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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북해(北海)의 나라(國) <제2편>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1.04.16|조회수270 목록 댓글 3

 

                                    북해(北海)의 나라(國) <제2편>

   

【3】 통전 변방 전 / 突 厥 (上) :

 

木 杆 可 汗 土 門 之 子, 名 俟 斤, 一 名 燕 尹. 狀 貌 奇 異, 面 廣 尺 餘, 其 色 甚 赤, 眼 若 琉 璃, 性 剛 暴 而 多 智, 西 破 蠕 (蠕), ( ) 噠, 東 走 契 丹, 北 并 契 骨, 威 服 塞 外 諸 國. 其 地 東 自 遼 海 以 西, 西 至 西 海 萬 餘 里, 南 自 沙 漠, 北 至 北 海 五 六 千 里, 皆 屬 焉 。 : 목간 (木 杆) 가한 【토문(土門)의 아들이며, 이름이 “사근(俟 斤)”인데, 일명 “연윤(燕 尹)”이라고도 한다.】얼굴모양이 기이하여, 얼굴이 일척(尺)여로 넓고, 그 색깔이 아주 붉고, 눈(眼)은 유리 같았고, 성격은 강직하고 사납고 슬기(지혜)가 많았다. 서(西)쪽으로 연연(蠕蠕). ( )달【噠 : 오랑캐 이름 달】을 파(破)하고, 동쪽으로 글란(契丹)을 달아나게 하고, 북쪽으로 계골(契 骨)을 병합하여, 새외(塞外)제국(諸國)을 위력으로 굴복시켰다. 그 땅은 동(東)쪽으로 요해(遼 海)의 서쪽까지이며, 서(西)쪽으로는 서해(西海) 만 여리에 이르고, 남쪽은 사막(沙漠)이며, 북(北)쪽으로는 북해(北海) 5, 6 천리에 이르는 곳 모두를 속하게 하였다.》

 

► 당시 돌궐(突 厥)의 위치는 바로 위에서 말한 현 “카자흐스탄” 지방이다. 이곳으로부터 5,6 천리 북해(北海)지방 모두가 돌궐(突厥)에 복속(復屬)되었다는 위 기록으로 보면 말이다.

 

► 많은 역사서의 북해(北海)를 찾아보면 지금 내린 결론과 비슷한 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엄채(奄蔡)국 설명을 보면 위의 결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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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전 서융(西戎)전 / 《엄채(奄 蔡) : 奄 蔡, 漢 時 通 焉. 西 與 大 秦 接, 東 南 二 千 里 與 康 居 接, 去 陽 關 八 千 餘 里. 控 弦 十 餘 萬. 與 康 居 同 俗, 而 屬 康 居. 土 氣 溫 和, 臨 大 澤, 無 涯 岸. 多 楨 松, 白 草 及 貂. 畜 牧 逐 水 草, 蓋 近 北 海. 至 後 漢 改 名 阿 蘭 聊 國. 後 魏 時 曰 粟 特 國, 一 名 溫 那 沙. : 엄채(奄蔡)국은 한(漢)나라 때 통하였다. 서쪽으로는 대진(大 秦)과 접하였고, 동남 2,000 리에 강거(康居)와 접하였으며, 양관(陽關 : 감 숙성 최 서쪽)은 8천 여리 떨어져 있다. 활을 쏠 수 있는 자가 십여만이며, 강거(康居)와 풍습이 같고, 강거(康居)에 속했다. 땅은 온화(溫和)하며, 대 택(大 澤)에 임해 있고, 가장자리는 없다. 정송(楨 松 : 광나무) 는 많으며, 백초(白草)와 담비가 있다. 가축을 기르기 위해 수초(水草)를 쫓아다니는데, 모두 북해(北海) 가까이 있다.

 

► 엄채(奄蔡)국의 동남 2천 여리에 강거(康居)가 있었다고 하면, 엄채(奄蔡)국은, 강거(康居)의 서북(西北) 2천 여리에 있었다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이곳은, 흑해(黑 海)의 북방(北方)으로, 『흑해(黑 海)와 러시아의 서울이 있는 “모스크바” 사이』 정도가 된다. 이곳에 있던 “엄채(奄蔡)국”은 그 땅이 모두 “북해(北海)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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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해(北海)에 대한 여러 사서(史書)의 기록으로 보면,

 

북해(北海)는 대략 “우랄산맥”을 기준으로 그 동서(東西)쪽 추운지방의 어느 지역을 칭하는 것이며, 북해(北海)의 북쪽에 또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면, 바다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으로 추정(推定)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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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북사(北史)에서“유도 산(幽都산)을 찾아보자.”- <위서(魏書) 권 1>

 

《 受 封 北 土, 國 有 大 鮮 卑 山, 因 以 為 號. 其 後, 世 為 君 長, 統 幽 都 之 北, 廣 漠 之 野, 畜 牧 遷 徙, 射 獵 為 業, 淳 樸 為 俗, 簡 易 為 化, 不 為 文 字, (中略). 黃 帝 以 土 德 王, 北 俗 謂 土 為 托, 謂 后 為 跋, 故 以 為 氏. 其 裔 始 均, 入 仕 堯 世, 逐 女 魃 於 弱 水 之 北, 民 賴 其 勤, 帝 舜 嘉 之, 命 為 田 祖. 爰 歷 三 代, 以 及 秦 漢, 獯 鬻, 獫 狁, 山 戎, 匈 奴 之 屬, 累 代 殘 暴, 作 害 中 州 : 봉 받은 북쪽 땅, 나라 안에 <대선비산(大 鮮 卑 山)>있어, 이로 인하여 <호(號)>가 되었다. 그 후 군장으로써 계속 이어 왔다. 모두 유도(幽都)의 북쪽, 광 막(廣漠 : 광활한 사막지대 또는 넓고 넓은 황야)한 들판에서 가축을 기르며 옮겨 다니고, 사냥하는 것을 업으로 하였다. 소박(素朴)하고 순진(純眞)함을 풍속으로 하였고, 문자를 사용할 줄 몰랐다. 황제(黃帝)는 토 덕 왕이니, 북쪽의 풍습이 땅(土)은 <탁托>이요, 후(后:임금)는 <발拔>이니, 이를 씨(氏) 즉 성(姓)으로 하였다. 기 후예인 “시 균(始 均)”때 요(堯)임금 세대에 들어와 벼슬을 하였으며, 가뭄의 신(神)을 따라 <약수>의 북쪽으로 쫓아가니, 부지런한 그를 백성(百姓)들도 신뢰하니, 순(舜)임금도 기뻐하여, 전조(田祖 : 밭의 신)라 명하였다. 삼대(三代)를 지나, 진(秦). 한(漢)때에는, 훈 죽(獯 鬻), 험윤(玁狁), 산융(山戎), 흉노(匈奴)에 속해 있었으며, 누대에 걸쳐 잔 폭(殘 暴 : 잔학하여) 중주(中 州 : 중국 : 중원 : 천자(天子)가 있는 곳)에 해가 되었다. 》

 

이곳에서 말하는 『“유도(幽都) 산”은 북해(北海)안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위의 산해(山海)경이나 다른 사서(史書)의 기록에 대입(代入)해 보면 “한해(翰 海)는 북해(北海)의 이름이다.”라 했으므로 당시의 『유도(幽都)산은 북해(北海) 내에 있었으며, 이는 한해(翰 海)내에 있었다고 봐도 무난한 설명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도(幽都)는 유주(幽州)라는 사실이다. 유주(幽州)내에 요동요서(遼東遼西)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지리(地理), 지형(地形)으로 보면, 오늘날의 역사해설인 유주(幽州). 요동요서(遼東遼西)등의 위치는 100% 조작(造作), 이동(移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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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북해(北海) 또는 한해(澣海)』는 북쪽의 바다를 칭하는 것이 아닌 “대 사막(沙漠)”지대의 북쪽 광활(廣闊)하고 황 막(荒漠 : 춥고, 어둡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음)한 지대(地帶)를 북해(北海)라고 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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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남자 전 / <주술 훈>에 :

 

(1) 《其 地 南 至 交 阯, 北 至 幽 都, 東 至 暘 谷, 西 至 三 危 : 그 땅의 남쪽은 교지에 이르고, 북쪽은 유도(幽都)에 이르고, 동쪽은 양곡에 이르며, 서쪽은 삼위에 이른다.》란 말이 있으며,

 

(2) 《西 北 方 曰 幽 天 : 서북방을 말하기를 “유천(幽天)”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3) 또한 8 극에 《西 北 方 曰 不 周 之 山 曰 幽 都 之 門 : 서북방을 이르길, “불 주산”이며, 이르길 유도(幽都)의 문(門)이다.》란 말이 있다.

 

► 《 『북방(北方) 또는 서북(西北)방 지역이 “유도(幽都)이며, 유주(幽州)로써,” 이는 북해(北海) 내에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설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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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속에서 “한해(澣 海) 또는 북해(北海)”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니, 정조 대왕(正祖大王)이 손수 섰다는 “홍재전서(弘 齋 全 書)” 및 “왕조실록(王朝實錄)”속에 대단히 의미(意味)있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개별적으로 전회에 소개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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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홍재전서(弘 齋 全 書) 제28권 윤음 (綸 音) 3 (정조대왕의 기록)

 

(가)《國初兵制亦然.三府爲二司.二司爲五衛.衛有五部.部有四統.而宰樞十人.爲摠管都副分釐之.歲周則遞而已.如河敬復,黃衡,崔潤德,魚有沼諸人之受脤啓行.遠出沙漠.梁瀚海而銘燕然.功在盟府.名留編者.何嘗髣髴於近日五營之爲而有是哉.此所以初元朝參.問汰冗足食之策也.首及於五營.拈出守摠二營之存罷.而雜議於廷臣者也. : 국초(國初)의 병제도 그러하여, 삼부(三府)가 이사(二 司)가 되고, 이사가 오위(五衛)가 되었는데, 위에는 오부(五部)가 있고 부에는 사통(四 統)이 있으며 재추(宰樞) 열 명이 총관(摠管)을 맡되 도총관과 부총관으로 나누어 다스리다가 1년이 되면 체차될 따름이었다. 하 경복(河敬復), 황형(黃衡), 최 윤 덕(崔潤德), 어유 소(魚 有 沼) 같은 사람들이 어명을 받들어 출정에 나서서 멀리 사막(沙漠)을 원정하고 한해(瀚 海)를 건너 연연(燕然)에다 자신의 공을 새겨 맹부(盟府)에 공이 있고, 간 편(簡 編)에 이름을 남긴 것으로 말하자면, 어찌 일찍이 요사이 오영(五營)에서 하는 것과 같이 하여 이렇게 된 것이겠는가. 이것이 즉위 후 첫 조참에서 쓸모없는 군영을 없애어 식량을 충분하게 할 방도를 물으면서 가장 먼저 오영을 언급하고 수어청과 총융청 두 군영의 존폐를 끄집어내어 조정 신하들에게 다각도로 상의하게 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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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에 등장하는 『하 경복(河敬復), 황형(黃衡), 최 윤 덕(崔潤德), 어유 소(魚 有 沼)』등에 대한 설명은 반도사학(半島史學)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❶ 1,432년 건주(建州)위의 야인 추장(酋長) 이 만주(李 滿 住)의 침입이 있자 이를 계기로 평안도(平安道)도절제사에 임명되어 1만 5천의 군사(軍士)를 이끌고 이를 대파(大破)하였다.>라는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데,

 

❷ 그 해 겨울 명(明)나라가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 ‘강순’과 함께 나가 ‘올 미부(兀 彌 府)’의 여러 곳을 소탕(掃蕩)하였다. 1471년(성종 2) 다시 올 적합(兀 狄 哈)의 세력이 강해지자 영안(永安)도순찰사로 출정하였으며, 1479년 명(明)나라가 재차 건주(建州)위를 정벌(征伐)할 때에도 서정(西征)대장으로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는 등 북도(北道) 방어(防禦)에 없어서는 안 될 무장이었다.

 

❸ 스스로 자원(自願)하여 15년간을 일선에 나아가 수비(守備)를 담당(擔當)하면서 그곳 주민(住民)들을 가르치고 야인(野人)들을 잘 타일러 변방(邊方)을 잘 경비(警備)하였다.

 

❹ 1512년 평안도(平安道) 변방에서 야인(野人)이 반란(反亂)을 일으키자 순변사(巡邊使)로 나가 이를 진압(鎭壓)하였으며, 평안도(平安道)·함경북도(咸鏡北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거쳐, 벼슬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에서 찾을 수 있는데,

 

◌ 이들이 건주(建州)위를 토벌(討伐)하는데 출정(出征), 진군(進軍)한 곳은 沙漠(사막)지대였다는 것이며【현재의 역사 해설인 심양(瀋陽)중심의 건주(建州)위는 왜곡,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고증(考證)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朝鮮) 황제(皇帝)의 왕사(王師) 자격으로 토벌(討伐)했다.”는 것을 이 글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 이러한 기록을 접하게 되면, 조선(朝鮮)에 관한 기존(旣存)의 역사해설은 너무도 파렴치한 해설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말하는 사막(沙漠)지대에 당시의 “건주(建州)”가 있었으며, 이곳에 “이 만주(李 滿 住)”가 있었다. 또 이들을 쫓아 한해(澣海)까지 진격(進擊)했다는 것이 위 내용이다. 기껏 압록강(鴨綠江) 이북(以北)의 심양(瀋陽 : 건주)주위를 진격(進擊)하여 “이 만주(李 滿 住)”가 거느린 군대를 격파(擊破)했다고 해서, 사막(沙漠)을 건너, 한해(澣海)까지 진격(進擊)했다고 과장(誇張)하여 기록할 이유(理由)가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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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 윤 덕 : 【1376년(우 왕 2)~1445년(세종 27) 자 : 여화(汝 和), 백수(伯 修) 호 : 임곡(林 谷) 시 호 : 정렬(貞烈) 본 관 : 통천】조선(朝鮮) 전기(前期)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무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최운해이다. 1410년(태종 10)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고, 1419년(세종 1)에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 종무(李 從 茂)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1432년 건주위의 야인 추장 이 만주(李 滿 住)의 침입이 있자 이를 계기로 평안도도절제사에 임명되어 1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이를 대파하였고, 이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1435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영중추원사에 전임된 뒤 1445년에 궤장을 하사받았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통천의 상렬寺와 안주의 청천寺에 제향 되었다.

 

(2) 어 유소[魚 有 沼] : 【1434년(세종 16) ~ 1489년(성종 20)자 : 자유(子 游) 시호 : 정장(貞 莊) 본 관 : 충주이다.】 조선(朝鮮) 전기(前期) 무신으로 이 시애(李 施 愛)의 난을 진압한 인물. 1456년(세조 2)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복시직장, 감찰을 역임하였다. 1460년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워 절충장군이 되었으며, 이어 회령부사에 올랐다. 1467년 세조의 중앙집권정책에 불만을 품고 함경도 길 주 (吉 州)지방의 호족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강순(康 純)·남이(南 怡) 등과 함께 출정하여 좌 장군으로서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청·경성·만 령 등지에서 반란군을 격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적개공신 1등으로 예성君에 봉해지고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겨울 명나라가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 강순과 함께 나가 올 미부(兀 彌 府)의 여러 곳을 소탕하였다. 1471년(성종 2) 다시 올 적합(兀 狄 哈)의 세력이 강해지자 영안도순찰사로 출정하였으며, 1479년 명나라가 재차 건주위를 정벌할 때에도 서정대장으로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는 등 북도 방어에 없어서는 안 될 무장이었다. 1488년 판중추부사 겸 도총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10월 성종의 강무(講武)에 참가하였다가 기진해 죽었다.

 

(3) 하 경복(河 敬 復) : 조선(朝鮮) 전기(前期)의 무신. 본관은 진주. 『晋 陽 誌』 권3「人 物 條」에 수록되어 있다.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에 출생 - 1438년(세종 20) 별세하였다. 】조선 건국 후인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한 후 상호군을 지냈다. 1410년에는 무과중시에 다시 급제하여 첨지총제로서 함경도 경원과 경성의 군사 요새지를 수비했으며, 세종 때에도 경기도 및 경상도의 병마절제사를 지냈다. 1433년(세종 15) 병서 편찬을 주관, 이를 활자로 간행하여 군사교육의 교재로 삼았다. 또한, 북쪽 국경 수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스스로 자원하여 15년간을 일선에 나아가 수비를 담당하면서 그곳 주민들을 가르치고 야인들을 잘 타일러 변방을 잘 경비하였다. 국경 수비에 힘쓰다 용모가 준수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효성이 깊어 항상 노모를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돌보게 하였다. 조정에서 국경 수비의 공을 기려 의관과 말을 하사하였으며, 어머니를 위해 잔치를 하도록 지원하였다. 시호는 양정(襄 靖)이다.

 

(4) 황 형 (黃 衡) : 【1,459년(세조 5)~1,520년(중종 15) 자 : 언 평(彦 平) 시 호 : 장무(莊 武) 본 관 : 창원】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삼포왜란 당시 방어사로 왜적을 대파한 인물. 1480년(성종 11) 무과에 급제한데 이어, 1486년 무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평안도우후를 지내고 유원과 혜산진의 첨절제사로 나갔다. 그 뒤 훈련원도정·의주목사·회령부사·함경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유담년(柳 聃 年)과 함께 각각 경상 좌·우도방어사로 임명되어 왜적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특히 제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삼포의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뒤 도총관·지훈련원사를 거쳐, 1512년 평안도 변방에서 야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변사로 나가 이를 진압하였으며, 평안도·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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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정조(正祖)실록 / 19년 8월 18일(병신)조

 

《國初兵制亦然.三府爲二司,二司爲五衛,衛有五部,部有四統,而宰樞十人爲摠管都副,分釐之,歲周則遞而已.如河敬復,黃衡,崔潤德,魚有沼諸人之受脤啓行,遠出沙漠,梁瀚海而銘燕然.功在盟府,名留簡編者, (중략). 우리나라 초기의 병제(兵制) 역시 그러하였다. 3부(府)가 2사(司)로 되고 2사가 5위(衛)로 되었는데, 위에는 5부(部)를 두고 부에는 4통(統)을 두었으며 재추(宰樞) 10인이 도총관(都摠管)도 되고 부총관(副 摠管)도 되었다가 1년이 되면 체차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가령 하 경복(河敬復)· 황형(黃衡)· 최 윤 덕(崔潤德)· 어 유소(魚 有 沼) 같은 사람들을 보면 제사 드린 고기를 받고서(본인 주 : 사직 제에 쓴 생고기를 말함) 길을 떠나(본인 주 : 길을 열고), 멀리 사막(沙漠) 지방에 출전하여, 한해(瀚 海)를 건너기도 하면서, 연연(燕 然)에 공을 새겨, <중국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맹부(盟府)에 공이 기록되고, 간편하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자를 보건대, (중략).》

 

<중국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이 말은 원문(原文)에도 없는 글이다. 위의 기록은 조선(朝鮮)을 반도(半島)에 놓고 불가능(不可能)한 사건이다. 『중국(中國)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는 말이 무엇인가? 위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번역(飜譯)한 자나 해설(解說)한 자는 중국(中國)의 요청(要請)으로 원병(援兵)을 파견(派遣)하여 적(敵)을 무찌르니 중국(中國)의 황제(皇帝)로부터 상까지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원문(原文)에 없는 해설(解說)이 존재(存在)하는 것이다.> 왜 이런 번역(飜譯)이나 해설(解說) 내용(內容)이 들어가야 하는지 본인으로써는 알 수 없다.

 

► 위의 홍재전서 내용과 같은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이 왕조실록(王朝實錄)속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과장(誇張)했다거나 조그만 사건을 미화(美化)하여 기록할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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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왕조실록 / 세조 10년 / 갑신(1464, 천순 8) 9월 6일(병진) :

 

是故移南民以實之,撤口子以强之,觀兵,田獵,征伐不休,以鍊士卒,宣威沙漠,何可自疲日耗,臨敵昏惰,罔知所措乎? : 이러한 까닭으로 남도(南道)의 백성들을 옮겨다 여기에 채우고 구자(口子)를 철거(撤去)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관병(觀兵)·사냥[田 獵]·정벌(征 伐)을 쉬지 않는 것은 『사졸을 훈련시켜 위엄을 사막(沙漠)에 펴려는 것인데, 어찌 스스로 피폐하고 날로 줄어들게 하여, 적(賊)에 임(臨)하여 혼미(昏迷)하고 나태(懶 怠)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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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병(觀兵)·사냥[田 獵]·정벌(征 伐)을 쉬지 않는 것은 『사졸을 훈련시켜 위엄을 사막(沙漠)에 펴려는 것인데,』 이 말은 당시 “조선(朝鮮)”의 영토(領土)가 사막(沙漠)지대를 포함(包含)하고 있었다는 명 백(明白)한 증거(證據)다. 그렇지 않다면 위의 여러 내용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 반도(半島) 조선(朝鮮) 조정에서 사막(沙漠)지대에서 준동(蠢動)하는 오랑캐와는 전혀 관계없음에도, 조선(朝鮮)의 장수(將帥)와 병사(兵士)들이 출정(出征)하여 이곳의 적(賊)들을 물리치고, 한해(瀚 海)까지 올라, 연연 산(然 燕 山 : 연산)의 돌에 기공(紀功)비까지 세우고(공을 세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인 기록이라 하더라도), 돌아와 상까지 받았다면 이들은 분명 이곳에 출정(出征)했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조선(朝鮮)”의 “군대(軍隊)”를 “사막(沙漠)”으로, “한해(瀚 海)로 출정(出征)토록 명(命)을 내린 자는 누구인가? 바로 조선(朝鮮)의 황제(皇帝)다. “조선(朝鮮)”이 반도(半島)에 있으면서 “사막(沙漠)지대”와 그 “북쪽 한해(瀚 海)”지방까지 진격(進擊)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을까 의문(疑問)이다. 또 의문인 것이 반도(半島) 땅에서 서쪽 수천(數千)리 머나먼 지방인 사막(沙漠)지대에 준동(蠢動)하는 그 어떤 오랑캐라 하더라도 반도(半島)와는 직, 간접적 그 어떤 위협(威脅)이 있을 수 없다.

 

► 도대체 반도(半島) 조선(朝鮮)에서 누구의 명령(命令)으로 사막(沙漠)지대의 정복(征服)활동이 있었는가. 이것은 조선(朝鮮)의 황제(皇帝)가 자신의 휘하 장수(將帥)와 병사(兵士)들에게 출정(出征) 명령(命令)을 내렸으며, 북방(北方)과 서북(西北)방 변경(邊境)지방에서 약탈(掠奪), 침략(侵掠)하는 오랑캐를 쳐부수기 위한 것이다. 이곳은 조선(朝鮮) 영토(領土)였으며, 이곳 최 변방(邊方)에서 내지(內地)를 약탈(掠奪)하려는 오랑캐를 쳐부수고, 황명(皇命)을 완수(完遂)한 그들에게 주군(主君)인 조선(朝鮮) 황제(皇帝)가 상을 내린 것이지, 원문(原文)에도 없는 중국(中國) 황제(皇帝)가 상을 내린 것이 아니며, 만약 중국(中國)으로부터 상을 받았다면, 그 중국(中國)은 바로 “조선조정(朝鮮朝廷)”일 수밖에 없다.

 

                                                    2011년 04월 16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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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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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Юрий(유리) | 작성시간 11.04.16 중국의 정체는 무엇인지 점점 궁금해지는군요. 그리고 조선의 영토가 동유럽으로 확장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4.16 중국의 정체는 바로 "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영토가 서쪽으로 확장되어지는 것에 대한 근거, 고증을 확실하게 찾아야 됩니다. 아직까지는 미비한 것이 많아 옛 기록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해 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황의형 | 작성시간 11.04.16 조선때 중국인이 되버린것이더군요. 글도 기록도 사상도 다 빌려썻으니깐요. 공자 500년이면,,, 다른 옛 기록이나 뭐나 죄다 없애버렸지요. 이씨만 사람이고 나머지 성씨는 노예취급했으니깐 결국 오래되니 뭔가 알아서, 세도정치가 나와버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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