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회랑(河西回廊) 주위의 내해(內海), 발해(勃海)
○ 발해(渤海)는 당초 발해(勃海)였다. 오래된 기록일수록 “발해(勃海)”라 했기 때문이다. 발해(勃海)는 언제부터 <삼수변>을 더하여, 발해(渤海)로 고쳤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옛 부여(夫餘)의 영토 위치, 맥(貊)의 지리적 위치, 고구려(高句驪)의 변방(邊方) 지명, 선비(鮮卑), 오환(烏丸), 연(燕), 말갈(靺鞨), 글란(契丹) 등등 수많은 변수(變數)들을 종합하여 판단한 그 지리, 지형적 위치를 논할 때는 “한 가지 사료(史料)의 기록만을 가지고는 논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발해(渤海)의 위치에 대해서 현재까지 4 개의 주장이 맞서고 있는데,
1) 기존(旣存) 통설대로 현 “발해(渤海)”를
2) 대륙조선사에서 주장하는 <돈 황(燉煌)으로부터 적석(積石)산 사이>의 “발해(勃海)”
3) 대륙조선사에서 주장하는 <포창해(蒲昌海)>의 “발해(勃海)”
4) 아시아 / 조선사에서 주장하는 <흑해 또는 지중해>의 “발해(渤海)”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2)+3) 은 지리적으로 1)과 4)처럼 큰 차이가 없는 지대이므로 함께 묶어도 괜찮을 것 같다.
● 1)의 현 역사해설에서 말하는 발해(渤海)는 여러 가지 기록(記錄), 지형, 지리, 방향, 주위의 나라와 종족(種族)등에 있어 배치(背馳)되는 상황이 발생되기 때문에, 이곳의 “발해(渤海)”는 근세기에 “발해(渤海)”라는 이름만 차용(借用)되어 옮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는 “만주(滿洲)”라는 지명,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의 위치, 요동(遼東)과 요서(遼西)지방의 지리적 위치 등 많은 것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를 주장하는 본인의 “발해(勃海)” 지리적(地理的) 위치는 여러 사료(史料)를 검토하고, 추정(推定)하여 판단한 것이다. 우선적으로 『돈 황(燉煌)으로부터 적석(積石)산 사이』의 “발해(勃海)” 위치를 정하게 된 판단자료 중에서 몇 개를 고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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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전(通典) / 西 戎 一 / 羌 無 弋
(1) 《羌 無 弋 : 漢 遣 將 軍 李 息 將 兵 討 平 之 ,始 置 護 羌 校 尉 統 領 焉 。 羌 乃 去 湟 中 , 依 西 海 、 鹽 池 之 左 右 。 今 酒 泉 郡 之 北 千 餘 里 鹽 池 。 : 강 무 익 : 한(漢) 장군 “이식”의 장병들이 평정하였는데, 처음 호강교위 통령이 설치되었다. 강(羌)은 이에 황 중(湟中)을 떠나, 서해(西海), 염지(鹽池)의 좌우(左右)에 의지하여 살았다. 주천(酒泉)군의 북쪽 천(千)여리에 염지(鹽池)가 있다.》
●《 注 : 今 酒 泉 郡 之 北 千 餘 里 鹽 池 : 주천(酒泉)군의 북쪽 천 여리에 염지(鹽池)가 있다. 》는 주해(註解)의 ‘염지(鹽池)’ 설명과 본문(本文)의 ‘서해(西海)’는 같은 곳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별도의 해(海)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맥상 별도의 것으로 판단된다.
● 여기서 지리, 지형(地理地形)적으로 보면,
<주천(酒泉)의 북쪽에 염지(鹽池)가 있다.>에서 주천(酒泉)의 약간 동북(東北)으로 치우친 곳에 “약수(弱水)가 모이는 거연 택”이 있고, 서북(西北)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는 신강(新疆)의 “포 류 해(蒲類海)”가 있다. 아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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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해(西海)군에 대해서 ;
《自建武以來,其犯法者,常從燒當種起.所以然者,復立之.以其居大,小榆谷,土地肥美,又近塞內,諸種易以為非,難以攻伐,南得鍾存,鍾存,別種羌,以廣其眾,北阻大河,因以為固,又有西海魚鹽之利,緣山濱水,以廣田畜,故能強大,常雄諸種,恃其權勇,招誘諸胡.(中略).建復西海郡縣,漢武帝逐諸羌,置西海郡,在今酒泉郡北千二百里,欲復立之. : 이곳의 대, 소 유 곡은 토지(土地)가 비옥하고, 또 새내(塞內)가 가까워 여러 종족들이 무역하던 곳으로, 공격하여 토벌하기가 어려웠다. 남쪽의 종재(種 在)를 득하여【종재(種 在)는 별종의 강(羌)이다.】, 넓고, 그 무리들이었는데, 북(北)쪽으로는 대하(大河)에 막혀(阻), 이로 인하여 단단하였으며, 또 서해(西海)의 물고기와 염(鹽)의 이득이 있었다. 산의 가장자리, 물가의 넓은 밭에서 축목을 하여, 강대해지니, 항시 여러 종족들 중에서 뛰어나, 여러 오랑캐로부터 유혹(꾀 임)을 받았다.(중략). 서해(西海)군을 다시 설치하였다.【한(漢) 무제(武帝)가 여러 강(羌)들을 몰아내고, 서해(西海)군을 설치하였는데, 지금 주천(酒泉)군의 북쪽 “일천 이 백리”에 있으며, 욕심을 내어(바라고)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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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 주> : ➊ 주천 북방 <일천 이 백리>에 서해(西海)군을 설치했다. ➋ “강 무 익” 편에 기록된 “주천 북방 <일천 여리>에 염지(鹽池)가 있다.”고 한 것을 함께 묶어보면, 한 곳을 말하는 것이며, 이곳은 곧 <서해(西海)라고도 했고, 염지(鹽池)라고도 했다.> 는 말과 같다. ➌ 또 지형지리(地形地理), 방향, 거리 등으로 이웃한 곳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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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을 보면, 당시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에, 주천(酒泉)의 북방 1,200 리에, 큰 호수(湖水)가 있었다. 이는 위의 글 내용으로 <물고기와 소금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라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주천(酒泉)의 북방 일천리 또는 이천 이 백리 정도에는 “거연(居延)호”가 있다.』 그 주위는 “고비사막”지대일 뿐이다. 오늘날 그 흔적(痕迹)은 <거연호수>이며, 또 다른 이름인 <액 제 납(額濟納)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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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 (1)에 ;《羌乃去湟中,依西海,鹽池之左右.今酒泉郡之北千餘里鹽池. : 강(羌)족은 이에 황 중(湟 中)과는 떨어졌는데, 서해(西海)에 의지하여, 염지(鹽 池)의 좌우(左右 : 東西)에서 살았다. 【주천(酒泉)군의 북쪽 천 여리에 염지(鹽 池)가 있다.】》라는 기록과
위 글 (2)에 ;【漢武帝逐諸羌,置西海郡,在今酒泉郡北千二百里,欲復立之.: 한(漢) 무제(武帝)가 여러 강(羌)들을 몰아내고, 서해(西海)군을 설치하였는데, 지금 주천(酒泉)군의 북쪽 “일천 이 백리”에 있으며, 욕심을 내어(바라고) 다시 세웠다.】
● 위 글 (1)+(2)를 보면, 《 주천(酒泉) 북방 『천 여리(千 餘 里)에서 일천(一千) 이 백리(二 百 里)』정도에 큰 호수(湖水)가 있었으며, 이 호수(湖水)는 담수(淡水)가 아닌 해수(海水=염수(鹽 水)로 가득 찬 내륙의 바다(內海)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 지도(地圖)상엔, 『거연(居 延)호(湖) 또는 액 제 납 호(湖)로 불리는 호수가 있으며』, 이곳에 거연(居 延)성 또는 흑수(黑水)성이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동서(東西) 두 군데의 호수(湖水)가 있었으며, 동쪽의 것은 동해(東海), 서쪽의 것은 서해(西海)로 호칭(呼稱)되었다고 지명(地名)사전은 기록하고 있다. 이곳 두 호수(湖水)가 그 이전(以前)엔 큰 한 개의 호수(湖水)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추측(推測)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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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西 戎 2 ❲乙 弗 敵❳
《乙弗敵,後魏聞焉,在吐谷渾北.國有屈海,其海周迴千餘里.眾有萬落,風俗與吐谷渾同.然不識五穀,唯食魚與蘇子.蘇子狀若中國枸杞子,或赤或黑.西有契翰一部,風俗亦同,土特多狼. : 을 불 적(乙 弗 敵) : 후위(後魏=北魏)때 견문하였는데, 토 곡 혼(吐谷渾)의 북쪽에 있다. 나라에 한쪽으로 굽어진 바다(海)가 있어, 그 바다는 둘레를 도는데 천 여리이다. 백성은 만 락(萬 落)이 있으며, 풍속은 토 곡 혼과 같다. 오곡(五穀)에 대한 것은 알지 못하며, 유일한 것은 고기(漁)와 함께 소자(蘇子)를 먹는 것인데, 소자(蘇子)는 중국(中國)의 구기자(枸 杞 子)와 생김새가 같고, 혹 붉은 혹 검은 것이다. 서쪽에는 글한(契翰)의 1부가 있는데, 풍속은 역시 같다. 땅에는 특히 이리(狼)가 많다.》
● 토 곡 혼(吐谷渾)의 북쪽이라면, 청해(靑海)의 ‘북쪽과 서북지방’이며, 기련 산맥(祁連山脈)의 북쪽으로 장액(張 掖), 주천(酒泉), 돈 황(燉煌), 선선(鄯善)지방 등을 말한다. 현재의 지형, 지리로 보았을 때, 이러한 지방에 바다(海)는 존재할 수 없으니, 큰 하천(河川)이나 큰 호수(湖水)를 칭한다고 보아지며, ➊ 포창해(蒲 昌 海) 또는 포 류 해(蒲類海)는 지리, 지형, 방향등으로 보면, 해당되지 않는다. ➋ 장액(張 掖). 주천(酒泉)의 북방 약수(弱水)가 흘러드는 “거연 호(湖)”를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호수(湖水) 역시도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합당치 않다.
그 둘레를 도는데 천 여리(千 餘 里)라 하였으니, 아주 큰 호수(湖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천삼백여년>전의 기록임을 감안한다면, 현 사막(沙漠)지대 중에서 소위(所謂) “적(磧)”지방이 당시의 이러한 내륙(內陸)의 바다가 아니었을까? 또 그곳에서 머지않은 곳에 또 하나의 큰 호수【염지(鹽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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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기(史記) 貨 殖 列 傳
《夫 燕 亦 勃 、 碣 之 閒 〔一〕 一 都 會 也. : 연(燕)은 또 발(勃), 갈(碣)의 사이이며, 하나의 도회지이다.〔一〕 正 義 勃 海 、 碣 石 在 西 北. : 정의 발해, 갈 석은 서북에 있다. 》이는 전한(前漢)의 후궁(後宮)이었던 “왕소군(王昭君)”이 선비(鮮卑) ‘호 한 사’에게 시집가던 여정(旅程)과 맞물리는 지형, 지리로 전한(前漢)의 왕도(王都)로부터 “서북(西北)”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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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결과로 보면 ;
➊ 주천(酒泉) 북방 <일천 이 백리>에 서해(西海)군을 설치했다.
➋ “강 무 익” 편에 기록된 “주천(酒泉) 북방 <일천 여리>에 염지(鹽池)가 있다.”
➌ 나라에 한쪽으로 굽어진 바다(海)가 있어, 그 바다는 둘레를 도는데 <천 여리>이다. ‘토 곡 혼(吐谷渾)’ 북쪽지방이다.
➍ <사기(史記) 貨 殖 列 傳> : 夫 燕 亦 勃 、 碣 之 閒 〔一〕 一 都 會 也. : 연(燕)은 또 발(勃), 갈(碣)의 사이이며, 하나의 도회지이다.〔一〕 正 義 勃 海 、 碣 石 在 西 北. : 정의 발해, 갈 석은 서북에 있다.
● 위 글 『(1)+(2)+(3)+(4)=➊+➋+➌+➍』을 함께 지리(地理), 지형(地形), 방향(方向)들을 적용해 보면, 당시 기련 산맥(祁連山脈) 북쪽 하서회랑(河西回廊)지대와 그 북쪽지방의 사막(沙漠)지대엔 대단히 큰 호수(湖水)가 2 개소 또는 3 개소가 있었으며, 이는 염분을 가진 염호(鹽湖)였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이곳이 바로 “발해(勃海)”였다고 본인은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산해 경(山海經)으로부터 시작되는 발해(勃海)의 위치를 잡은 곳이며, 이는 또 사기(史記) 식화(食貨)전 <본문> : 《夫 燕 亦 勃 、 碣 之 閒 〔一〕 一 都 會 也. : 연(燕)은 또 발(勃), 갈(碣)의 사이이며, 하나의 도회지이다.〔一〕 正 義 勃 海 、 碣 石 在 西 北. : 정의 발해, 갈 석은 서북에 있다. 》【 발해(勃海)와 갈 석(碣石)은 서북(西北)쪽에 있다. 】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안(事案)이며, 후대(後代)의 통전(通典)등으로 고증되는 것이다.
● 이것은 또 황하(黃河)와 연관이 되는데, 서융(西戎)편의 구차(龜 茲)를 보면 ; 《 東 有 大 河 東 流 ,號 計 戍 水 ,據 漢 書 則 黃 河 也 。其 真 黃 河 也 ,見 雍 州 西 平 郡 篇 。: 동쪽에 큰 하천이 동쪽으로 흐르는데, 계 수 수(計 戍 水)라 부르는데, 한서(漢書)에서 말하는 황하(黃河)이다. 그것이 참 황하(黃河)이다. 웅주 서평군편을 보라.》라 하였는데, 오늘날의 하(河)와는 그 물길이 다르나,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다.
이러한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발해(渤海)” 곧 “발해(勃海)”는 이 지방에 있어야 여러 조건(條件)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곧 《해수(海水)는 내륙의 염해(鹽 海 곧 鹽池)를 말하는 것이며, 이곳의 사막(沙漠)과 사적(沙磧) 지대(地帶)에 거대한 호수(湖水)가 여러 개 있었으며, 담수(淡水)가 아닌 염수(鹽水) 곧 해수(海水)로 채워져 있던 염호(鹽湖)를 말하는 것이며, <신강(新疆) 동쪽으로부터 내몽골과 감 숙성 하서회랑사이의 남북(南北)지대>에 있었다.》는 것이다.
※ 이는 현재(現在)를 기준하지 않은, 역사서(歷史書)에 <기록된 그 때> 또는 <그러한 나라들이 있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게 중요한 것이다. 항상 말하는 것이나, <당시의 것>을 수천 년 세월이 지난 후인 <21세기 지금>을 가지고 비교할 수는 없다.
※ 4)의 아시아 / 조선을 주장을 하는 분들은 아예 예 기록은 쳐다보지도 않는 것 같은데, 본인이 몇 년 전에 소개한 내용이 있다. 아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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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大 秦 【 대진(大秦)은 한(漢)나라 때 로마(Roman)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 大 秦 , 一 名 犁 靬, 一 云 前 漢 時 犁 靬 國 也 。 後 漢 時 始 通 焉 。 其 國 在 西 海 之 西 , 亦 云 海 西 國 。(中略). 其 人 長 大 平 正 , 有 類 中 國 ,故 謂 之 大 秦 ,或 云 本 中 國 人 也. <중국(中國) 무리가 있으며, 고로 대진(大秦)이라 하였다. 혹은 본래 중국인이라고 하였다.> 土 有 駭 雞 犀 , 抱 朴 子 云 : 「 通 天 犀 有 一 白 理 如 綖 者 , 以 盛 米 , 置 群 雞 中 , 欲 啄 米 , 至 輒 驚 去 , 故 南 人 名 為 駭 雞 也 。 」 合 會 諸 香 , 煎 其 汁 以 為 蘇 合 。 土 多 金 、 銀 、 奇 寶 、 夜 光 璧 、 明 月 珠 、 琥 珀 、琉 璃 、 神 龜 、 白 馬 朱 髦 、 玳 瑁 、 玄 熊 、 赤 螭 、 辟 毒 鼠 、大 貝 、 車 渠 、 廣 雅 云 : 「 車 渠 , 石 , 似 玉 。 」 瑪 瑙 。 廣 雅 云 : 「 瑪 瑙 ,石 , 似 玉 。 」 ( ) 出 西 海 , 有 養 者 , 似 狗 , 多 力 獷 惡。 (中略). 出 細 布 , 作 氍 ( ) 、( ) ( ) 罽 帳 之 屬 ,其 色 又 鮮 於 海 東 諸 國 所 作 也 。數 與 安 息 諸 胡 交 市 於 海 中.< 그 빛깔이 또 고와서 『해동제국(海東諸國)』이라 지어졌다. 몇 안 되는 안식(安息)등 여러 호(胡)와 해중(海中)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4-1) 북사(北史) 열전(列傳) 85 서역(西域)『대진(大秦)』편에,
《大秦國,一名黎軒,都安都城,從條支西渡海曲一萬裡,去代三萬九千四百裡.其海滂出,猶渤海也,而東西與渤海相望,蓋自然之理,地方六千里,居兩海之間. : 대진(大震)국, 일명 리간(犁 靬)이다. 도읍지는 안도 성(安都城)이며, 조지(條枝)의 서쪽을 따라 바다 건너 굽이 저 일만(一萬)리이며, 대도(大都)로부터 39,400 리 떨어져 있다. 그 바다에 물이 질퍽하게 흘러나오는데, 마치 발해(渤海)와 같다. 동쪽과 서쪽 함께 발해(渤海)를 서로 바라볼 수 있는데,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다. 지방은 육(六)천리며, 양 바다 사이에서 산다. 》
● <통전(通典)>의 대진(大秦) 설명에서 《有 類 中 國 ,故 謂 之 大 秦 ,或 云 本 中 國 人 也. : 중국(中國) 무리가 있으며, 고로 대진(大秦)이라 하였다. 혹은 본래 중국인이라고 하였다. 》와 《其 色 又 鮮 於 海 東 諸 國 所 作 也 。: 그 빛깔이 또 고와서 『해동제국(海東諸國)』이라 지어졌다. 》라는 대목이 우리에게 관심을 끌 것이다.
발해(渤海)가 있고, 해동제국(海東諸國)이 있다. 그렇다면 이곳이 역사서에 기록된 “발해(勃海)”이며, “해동제국(海東諸國)”이 있던 곳일까? 대진(大秦)은 『대 진국(大震國)이며, 리간(犁 靬)이며, 불 름(拂菻)국이다.』또한 <한(漢)나라 때 로마(Roman)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차라리 이곳을 “조선(朝鮮)의 중국(中國)”이라고 한다면 기록으로 고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객관적 관점으로 볼 수 있다.
● 이곳을 “발해(渤海)”라 했고, 이곳을 “해동제국(海東諸國)”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지리(地理)지형(地形)적인 면이다. 만약 이곳이 “발해”였다고 했을 때, 선비(鮮卑). 오환(烏丸). 우문(宇文)씨. 글란(契丹). 돌궐(突闕). 척 발 씨. 고리국.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驪). 백제(百濟)등의 수많은 옛 나라들의 지리적 위치가 『존재할 곳이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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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수경【水經 : 중국(中國)의 강물을 설명한 최초의 기록이며, 저자(著者)는 상 흠(桑欽 : 한나라 사람)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곽박(郭璞) 역시 이 ‘수경(水經)’을 주석(註釋)했다고 한다. 곽박(郭璞)이 주석(註釋)한 수경(水經)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에는 패수(浿水)가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였고, 설문해자(說 文 解 字)에도 패수(浿水)는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였으나, 반도(半島)의 지형지리(地形地理)상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를 수 없는 관계로, 이 옛 기록들이 잘못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조선(朝鮮)을 반도(半島)에 있었다는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만든 작품의 하나일 뿐, 『참(眞) 역사(歷史)가 아니다.』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로, 패수(浿水)가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만고(萬古)의 진리(眞理)다. 이러한 <많은 기록과 지형지리(地形地理)적 판단과 방향(方向)과 생태계>등을 총합(總合)하여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를 판단해야 한다.
2011년 11월 08일 <글쓴이 : 문 무>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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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궐한 작성시간 11.11.10 고지도도 다 믿을순 없지만...고지도들을 보면...
현재의 거연택은...상당수가 어해(漁海),온천(溫泉)으로 표기됍니다.
황하가 최 북단에서 급히 꺽여 서안으로 남하하는 분명한 서북쪽 호수니...옛 사람들도 틀렸을 리 없습니다.
막상 거연택이라 표시됀 건...가욕관과 황하의 중간 위치쯤에서 북쪽으로 있는 사막지대에 표시돼며...
거기서 포창해 옆 모래사장(사막)으로 약수,흑수가 유입돼고...그 모래사장에서 남쪽바다로 빠져나간다 했습니다.
브라마프트라강과 인더스를 얘기하는듯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궐한 작성시간 11.11.10 간단히 말해서...현 거연택은 어해(漁海),온천(溫泉)이라 한 동쪽 거연택인 격이고...
정작 고지도에 표기됀 거연택은...그 한참 서쪽에 있고...여기서 포창해 동쪽 모래사장으로 약수와 흑수가 스며든단 겁니다. -
답댓글 작성자궐한 작성시간 11.11.10 이를 참조해 보자면...
발해는 문무님 추론대로 포창해를 이를 것이며...그 내륙해는 산해경 당시엔 대륙고원 빙하가 엄청 잔존했을 테니...지금보다..아니 청대의 고지도 그릴때 보다 몇 갑절(전 몇 십 갑절이라 예상합니다만)이 컷을 것이니...
청대의 포창해 옆 모래사장들은...산해경 집필당대엔 거대 염수호였을 거라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궐한 작성시간 11.11.10 그 내륙염호는...과거 수면이 엄청 더 상승했었을 것을 감안하면...
라포박과도...타클라마칸 저지대...신장성 최 북단의 부해와도...한해라 불린 고비사막,파단길림사막... 전체 염해들과도 연결됀...
뒤죽박죽의 발해(勃海) 중 한 지역이라 전 생각합니다.
라포박,포창해,거연해,어해,등등은...지역별 발해의 별칭이자...
후대엔 물이 엄청 더 빠진 후에 완전하게 갈라진 발해의 제각각 이름이 아닐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