(洪州)의 형승(形勝)」 편을 보면 황당(荒唐)하기 그지없는 것이, 그 조그만 땅이 무슨 얼어 죽을 큰 고을(鉅州)이며, 그곳 땅이 넓어 “廣 : 넓을 광(廣)” 자(字)를 쓸 정도(程度)인가? 또 해괴(駭怪)하게 「발해(渤海)」가 둘러싸고 있다는 것인가?
➋ 「호서(湖西) 땅」이라면 : 「호수(湖水)의 서(西)쪽 땅」이라는 것인데 : 그렇다면 홍주(洪州)의 동(東)쪽 땅에 거대(巨大)한 호수(湖水)가 자리 잡고 있어, 이 호수(湖水)를 기준(基準)하여, 서(西)쪽은 ‘호서(湖西)=호우(湖右)’라 했고, 그 동(東)쪽을 ‘호좌(湖左)’라고 했으며, 그 북(北)쪽을 호북(湖北)이라 했으니, 그 남(南)쪽은 호남(湖南)이 되는 것인데…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살펴보건대(俯伏) : 「홍주(洪州)의 동(東)쪽 땅에 700리 동정호(洞庭湖)가 있습니까?」 묻노니, 답(答)은 천년(千年)이 흘러도 못할 것임은 100% 뻔한 일이다.
➌ 「호좌(湖左)」를 네이버(Naver)에서 검색(檢索)하면 : AI 브리핑 [실험 단계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 호좌(湖左)는 충청남도를 달리 이르던 말로, 주로 조선 시대 행정 구역 구분에서 사용된 지명입니다. 【1. 일부 자료에서는 호좌가 ‘호수(湖水)의 왼쪽’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되나, 역사적 맥락에서는 충청남도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통용됩니다. 2. 호좌의 주요 의미 : 지리적 명칭: 충청남도를 달리 부르는 말로, 호남(湖南), 호서(湖西) 등과 함께 3한(三韓) 시대 행정 구역의 일부였습니다.】
➍ 이게 21세기(世紀) ‘AI’ 선도국(先導國) 실정(實情)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좌(左)의 뜻이 무엇인지, 우(右)의 뜻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오른팔도, 왼쪽 팔도 모른대서야… …」 「호좌(湖左)」란 뜻은, 호수(湖水)의 동(東)쪽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럼 홍주(洪州)는 충청남도(忠淸南道) 땅에 없고, 황해(黃海) 가운데 있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황해(黃海)”라는 내륙해(內陸海)의 서(西)쪽 강서성(江西省)의 성도(省都) “남창(南昌)”이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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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三國史記卷第四十六 列傳第六 / 崔致遠
〈唐昭宗景福二年納旌節使兵部侍郞金處誨沒於海卽差橻城郡太守金峻爲告奏使時致遠爲富城郡太守柢召爲賀正使以比歲饑荒因之盜賊交午道梗不果行其後致遠亦嘗奉使如唐但不知其歲月耳故其文集有上太師侍中狀云 : 당소종(唐昭宗) 경복(景福) 2년(893)에 납정절사병부시랑(納旌節使兵部侍郞)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 빠져 죽었으므로 곧 추성군(橻城郡) 태수(太守)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 국내의 일을 당에 보고하는 사신)로 삼아 보냈을 때에, 치원(致遠)은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있다가 부름을 받아 하정사(賀正使)가 되었으나, 그즈음 당(唐)에 해마다 흉년이 들고 이로 인하여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혀 가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도 치원은 당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으나, 그 시기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문집에는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올리는 편지(狀)에서 이르기를, 伏聞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 :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三國)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마한(馬韓), 변한(卞韓), 진한(辰韓)입니다. 마한(馬韓)은 고려(高麗)요, 변한(卞韓)은 백제(百濟)요, 진한(辰韓)은 신라(新羅)입니다. 고려(高麗)와 백제(百濟)의 전성기(全盛之時)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百萬) 명이나 되어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략(侵略)하고, 북(北)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어지럽혀 중국(中國)을 크게 갉아먹었습니다〉라고 하였음에 비춰보자… …,
➥ 삼국사기(三國史記)가 동국(東國)의 역사서(歷史書)라고 했을 때 : 위의 「최치원(崔致遠) 열전(列傳)」에서 말하는, 최치원(崔致遠)의 말은 : 「옛 동이(東夷)=구이(九夷)=한국(韓國)」은, 「반도(半島)가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주인(主人)이었다」라는 것을 여실(如實)하게 밝혀주고 있다.
「“고구려(高駒驪)와 백제(百濟)”가 바로 “장강(長江) 주변(周邊)의 오(吳), 월(越) 땅”을 침범(侵犯)하고, “황하(黃河) 유역(流域)의 유(幽), 연(燕), 제(齊), 노(魯) 땅”을 침략, 토벌(討伐)하여 중국(中國) 땅을 크게 갉아먹었다」라고 말한 것이 그 증거(證據)다.
➥➥➥ 「백제(百濟)가 장강(長江) 유역(流域)【강좌(江左)】을 정복(征服)하고, 고구려(高駒驪)는, 유(幽), 연(燕), 제(齊), 노(魯) 땅을 침략, 토벌(討伐)했다. 또 고구려(高駒驪)가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있을 때, 백제(百濟) 역시(亦是) 요서(遼西) 땅을 차지하고 이곳에 두 군(郡)을 두고 경략(經略)했다」라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주인(主人)은 ‘동이(東夷)=구이(九夷)=한(馯 : 韓)’이었다」는 것을 역사적(歷史的) 사실화(事實化)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登場)하는 「㈠ “오(吳)와 월(越)의 땅”은,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과는 전혀 다른 땅에 있었으며, 곧 ‘강우(江右)’에 있었으며, 백제(百濟)에 예속(隸屬)되어 있었다. 또한 「㈡ “유(幽), 연(燕), 제(齊), 노(魯)의 땅”은, 오늘의 역사해설(歷史解說)과는 전혀 다른 땅에 있었다.」라는 것이고,
「사서(史書)에서 “진세(晉世)”라고 말하는 것은, “서진(西晉)” 때를 말하는 것으로, 대략(大略) AD 265∼316년간(年間)을 말하는 것인데, ‘서진(西晉)’이라는 옛 국가(國家)는 바로 ‘사마의(司馬懿)’의 손자(孫子)인 ‘사마염(司馬炎)’이 위(魏)의 조환(曺奐)에게 선양(禪讓)을 받고, 건국한 진(晉)나라를 말하는 것인데, 사마진(司馬晉)이라고도 불린다.」
(9) 東史綱目 5 上, 계축(癸丑) 眞聖女主 7年【唐 昭宗 景福 2, 893年】
〈癸丑, 七年, 朝唐使金處誨。沒于海。遣兵部侍郞金處誨。如唐。納先王㫌節。沒于海。復以橻城郡 【橻疑作槥今沔川】 太守金峻。爲告奏使。時。崔致遠爲富城郡 今瑞山 太守。召爲賀正使。以比歲飢荒。盜賊交午。道梗不行。後致遠亦甞奉使如唐。以州縣供給不繼。上唐宰相太師侍中狀曰。 : 당에 조공가던 사신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 익사하였다. 병부 시랑 김처회를 보내 당에 가서 선왕의 정절(旌節)을 헌납하게 하였는데, 바다에 익사하였으므로 다시 추성군(橻城郡) 【筆者 注) : 번역본(飜譯本)에 ‘혜성군(槥城郡)’이라고 하였지만 : 원문(原文)은 ‘추성군(橻城郡)’이다】【혜(橻)는 아마 혜(槥)인 듯하며, 지금의 면천(沔川)이다】 태수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이때 최치원이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서산(瑞山) 태수로 있었는데, 불러서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고 도적이 잇달아 일어나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 최치원이 다시 사신이 되어 당에 갔으나 당의 주현에서 공급(供給)이 계속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당의 재상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서장을 올렸는데 내용은 이러하다.伏聞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麗濟盛時。強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蠧。隋皇失馭。由於征遼。: 엎드려 듣건데 “동해(東海)”밖에 세 나라가 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ㆍ변한ㆍ진한으로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하였을 때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와 월(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주(幽州)ㆍ연주(燕州)와 제(齊)ㆍ노(魯)를 난요(亂撓)하여 중국의 큰 해독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수황(隋皇)이【수(隋), 양제(煬帝)】나라를 잃게 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征伐)한 것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글 (5) 참조(參照)】
➥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가 「남(南)으로는 오(吳)와 월(越)을 침략(侵略)하고, 북(北)으로는 유주(幽州)ㆍ연주(燕州)와 제(齊)ㆍ노(魯)」를 침략(侵略), 난요(亂撓)하니, 중국(中國) 땅을 크게 좀먹었다」라는 의미(意味)인데… …「오(吳), 월(越), 유주(幽州), 연주(燕州), 제(齊), 노(魯) 땅을 빼고 나면 중국(中國)은 없다.」 이 뜻이 중요(重要)한 것이다.
➥ 「추(橻)」 자(字)는 「고을 이름 추(橻)」라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 신라(新羅) 최치원(崔致遠) 이전(以前)에 “추성군(橻城郡)”이 실제(實際)했었다는 것이고, 여기서 중요(重要)한 것은 「추(橻)」 자(字)는, 신라(新羅)에서 만든 국자(國字)【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漢字)】다.
➨➨➨ 여기서, ‘역설적(逆說的)인 논리(論理)’를 펴면 : 「19세기 후기(後期)부터 2,025년(年) 오늘까지 한반도(韓半島)에서 발굴(發掘)되는 많은 고분(古墳), 릉(陵), 묘지(墓地) 기타(其他)에서 발굴(發掘), 출토(出土)되는 유물유적(遺物遺跡) 등에서 명문(銘文), 묘지석(墓地石) 하나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 땅에 신라(新羅) 또는 백제(百濟), 가야(伽耶), 삼한(三韓), 한국(韓國) 78개 나라 등은 없었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신라(新羅)는 글자가 없었으나, 백제(百濟)로부터 불경(佛經)과 함께 한자(漢字)를 가져왔기 때문이고, 이는 「고을 이름을 위한 글자【한자(漢字)】를 새로 만들기까지 하는 등(等) 전반적(全般的)으로 한자(漢字)가 통용(通用)되었다」라는 증거(證據)이며,
이는 당시(當時)의 통치자(統治者), 왕족(王族), 대신(大臣)이나 태수(太守) 등등(等等)의 무덤 속에 부장(副葬)된 여러 물건(物件) 등에 명문(銘文)이 새겨졌을 확률(確率)이 높고, 특히 당시(當時)의 통치자(統治者), 왕족(王族), 대신(大臣)이나 태수(太守) 등등(等等)의 무덤 속에는 ‘죽은 이’의 일생(一生)을 그대로 재현(再現)해 놓은 묘지석(墓地石)이 있었을 가능성(可能性)은 100%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1개(個)의 명문(銘文)이나 묘지석(墓地石)이 출토(出土)된 적이 없다. 왜?
특히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 사활(死活)을 걸고 사투(死鬪)를 벌이는 왕릉(王陵) 발굴(發掘)이라며 호들갑을 떨지만 : 그곳에서 무엇이 나왔는가? 또 1,500년(年) 전(前)의 공주(公主) 무덤… …? 이게 반도사학(半島史學)의 현주소(現住所)다.
➥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이자,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민(土着民)이었고, 주인공(主人公)이었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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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디지털 서산문화대전[서산행토문화백과] / 부성군(富城郡)
[정의] 통일 신라 시대 충청남도 서산시 일대를 관할하였던 군(郡).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6 잡지 제5 지리3 신라 웅주 부성군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부성군은 본래 백제 기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소태현은 본래 백제 성대혜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지육현(地育縣)은 본래 백제 지육현(知六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북곡현(北谷縣)이다.” 또한, 『삼국사기』 권46 열전 제6 최치원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2년[893]에 납정절사(納旌節使) 병부시랑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서 익사하자 곧 추성군(橻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차출하여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당시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있었는데 마침 불러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내용] 부성군의 치소(治所)나 통치 범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기존의 백제 기군을 명칭 중심으로 개편한 것이므로 이전과 마찬가지로 태안반도 전체를 관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안반도 일대를 아우르기 위해서는 그 중심지로 현 서산 시내 일원이 유력하지만 정확한 지점을 확정하기 힘들다. 지곡면에 위치하고 있는 부성산성 인근에 치소가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역시 확실하지 않다. 현재에도 부성산 내 최치원을 기리는 사당인 부성사(富城祠)가 위치하고 있다.
[변천] 757년(경덕왕 16) 통일 신라의 웅천주(熊川州) 부성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 시대 잦은 승격과 강등을 거듭하면서 서산군(瑞山郡)·서주목(西州牧)·서령부(瑞寧府)을 거쳐 조선 시대 서산군이 되었다. 1914년 태안·해미를 합쳐 서산군이 설치되었으며, 1989년 서산읍(瑞山邑)이 시로 승격되고, 태안군은 다시 분리되었다. 1995년 서산시와 서산군의 통합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부성군(富城郡) 태수(太守) 최치원(崔致遠) : 부성군(富城郡) 또는 부성현(富城縣)에 대한 대륙(大陸)의 「부성현(富城縣)」은? 【“부성현(富城縣) 또는 부성군(富城郡)은 홍주(洪州)에 예속되어 있었다. 반도(半島)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것이 똑같다.” 우연(偶然)의 일치(一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서산군(瑞山郡) 조(條)를 보면 :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차다.」라고 하였는데… …“땅이 메마르고, 기후(氣候)가 차다【厥土塉, 風氣寒】”라는 뜻이 뭔가?
➥ “땅이 메마르고, 기후(氣候)가 차다【厥土塉, 風氣寒】”라고 하였는데… …서산군(瑞山郡) 땅은 돌연변이(突然變異) 땅인가? 예(例)를 들면 강원도(江原道)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 조(條)에도 똑같은 기록(記錄)【厥土塉, 風氣寒】이 있다.
「홍주(洪州) 관내(管內)는 추운 땅이었다」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올바른 설명(說明)인가? 귀신(鬼神)들이 씨 나락 까먹는 헛소리인가? 충청도(忠淸道)가 찬가운(寒) 땅이라면 : 함경도(咸鏡道)는, 평안도(平安道)는 동토(凍土)의 땅이라는 말인가?
또 토공(土貢)에는, 「“正鐵(시우쇠)”, 철장(鐵場) 一【在郡西都飛山南】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➊ 「정철(正鐵)은 무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만든 쇠붙이의 한 종류로, 조선시대 무기 제조 등에 주로 사용된 순수한 쇠」이고, ➋ 「철장(鐵場)은 철광석이나 철의 원료를 채취하거나, 이를 제련하여 쇠를 생산하는 산업 현장 또는 작업장」을 말한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서산군(瑞山郡)에 이러한 흔적(痕迹)은 있느냐? 하는 것이다.
➥ 「반도(半島) 땅의 지명(地名)」을 보면 : “지명(地名)의 탄생(誕生) 유래(由來), 또는 연유(緣由), 사유(事由), 지명(地名)으로 결정(決定)이 된 까닭이 없다”라는 것이다. 또 있다고 해도 그 지명(地名)과 전혀 관계(關係)없는 것을 나열(羅列)만 하고 있다.
“예(例)”를 보자. 위의 「부성군(富城郡)」은, 본시 부성현(富城縣)【중원대륙(中原大陸)의 강서성(江西省) 홍주(洪州)의 속현(屬縣)으로 호서(湖西) 땅이다.】인데… …「부수(富水)가 이곳 땅을 흐르고 있어 “부성(富城)”이라는 지명(地名)이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반도(半島) 충청도(忠淸道) 홍주(洪州) 또한 호서(湖西) 땅으로, 부성군(富城郡) 역시(亦是) 홍주(洪州)에 예속(隸屬)된 고을인데, “부성(富城)”이란 지명(地名)의 탄생(誕生) 유래(由來)는 무엇일까?」
◈ 「부성군(富城郡), 추성군(橻城郡)」에 대한 것은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等) 그 어디에도 기록(記錄)된 것이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 : 「㈠ 富城郡, 本百濟基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 蘇泰縣, 本百濟省大兮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 地育縣, 本百濟知六縣, 景德王改名, 今北谷縣. : 부성군은 원래 백제의 기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소태현은 원래 백제의 성대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지육현은 원래 백제의 지륙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북곡현이다.」
「㈡ 槥城郡, 本百濟槥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唐津縣, 本百濟伐首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 餘邑縣, 本百濟餘村縣, 景德王改名, 今餘美縣 ; 新乎縣{新平縣}, 本百濟沙平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 혜성군은 원래 백제의 혜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당진현은 원래 백제의 벌수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여읍현은 원래 백제의 여촌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여미현이다. 신평현은 원래 백제의 사평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라고 하였으니,
어디에도 「추성군(橻城郡)」은 없다.
➊ “추성군(橻城郡)과 혜성군(槥城郡)”은 같은 곳을 말하는 것일까? 「추성군(橻城郡)의 “추(橻)” 자(字)는 “고을 이름 추(橻)”이므로, 「추(橻)」라는 고을은 있었으며, 이곳이 고을이 되니 “추성(橻城)”이 된 것이고, 이곳이 군(郡)으로 승격되니 “추성군(橻城郡)”이라고 명명(命名)된 것이다.
➋ 혜성군(槥城郡) : “혜(槥)” 자(字)는, ㈠ ‘널 혜, 널 위, 널 세’ 등으로 고을 이름과는 관계(關係)가 없다. 다만 ㈡ “槥山”은, 땅 이름, 군(郡) 이름. “槥郡”과 같다. 산(山) 이름. 충청남도 당진시(唐津市) 면천면(沔川面)과 순성면(順城面)의 경계에 있는 아미산(峨嵋山)[增補文獻備考 35, 輿地考, 關防, 海路》槥山, 今名峨嵋山, 在郡北八里]라고 한 것이 “혜성군(槥城郡)의 탄생(誕生) 유래(由來)가 될 수 있을까?” 결코 되지 못한다. ㈢ 왜냐하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는 1,908년에 증보(增補)된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槥」 : ‘널 혜(槥)’ 자(字)이며, ‘소관(小棺) 곧 작은 관 혜(槥)’이다. 이게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을 이름으로 쓰기 어려운 글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곧 「널 혜(槥)」의 “널”이란 : 「시체를 넣는 관이나 곽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추성군(橻城郡)은 어디에 있었던 지명일까? 분명(分明)하게도 “추(橻)” 자는 “고을 이름 추(橻)”이다. 즉(卽), 「“추(橻)”라는 고을이 있어 글자도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 「네이버 오픈사전 PRO」에서 “추(橻)”를 보면 : ㈠ 「일설에는 혜(槥)자의 속자(俗字)라고도 한다. 그러나 정설(正說)이 아니다. 「추(橻)」는 “고을 이름 추(橻)”로 우리나라 한자(漢字)로 알려져 있는데, “홍주(洪州) 관내(管內)의 고을 이름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는, 1903년 홍문관 찬집소에서 박용대·김택영·장지연 등 33인이 찬집하고, 1907년 완성, 1908년에 나온 것이라고… …솔직히 믿기 어려운 서사(書史)이다.
㈡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면천군(沔川郡)」조(條)를 보면 : 혜군(槥郡)ㆍ혜성(槥城) 【槥,俗作 “橻”,或作 “杻”,非。: ‘혜(槥)’를 속자(俗字)로 추(橻)로 쓰기도 하고, 혹은 유(杻)로 쓰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마산(馬山)ㆍ해종(海宗)ㆍ면주(沔州)」라고 한 것을 보면 : “면주(沔州)와 관계가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면주(沔州)」의 “沔” 자(字)는 : ‘물 이름’이라고 하였다. 곧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한수(漢水)를 칭하는 말로, 한수(漢水)의 옛 이름이 “면수(沔水)”였다.
➥ ‘면수(沔水)의 북(北)’쪽 땅을 ‘면양(沔陽)’【仙桃市 : 位於湖北省中南部江漢平原腹地,漢水南岸與東荊河北岸之間,長江與漢水交匯的沖積三角洲上,舊稱沔陽。東鄰省會武漢,西聯荊州、宜昌,北倚漢水,南抵長江。境內地勢低平,湖泊河流星羅密布,有「魚米之鄉」、「水鄉澤國」之稱.】이라고도 한다.
➥ 「혜성(槥城)과 면주(沔州)와 홍주(洪州)」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關係)가 있다. 그러나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는 것이다.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홍주(洪州)와 면주(沔州)’와 관계(關係)가 있고, ➊ 바로 면수(沔水)인 한수(漢水)와 장강(長江)이 합류(合流)하는 지역(地域)의 지명(地名)과 깊은 관계(關係)가 있을 뿐이며, ➋ 부성(富城)은 강서(江西) 땅의 부수(富水) 지역(地域) 고을로 “홍주(洪州)”에 예속(隸屬)되어 있었다.」
➥ 「바로 이곳이 아열대기후(亞熱帶氣候)를 가지고 있어 백성들은 산(山)에 집을 짓고 살며, 남국(南國)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강(江)과 택(澤)과 호수(湖水)가 여러 곳에 있어 ‘물이 많은 땅’이라는 “택국(澤國)”이란 별칭(別稱)으로 불린 곳이다.」
○ 참고(參考) : 호서(湖西 : 湖右) 땅, 강서(江西) 홍주(洪州) 부성현(富城縣)
富城鄉 / 是中華人民共和國江西省贛州市會昌縣下轄的一個鄉鎮級行政單位。
豐城縣,原名富城縣,東漢時設,屬豫章郡 / 豐城市為中國江西省下轄縣級市,南昌大都市圈副中心城市,省直管縣級市、豐城位於江西省中部,市域南北長70.5千米,東西寬74千米,東界撫州臨川區、進賢縣、南臨崇仁縣、樂安縣、新幹縣,西接樟樹市、高安市,北連新建縣、南昌縣,市人民政府駐河洲街道孺子路6號。
東漢建安十五年(公元210年)析南昌縣南境置富城縣。富城,以縣建富水西而得名,隸屬:豫章郡。【東漢建安十五年(210),建富城縣,以縣建富水西而得名。縣治位置大約在今豐城市南側,大概在富水附近】
晉太康六年(公元280年)改稱豐城縣。移治豐水西岸榮塘圩(今榮塘鎮),縣名:豐城,豐之得名自此始,隸屬:豫章郡。
梁大同二年(536年)析縣東境置廣豐、新安二縣。
隋初,廢新安入廣豐縣。開皇九年(589年)並豐城入廣豐縣,初隸屬:撫州,後屬:洪州,縣治於石灘故縣(今石灘鎮故縣村);仁壽二年(602年),避楊廣諱,復名豐城。
隋大業十二年(602),林士宏陷豫章,縣治廢,凡六年。唐武德五年(622),復置豐城縣,隸屬:洪州。
唐高宗永徽二年(651),移豐城縣治於贛水東曲豆鎮(今劍光街道),今治所自始,縣名:豐城,隸屬:洪州。
唐天佑二年(905年),梁王朱溫因其父名誠,改豐城為吳皋。後唐同光元年(923年),復改吳皋為豐城,隸屬:洪州。
元至元二十三年(1286年)以豐城戶滿五萬,升豐城為富州,隸屬:隆興路。
明洪武九年(1376年),改富州為豐城縣,隸屬:南昌府。
○ 위의 여러 설명(說明)을 보면 : 반도(半島) 땅의 지명(地名)에 대한 반도학계(半島學界)는, 「대부분(大部分) 학계(學界)의 원로(元老)들로 추앙(推仰) 아닌 추앙(推仰)을 받는, “식민(植民) 사학자(史學者)”들의 그것을 그대로 인용(引用)하고 있을 뿐, 반론(反論)이나, 새로운 주장(主張)이나 학설(學說) 등은 없다.」
설명(說明)하기 어려운 것, 이해(理解)할 수 없는 것들은, “미상(未詳)”이라는 단어(單語)로 포장(包裝)하고, 좀 다른 주장(主張)은 “추정(推定)”한다거나 “비정(比定), 추측(推測)”한다는 등(等)으로 적당히 넘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얽혀버려 실타래를 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도(半島) 땅, 이곳저곳 파보지 않은 곳이 또 있을까? 19세기(世紀) 말(末)부터 21세기(世紀) 오늘까지 말이다. 단 한 곳에서도 이 땅의 역사(歷史)를 증명(證明)할 수 있는 그 무엇도 발견(發見), 건져낸 것이 없다. 그저 두리뭉실 옛 기록(記錄)에 맞추고, 모르면 미상(未詳)이요, 추정(推定)이요, 비정(比定)이요 추측(推測)일 뿐이다.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형편(形便)을 보면 : 「예(例)를 들어 “죽서기년(竹書紀年)”을 보면 : 그 주석자(註釋者)들은, 『은(殷)【상(商)】나라는 동이(東夷) 왕조(王朝)였다』고 설명(說明)한다.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위(魏) 양왕(襄王)【一說為魏哀王】까지를 죽간(竹簡)에 적은 기록(記錄)이다. 급군(汲郡)의 묘지(墓地)에서 출토(出土)되어 “급총기년(汲冡紀年)”이라고도 불리는데, 「서진(西晉) 무제(武帝) 때에 급군(汲郡)의 고묘(古墓)에서 출토된 것을 말하는데, “급총서(汲冢書)”」라고도 한다. 【西晉武帝時在汲郡古墓出土整理的戰國竹簡汲冢書】
「반도(半島), 이 땅에서 반만년(半萬年) 찬란(燦爛)한 문명(文明)을 꽃피었다」라는 「조선왕조(朝鮮王朝)는, ‘글자 한 자(字)’도 모르는 금수(禽獸)들의 왕국(王國)이었다는 것인가?」
「그런 금수(禽獸)들의 세계(世界)에서 어떤 금수(禽獸)가 찬란(燦爛)한 문명(文明)을… …글자 “한” 자(字)도 모르면서 뭔 재주로 문명(文明)을 만들어냈다는 것일까?」
「동이(東夷)는, 구이(九夷)」는 : 동방(東方)에서, 해동(海東)에서, 진역(震域)의 땅 반도(半島)에서 반만년(半萬年) 찬란(燦爛)한 문명(文明)을 피웠다」라고 하면서… …어떻게 「은(殷)【상(商)】나라는, 동이족(東夷族) 왕조(王朝)로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에서 600여 년(餘年), 그 땅의 토착세력(土着勢力)으로 지배자(支配者)로, 누구도 경험(經驗)해보지 못한 “글자”를 사용(使用)하면서 말 그대로 찬란(燦爛)한 문명(文明)과 함께 번영(繁榮)을 꽃피운 것일까?」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의하면 : 「은(殷)나라의 시조(始祖)는 “설(契)”【은설(殷契)】이다. 어머니(母)는 유융씨(有娀氏) 여(女) “간적(簡狄)”으로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차비(次妃)였다」라고 전(傳)해진다.
「은(殷) 왕조(王朝)가 “동이(東夷) 왕조(王朝)”였다면 :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도 동이(東夷)였다는 것이고, 황제(黃帝) 헌원(軒轅)도 동이(東夷)였다」라는 것이 된다. 그래서 「고구려(高駒驪)는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후예(後裔)이니 성(姓)을 고씨(高氏)로 했다」라는 기록(記錄)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실리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제발… …정신(精神) 좀 차리자! 언제까지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요, 이 자(者)들이 바로 반역(叛逆)한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이다.】들의 “헛소리에 귀 기울일 건가?”』
➥ 자칭(自稱) ‘염제(炎帝)’를 시조(始祖)로 하는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 민족(民族)들은 모두 소수민족(少數民族)이다. 곧 「자칭(自稱)하여 한족(漢族), 강족(羌族), 경족(京族), 묘족(苗族), 글란(契丹)」등등(等等)은, 염제(炎帝)를 시조(始祖) 이로 한다」라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소수민족(少數民族)이다. 【漢族、羌族、京族、苗族、契丹等各民族皆以炎帝為先祖】
「무슨 얼어 죽을 “한족(漢族)”인가? 고전(古典) 원문(原文) 어디에 “한족(漢族)”이라고 기록(記錄)해 놓았는가?」
➥ 「염제(炎帝)」는, 「동이(東夷) 황제헌원(黃帝軒轅)」과의 전쟁(戰爭)에서 패배(敗北)하여 소수족(小數族)으로 전락(轉落)하며, 주류(主流)에서 밀려났다. 은(殷)【상(商)】의 시조(始祖)인 「설(契)이 동이(東夷)였다」라면 그 아버지(父), 증조(曾祖), 고조(高祖) 또한 동이(東夷)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무엇이 “한족(漢族)”이란 말인가? 【준비(準備) 중인 ‘삼국유사(三國遺事) 재(再)해석(解釋)’ 편에서 상세(詳細)하게 다루어 볼 예정(豫定)이다.】
「‘반도(半島) 땅’을 ‘동방(東方)이니, 해동(海東)이니, 진역(震域)’이니 하는 ‘강아지(犬)’가 풀 뜯어 먹는 소리는, 만담(漫談)꾼의 농담 따 먹기 같은 헛소리다.」
반도(半島) 땅의 반만년(半萬年) 동이왕조(東夷王朝)는 뭐냐?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이 만들어낸 ‘사생아(私生兒)’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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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半島) 조선왕조(半島朝鮮)는 없다.」 이것이 정답(正答)이요, 올바른 역사관(歷史觀)의 정립(正立)이라고 할 수 있다.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사학(史學)의 사활(死活)을 걸고,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지만 애당초 잘못 만들어진 사관(史觀)이다. 「일본(日本)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에 의해 만들어진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성공(成功)할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고전(古典) 기록(記錄)”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며, 이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한다고 해서 고전(古典) 기록(記錄) 자체(自體)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 오늘의 현실(現實)을 보라! ‘조선왕조(朝鮮王朝) 반만년(半萬年) 터전’이라고 선전(宣傳)만 요란할 뿐, 그것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 그것을 증거(證據)할 수 있는, 그것을 확인(確認)할 수 있는, 그 무엇 하나 출토(出土)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의 수많은, 보존(保存)할 곳이 없을 정도(程度)로 쏟아져 나오는 유물유적(遺物遺跡)은 뭐냐?
〈지금 장난하냐?「‘1’억(億)에 가까운 한민족(韓民族)과 장난하자는 거냐? 농담(弄談) 따 막기라도 하자는 건가?」〉
19세기(世紀) 말엽(末葉)부터 일본(日本)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에 의해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부터 오늘의 만주(滿洲) 땅, 한반도(韓半島) 땅까지를 온갖 핑계를 대며 파헤쳤지만 “말 그대로” 반도조선(半島朝鮮)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 그것을 증거(證據)할 수 있는, 그것을 확인(確認)할 수 있는, 그 무엇 하나라도 건져 낸 것이 없다. 그러니 그대로 덮어둔 것을 해방(解放) 이후(以後) 일본(日本)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에 의해 키워진 소위 식민(植民) 사학자(史學者)들에 의해 온 국토(國土) 이곳저곳을 또 파헤쳤지만 : 결과(結果)는 뭐냐?
장난하냐? 「나올 수가 없다.」 국민(國民)들의 피와 땅이 서린 국가예산(國家豫算)을 낭비(浪費)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건져냈는가? 명문(銘文) 하나 없는… …묘지석(墓地石) 하나 없는… …‘결과(結果)’는 없었다. 이번 경주(慶州) APEC에서 자랑스럽게 1,500년(年) 전(前)의 어린 공주(公主) 무덤을 재현(再現)하려 했지만… …모든 것은 추측(推測)이요, 자의적(恣意的)인 추정(推定)일뿐이다.
이렇게 ‘왕실(王室)의 어린 공주(公主)가 죽었다’라면 왕실(王室) 자체(自體)가 충격(衝擊)에 빠졌을 것이요, 슬픔에 빠졌을 것이다. 그것에 비례(比例)하여 부장품(副葬品)이나 명문(銘文), 특히 묘지석(墓地石)에는 자세(仔細)한 이력(履歷)과 애통(哀痛)함을 담은 명문(銘文)이 있지 않았겠나! 사후세계(死後世界)에서 ‘편안(便安)히 살라’하는 염원(念願)과 함께 순장(殉葬)이란 아주 참혹(慘酷)한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 있었나? 없다.」
「오늘의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식민사학(植民史學)과 무엇이 다른가? 일란성(一卵性) 쌍둥이다. 일제(日帝)가 만들어준 그 해설서(解說書)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 「친일(親日)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과 야합(野合)한 식민사학계(植民史學界)는, 아예 반도(半島) 땅에 이를 정착(定着), 고착화(固着化) 단계(段階)에 이르렀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에 대해 ‘문제(問題) 제기(提起)’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선대(先代)의 역사(歷史)에 대해서만은 모두가 문맹(文盲)이요, 참된 역사(歷史)를 알고 있는 분들은 극소수(極少數)에 불과(不過)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이(東夷), 구이(九夷), 구한(九韓)을 이뤘던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민(土着民)들은 강제(强制)로 한족(漢族)으로 둔갑(遁甲)되어버렸고, 그 땅은 남의 나라의 것이 되어버렸다.」 이를 어쩌랴?
2,025년 11월 1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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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1.15 본래는 오늘 게재할 것은 "후한서 동옥저(4-2]" 편이었는데... ...조금 감정이 격해져서 "추성군과 부성군"에 대한 것을 올려 놓았습니다.
* 추성군의 "추(橻)"자는 : "고을 이름 추"자이므로 ; 백제 땅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곳을 점령한 신라의 행정조직에 이름이 다르더라도... ..."추성군"이 있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행정조직이 되어버렸습니다.
* 오죽하면 : 실제 존재한 행정조직이 있고, 역사서에만 나열하는 있는 행정조직이 있다라는 황당한 설명을 하는 곳도 있다니... ...반도 사학계는 史學을 하는 곳인지, 死學을 하는 곳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합니다.
* 다음 게재분은 약속한대로 "후한서 동옥저"편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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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