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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土質•人種=體樣]로 본 北京(燕京) [6-1편]

작성자문 무|작성시간26.06.06|조회수153 목록 댓글 2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土質人種=體樣]로 본 北京(燕京) [6-1편]

                                [북경(北京), 20 世紀 以後, 오늘의 북경(北京)일 뿐이다]

                                                                   2026년 06월 06일

 

「오늘날AD 1,937이후(以後)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은 : 「본래(本來) 북평(北平)으로 우북평(右北平)이었고, 경조지방(京兆地方)이라고도 했으나, ‘AD 1,937년 10월 13일’부터 “북경(北京)”으로 개칭(改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는 설명(說明)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북평(右北平)”이라면 “서(西)쪽 땅에 있는 북평(北平)”이라는 뜻이니, 또 다른 “북평(北平)”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의심(疑心)은, 매우 합리적(合理的)이다. 그러나 “북평(北平)이 우북평(右北平)이다”라고 하니, 황당(荒唐)할 따름이다.

 

     또 세부적(細部的) 내용(內容)으로 들어가면 뒤죽박죽으로 되어 있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混亂)스럽다.

 

     그렇다면 오늘날 북경(北京)=연경(燕京)’지방(地方)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들은 어떨까? 사서(史書)나 연행록(燕行錄)에 기록(記錄)된 ‘북경(北京)=연경(燕京)’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 및 그곳에 살고 있었던 인종(人種), 그 인종(人種)의 ‘체양(體樣)=체형(體形)’ 등을 알아보자.

 

     이러한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들을 고찰(考察)해보면 : 과연(果然)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연경(燕京), 우북평(右北平), 북평(北平), 북경(北京),”의 지명(地名)에 대한 진실여부(眞實與否)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속어(俗語)로 표현(表現)하면 : 『“짝퉁” 여부(與否)를 가려보자는 것이다. 신선(新鮮)한 충격(衝擊)이 되지 않을까?

 

     이 글은 2016년 12월 06일 : 토질(土質인종(人種체형(體形)으로 본 북경(北京)=연경(燕京)’?의 것을 토대(土臺)로 보완(補完), 보충(補充)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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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燕京)이 북경(北京)’이라고 한다. 『북경(北京)은, 천문(天文)에 있어서는 기(箕), 미(尾)의 분야(分野)가 되고, 지지(地志)에 있어서는 우공(禹貢)의 기주(冀州)의 지역(地域)이 된다.』라고 사가(史家)들은 열심히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이게 엉터리(詐欺)인 것은, 동북방(東北方) 땅에 갖다 놓으니, (), ()의 분야(分野)가 되고, 지지(地志)에 있어서는 우공(禹貢)의 기주(冀州)의 지역(地域)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역사(歷史)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조작(造作)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萬若) ‘연경(燕京)=북경(北京)’이 서(西)쪽 5∼8 천리(千里) 떨어진 먼 곳에 있었다면 : 그에 따른 천문지리(天文地理)를 적용(適用)했을 것이고, 기주(冀州)의 땅 역시(亦是) 서방(西方)에 만들어 놓았을 것임은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이다. 이러한 것은 임의(任意)대로, 주관적(主觀的)으로, 목적(目的)대로 첨삭(添削)할 수 있기 때문에 신뢰(信賴)할 수 없다.

 

     ☛ 속(俗)된 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로 들어가면 : 연경(燕京)=북경(北京)” 또는 북경(北京)=연경(燕京)”의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들은, 인간(人間)의 힘으로 불가능(不可能)한 것이므로, 왜곡(歪曲) 또는 조작(造作)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 착안(着眼)한 것이다.」

 

     중요(重要)한 것은, 또 신뢰(信賴)할 수 있는 것은 : 『사기(史記), 한서(漢書), 회남자(淮南子) 등처럼 기원전(紀元前)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과 지형지세(地形地勢) 등(等)을 기록(記錄)한 것을 보면, : 수천(數千) 년(年)이 지난 21세기(世紀) 작금(昨今)의 시대(時代)와도 큰 변(變)함이 없다는 것은, 자연환경(自然環境) 요소(要素)로 비교검토(比較檢討)의 결과(結果)도 그만큼 신뢰(信賴)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특히 「현재(現在)의 북경(北京)은, 인종(人種), 토질(土質), 기후(氣候)” 등(等)에 있어서도 반도(半島) 땅과 큰 차이(差異)가 없어, ‘거기가 거기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렇다면 ‘20세기(世紀) 이전(以前)’에도 현재(現在)와 같았을까?

 

    정답(正答)은 전혀 달랐다하는 것이다. 『달랐다』란 것은, 『지금의 북경(北京), “짝퉁이다』라는 ‘명명백백(明明白白)의심(疑心)할 여지(餘地)가 없이 아주 뚜렷하다한 증거(證據)다.’

 

     한족(漢族)과 한족(韓族: 朝鮮族)의 ‘체형(體形)=체양(體樣)’의 다른 점(點)이 있는가? 한족(漢族)과 한족(韓族: 朝鮮族)은, 체형(體形)으로 보면 크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연경(燕京)=북경(北京), 전혀 다른 종족(種族)들이, 인종(人種)들이 살고 있었다라는 것이다.

 

     ➥ 「‘연경(燕京)=북경(北京)’이 정말 오늘날의 북경(北京)일까? 인종(人種), 지세(地勢)와 토질(土質), 기후(氣候), 방위(方位) 등으로 밝혀 : 사가(史家)들의 사기극(詐欺劇)을 적나라(赤裸裸)하게 깨뜨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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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원직지(燕轅直指) 제6권 / 유관별록(留館別錄) 천지산천(天地山川)

 

     【연원직지(燕轅直指)는 : AD 1,832년∼1833년(年) 사이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兼謝恩使) 서경보(徐耕輔)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온 김경선(金景善)의 사행기록(使行記錄)이다. [出處 : 고전번역원 DB 解題]

 

     • 천지산천(天地山川) : 《➊ 渡鴨江.至瀋陽.直向西南. ➋ 自瀋至大凌河.稍迤而北.而間或向西. ➌ 自凌河至山海關.向正南. :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심양(瀋陽)까지는, 곧장 서남(西南)향이요, 심양(瀋陽)에서 대릉하(大凌河)까지는 약간 비스듬히 북(北)쪽으로 가다가, 혹 서(西)쪽으로 향(向)하는 때도 있으며, 능하(凌河)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정남(正南)으로 향한다. ➍ 北京雖極寒.地凍不過數寸.終日大雪.隔夜無點白.依然南土風氣.豈人烟稠集.鼓發喣噓.足以敷布陽和耶. : 북경(北京)은 아무리 춰도, 땅이 몇 치[寸] 밖에 얼지 않는다. 하루 종일 큰 눈이 와도 밤이 지나고 나면, 눈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쪽 지방 기후(氣候)와 비슷하다. 인구(人口)가 조밀하여 내뿜는 입김이 따뜻한 기운을 퍼뜨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하였는데,

 

     ➊  《渡鴨江. 至瀋陽. 直向西南 :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심양(瀋陽)까지는, 곧장 서남향(西南向)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심양(瀋陽)의 지리적(地理的) 구도(構圖)’는, 무조건(無條件) 북행(北行)해야 갈 수 있다. 도강(渡江)하여 “서남(西南)”으로 가면 “연행사신단(燕行使臣團) 수백(數百) 명(名)”은, 서해(西海)의 용궁(龍宮)으로 가게 된다. 오늘날의 심양(瀋陽)은 말 그대로 짝퉁이라는 명백(明白)한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당시(當時)의 청(淸)나라는 서해(西海)에 있었다는 ‘코믹 스토리’가 되는 것인데,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그래도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외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중원대륙(中原大陸) 토착왕조(土着王朝)로 대제국(大帝國)을 건설하고 있었다」라는 것이고, 「여진족(女眞族) 청(淸)은, 서방(西方)에 있었다」라는 것인데, 이는 인종적(人種的)으로 봐도 입증(立證)된다.

 

     「() 하북성(河北省)의 북경(北京)은 맞다. 다만 21세기(世紀) “북경(北京)”일 뿐이다. 「20세기(世紀) 이전(以前)의 북경(北京) 곧 연경(燕京)은 서(西)쪽 땅에 있었다」라는 것을 증거(證據)하고 있는 기록(記錄)이다.

 

     ➋  《自瀋至大凌河. 稍迤而北. 而間或向西. 自凌河至山海關. 向正南. : 심양(瀋陽)에서 대릉하(大凌河)까지는 약간 비스듬히 북(北)쪽으로 가다가, 혹 서(西)쪽으로 향(向)하는 때도 있으며, 능하(凌河)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정남(正南)으로 향한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지도(地圖)를 놓고 보면 :

 

     ㊀ 심양(瀋陽)에서 ➞ 대능하(大凌河)는 : 「약간 비스듬히 북(北)쪽으로 가다가, 혹 서(西)쪽으로 향(向)하는 때도 있으며」라는 말은 방향(方向)으로 볼 때 맞는 말이다. 그러나,

 

     ㊁  『自凌河至山海關. 向正南. : 능하(凌河)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정남(正南)으로 향한다.』라고 하였는데 : 실제(實際)로는 : 「대능하(大凌河)에서 ➞ 산해관(山海關)까지는 “서남(西南)”쪽에 있다.」

 

     ➤ 따라서 「본문(本文) 설명(說明)대로 정남(正南)”으로 산해관(山海關)까지 간다면 : 연행사신단(燕行使臣團) 수백(數百) (), 발해(渤海) 바다에 수장(水葬)되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심양과 산해관(山海關) 땅이 아니었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㊂ 「심양(瀋陽)에서, 어느 길을 택하든 북경(北京)=연경(燕京)’은, ➞ 서(西)쪽이며, 약간(若干) 남(南)쪽으로 치우친 『서남(西南)쪽에 있다.』 ➞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지나, 대능하(大凌河)를 건넌 후, ➞ 산해관(山海關)으로 가려면 : 계속(繼續) “서남(西南)”쪽을 보고 가야만 한다. ➞ 산해관(山海關)에서 북경(北京)은 정서(正西) 쪽에 있다.」

 

     ☛ 위와 같은 지리적(地理的) 구도(構圖)는 이미 수만(數萬) 년(年) 전(前)에 형성(形成)되었을 것이니, 오늘날의 연경(燕京)=북경(北京)”20세기(世紀) 이전(以前)”연경(燕京)=북경(北京)”이 아님을 여실(如實)히 증명(證明)하고 있다.

 

     ➍  《北京雖極寒. 地凍不過數寸. 終日大雪. 隔夜無點白. 依然南土風氣. 豈人烟稠集. 鼓發喣噓. 足以敷布陽和耶. : 북경(北京)은 아무리 춰도, 땅이 몇 치[寸]밖에 얼지 않는다. 하루종일 큰 눈이 와도 밤이 지나고 나면, 눈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쪽 지방 기후(氣候)와 비슷하다. 인구(人口)가 조밀하여 내뿜는 입김이 따뜻한 기운을 퍼뜨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민망(憫惘)한 이야기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아니 한반도(韓半島) 그리고 해외동포(海外同胞)를 망라(網羅)하면 “약(約) 1억(億) 정도(程度)”로 추산(推算)되는 “한민족(韓民族) 곧 조선족(朝鮮族)”의 무지몽매(無知蒙昧)함을 스스로 한탄(恨歎)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오늘날의 북경(北京) 땅이 그 기후(氣候)가 『依 然 南 土 風 氣 : 남쪽 땅의 풍기(風氣)와 비슷하다.』라는 것이 맞는 말일까? 무슨 얼어 죽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다. 「‘남토(南土)는, 아열대(亞熱帶) 기후(氣候)에 속하고 있어, 그곳과 비슷하다’라는 것은 다른 땅을 말하고 있다.’

 

     『‘위키백과’에서는 : 여름은 고온 습윤, 겨울은 한랭 건조한 특징을 갖는다. 氣候 : 北京市地處暖溫帶半濕潤地區,氣候屬於暖溫帶半濕潤大陸性季風氣候』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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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원직지(燕轅直指) 1,832년∼1,833년 제6권 / 유관별록(留館別錄)

 

     ➨ 북경(北京)지방의 토질(土質) : <凡土性. 自遼野至北京. 皆理細而黏. 每當凍解雨溽之時. 膠轍難行. 用以墍屋. 無滲漏之患. 蓋土之理細者皆沙也. 微風輒揚. 狀若烟霧.: 무릇 이 지방(地方) 토질(土質)은, 요동(遼東)에서 북경(北京)까지가, 모두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찰져서, 해동(解凍) 때나 장마 때는, 바퀴에 붙어 지나가기 어렵고, 또 집 벽에다 바르면 빗물이 스며들 걱정이 없다. 그런데 곱고 부드러운 이 흙은 다 모래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치 연무(煙 霧)처럼 먼지가 인다. 雖大雪紛下. 爲飛沙所混. 片刻間不見雪痕. 而沙河驛最甚. 關內則往來車馬益多. 日夜爲蹄輪所碾磨. 雖無風時. 紛如飛灰. 着人衣帽面目. 頃刻幻形變色. 雖同行者. 驟看不能相識. : 그래서 아무리 큰 눈이 쏟아져도 이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버리면, 이내 눈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는데, 그중에도 사하역(沙河驛)이 제일 심하다. 산해관(山海關) 안쪽은 왕래하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아서, 밤낮으로 먼지를 일으키어, 아주 바람이 없는 때라도, 꼭 잿 가루가 날리는 것같이 분분하다. 이것이 사람의 의복이나, 모자에 붙으면, 잠깐 사이에 모습을 변화시켜서, 동행자끼리도 언뜻 보면 누가 누군지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 된다. 棲鬚髮者. 拭之不去. 入口中者. 嚼之輒索索有聲. 夜宿而朝起視之. 則沙能透入紙窓. 積于衾上. 至十襲之籠. 重封之甁. 亦皆透入其內. 極可怪也.市肆及人家所排器物. 以雞尾帚. 不住拭拂. 而暫停輒積. :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붙으면, 닦아도 떨어지지 않고, 입속으로 들어간 것을 씹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나기도 한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 먼지가 종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이불 위에 쌓여 있다. 심지어는 겹겹으로 된 장롱이나, 두세 겹씩 봉해 놓은 병 속에까지 뚫고 들어가니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저자 가게나 인가에 벌여 놓은 기물들은 닭털로 된 털이 개를 가지고 끊임없이 털어 내는데, 잠시라도 멈추면 또다시 쌓이곤 한다. 有風則行者不能開眼. 北京尤甚. 都是石炭滓棄之地而成屑者. 古所謂緇塵是也. 加以人溺所漬. 飛入口中.輒生鹹味. 大街上皆洒水以浥. 而亦莫之禁也. : 바람이 불면 길 가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북경(北京)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地方)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의 ‘치진(緇塵 세상 풍진 속에 분주하여 의복이 더럽혀짐)’이란 것이 곧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오줌에 젖은 먼지가 입속으로 날아들면 문득 짠맛까지 나게 되므로, 큰길에서는 모두 물을 뿌려 적시기도 하지만, 역시 아주 없애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➊  「요동(遼東)에서 북경(北京)까지, 이곳의 토질(土質)은 : 모두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찰져서, 해동(解凍) 때나 장마 때는, 바퀴에 붙어 지나가기 어렵고, 또 집 벽에다 바르면 빗물이 스며들 걱정이 없다. 그런데 곱고 부드러운 이 흙은 다 모래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치 연무(煙 霧)처럼 먼지가 인다.」라고 하였다.

 

     『고운 입자의 모래()로 온통 뒤덮여 있는 땅이란 이야기다. 「이것이 메마를 때는, 바람이 불면, 가는 입자의 모래가 날려 사람을 괴롭힌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현재(現在)의 요녕성(遼寧省) 요동(遼東)으로부터,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까지의 토질(土質)이 맞는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다.

 

     ➋ 이런 현상(現象)은, 「북경(北京)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地方)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현재(現在)의 북경(北京) 토질(土質)을 설명(說明)한 이야기다. 과연 올바른 이야긴가?

 

     ➌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1,720년 상(上) :《自渡江至北京. 地皆沙. 自入遼野. 往來車馬益多. 沙益細. 乍風輒揚. 狀若煙霧. :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북경(北京)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遼東)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關內尤甚. 雖無風之日. 輪蹄間觸起者如灰揚. 着人衣帽. 在轎內. 垂紗以遮. 而由其細故. 透入尤易. 頃刻之間. 堆積如丘. :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라고 하였다.

 

     1) 이곳에서도 요동(遼東)으로부터 북경(北京)까지, 땅이 모두 모래(地皆沙)라고 설명(說明)한다. 북경(北京),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2)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는 1,720년이요, 연원직지(燕轅直指)는 1,832∼1,833년이다. 시차(時差)는 약() ‘일백(一百)’()이다. 조선(朝鮮)에서 연경(燕京)으로 가는 곳의 토질(土質), 또는 연경(燕京)의 토질(土質)이, 1,720년대와 1,832년대가 같았다는 뜻이다. 이는 지세(地勢)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연경(燕京), 북경(北京) 1,700-1,800年 代의 인종(人種)

 

(6) 燕 轅 直 指 卷 六 / 留 館 別 錄 / 人 物 謠 俗

 

     《滿人皆豐碩. 生子多至七八者多. 似其旺運未替也. : 만인(滿人)은 모두 헌칠하게 크게 생겼고, 아들을 일곱 명까지 낳은 사람이 많았으니, 그들의 왕운이 아직 쇠퇴하지 않은 듯하다. 중략. 無論漢滿女多美色. 而關外素稱尤多美者. : 한족 여인이든 만족 여인이든 막론하고 대부분 예뻤으며 관외가 더욱 미인이 많다고 일컫는다. 중략. 女人三十以上. 擧已衰謝. 蓋夙成而早衰也. : 여자들이 30세 이상이면 거의 다 노숙해 보이니, 이는 대개 일찍 성장하고 일찍 노쇠하기 때문이다. 無論男女. 多白晢豐腴者. 以常食肉故也 : 남녀를 물론하고, 살결이 희고 뚱뚱한 사람이 많은데, 이는 평소 육식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➊ 《滿人皆豐碩. 生子多至七八者多. 似其旺運未替也. : 만인(滿人)여진족(女眞族) 특히 건주여진(建州女眞)은 모두 헌칠하게 크게 생겼고, 아들을 일곱 명까지 낳은 사람이 많았으니, 그들의 왕운(旺運)이 아직 쇠퇴하지 않은 듯하다》라고 하였다.

 

     『만인(滿人)』이란 말은, 곧 본시(本是)의 ‘만주(曼珠)=만주(滿洲)’ 땅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을 말하는 것인데, 대표적(代表的)으로 ‘건주여진(建州女眞)’이다. 이들이 바로 ‘청(淸)’을 건국(建國)한 자(自)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종족(種族), 동국인(東國人: 朝鮮人)과는 다르게 키가 더 크고, 신체(身體)가 더 컸다滿 人 皆 豐 碩』는 것을 말하며, 그 인종(人種) 자체(自體)가 달랐다는 것이다.

 

     「여진족(女眞族)」은, 청인(淸人)이며, 금인(金人)이며, 말갈(靺鞨)이며, 물길(勿吉)이며, 읍루(挹婁)이며, 숙신족(肅愼族)이다.

 

     오늘날의 구라파(歐羅巴) 계열(系列)의 인종(人種), 종족(種族)으로, 산해경(山海經)이나 회남자(淮南子) ()에서 말하는, 서북방(西北方) 종족(種族)이며,

 

     「이들은 고대(古代)로부터 말갈(靺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때도 고구려(高句驪)에 복속(服屬)되었고, AD 670년대(年代) ‘고구려(高句驪) 부흥군(復興軍)’이 말갈군(靺鞨軍)을 앞세워 당군(唐軍)의 벌노성(伐奴城)을 공격(攻擊)했고, 이곳저곳에서 당군(唐軍)과 치열(熾烈)한 전투(戰鬪)를 벌였고, 발해(渤海) 때에는 대조영(大祚榮)과 함께 발해(渤海)를 건국(建國)할 때 일조(一助)를 담당(擔當)했으며, 그 이전(以前) 숙신(肅愼) 때에는 고조선(古朝鮮)의 일원(一員)으로, 단군(檀君)의 통치(統治)를 받았다.」라고 하였다.

 

     ☛ 이들 「여진족(女眞族)은 : 황인종(黃人種)이 아닌 백인종(白人種) 계열(系列)의 별종(別種)이다. 오늘날의 동구라파(東歐羅巴)의 마자르(Magyar), 바로 헝가리[Magyarország : 부다페스트] 종족(種族)이다.」 이걸 극동(極東)의 ‘반도(半島) 백두산(白頭山) 북방지대(北方地帶)동북방(東北方)’에 가둬 놓으면 어찌 되겠는가? 정신(精神)이 나간 자(者)들이다.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주장(主張)하는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 하늘의 징벌(懲罰)인 “천벌(天罰)”을 피할 길이 없다. 뻔한 것을 속이려 사기극(詐欺劇)을 연출(演出)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민족(單一民族)이니, 백의민족(白衣民族)이니 하는 말은, 일제(日帝)가 만들어낸 말이다. 이미 동이(東夷), 구이(九夷) 속에는 이족(異族), 이종(異種)이 포함(包含)되어 있었다는 것은, 구이(九夷)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➋ 《無論漢滿女多美色. 而關外素稱尤多美者. : 한족(漢族) 여인(女人)이든 만족(滿族) 여인(女人)이든 막론하고 대부분(大部分) 예뻤으며 관외(關外)가 더욱 미인(美人)이 많다고 일컫는다.》라고 하였는데… …,

 

     여기서 관외(關外)산해관(山海關) ()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조선(朝鮮) 땅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記錄)이 있다.

 

     ☛ 즉(卽), 남남북녀(南男北女)란 말이 있다. 남남북녀(南男北女)”란 말은 반도(半島) 땅과는 십 원 한 장의 관계(關係)도 없다. 중원대륙(中原大陸) 서북방(西北方) 땅에서 있었던 일이다.

 

     • 林下筆記李裕元 1,814~1,888) 27권 / 春明逸史. 南男北女

 

     《世以南男北女. 謂之南方之男北方之女. 其眞實則以咸關南北而言也. 關北之女. 碩大白晢. : 세상(世上)에서 남남북녀(南男北女)는, 남방(南方)의 남자(男子)와 북방(北方)의 여자(女子)를 말하는데, 그 진실(眞實)은 함관(咸關)의 남()쪽과 북()쪽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관북(關北)의 여자(女子), 체구가 크고 살갗이 희다.》라고 하였다.

 

     ☛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의 말 그대로 : 이 내용(內容)을 반도(半島) 땅에 대입해 보면 : 『함경도(咸鏡道) 땅에는 ‘코카서스(Caucasoid)’ 인종(人種)들이 살았다』라는 이야기가 전개(展開)되어야 한다. 전형적(典型的)인 색목인(色目人)들로 달단족(韃靼族 : Tatar)과 마자르족(Magyar : Hungary)헝가리(Hungary)의 대부분(大部分) 인종(人種)이 마자르(Magyar)이다들의 터전이었다라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 ‘남남북녀(南男北女)’를 나누는 기준(基準)이 되는 곳은 : 함관(咸關)이다. 즉(卽) 『‘함관(咸關) 남(南)쪽 땅의 남자(男子)’와 ‘함관(咸關) 북(北)쪽 땅의 여자(女子)’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 달단(韃靼) 마을인 달단동(韃靼洞)이 있었다.라는 기록(記錄)에 따르면 : 함경도(咸鏡道) 땅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우랄산맥(Ural, 山脈) 남안(南岸) 지대(地帶)의 땅이 되는 것이다. 암내(羶臭)를 풍기는 인종(人種)은, 유목족(遊牧族)으로 서방족(西方族)이다. 인종(人種)이 다르다.

 

     ➤ 이곳에서 말하는 “함관(咸關)”은 반도(半島) 땅의 함경도(咸鏡道) 지방(地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西北方) 지대(地帶)를 말하는 것이다.

 

     『체구(體軀)가 크다라는 말은 ‘신체(身體)가 크다’라는 말이고, 살갗이 희다란 말은 백인종(白人種)에 가깝다는 말이 된다. 關 北 之 女. 碩 大 白 晢 : 관북(關北)의 여인(女人), 체구(體軀)가 크고 살갗이 희다. 곧, 이러한 인종(人種)은, 중원대륙(中原大陸)에도, 반도(半島) 땅에도 존재(存在)할 수 없는 : 백인계열(白人系列) 종족(種族)이다.

 

     이런 인종(人種)이 주(主)로 어디에 분포(分包)되어있을까? 「동구라파(東歐羅巴) + 우랄산맥(Ural, 山脈) 서(西)쪽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 아랍(Arab) 지방(地方)」등지(等地)로, 관외(關外) 곧 관북(關北)이라면 달단(韃靼), 러시아인(Russian), 동구라파(東歐羅巴) ()들이다. 내륙(內陸) 땅에 살던 종족(種族)들을 “1만(萬) 5천(千) 여리(餘里)” 극동(極東) 땅에 옮겨 놓고 해설(解說)하면 어찌 되겠나?

 

     그러니 뒤죽박죽이 되어,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조차 구분(區分), 구별(區別)하지 못하는 무지무식(無知無識)한 논리(論理)가 진짜인 것처럼 행세(行世)하는 우리 사회(社會)가 되어버렸다.

 

     ➌ 《女人三十以上. 擧已衰謝. 蓋夙成而早衰也. : 여인(女人)들이 30세(世) 이상(以上)이면, 거의 다 노숙(老宿)해 보이니, 이는 대개 일찍 성장(成長)하고 일찍 노쇠(老衰)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종(人種) 특징(特徵)’은, 『전형적(典型的)인 동구라파(東歐羅巴) 및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아랍(Arab) 인종(人種)들의 특색(特色)이다.」

 

     ‘십대(十代)에서 이십(二十) 대(代)’까지는 아주 날씬하고 매력적(魅力的)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십(二十) 대(代), 혼인(婚姻)과 함께 임신(妊娠), 출산(出産) 후(後)부터는 비대(肥大)해지고, 조쇠(早衰)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곳 땅 여인(女人)들의 특징(特徵)이다.

 

     「반도(半島) 함경도(咸鏡道)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토인(土人)들이 그와 같은 종족(種族)이다」라고 한다면 : 그곳 땅의 토인(土人)들로부터 몰매를 맞아 죽을지 모른다. 유언비어(流言蜚語) 날조(捏造) 및 전파(傳播)로 말이다. 반도(半島)와는 손톱만큼의 관계(關係)도 없다. 반도조선(半島朝鮮)논리(論理),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어불성설(語不成說) 논리(論理)이다.

 

     ☛ 이러한 ‘인종적(人種的) 면(面)’만을 살펴봐도 : 북경(北京)=연경(燕京)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이 될 수 없다. “연경(燕京)=북경(北京)”은 중원대륙(中原大陸) 땅에 있을 수 없다. ➤ “금산산맥(金山山脈)=알타이산맥(Altai, 山脈)=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을 넘어 그 서(西)쪽 땅에 있어야 : 사서(史書)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다.

 

     ➍ 《無論男女. 多白晢豐腴者. 以常食肉故也. : 남녀(男女)를 물론하고, 살결이 희고 뚱뚱한 사람이 많은데, 이는 평소 육식(肉食)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고기(肉)를 많이 먹는다고 백인(白人)이 되는 게 아니다. 종족(種族)이 백인계열(白人系列)이기 때문에 이러한 체형(體形)이 탄생(誕生)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체형(體形)이 분포(分包)되어 있는 곳은 :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이다.

 

     ➎ 위에서 설명(說明)하는 종족(種族), 인종(人種)에 대한 것은,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연행기록(燕行記錄)에서도 볼 수 있다.

 

     • 연원직지(燕轅直指)는 : 1,832年∼1,833年

     •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는 : 1720年[肅宗 46]

 

     •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淸人大抵豐偉長大. 而間有面目極可憎者. 羶臭每多襲人. 言辭擧止. 全無溫遜底氣象. : 청인(淸人)들은 대개 몸이 살지고 큰데, 그중에는 얼굴이 몹시 가증스러운 자도 있다. 누린내가 많아서 사람에게 풍기기도 한다. 언사와 행동이 전혀 공손한 기상이 없다.》라고 하였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1,720(肅宗 46)와 연원직지(燕轅直指)1,8321,833기록(記錄)은 : 『약(約) 110년(年) 정도(程度)의 시차(時差)가 있음에도, 그곳 땅의 인종(人種)은 똑같았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누린내전취 : 羶臭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백성(百姓)들에게는 없다. 소수민족(少數民族) 중에서는 있을 수 있으나, 대부분(大部分)에게서는 없다는 것이다. 소위 ‘암내’라고도 하는 ‘누린내’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구라파(歐羅巴) 인종(人種)들에게서 나는 특징(特徵)이다당시(當時) 북경(北京)에 살고 있던 청인(淸人)”, 황인종(黃人種)이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특히 「만인(滿人) 곧 청인(淸人)들은, 만자(蠻子)라고 하면서, 오랑캐 곧 미개(未開)한 종족(種族)으로 취급(取扱)받았다」라는 것인데 … … 청인(淸人)은 곧 여진족(女眞族)”이다.

 

     이들의 몸에서 ‘누린내(羶臭)가 나서 못 견딜 정도(程度)’라고 하는데, 전형적(典型的)인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러시아인(Russian)들의 특징(特徵)이며, 전형적(典型的)인 유목족(遊牧族)이라는 뜻이다.

 

                     여진족(女眞族)과 몽고족(蒙古族)의 진실(眞實) 게임(Game)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에서 가장 오류(誤謬)가 심(深)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세뇌(洗腦)로 인한 뇌세포(腦細胞)에 각인(刻印)된 잘못된 역사지식(歷史知識) 중에서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 할 부분(部分)이 바로 인종(人種) 또는 종족(種族)” 분야(分野)로, 특히 「여진족(女眞族)과 몽고족(蒙古族), ()

 

     ㈠ 「‘여진족(女眞族)의 원류(源流)’는, 숙신족(肅愼族)이고, 물길(勿吉), 읍루(挹婁), 말갈(靺鞨), 여진(女眞)으로 불렸는데, 숙신(肅愼)은 직신(稷愼)으로 단군(檀君)고조선(古朝鮮)의 예속(隸屬)되어 있었다.」

 

     「숙신(肅愼) 또는 직신(稷愼) 전음(轉音)이 되어 조선(朝鮮)이 되었다라는 등의 근거(根據) 미약(微弱)한 주장(主張)과 맞물려 있어, 일반적(一般的)으로 ‘조선족(朝鮮族)=한족(韓族)’과 같은 동족(同族) 내지 비슷한 부류(部類)로 인식(認識)하고 있으나, 「실상(實相)은 전혀 다른 이민족(異民族)으로체양(體樣)=체형(體形)’곧 몸의 생김새가 조선족(朝鮮族)과 전혀 다른 이민족(異民族)이다.」착각(錯覺)도 자유(自由)라고 하지만, 이건 자유(自由)에 속(屬)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진족(女眞族)은, 백인(白人) 계열(系列)의 “코카서스(Caucasus)”계 인종(人種)이다.」

 

     ㈡ 「몽고족(蒙古族)」은, 몽고반점(蒙古斑點)이 있어 더더욱 친근(親近)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몽고족(蒙古族)은 ‘우랄 알타이(Ural, Altai)’ 계통(系統)으로 우리와 밀접(密接)하게 관계(關係)되어 있다는 믿기 어려운 주장(主張) 때문에, 오늘날의 ‘몽골공화국’인(人)들이 옛 몽고족(蒙古族)이다」라는 엉터리 역사교육(歷史敎育)과 해설(解說)을 한다.”

 

     「옛 몽고족(蒙古族), 본래(本來) 글란(契丹)의 노예(奴隸)로 공역(貢役)을 담당(擔當)하던 한 부락(部落)으로, 색목인(色目人) 종족(種族)이다. 우랄산맥(Ural, 山脈) 서(西)쪽에서 동(東)쪽 카스피해(Caspi, 海)를 건너왔다고 하였고, ‘신원사(新元史)에서, 몽고비사(蒙古祕史)’에서 이미 기록(記錄)하여 설명(說明)하고 있는 내용(內容)이다.」

 

     자주 반복(反復)되는 설명(說明)이지만 :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국민(國民), 옛 몽고인(蒙古人)의 후예(後裔)가 아닌 조선족(朝鮮族)의 일원(一圓)이며, 이는 유전자(遺傳子) 및 몽고반점(蒙古斑點) 등으로 증거(證據)된다.

 

     ➥ 「옛 몽고족(蒙古族)은, 색목인(色目人)들로 영토(領土)는 우랄산맥(Ural, 山脈) 서(西)쪽에 있었으며, 그 일파(一派)인 달단(韃靼) 역시(亦是) ‘달단공화국(韃靼共和國)’으로 존재(存在)하고 있다.」

 

     ☛ 「우랄산맥(Ural, 山脈) 서(西)쪽의 본래(本來) 몽고(蒙古) 땅은, 소련(蘇聯)이 다 차지해버리고흔적(痕迹)은 남겨 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달단(韃靼) 공화국(共和國)이다, 20세기(世紀) 초반(初盤) 소련(蘇聯)에 의해 수천리(數千里) 동(東)쪽의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땅에 “20여만(餘萬) 백성(百姓)”을 위한 “공화국(共和國)”을 만들어 준 것인데… … ➤ 몽고(蒙古: 몽골)는 다시 나라를 세웠으나, 몽고족(蒙古族)은 없고, 조선족(朝鮮族)의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예(例)’는 : 「서세(西勢)와 일제(日帝)가 야합(野合)」하여, 「옛 조선(朝鮮)의 강토(疆土)였던 ‘중원대륙(中原大陸)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서 내쫓고, 극동(極東)의 손바닥만 한 땅 “반도(半島)에 조선(朝鮮)을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곧 소련(蘇聯)도 이것을 본받아, 본래(本來)의 몽고(蒙古) 땅을 빼앗고, 옛 조선(朝鮮)의 변방(邊方) 땅에, ‘토착민(土着民) 조선족(朝鮮族)에게 몽고인(蒙古人)이라 칭(稱)’하며, “몽골공화국(共和國)”을 세워 준 것이다.

 

     ㈢ 위에서 말하는 「여진족(女眞族)과 몽고족(蒙古族)」 이야기는, “올바른 교육(敎育)의 부재(不在)”로 인한 부작용(副作用)이다. 「본시(本是)의 여진족(女眞族)과 몽고족(蒙古族)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민족(異民族)이란 사실(事實)이다.」 역사교육(歷史敎育)의 부재(不在)와 잘못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전파(傳播)세뇌(洗腦)로 인한 것이다. 몽고족(蒙古族)과 왜()에 대해서는 오늘의 주제(主題)가 아니므로 생략(省略)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일까?

 

     • 역사교육(歷史敎育)의 부재(不在)와 잘못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전파(傳播)세뇌(洗腦)로 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진족(女眞族)” 인종(人種) 체형(體形)은, 동양(東洋)의 황인종(黃人種)과 어떻게 다르게 생겼을까?

 

     “동방(東方)의 황인종(黃人種)과 전혀 다른 인종(人種)이 사는 북경(北京)”은, 당연(當然)히 오늘날의 북경(北京)이 될 수 없다.이건 자연(自然)의 이치(理致)와 같아 물리적(物理的)으로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㈣ 여진족(女眞族) 체양(體樣)=면상(面相)女眞族(建州女眞 : 淸人) 體樣 面相

     ➤ 명(明) 때 그려진 여진족(女眞族)이라고 전해진다. 출처(出處) : 네이버 캐스트: 황인종(黃人種)이 아닌 “이민족(異民族)”의 체형(體形)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➊ 「청인(淸人)」 : 燕行錄叢書, 北轅錄이의봉(李義鳳, 1733~1801)제1권 / 산천풍속총론(山川風俗總論) : 《淸 人 貌 多 豊 碩 項 大 如 牛 而 身 又 長 : ()나라 사람의 모습은 몸집이 크고, 목의 굵기가 소()와 같고 신체(身體)는 길다.》라고 하였다.

 

     당시(當時)의 ()나라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我東人 : 朝鮮人)과는 체형(體形)이 달랐다라는 것이다. 「연행록(燕行錄)을 기록(記錄)한 이의봉(李義鳳)이 청(淸)나라 곧 만주족(滿洲族)들과 그 모습이 같았다면, 이런 설명(說明)은 할 필요(必要)조차 없다.」 당연(當然)하게도, 저자(著者)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청인(淸人)”에 대해 기술(記述)해 놓은 것이다.라는 100% 신뢰(信賴)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청인(淸人)들은 몸집이 굶고[크고], 특히 목이 소()처럼 긂고, 신장(身長) 또한 컸다라는 이야기다. 즉(卽), “청(淸)”나라 사람들에 대해 : 이의봉(李義鳳, 1733~1801)은, 동국(東國), 곧 조선인(朝鮮人)과는 전혀 다른 체형(體形)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곧 “청인(淸人)”은, “이민족(異民族)”이라는 것을 설명(說明)하고 있다.

 

     ➥ 위의 이야기로 보면 : 건주(建州) 여진족(女眞族)은, 조선인(朝鮮人)과 체형적(體形的)으로 달랐다는 이야기다. 서력(西曆) 1,7601761년 사이에 연행(燕行)을 다녀왔다고 한다.혹자(或者)들은 여진족(女眞族)은, 조선인(朝鮮人)과 같은 종족(種族)이나, 또는 사촌(四寸)쯤 되는 부족(部族) 정도(程度)로 알고 있지만, 이는 전혀 다르다. 이들은 몽고족(蒙古族)과 더 가까운 체형(體形)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두는 역사교육(歷史敎育)의 잘못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고, 식민사학(植民史學)과 정치(政治)가 야합(野合)한 민낯이다.

 

     연행기록(燕行記錄)을 남긴 저자(著者)가 자신(自身)과 똑같은 얼굴 모습이며, ‘체형(體形)=체양(體樣)’이 비슷한 청인(淸人)들을 보면서《淸 人 貌 多 豊 碩 項 大 如 牛 而 身 又 長 : ()나라 사람의 모습은 몸집이 많이 좋은데(豊碩), 목의 굵기가 소와 같고, 신체(身體)는 또 길다》라고 했을까? 이건 아니다.

 

     〈몸집이 좋다는 말은, 몸집이 크다는 것이고, 목의 굵기가 소()처럼 크다는 말은 신체(身體) 자체(自體)가 몹시 컸다는 뜻이고, 신장(身長)이 길다()라는 말은, 키가 컸다.는 뜻이다. 이렇게 묘사(描寫)한 ‘체형(體形)=체양(體樣)’은, 황인종(黃人種) 계열이 될 수 없으며, 특히 암내(羶臭)는, 결정적(決定的)인 단서(端緖)다.

 

     ➥ 「이와 같은 ‘체형(體形)=체양(體樣)’을 가진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일부(一部) 및 마자르(Magyar) 계통(系統)의 헝가리(Hungary), 루마니아 (Romania), 불가리아(Bulgaria), 러시아(Russia) 일부(一部) 등지(等地)의 종족(種族)이다.」

 

     ➋ 薊山紀程 5권 부록(附錄) 滿洲族 體形女眞族:《滿人貌多豐偉. 亦小文而多實. 漢人反是. 南人又輕薄狡詐. 然而不必盡然. : 만인(滿人)은 모양이 흔히 풍위豐偉 : 살찌고 크다하고, 또한 형식[]이 적고 실질이 많은데, 한인은 이와 반대된다. 남쪽 사람은 또 경박하고 간사하지만, 꼭 다 그렇지는 않다.》라고 하였다.

 

     ➌ 庚子燕行雜識 下著者 : 이의현(李宜顯) 경자(庚子)1,720: 여진족(女眞族) (建州 女眞 : 淸人) 體樣面相 :《淸人大抵豐偉長大. 而間有面目極可憎者. 羶臭每多襲人. : 청인(淸人)들은 대개 몸이 살찌고 큰데, 그중에는 얼굴이 몹시 가증스러운 자도 있다. 누린내가 많아서 사람에게 풍기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➍ 老稼齋燕行日記卷之一[燕行日記] 山川風俗總錄 著者, 김창업(金昌業) : 숙종(肅宗) 38(1712) 임진년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 김창집(金昌集)의 타각(打角 자벽군관(自辟軍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온 김창집(金昌集)의 아우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의 연행기록(燕行記錄)이다.: 「청인(淸人)의 얼굴(貌)」

 

     《自渡江至北京。地皆沙。淸 人 貌 豐 偉 :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북경(北京)까지, 땅은 모두 모래(). 청인(淸人)의 모습은 살찌고 크다(豐偉)》라고 하였다.

 

     ㈤ 위의 ‘연행기록(燕行記錄)’에서 : “만주족(滿洲族)인 청(淸)나라 사람들의 체형(體形) 곧 면상(面相)”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는 저자(著者)가 직접(直接) 눈으로 보고 기록(記錄)한 것이니만큼 신뢰(信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주족(滿洲族)의 체형(體形)은, 신체(身體)는 크고, 신장(身長)은 길며, 목이 아주 두껍고, 몸에서 누린내가 아주 많이 나는 자()들이다.라고 표현(表現)하였다.

 

     【羶臭(전취) : ‘암내를 말하는 것으로, ()에서 나는 누린내를 표시(表示)하는 글자이니, 곧 유목족(遊牧族)을 가리키는 말로, 이민족(異民族)을 말한다.

 

     ☛ 청인(淸人) 곧 여진족(女眞族)은 조선(朝鮮)의 여러 나라에 복속(服屬)되어 있었으나, 그 종족(種族)은 우리와는 다른 유목종족(遊牧種族)으로 근본(根本)이 다르고, ‘체형(體形)=체양(體樣)’이 전혀 다른 이민족(異民族)이었다라는 것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勘案)치 않고, 무작정(無酌定) 따져보지도 못하는 사가(史家)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요동(遼東)요서(遼西)북경(北京)의 토질(土質)

 

(7) 《自遼至西. 地皆平衍. 一風一雨. 沙移失路. 故往往植柳以識路. : 요동에서부터 서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평탄하고 넓다. 그래서 바람이 한번 불거나 비가 한번 오면 모래가 이리저리 옮겨져서 길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이따금 버드나무를 심어서 길을 식별하게 했다. 중략. 婚姻之禮.男女幼時約婚.未成禮.而男子死.猶且終身守寡云. : 혼인하는 예절은, 남녀가 어렸을 때 약혼하며, 성례(成禮)하지 못한 채 남자가 사망하게 되면, 그 여자는 종신토록 수절(守節)한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➊ 《自遼至西. 地皆平衍. 一風一雨. 沙移失路. 故往往植柳以識路. : 요동(遼東)에서부터 서(西)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평탄하고 넓다. 그래서 바람이 한번 불거나 비가 한번 오면, 모래가 이리저리 옮겨져서 길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이따금 버드나무를 심어서 길을 식별(識別)하게 했다.》라고 하였으니,

 

     ➥ 「요동(遼東)으로부터, 요서지방(遼西地方) 곧 북경(北京)까지의 땅은,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것을 증거(證據)하고 있다.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모래(沙)가 이리저리 이동(移動)하면서 모래 구릉(丘陵)을 만들고, 이리저리로 옮겨진 모래 때문에, 길이 없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길가에 “느릅나무(楡)또는 버드나무(柳)”를 심어, 이정표(里程標)로 삼는 것이다.」

 

      연행록(燕行錄)을 보면 : 수백(數百) 년(年)이 됨직한 수령(樹齡)의 느릅나무를 잘라 땔감으로 사용(使用)하는 그곳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記錄)한 예(例)도 있다.

 

     특히 3월(月)쯤대개(大槪) 계절(季節)이 바뀌는 전후(前後)에 이러한 기상이변(氣象異變)이 꼭 일어나는데, 이러한 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攝理)불어오는 모래바람(風沙)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 모든 것들이 다 변해버린다. 그래서 요즘의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는 고속도로(高速道路) 또는 포장(鋪裝)된 도로(道路)변에 ‘콜타르’를 살포(撒布)하여, 모래가 날리지 않도록 하는 그러한 “예(例)”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전형적(典型的)인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설명(說明)하고 있다.

 

     ➋ 「老稼齋燕行日記卷之一[燕行日記] 山川風俗總錄 著者, 김창업(金昌業) : 숙종(肅宗) 38(1712) 임진년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 김창집(金昌集)의 타각(打角 자벽군관(自辟軍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온 김창집(金昌集)의 아우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의 연행기록(燕行記錄)이다.」 에서도 위와 같은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즉(卽),

 

     《自渡江至北京。地皆沙。: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면서부터 북경(北京)에 이르기까지, 땅은 모두 모래().》라고 하였다.

 

     ☛ 이러한 기록(記錄)을 보면서도 오늘날의 “북경(北京)”을 “옛 연경(燕京)”이라고 하거나 우북평(右北平) 또는 북평(北平)이라고 하는 사가(史家)는, 제정신을 가진 학자(學者)가 아닐 것이다.

 

     ‘일반(一般) 국민(國民)’은, 역사(歷史)를 전문적(專門的)으로 연구(硏究)하지 않은 까닭에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고대사(古代史)니, 동양사(東洋史)니 하는 역사학계(歷史學界)에 몸담고 있다면 : 이 정도(程度)의 역사지식(歷史知識)은, 상식(常識)에 속(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필자(筆者)는,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를 식민사학계(植民史學界)라고 하는 것이고, 이들의 사관(史觀)이야말로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 목매는 자(者)”들이라고 비난(非難)하는 것이다.

 

                         「()서한(西漢)수당(隋唐)19 世紀의 인종분포(人種分布)

 

‘인종(人種) 분포(分布)’를 보면 : 전한서(前漢書)()이나 전한(前漢)은 기원전(紀元前)의 나라이다.에서 기록(記錄)되어 있는 것과 19세기(世紀)까지도 크게 변(變)함이 없다.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황인종(黃人種)과는 전혀 다른 이민족(異民族)핏줄, 언어(言語), 풍습(風習) 따위가 다른 민족(民族).곧 구라파(歐羅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등지(等地)의 백인계열(白人系列)색목인(色目人)을 포함(包含)한 오늘날의 구라파(歐羅巴)+러시아(Russia)+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인도(人道), 아랍계(Arab, ) 등을 말한다.이 침략(侵略)하여 잠시 머문 예(例)는 있다. : 그러나 장기간(長期間)에 걸쳐 나라를 세우고 정착(定着)한 경우(境遇)는 없다. 왜냐하면 그 흔적(痕迹)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민족(異民族)들이 중원대륙(中原大陸)에 들어와 토착왕조(土着王朝)를 정복(征服)하고, 통치(統治), 정착(定着)했다」라면 : 인종적(人種的)으로 혼혈(混血)은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건 창조주(創造主)라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흔적(痕迹)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나?

 

     “중원대륙(中原大陸)에는 소수민족(少數民族)이 많다라고 하지만 : 대부분(大部分) 체형(體形)은 같다. 다만 복식(服飾)에서, 음식(飮食)에서, 풍속(風俗)이 서로 다를 뿐… …인종적(人種的)으로 남남이 아니다.

 

     ☛ 「오늘날의 ‘북경(北京)이 옛 연경(燕京)이요, 우북평(右北平)이요, 북평(北平)이었다’」라면 : 이곳에 사는 대부분(大部分) 백성(百姓)들은, 황인종(黃人種)과는 다른 이민족(異民族)의 ‘형상(形相)=체양(體樣)=체형(體形)’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황인종(黃人種)과 더불어 사는 곳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只今)의 북경(北京)이 그러한 곳인가?

 

     ➊ 예(例)를 들면 : 인종(人種)으로, 종족(種族)으로, 체형(體形)이 크다거나 얼굴이 희다거나 몸에서 암내羶臭 : 누린 냄새 : 농경족(農耕族)이 아닌 서방(西方)의 유목민(遊牧民)에게 나는 누린내 일컫는다가 난다거나 하는 종족(種族)은, 이민족(異民族)으로 대략(大略) 그 분포(分包)는 : 전한서(前漢書)에서 말하는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소륵(疏勒), 구자(龜玆)를 포함(包含)한 그 서(西)쪽에 산다라고 하였으며,

 

     ➋ “두우(杜佑) 통전(通典)”에서는 이르기를 : 「고창(高昌)에 살고 있었던 당시(當時)의 백성(百姓)들은 고려인(高麗人) 일족(一族)이었다其地東西三百里, 南北五百里. 其人面貌類高麗」라고 하였다,

 

      이곳 고창(高昌)의 서(西)쪽은, 《自高昌以西, 諸國人多深目高鼻, 惟此一國, 貌不甚胡, 頗類華夏 : 고창(高昌)의 서(西)쪽 지방은, 많은 여러 나라 사람들은 눈은 깊고, 코는 높다. 유일하게 그 한 나라우전(于闐)는, 얼굴 모양이 호(胡)와 같지 않고, 약간 화하(華夏) 일족(一族)과 같다.》라고 하였다.

 

     「고창(高昌)」은, 전한(前漢) 때의 거사국(車師國)이요,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 주변(周邊)을 말하는 것으로, 고창고성(高昌故城)으로 유명한 곳인데, 신강성(新疆省에서 가장 큰 고성유지(古城遺趾)이다. 【是公元前1世紀到公元14世紀吐魯番盆地的第一大中心城鎮,也是新疆留存最大的故城遺址。城遺址位於新疆維吾爾自治區吐魯番市高昌區三堡鄉,即火焰山南麓木頭溝河三角洲】

 

     ➤ 「고창(高昌)」은 전한(前漢) 때의 거사국(車師國)이요,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 주변(周邊)을 말하는 것으로, 고창고성(高昌故城)으로 유명한 곳인데, 신강성(新疆省에서 가장 큰 고성유지(古城遺趾)이다. 【是公元前1世紀到公元14世紀吐魯番盆地的第一大中心城鎮,也是新疆留存最大的故城遺址。城遺址位於新疆維吾爾自治區吐魯番市高昌區三堡鄉,即火焰山南麓木頭溝河三角洲 : 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고창고성(高昌故城)】

 

     이러한 ‘고창국(高昌國)’에 대해 ‘통전(通典)’에서는 이르기를 : 「고창(高昌)에 살고 있었던 당시(當時)의 백성(百姓)들은 고려인(高麗人) 일족(一族)이었다其地東西三百里, 南北五百里. 其人面貌類高麗」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창고성(高昌故城)은 누가 만들었을까? 뻔한 이야기다. 고려인(高麗人)이 쌓았다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고려인(高麗人)이라면 이때는 고구려인(高句驪人)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當時) 고구려(高句驪)가 이 땅까지 진출(進出)하지 않고는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혹자(或者)는, 고구려(高句驪)가 망(亡)할 때 끌려간 유민(遺民)들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할 수 있으나, 위의 고창고성(高昌故城)에서 보듯이 소수(小數) 백성(百姓)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창국(高昌國) 모두의 백성(百姓)들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동국사(東國史)’는, 반드시 새롭게 써져야 한다.」

 

     ➌ 여기서, 우리가 간과(看過)해서 안 되는 게 있다 즉(卽), 「장안성(長安城)」이다. 『전한(前漢)=서한(西漢)’의 장안성(長安城), 수당(隋唐)의 장안성(長安城 : 大興城), 그리고 고구려(高句驪)의 장안성(長安城)이다.』 똑같은 곳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난 회(回)에 “1, 2, 3”편(篇)으로 게재(揭載)한 바 있는데,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구자(龜玆)에는 구자성(龜玆城)이 있는데 : 〈구자성(龜茲城)은 장안성(長安城)과 장안(長安)의 시읍(市邑)과 똑같고, 궁실(宮室)도 대단히 성했다(컸다)城如長安市邑, 宮室甚盛〉라고 전해진다.

 

     『중원대륙(中原大陸) 장안(長安)으로부터 ‘7천(千) 5 백리(百里)’ 떨어져 있었다.』라는 서역(西域) 땅의 ‘구자국(龜慈國)’을 보면 :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은, 이러한 것에서부터 출발(出發)하는 것이다.

 

     • 쿠처(龜茲 : 龟兹 : Kucha)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쿠처위구르어: كۇچار, 중국어 간체자: 库车, 정체자: 庫車, 屈支, 屈茨, 丘玆, 중국어 간체자: 龟兹, 정체자: 龜玆는 고대(古代) 불교(佛敎) 왕국(王國) 구자국(龜玆國)의 현지명으로 비단길에 있으며,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가장자리 무자트강 남쪽에 있다.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아커쑤 지구에 속하며 쿠처 현 중심이다. 쿠처(Kucha)는, 쿠샤, 쿠처르 등으로도 읽히며 같은 곳을 가리킨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인용/끝 -》

 

     • 이러한 곳에 있었던 「城 如 長 安 市 邑, 宮 室 甚 盛 : 구자국(龜慈國)도성(都城)과 시읍(市邑)이 매우 크고 성했는데, 장안성(長安城)과 같았다.」라 하였다. ‘명(明) 말(末), 청(淸)나라 초(初)’를 살다 간 “고조우(顧祖禹)”가 편찬(編纂)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서역(西域)”편에 이러한 이야기가 생생(生生)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다.

 

      【고조우(顧祖禹1,631 ~ 1,692) :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의 역사, 지리학자. 사학자 유겸의 아들. 지리학에 정통하였다. 벼슬하지 않고, 20년에 걸쳐 여도요람, 독사방여기요를 완성했다. 서건학·진덕화 등과 함께 대청일통지편찬에도 참여했다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조우[顧祖禹] (두산백과)

 

     ● 讀史方輿紀要. 西域 / 龜茲國城 :《龜茲國城在亦力把力東南. 구자국성(龜慈國城)은 역력파력(亦力把力) 동남(東南)쪽에 있다. 漢西域傳:龜茲治延城, 去長安七千四百八十里, 東至都護治烏壘城三百五十里. 或曰丘慈, 亦曰屈茲. 武帝時, 內附. 中略. : 한(漢)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 구자(龜玆)는 연성(延城)에서 다스렸다. 장안(長安)으로부터 7,480리 떨어져 있고, 동(東)쪽으로 도호(都護)가 다스리는 오루성(烏壘城) 350리에 다다른다. 혹은 구자(丘慈), 또 굴자(屈慈)라고도 한다. 무제(武帝) 때 내부하였다. 중략(中略). 太元七年, 苻秦將呂光伐西域, 焉耆諸國皆降, 惟龜茲不下. 九年, 龜茲窘急, 重賂獪胡求救. : 태원 7년, 부진(苻秦)의 장(將) 여광(呂光)이 서역을 쳐서, 언기(焉耆)등 여러 나라가 모두 항복(降伏)하였으나, 유일하게 구자(龜玆)가 항복치 않았다. 9년에, 구자(龜玆)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몹시 급하게 되어, 많은 뇌물을 주고 회호(獪胡)에게 도움을 구했다. 獪胡王引溫宿尉頭諸國兵赴救, 光大破之於城西. 王侯降者三十餘國, 光入龜茲城. : 회호왕(獪胡王)은 온숙(溫宿), 위두(尉頭)등의 여러 나라 병사들과 다다라 구원했으나, 여광(呂光)이 성(城)의 서(西)쪽을 크게 깨뜨렸다. 왕후(王侯) 30여 나라가 항복하고, 여광(呂光)이 구자성(龜玆城)에 들어왔다. 城如長安市邑,宮室甚盛. 光撫寧西域, 前世所不能服者, 悉來歸附, 改立故王帛純之弟震為龜茲王而還. 中略. : 구자성(龜茲城)은 장안(長安)의 시읍(市邑)과 똑같고, 궁실(宮室)도 대단히 성했다(컸다). 여광(呂光)은 서역(西域)을 안무(按撫)하니, 전에 항복하지 않았던 자들도, 모두 와 귀부(歸附)하니, 옛 왕(王) 백순(帛純)의 동생인 ‘진(震)’을 구자왕(龜茲王)으로 다시 세웠다. 중략(中略).》하였는데, 공교롭게도…

 

     ☛ 『“장안성(長安城)과 구자국성(龜慈國城)”은 여러 가지로 공통점(共通點)이 많고, 시가(市街)와 성(城)도 장안성(長安城)과 똑같았다』라는 것이다

 

     『() 6()에 펼쳐져 있었다. 사찰(寺刹)이 많았다. 내성(內城)과 외성(外城) 등의 몇 겹으로 성()의 규모가 컸고(三重), 궁실(宮室) 또한 크고 성했으며, 시읍(市邑) 또한 같았다』라고 하였으니, ‘고구려(高句驪) 평양성(平壤城)’에 대한 설명(說明)과 무엇이 다른가?

 

     ➊ 구자국성(龜茲國城), 삼중(三重)으로 방() 56()에 걸쳐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➋ 「조선(朝鮮)의 장안성(長安城)인 평양성(平壤城) 즉(卽) 유경(柳京)의 도성(都城)이 삼중(三重)의 겹으로 만들어졌으며, 6리(里)였다.」라고 하였다.

 

     ➌ 《진서(晉書)》에서 이르기를 : 《구자국(龜慈國)은 낙양(洛陽)으로부터 서(西)쪽으로 8,280리 떨어져 있고, 성곽(城郭)이 있고, 그 성(城)은 삼중(三重)이며, 그 가운데에는 불탑과 사당이 천(千) 개소가 있다. 왕궁(王宮)은 장엄(莊嚴)하고 화려(華麗)하였다.晉書四夷 / 龜茲國 : 龜茲國西去洛陽八千二百八十里, 俗有城郭, 其城三重, 中有佛塔廟千所. 中略. 王宮壯麗,煥若神居.》라고 하였다.

 

     ➍ 《북사(北史)》에서 이르기를 : 《구자국(龜慈國)은, 위리(尉犁) 서북(西北)에 있는데, 백산(白山) 남쪽 170리(里)에 있다. 대(代)로부터 10,280리 떨어져 있다. 중략(中略). 그 나라 왕이 살고 있는 성(城)은 방(方) 5, 6리(里)이다. 北史 西域 / 龜茲國在尉犁西白山之南一百七十里都延城漢時舊國也去代一萬二百八十里. 中略. 所居城方五六里》라고 하였다.

 

     ➎ 《수서(隋書)》에서 이르기를 : 《구자국(龜慈國)의 서울(京)은 백산(白山)의 남(南) 170리에 있다. 도성(都城)은 방(方) 6 리(里)이다. 隋書. 西域. 龜茲 : 龜茲國, 都白山之南百七十裡, 漢時舊國也. 其王姓白, 字蘇尼咥. 都城方六里.》라고 하였다.

 

     ➏ 《주서(周書)》에서 이르기를 : 《구자국(龜慈國)의 서울(京)은 백산(白山)의 남(南) 170리에 있다. 동(東)쪽으로 장안(長安)까지 6,700리(里)이다. 도성(都城)은 방(方) 6리(里)이다》라고 하였다. 龜 茲 國 在 白 山 之 南 一 百 七 十 里 東 去 長 安 六 千 七 百 里 所 治 城 方 五 六 里 。】

 

     ➠➠➠ 한대(漢代)의 장안성(長安城)”은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長安[編輯] 편을 보면 : 城市佈局[編輯] 漢長安城位於今西安市區西北郊外, 面積約36平方公里라고 하였으니, “6()였다는 뜻이다.

 

      또 相關遺址[編輯]편을 보면 : 《“目前唐長安城相關的遺址主要為:大雁塔, 大慈恩寺, 小雁塔, 大明宮, 太極宮, 乾陵, 昭陵等十八座唐朝帝陵, 碑林, 法門寺, 青龍寺, 大秦寺塔, 興教寺塔, 灞橋遺址, 華清宮遺址, 仙遊寺法王塔, 水陸庵, 東渭橋遺址, 鳩摩羅什舍利塔, 香積寺善導塔, 八雲塔, 長安聖壽寺塔, 長安華嚴寺塔, 昭慧塔, 藥王山石刻, 玉華宮遺址, 隋泰陵, 耀縣文廟, 隋仁壽宮唐九成宮遺址, 慈善寺石窟, 楊珣碑, 大佛寺石窟, 昭仁寺大殿, 精進寺塔, 百良壽聖寺塔等”이 있다.》라고 한 것처럼,

 

     ➐ 『구자국성(龜慈國城)에도, () 개소에 이르는 사찰(寺刹)과 탑()이 있었다(有佛塔廟千所), 동서(東西), 삼중(三重)으로 성()을 쌓았는데, 6()5, 6() 』라고 하였고,

 

     ➑ 『고구려(高駒驪) 장안성(長安城)=평양성(平壤城)도 사찰(寺刹)로 뒤덮여 있었다. 동서(東西), 삼중(三重)으로 성()을 쌓았는데, 6(). 또 성벽(城壁)3외성(外城), 중성(中城), 내성(內城)의 겹성으로 쌓았다.』라고 하였으며,

 

     ➒ 한대(漢代) 장안성(長安城)에는 일천(一千) ()의 사찰(寺刹)사원(寺院)이 있었다. 동서(東西), 삼중(三重)으로 성을 쌓았는데. 6()라고 하였다.

 

     ➓ 『구자국성(龜玆國城)과 장안성(長安城), ()뿐만 아니라, 시읍(市邑)도 똑같았다』라고 하였다.

 

     ☛ 讀史方輿紀要. 西域. 龜茲國城【原文繼續】 : 《上元以後, 河西軍鎮, 多為吐蕃所陷. 惟北庭安西為唐守, 以沙陀回鶻為應援. : 상원(上元) 이후에, 하서군진(河西軍鎭)은, 토번(吐蕃)에게 함락(陷落)된 곳이 많았다. 유일하게 북정(北庭)과 안서(安西)만이 당(唐)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는 사타회골(沙陀回鶻)이 응원(應援)했기 때문이다. 吐蕃急攻二部, 二部益衰. 貞元三年. 安西陷於吐蕃. 自是不復入於中國. : 토번(吐蕃)이 2부를 갑자기 공격(攻擊)하여, 2부가 점점 쇠약해졌는데, 정원(貞元) 3년에, 안서(安西)가 토번(吐蕃)에 함락되었고, 그 뒤로 중국(中國)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였다. 唐志:龜茲東接焉耆, 西連疏勒, 南鄰吐蕃, 北拒突厥, 為四鎮之一. : 당지(唐志)에 따르면 : 구자(龜茲) 동(東)쪽으로 언기(焉耆)와 접(接)하고, 서(西)쪽으로는 소륵(疏勒)과 연이어져 있으며, 남(南)쪽은 토번(吐蕃)과 인접(隣接)해 있고, 북(北)쪽은 돌궐(突厥)에 막혔다. 東北到北庭府二千里, 西南到于闐亦二千里. 李泌謂安西,北庭, 控制西域五十七國及十姓突厥. : 동북(東北)으로 북정부(北庭府)에 2 천리(千里)에 이르고, 서남(西南)으로는 우전(于闐) 또한 2 천리(千里)에 이른다. 이필(李泌)이 안서(安西)와 북정(北庭)에서 서역(西域)의 57개 나라와 십성(十姓) 돌궐(突厥)을 제압하였다. 五代史:安西都護衛西域羈縻三十六國. 是也. : 오대사(五代史)에서 이르기를 : 안서도호위(安西都護衛)는 서역(西域)의 36개 나라를 기미(羈縻)하였다종속(從屬)시켰다라고 하였다. -讀史方輿紀要. 龜慈國. 引用 / 끝-》

 

     ➤ 구체적(具體的)인 서지적(書誌的) 근거(根據)를 찾지 못했지만: 《‘구려(駒麗)=구려(句驪)=구려(駒驪)’가 서(西)쪽으로부터 해(日)가 뜨는 양곡(暘谷)의 땅을 찾아 이동(移動)하여, 구자국(龜玆國)의 땅에 “평양성(平壤城)”을 건설(建設)하고 몇 대(代)를 영위(營爲)하며, 다시 동(東)쪽으로 천도(遷都)하자, 그 빈자리에 한(漢)나라가 나라를 세웠다》라는 가설(假說)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 역사서(歷史書)에서 이해(理解)하지 못할 많은 부분(部分)이 해소(解消)된다. 이것은 오늘의 주제(主題)는 아니다. 차후(此後) 논의(論議)가 꼭 필요(必要)한 주제(主題)다

 

     ☛ 따라서… …,

 

     인종적(人種的)으로 보면 : 대략적(大略的)으로 신강성(新疆省) 고창국(高昌國)의 서(西)쪽으로는 황인종(黃人種)과 백인계(白人界)가 공존공생(共存共生)했으며,

 

     소륵(疏勒)의 서(西)쪽으로부터는 : 《백인계열(白人系列)의 중아(中亞)+구라파(歐羅巴)+러시안(Russian)으로 분류(分類)되는 ‘코카서스(Caucasoid)’ 인종(人種)으로 피부색이 밝고(흰 피부), 파상모, 푸른 눈, 높은 코 등의 특징(特徵)”이다. 이 외에 두발이 가늘고 곱슬머리가 많으며 몸털이 많다. 아포크린샘에 의한 겨드랑이냄새가 강하며, 코가 크고 폭이 좁게 돌출해 있으며 입술이 엷고 쌍꺼풀이 있는 등의 특징이 있다. [위키백과 및 생명과학대사전 인용(引用)]

 

     ☛ 이런 분포(分包)로 보면 「만족(滿族), 청인(淸人)」은, 「서방(西方) 종족(種族)」이라는 것이 확실(確實)하다. 곧 연경(燕京), 우북평(右北平), 북평(北平), 북경(北京)에는 이런 자()들이 사는 곳이었다라는 것이고,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것이다.

 

  『21세기(世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20세기(世紀) 이후(以後)북경(北京)일 뿐, 옛 연경(燕京)이 될 수 없는 짝퉁이란 증거(證據)

                                                        2026년 06월 0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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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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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6 * 다음 편은,
    "조선(朝鮮)은, 북막(北幕)의 이민족(異民族)을 초무(招撫)하다[6-2편]"라는 내용으로, "조선왕조는 오늘날의 한반도 땅에 없었다"는 서지적 증거를 계속 내놓을 예정입니다.
    아무리 반도사학계가 온 국토를 벌집을 만들어 놓아도 "옛 조선왕조의 고고학적 유물은 찾아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 조선왕조는 이 땅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도 식민사학계가 아무리 발버등쳐대도, 없는 것이 새롭게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만들어낸다?
    그건 조적입니다.
    몇 만리, 수만리, 1만리, 6천리등의 기록은, 결코 헛소리가 아닙니다.
    반도조선사에서는 헛소리가 될 수밖에 없으나, 무대를 중원대륙에 놓고 나면 :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 게재하고싶은 주제나 내용은 많은데... ...시간이 없으니 안타까움뿐입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7 * 조선왕조가 정말이지... ...한반도 땅에서 반만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존재했었을까?
    그렇다고만 열심히 주장하고, 해설하고를 반복하고 있지만 : 역사서, 지리지는 전혀 다른 곳을 말하고,
    한반도 조선왕조 5000년을 증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유물유적도 발굴된 적이 없다.
    그저 "그렇다"라고만 침을 튀기며 주장만 하고 뿐이다.
    * 왜 지리지에서는 '몇 만리'라고 했는가? 답이 없다.
    왕조실록의 "막북(漠北)" 토벌에 대한 기록은 뭐냐? 답이 없다.
    삼한 땅, 3남의 땅은 방 사천리였다라고 하였는데, 방 4천리라는 엄청나게 큰 땅이 어디에 있냐? 물론 답이 없다.
    고려 황도에서 남쪽으로 5천리 되는 곳에 강주가 있고... ...황도에서 5천리 되는 곳은 어디야? 물론 답이 없다.
    밤을 낮삼아 몇날 며칠을 설파해도 모자랄 많은 의문점이 있지만... ...답이 없다.
    * 한반도 곧 반도사학계는 왜 존재하나? 그 이유가 궁금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도대체 반도사학계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참, 답이 없는 벗들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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