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天下)의 안위(安危)는 늘 이 요양(遼陽)의 넓은 들에 달렸으니!
● 요즈음 열도(列島)에서 벌어지고 있는 망언(妄言)들을 뉴스로 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현실이 암울(暗鬱)하기만 하다. 누구 한 사람 제대로 대응(對應)하는 세력(勢力)이 없다. 정권(政權)의 수뇌부(首腦部)도, 국민(國民)들의 충복(忠僕)이라고 늘 상, 미 사 려 구(美辭麗句)를 사용(使用)하는 자(者)들도, 누구 한 사람 제대로 말을 하는 자(者), 또한 없다.
허기야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 조차 온전히 보존(保存)치 못했던, 당시(當時)를 생각해 보면, 누가 그 물줄기를 돌릴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말한다.
『너희들의 주인(主人)이었던 왕(王)이나, 그 아래 신하(臣下)들, 그리고 백성(百姓)들 모두, 무사안일(無事安逸)에 빠져, 변화(變化)하는 시대에 적응(適應)하지 못해 뒤떨어지고, 또한 두려움을 갖고,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오직 한다는 짓이, 부정부패(不正腐敗)와 매관매직(賣官賣職)이요, 뇌물(賂物)은 일상사인 그 때, 누가 나라를 위해 희생(犧牲)했을 것인가? 그저 이 나라 저 나라를 끌어 들여 자신(自身)들의 정권야욕(政權野慾)에 눈이 멀었던 자(者)들이 아니었던가! 나라에 힘이 없으면 참혹(慘酷)한 결과(結果)를 맞는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 이제 와서 정신대니 위안부(慰安婦)니 하고 떠들어 봐야, 구린 곳 파내는 것이니, 강자(强者)였던 우리가 너희들을 구원(救援)한 것인데, 그까짓 일을 가지고 무슨 생떼냐!』 이것이 그들의 속마음일 게다.
개인적(個人的)으로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어찌 생각해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힘이 없는 무리들은, 강자(强者)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 인접(鄰接)나라에서 침탈(侵奪)을 당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금은(金銀)보화(寶貨)를 챙기고, 창이나 칼을 들 만한 사내들은 목을 베고, 여인(女人)들을 빼앗고, 노예(奴隸)로 쓸 포로(捕虜)를 확보하는 일이다. 이것은 역사서(歷史書)를 보면 언제나 치러지는 일이다.
나라의 군주(君主), 그리고 신하(臣下)들, 또한 백성(百姓)들! 이들 모두는 이러한 과거(過去)의 일들에 대해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임에도, 무사안일(無事安逸)만을 추구(追求)하며, 백성(百姓)들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짓을 스스럼없이 자행했고, 또 이러한 행위(行爲)가 만연(蔓延)했다는 것은 스스로 망(亡)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뼈를 깎는 반성(反省)과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實狀)은 어떤가? 되돌아보는 계기(契機)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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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하일기(熱河日記) / 성경잡지(盛 京 雜 識) 성경잡지(盛 京 雜 識) 7월 10일 병술(丙戌)에 시작하여 14일 경인(庚寅)에 마쳤다. 모두 5일 동안이다. 십리 하(十里 河)로부터 소 흑산(小 黑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3백 27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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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경자(庚子) 가을 7월 10일 병술(丙戌)
이날은 몹시 더웠다. 멀리 요양 성(遼陽 省) 밖을 돌아보니 수풀이 아주 울창한데, 새벽 까마귀 떼가 들 가운데 흩어져 날고, 한 줄기 아침 연기가 하늘가에 짙게 끼었는 데다 붉은 해가 솟으며 아롱진 안개가 곱게 피어오른다. 『사방을 둘러본즉, 넓디넓은 벌에 아무런 거칠 것이 없다. 아아, 이곳이 옛 영웅들이 수없이 싸우던 터전이구나. 범이 달리고 용이 날 제 높고 낮음은 내 마음에 달렸다는 옛말도 있겠지만, ➡ 그러나 천하의 안위(安危)는, 늘 이 요양의 넓은 들에 달렸으니 이곳이 편안하면 천하의 풍진(風塵)이 자고, 이곳이 한번 시끄러워지면 천하의 싸움 북이 소란히 울려댄다. 이는 어인 까닭일까. 대개 평평한 벌과 넓은 들판이 한 눈에 천 리가 트인 이곳을 지키자니 힘들고, 버리자니 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 아무런 방비할 계교가 없으므로 이곳은 중국으로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터전이어서, 비록 천하의 병력을 기울여서라도 이를 지킨 뒤에야 천하가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천하(天下)가 백년(百年)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음이 어찌 그들의 덕화와 정치가 전대(前代)보다 훨씬 뛰어난 때문이라 할 수 있으리오. 단지 이 심양(瀋陽)은 본시 청(淸)이 일어난 터전이어서 동(東)으로 영고 탑(寧古塔)과 맞물리고, 북으로 열하(熱河)를 끌어당기고, 남(南)으로는 조선(朝鮮)을 어루만지며 서(西)로는 향하는 곳마다 감히 까딱하지 못하니, 그 근본을 튼튼히 다짐이 역대에 비하여 훨씬 낫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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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하(天下)의 안위(安危)는, 늘 이 요양(遼陽)의 넓은 들에 달렸으니 이곳이 편안하면 천하(天下)의 풍진(風塵)이 자고, 이곳이 한번 시끄러워지면 천하(天下)의 싸움 북이 소란히 울려댄다.〕
『천하(天下)의 안위(安危)』라면, 당시로 볼 때, 천자(天子)와 그에 예속된 많은 제후(諸侯)들까지를 망라(網羅)한 곳을 말하며, 안위(安危)란 안전함과 위태로움을 말하는 것이니,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양 땅인 이곳 “요(遼)” 땅에 병진(兵塵)이 몰아치면, 곧 천하(天下)가 한바탕 소란스러워진다는 뜻일 게다.
『요(遼) 땅!』 이곳은 수많은 이민족(異民族)과 부족(部族), 종족(種族), 국가(國家)간에 치열한 땅뺏기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다. 『험윤(玁狁) 또는 험윤(獫狁), 훈 죽(獯粥), 산융(山戎), 흉노(匈奴), 돌궐(突闕), 선비【鮮卑 : 모용(慕容). 오환(烏桓). 탁발(拓跋)등】, 글란(契丹), 해(奚), 동호(東胡), 말갈(靺鞨), 달단(韃靼) 또는 몽고(蒙古)등』등의 『대륙(大陸)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그 남북(南北)의 여러 나라, 러시아등지에 살고 있던 수많은 이민족(異民族)들이 이 땅을 탐내어, 살기 좋은 동쪽, 해가 뜨는 양곡(暘谷)의 땅으로 진출(進出)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곳이다.』
이러한 곳이 “반도(半島) 북방(北方)이라고 하기엔 한참 자격미달(資格未達)이다.” 또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설명대로라면, 도대체 “요【遼 : 반도(半島)북방과 요 녕 성(遼寧省)과 하 북 성(河北省)주위 】” 주위에 누가 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설사 어떤 이민족(異民族)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 어떤 누가 천하(天下)를 병진(兵塵)에 시끄럽게 했는가? 도무지 답(答)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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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遼陽)에 들어오면서부터 뽕나무와 삼밭이 우거지고, 개ㆍ닭소리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토록 백 년 동안이나 무사하긴 하나 청(淸)의 황제로서는 오히려 한낱 근심이 남아 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몽고(蒙古) 수레 수천 채가 벽돌을 싣고 심양(瀋陽)에 들어오는데, 수레마다 소 세 마리가 끈다. 그 소는 흰 빛깔이 많으나 간혹 푸른 것도 있으며, 찌는 듯, 한 더위에 무거운 짐을 끌고 오느라고 코에서 피를 뿜는다. ➡ 몽고 사람들은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하며 험상궂고 날래고 사나운 품이 인간 같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옷과 벙거지가 남루하고 얼굴에는 땟국이 흐른다. 그런데도 버선은 꼭 신고 있다. 우리 하인배들이 알 정강이로 다니는 것을 보곤 이상스럽게 여기는 모양이다. 우리의 말몰이꾼들은 해마다 몽고 사람을 봐 와서 그 성격을 잘 알므로 서로 희롱하면서 길을 간다. 채찍 끝으로 그들의 벙거지를 퉁겨서 길 곁에 버리기도 하고, 혹은 공처럼 차기도 한다. 그래도 몽고 사람들은 웃고, 성내지 않으며 두 손을 펴서 부드러운 말씨로 돌려 달라고 사정한다. 또 하인들이 뒤로 가서 그 벙거지를 벗겨 가지고 밭 가운데로 뛰어 들어 가면서 짐짓 그들에게 쫓기는 체하다가 갑자기 몸을 돌이켜 그들의 허리를 안고 다리를 걸면 영락없이 넘어지고 만다. 그러면 그 가슴을 가로 타고 앉아서 입에 티끌을 넣으면, 뭇 되놈들이 수레를 멈추고 서서 모두들 웃으며, 밑에 깔렸던 자도 웃으며 일어나서 입을 닦고 벙거지를 털어서 쓰고는 다시 덤벼들지 않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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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몽고(蒙古) 사람들은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하며 험상궂고 날래고 사나운 품이 인간 같아 보이지 않는다. 〕
이땐 원(元)나라가 망(亡)한지 오래되었던 때이다. 요양(遼陽)땅에 들어서니, 몽고인(蒙古人)들이 청(淸)에 예속되어있는데, 이들의 모양(模樣)이 “몽고(蒙古) 사람들은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하며 험상궂고 날래고 사나운 품이 인간 같아 보이지 않는다.” 고 하였다. 이것은 저자(著者)가 직접 보고 그 모습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진실에 다가갈 확률(確率)이 그만큼 높다고 본다.
그러나 반도사학(半島史學)에 의한 요 녕 성(遼寧省) 심양(瀋陽)에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한 자(者)들”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더 나아가 하 북 성(河北省)이나 그 이북(以北)의 내몽고(內蒙古)나 외몽골지방 역시 마찬가지 형편(形便)이다.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한 자(者)들”이 바로 “몽고인(蒙古人)”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형상(形象)은 이미 기원전(紀元前)의 전한서(前漢書)나, 기원후(紀元後)의 북사(北史)나, 통전(通典)등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후대(後代)로 이어와, 『조선(朝鮮)의 정조(正祖) 4년, 곧 1780년, 금성 위(錦 城 尉) 박 명원(朴 明 源)의 수행원(隨行員)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온 기행문(紀行文)』임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자(者)【몽고인】들이 있었던 “심양(瀋陽)”이란 도회지(都會地)는 본시(本是)의 몽고인(蒙古人)들이 있었던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이곳은 신강 성(新疆省)이나 그 서(西)쪽 지방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대대적(大大的)으로 동(東)쪽으로 이주(移住)했다는 기록(記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몽고(蒙古) 곧 원(元)』에 대해 새로운 각도(角度)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현재(現在)의 “외몽골”지방은 『본시(本是) 몽고(蒙古) 땅이 될 수 없으며, 이곳은 조선(朝鮮)의 영토(領土)였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기록되어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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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양에서부터 길가에 버드나무를 수없이 많이 심어서 그 우거진 그늘에 더위를 잊을 만하다. 가끔 버드나무 밑에 물이 괴어서 웅덩이를 이루었으므로 이를 피하여 길 위로 둘러 나오면, 찌는 듯한 햇볕이 내려 쪼이고, 후끈거리는 흙 기운이 치올라서 삽시간에 가슴이 막힐 듯 갑갑해진다. 멀리 버들 그늘 밑을 바라본즉 수레와 말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다. 말을 재촉하여 그곳에 이르러서 잠깐 쉬기로 했다. 장사꾼 수백 명이 짐을 내리고 땀을 들이고 있다. 혹은 버드나무 그루에 걸터앉아서 옷을 벗어놓고 부채질을 하며, 혹은 차를 마시고 술을 기울이며, 어떤 이는 머리를 감기도 하고 깎기도 하며, 더러는 골패도 치며, 또는 팔씨름도 한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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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양(遼陽)에서부터 길가에 버드나무를 수없이 많이 심어서 그 우거진 그늘에 더위를 잊을 만하다. 〕
『길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놓은 것은, 바람에 모래가 날리어 길이 없어지는 것을 방지(防止)하기 위해서이다.』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길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놓으면, 바람에 날리어 길이 메워지더라도, 그곳이 길이란 것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이정표(里程標) 역할(役割)을 겸(兼)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방은 현 하 북 성(河北省)이나 요 녕 성(遼寧省)등지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나 가능(可能)한 말이며, 실제 역시 그렇다. 조선인(朝鮮人)들이 말하는 것을 보자.
➊ 계 산 기 정(薊山紀程) 제2권 / 도만(渡 灣) ○ 계해 년(1803, 순조 3) 12월 18일(기묘) / 유관(楡關) : 〔 산해 관(山海關)부터는 통 털어 유관(楡關)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임유 현(臨 楡 縣)에 속해 있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진(秦) 나라의 몽 염(蒙恬)이 느릅나무[楡]를 심어 요새를 만든 곳이라고 한다. (중략).〕 〔겹 관문 이북에는 삭풍이 부는데 : 重 關 以 北 朔 風 吹 / 만 그루 느릅나무 들판 길 그늘 지운다. : 萬 樹 楡 楊 蔭 野 歧 / 묻노니 일찍이 장군 손수 심었는가. : 試 問 將 軍 曾 手 種 / 썩은 뿌리 천년이라 솟구쳐 있고 가지 없구나. : 朽 根 千 載 竦 无 枝〕
➋ 서계 집 제4권 / 가을바람에 노장의 마음[秋 風 老 將 心] : 〔산해 관에 유엽 떨어져 빈 숲을 울릴 때 : 關 楡 葉 墮 振 空 林 / 중략 / 천기는 당년에 ‘사막’을 건넘이 깊어라 : 千 騎 當 年 度 磧 深 / 보갑 속의 용천검을 자주 닦아서 보노니 : 匣 裏 龍 泉 頻 拭 看 / 휴도에서 ‘제천 금’을 취하지 못했네. : 休 屠 未 取 祭 天 金 〕
고전번역원의 주(注) / <산해 관(山海關)에 유엽(楡 葉) 떨어져> : 유엽은 느릅나무 잎으로, 북쪽 변방 지방에 느릅나무가 많아 변방 지방을 뜻한다. 또 진(秦)나라의 몽 염(蒙恬)이 느릅나무를 심어 요새를 만든 곳이 산해 관(山海關)인데, 그래서 산해 관(山海關)을 유관(楡關) 또는 유관(渝 關)이라고 한다. 《외이고(外夷 考)》에, “유주(幽州) 북쪽 700 리에 유관(渝 關)이 있고 그 아래에 유수(渝 水)가 있는데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하였는데, 유수가 바로 유하(楡 河)이다.
➌ 연 원 직 지(燕轅直指) 제2권 / 출강 록(出 疆 錄) / 임진년(1832, 순조 32) 12월 12일 : 〔유관 기(楡關 記) / 몽 염(蒙恬)이 느릅나무를 심어 변계(邊界)를 삼고서 유관(楡關)이라 이름 했다. 지금은 임 투 현(臨 渝 縣)에 있는 까닭으로 혹은 투관(渝 關)이라고도 한다. 楡 關 記 / 蒙恬種楡爲塞.名楡關.而今爲臨渝縣.故或稱渝關.〕
➍ 연행록(燕行錄) / 일기(日記) 임진년(1712, 숙종 38) 12월 19일 : 〔 관내에는 산기슭을 감돌아 흐르는 냇물이 간간이 있는데 역시 큰물은 아니었다. 들으니, 진(秦) 나라 장수 몽 염(蒙恬)이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은 까닭으로 그대로 이름이 된 것인데, 지금도 느릅나무와 버드나무가 딴 곳과는 다르다 한다. 關內則以山麓之縈走.川流間間有之.而亦非大水矣.聞秦將蒙恬種楡柳.故仍名焉.卽今楡柳之木.異於他處矣.〕
➎ 연행일기 제3권/ 임진년(1712, 숙종 38) 12월 19일(무진) : 유관(楡關)은, 몽 염(蒙恬)이 느릅나무를 심어 요새를 만들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날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모래 먼지가 날려서 눈을 뜰 수 없었다. 대개 관내에는 거마의 왕래가 많고 수레바퀴와 말발굽에 흙과 모래가 부서져서, 마치 재처럼 가루가 되어 조금만 스쳐도 흩날리기 때문이다. 楡關.世傳蒙恬樹楡爲塞處也.是日乍風.而塵沙漲路.眼不可開.蓋關內往來車馬益多.輪蹄所碾.沙土細如灰.乍觸輒揚故也.〕
➏ 우 복 집 제2권 / 시(詩) : 〔 눈 안 가득 ‘유 새’ 이는 먼지 보이매 : 極 目 楡 塞 塵 / 바람 맞으면서 세 번 탄식 토하네. : 臨 風 三 歎 息 / 탄식해도 어찌해 볼 도리 없나니 : 歎 息 無 奈 何 / 밝은 덕을 높이기만 내 바라누나. : 但 願 崇 明 德 〕
고전번역원의 주(注) / 유 새(楡塞) : 진(秦)나라 때 몽 염(蒙恬)이 흉노족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관(關)으로,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있다. 유림 새(楡林 塞)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변방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 산해 관(山海關)과 유관(楡關) 또는 유관(渝 關)은 같은 곳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다. 또 이곳이 림 유 현(臨 楡 縣 = 臨 渝 縣)이므로, 림 유 관(臨 楡 關=臨 渝 關)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 있는 림 유 산(臨 楡 山)은 높고, 봉우리가 삐죽삐죽 뻗쳐있으며, 그 아래에 유하(楡河=渝河)가 흐른다고 하였다. 【유하(楡河=渝河)는 림 유 하(臨 楡 河 = 臨 渝 河)라고도 한다.】
현재의 『산해 관(山海關)』은, 이러한 지형지리(地形地理)와는 전혀 다른 지세(地勢)이기 때문에 “짝퉁의 오명(汚名)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事實)이다. 【지세(地勢)란 수억(數億)년 또는 수천(數千)만년 전(前), 또는 수십(數十)만년 전(前)에 이미 형성(形成)된 것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바뀔 수 없는 것이다. 대규모(大規模) 지진(地震)으로 바다가 육지(陸地)가 되고, 육지(陸地)가 바다가 된다거나 지구(地球)의 자전축(自轉軸)이 바뀌어 방위(方位)가 변하는, 개벽(開闢)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세(地勢)의 큰 변화(變化)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 】
산해 관(山海關) 주변(周邊)은, 사적(沙磧=사막)지대이며, 이곳은 『심 하(深河)전투의 김응하(金應河)가 대막(大漠)의 모래밭에 고이 잠들다』고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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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양(瀋陽)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혹은 이르기를, “한(漢)이 4군을 두었을 때에는 이곳이 낙랑의 군청[治所]이더니 원위(元魏)ㆍ수(隋)ㆍ당(唐) 때 고구려에 속했다.” 한다. 지금은 성경(盛京)이라 일컫는다. 봉천 부윤(奉天府尹)이 백성을 다스리고 봉천 장군(奉天將軍) 부 도통(副 都統)이 팔기(八旗)를 통할하며, 또한 승 덕 지현(承德知縣)이 있는데, 각부(各部)를 설치하고 좌이아문(佐貳衙門)을 두었다. 문 맞은편에 조장(照 墻)이 있고 문 앞마다 옻칠한 나무를 어긋매끼로 세워서 난간을 만들었다. 장군부(將軍 府) 앞에는 큰 패루(牌樓) 한 채가 서 있다. 길에서 그 지붕의 알록달록한 유리기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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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심양(瀋陽)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혹은 이르기를, “한(漢)이 4군을 두었을 때에는 이곳이 낙랑(樂浪)의 군청[治所]이더니 원위(元魏)ㆍ수(隋)ㆍ당(唐) 때 고구려에 속했다.” 한다.〕
심양(瀋陽)은 본시 한(漢)이 4군을 두었을 때, 낙랑군(樂浪郡)이며, 낙랑군(樂浪郡)을 다스리는 치소(治所 : 관청)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漢)이 한족(漢族)의 나라인가? 조선(朝鮮)인가? 하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대륙조선(大陸朝鮮)에서는, “한(漢)은 조선(朝鮮)의 다른 이름(별칭)일 뿐이다.”
『심양(瀋陽)은 요동(遼東)에 있으며, 요수(遼水) 변에 있는 도회지(都會地)이며, 이곳은 사막(沙漠)에 있었다.』고 조선인(朝鮮人)들은 설명(說明)하고 있다. 연행록(燕行錄)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내용(內容)이다.
● 연도기행 (燕 途 紀 行) <상(上)>【저자(著者)는, 조선(朝鮮)의 16대 왕(王)이었던 <인조(仁祖)대왕(大王)>의 셋째 아들이었던 인평대군 “이 요”가 체험(體驗)한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한 것이며,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심양(瀋陽)으로 끌려간 뒤, 이어 A. D 1,640년 ‘인평대군’ 역시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가, 다음 해에 귀국(歸國)했다. ‘인평대군’은 살아생전에 4 차례나 사은사(謝恩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고 하니, 이로 미뤄보아 인평대군은 청(淸)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본문(本文) / 及夫南漢議和.靑丘賴安.而今上曁昭顯世子.竟未免沙磧之行.余獨扈駕還都.北望遼山.只切飮泣之情. : 남한산성에서 화친이 맺어짐에 이르러는, 우리나라가 편안할 수 있었으나, 금상과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마침내 청나라 사막(沙漠)에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 나는 홀로 임금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서 북쪽으로 요(遼)산을 바라보니, 오직 눈물 흘리는 정이 간절할 뿐이었다. 〕
『淸(청)의 건주(建 州)나, 심양(瀋 陽)은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 많은 종류의 대륙 사(大陸史), 또한 많은 종류의 조선사(朝鮮史)에서, 반도(半島)가 “조선(朝鮮)”이 될 수 없음을 설명(說明)하고, 기록(記錄)을 고증(考證)해 보았다. 또 대륙(大陸) 땅이 조선(朝鮮)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必然的)인 것들을 설명(說明)하였다.
지형지리(地形地理), 방향(方向), 특이지형(特異地形), 특이(特異)기후(氣候), 토산물(土産物), 지명(地名), 인접(隣接)국가(國家), 종족(種族), 부족(部族), 인종(人種)등등으로 “조선(朝鮮)”과 관계(關係)되는 많은 것들의 진실(眞實)을 파헤치고, 대륙(大陸) 땅의 조선(朝鮮)실체(實體)를 밝혀냈다.
중요(重要)한 문제(問題)는 대륙(大陸)정권(政權)도 아니요, 열도(列島) 정권(政權)도 아니다. 오직 반도(半島)정권(政權)과 국민(國民)들의 정서(情緖)이다. 반도(半島)정권(政權)이나 국민(國民)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그야말로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지금 이 시간(時間)까지도 반도(半島)정권(政權)과 국민(國民)들에게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일 뿐이다. 더하여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영구(永久)히 고착(固着)하는데 앞장서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以上)의 “조선사(朝鮮史)” 진실(眞實)게임은 무의미(無意味)하다고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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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사학(半島史學)이니, 식민사학(植民史學)’이니 하는 역사관(歷史觀)은, 시작(始作)은 우리가 아닌 다른 자(者)들에 의해,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것이었으나, 그것을 수정(修正)한다거나, 바로 잡으려 하지 않는 것은, 반도(半島)국민(國民)들 스스로 택한 것이다.
사실(事實), 이제 와서 ‘반도사학(半島史學)이니, 식민사학(植民史學)’이니 떠들어 보아야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아무리 떠들어 봐도, 누구 한 사람 관심(關心)을 갖고, 저항(抵抗)하려는 세력(勢力)이 형성(形成)되지 않는다. 이것만 보아도 ‘반도(半島) 국민(國民)들 스스로 원하는 것이니, 더 이상의 역사(歷史)이야기는 무의미(無意味)하다.’고 보아도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될 수 없다.
심지어 스스로 조선(朝鮮)의 역사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는데 참여(參與)하고, 왜곡(歪曲)된 조선사를 편찬(編纂)한 자들이나, 이들과 함께 한 자(者), 또는 동조(同調)한 자(者)들이 핵심(核心)요직(要職)을 다 꿰차고 앉아 있었고, 그 후손(後孫)들까지도 엘리트로 칭송(稱頌)받으며, 요직(要職)을 꿰차고 있음을 볼 때,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다.』라고 판단(判斷)하고, 항상 깨지기만 하는 계란을 오늘도 그 바위에 던지고 있다. 허나 정말, 반전(反轉)될 기미(機微)는 전혀 없으며, 반도조선(半島朝鮮)은 더더욱 고착(固着)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現實)이다.
정말 이대로 주저앉아야만 할까? 답답한 오늘이다!
2013년 05월 25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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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26 산해관은 곧 유관이며, 림유관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서쪽 관문이었습니다. 이곳의 또 다른 이름이 '천하제일관'입니다. 또한 북경의 서북쪽 근교에는 거용관이 있습니다. 이 모두는 시황제의 명을 받은 "몽념과 30만 대군"이 쌓은 장성이라고 합니다만, 진본기나 열전, 자치통감등의 역사서 원전에는 시황제의 장성을 "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기서 "하"는 현 황하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중아지방의 어떤 "하"를 지칭하는가? 하는 문제도 결려 있습니다. 몽념이 대륙의 인물이었다면 그가 쌓은 장성은 현 섬서성 서쪽에 있으며, 섬서 동쪽으로는 쌓을 수 없는 것이 그는 그 때 '호해'의 명으로 죽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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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26 규수(규천)=아무강=오호수등은 독사방여기요나 지명사전, 기타 원전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 볼 수 있으며, 그 후로 이동된 것이 현 섬서 북방 내몽고 오원의 북쪽 900 리 주변(외몽골 땅)이며, 이곳에 옛 조양성이 있었다고 합니다.(단 이것은 이동된 후의 것임). 한서나 후한서, 오대사, 자차통감, 통전등에 의하면, 이곳을 흐르는 하천이 요하(요수)이며, 이곳을 지키는 장수의 관직명 "도요장군"입니다. 이것은 '중아지방과 신강지방'에 있던 것이 1차 이동된 것입니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주둔하는 "도요영"도 있었으며, 이곳에 주둔해 있던 부대는 신강지방까지 토벌작전을 벌입니다. 이것은 대륙사의 원전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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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대부여 작성시간 13.05.26 한가지 정말 궁금한것이 있습니다. 대륙사를 고증함에 있어서 반드시 짚고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서북 변방의 수많은 성을 말하지만 정작 현 중화민국의 만리장성은 도대체 왜 쌓았는지 모르게씁니다. 모든 우환덩어리는 중앙아세아 그 지역인것 같은데 왜 하북성에서 산서성 넘어까지 첩첩산중에 만리장성을 쌓았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안되는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북쪽에 외적이 있어서 그랬을까? 하지만 그 북쪽은 한겨울에 평균기온이 영하 20도를 넘는 아주 추운지역이고 당시에는 인구가 많지 안을것으로 판단되며 그래서 대규모 거병도 할 수 없는곳일것입니다. 그런데 왜 첩첩산중을따라 성을 쌓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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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26 현 대륙사로 보면 명나라 이후(조선사로 보면 고려로 부터 조선으로 이어진다)의 것으로 판단됩니다. 유목 또는 이목민족들은 말이라는 기동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전술에 능했다고 합니다. 하북성에서 산서성으로 연결되는 장성은 북경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산서 북변이 관통당하면 역시 이곳을 통하면 내륙의 어느 곳에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곳은 식량이 항상 모자란 곳이었기 대문에, 내륙으로 들어오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모여든 종족, 부족 등등이 소규모로 집단이 되어 노략질을 일삼으니, 그것을 방지하고, 또 내륙으로부터 어던 이유로 도주하려자는 자들을 차단역할도 수행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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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26 소위 북적이란 자들은 특별한 구분이 없습니다. 북변에 살고 있는 자들을 총칭해 그렇게 부른 것이며, 장성은 이러한 부류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차단하고, 왕조에서 반란 가담자, 범법자, 백성들의 월경을 차단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장성은 수비초소 역할 정도일 수밖에 없으며, 산서 동북으로부터 하북성의 장성은 아주 잘 보존되고 있는데, 이것은 근세기에 보수 및 증축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이 있었겠지요. 그 나머지 많은 장성들은 흔적만이 남아있으며, 잘 보존된 것들은 대부분 근세기에 보수와 증축이 진행된 것들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