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鮮卑) 탁발(拓跋)씨가 이릉(李陵)의 후예(後裔)?
○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탁발 씨(拓跋氏)는 선비족(鮮卑族)」으로 북위(北魏)왕조(王朝)를 건국(建國)한 자(者)들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으며, 그 설명(說明) 역시 같다. 북위(北魏) 왕조(王朝)는 고구려(高句驪) 왕실(王室)과 혼인(婚姻)관계(關係)로 맺어져 있었으며, 고구려(高句驪) 왕녀(王女)들은 북위(北魏)의 황후(皇后)가 되어, 낳은 자식들은 북위(北魏)의 황제가 되었으며, 용문(龍門)석굴(石窟)등의 상당수는 이들 고구려(高句驪) 왕녀【王女 : 북위의 황후】들에 의해 건설(建設)된 것들이다. 【이것은 곧 북위(北魏)왕조(王朝)의 정체(正體)를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곧 고구려(高句驪)의 일개 제후(諸侯)였다는 뜻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계에서는 이들이 “대 흥 안 령(大興安嶺)”의 북쪽 “흑룡강(黑龍江)” 북부(北部)지방에서 시원(始原)한다고 말한다. 옛 ‘오 낙 후 국(烏洛侯國)’의 서북(西北)쪽에 “탁발(拓跋)씨”의 조상(祖上)이 살았다는 석실(石室)유적(遺跡)이 발견되었고, 이 “알 선 동(嘎 仙 洞)”은 지금 유적(遺跡)으로 지정(指定)되어 있다고 전하면서, 진실(眞實)인 냥 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 학자(學者)들의 논문(論文)이나 저술(著述)한 책에서 모두 같은 내용(內容)을 주제(主題)로 하고 있다. 역사왜곡(歷史歪曲)은 이렇게 치밀(緻密)하게 지금 이 순간(瞬間)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繼續)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들의 주장(主張) 핵심(核心)은 “바이칼 호”를 “북해(北海)”로 인식(認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出發)한다. 그러나 「역사서(歷史書) 어디에도 “북해(北海)”가 “바이칼 호”라는 근거(根據)를 기술(記述)한 것이 없다.」 이게 문제(問題)인 것이다. 기록(記錄)이 없는데, 어떻게 “바이칼 호”가 “북해(北海)”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치명적(致命的)인 약점(弱點)이다. 이것은 「서(西)쪽으로부터 동(東)쪽으로 지명(地名)이동(移動)의 결과(結果)인 것을 모르는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다.」
● 북위서(北魏書)나 통전(通典)등의 대륙 사(大陸史)에 기록되어 있는 : 〔其 裔 始 均 仕 堯 時 , 逐 女 魃 於 弱 水 北 , 人 賴 其 勳 ,舜 命 為 田 祖 。: 그 후예(後裔)가 시작된 ‘균사요’ 때, 여발【女魃 : 가뭄을 맡은 귀신(鬼神)】을 약수(弱水)의 북쪽으로 내좇아, 사람들이 신뢰하여 그 공로(功勞)로, 순(舜)임금으로부터 전조(田祖)로 명을 받았다.〕라는 문구(文句)에 등장하는 “약수(弱水)를 흑룡강(黑龍江)으로 생각해 이런 주장이 나왔는가하는 의심(疑心)도 있다. 그러나 약수(弱水)가 현(現) 흑룡강(黑龍江)이라는 주장(主張)은, 쓰레기 통속으로 들어 간지 이미 오래다.
※ 태고(太古)적으로부터 동(東)쪽에서 시원(始原)한 무리들이 생존(生存)을 위해, 서(西)쪽으로 이주(移住)했다가 다시 동진(東進)하는 것이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이며, 이 과정(科程)에서 지명(地名)의 이동(移動)이 필연적(必然的)으로 따라 다닌 것이다.
○ 통전(通典) 변방 전(邊防傳)에,
〔駮 馬 : 駮 馬 , 其 地 近 北 海 , 去 京 萬 四 千 里 : 박 마(駮 馬), 박 마(駮馬)는, 그 땅 가까운 곳에 “북해(北海)”가 있는데, 경사(京師)까지 14,000 리 떨어져 있다. 〕고 하였는데,
“바이칼 호(湖)”는 장안(長安)으로부터 2000km 떨어져 있어, 5000 리(里) 또는 5300 여리(餘里) 떨어져 있을 뿐이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14,000 리라면 최소(最小)한 <5250km, 또는 5,600km> 정도 떨어져 있어야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바이칼 호”를 “북해(北海)”라 하지 않았다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이다. 그러나 반도사학(半島史學)은 다른 것은 다 거리(距離)를 재고, 따지면서도 “북해(北海)”에 대해서만은 특별(特別)히 따지는 것이 없는 묘한 “이중 잣대”를 들이 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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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발 씨(拓跋氏)는 북위(北魏)를 건국(建國)한 자(者)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 족(羌族)인 당항(党項)」에게도 “탁발 씨(拓跋氏)”가 있다.
통전(通典) 서역(西域) / 党 項 : 〔党 項 羌, 在 古 析 支 之 地, 漢 西 羌 之 別 種. 魏 晉 以 降, 西 羌 微 弱. 周 滅 宕 昌, 鄧 至 之 後, 党 項 始 強. 南 雜 舂 桑, 迷 桑 等 羌, 北 連 吐 谷 渾. 其 種 每 姓 別 自 為 部 落, 一 姓 之 中 復 分 為 小 部 落, 大 者 萬 餘 騎, 小 者 數 千 騎, 不 相 統 一. : 有 細 封 氏, 費 聽 氏, 往 利 氏, 頗 超 氏, 野 辭 氏, 房 當 氏, 米 禽 氏, 拓 拔 氏, 而 拓 拔 最 為 強 族. : 세봉 씨. 비 청 씨. 왕 리 씨. 규 초 씨. 야 사 씨. 방 당 씨. 미 금 씨. 탁 발 씨>등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척 발 씨(拓 跋 氏)가 가장 강한 무리였다.〕
당항(党項)족 탁발 씨(拓跋氏)가 건국한 왕조가 서하(西夏)이다. 서기 1038년, 이원호(李 元昊)는 요(遼)와 송(宋)나라 때 자칭(自稱) 황제(皇帝)가 되어 국호(國號)를 대하(大夏)라 하고, 흥 경 부(興 慶 府)에 도읍(都邑)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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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주 이색적(異色的)인 기록(記錄)이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있다.
○ 태평어람(太平御覽)의 “탁발 씨(托跋氏)”편을 보면, 〔托跋氏:宋書曰:托跋氏,其先漢將李陵之後也.陵降匈奴,單于妻之以女,字托跋,其後因氏焉.世豪強,分建種落也.索頭虜,姓托跋氏.愍帝進盧為代王,盧孫十翼鞬據陰山,眾數十萬.鞬死,子開字涉圭.即后魏道武皇帝. : 탁발 씨(托跋氏) : 송서(宋書)에서 이르기를 : 탁발 씨(托跋氏)의 그 선조(先祖)는 한(漢)의 장수(將帥) 이릉(李陵)의 후손(後孫)이다. 이릉(李陵)이 흉노(匈奴)에게 항복(降伏)해, 선우(單于)의 여식(女息)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자(字)가 “탁발(托跋)”이어서, 그 후인(後人)들이 이로 인해 씨(氏)가 되었다. 대대로 호족으로 성(盛)했는데, 종족(種族)의 부락을 나누어 두었다. 색 두 노(索頭虜)는 성(姓)이 탁발 씨(托跋氏)이다. 민 제(愍帝)가 “노(盧)”를 승차시켜 대왕(代王)이 되었는데, 노(盧)의 자손 십 익 건(十翼鞬)이 음산(陰山)에 의거하였는데, 무리가 수십(數十)만이었다. ‘건(鞬)’이 죽고, 아들이 ‘섭 규(涉圭)’이며, 곧 <후위(後魏=후위(后魏)>의 도무(道武)황제(皇帝)이다.〕라 하였다.
「색 두 노 (索 頭 盧)」란, “색 두 의 노(索頭猗盧)”를 말하는 것으로 도무제(道武帝)의 선조(先祖)이다. 남방(南方)왕조(王朝)에서 북방(北方)왕조(王朝)를 비하(卑下)하여 일컫는 말로, 남조(南朝)에서는 <후위(後魏)=북위(北魏)>를 “노(虜)”라 칭했다. 남제서(南齊書)를 보면, “위 노(魏虜)”라 했으며, 이들은 선비족(鮮卑族)이며, 피발【被髮 : 머리를 풀어헤침】하고 좌임【左袵 : 오른쪽 섶을 왼쪽 섶 위로 여미는 풍속】한다고 하여, 미개(未開)한 종족(種族)으로 보았으며, 이를 “색 두(索頭)”라 불렀다.」
○ 위 기록으로 본다면, 북위(北魏)를 건국(建國)한 자(者)들은
① 이릉(李陵)은 서북(西北)쪽으로 진격(進擊)하였고,
② 그 후손(後孫)들은 다시 동남(東南)쪽으로 이주(移住)했다는 설명(說明)이 된다. 그러나 「북위(北魏)는 고구려(高句驪)를 숨기기 위한 제후(諸侯)의 역사(歷史)을 황제 국(皇帝國)의 역사(歷史)로 둔갑(遁甲)시켰을 뿐이다」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③ 이렇게 본다면,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 말하는 “흑룡강(黑龍江) 북부의 대 흥 안 령(大興安嶺)주변에 있다는 탁발(拓跋)씨 조상(祖上)의 석실(石室) 유적(遺跡)이란 것은 조작(造作)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역사(歷史)를 조작(造作)하는 자들의 치밀(緻密)함과 더러운 양심(良心)을 실감(實感)케 한다.
● 해국도지(海國圖志) : 북양(北洋) 아라사(俄羅斯) 편 / 「以 黑 發 為 不 祥, 黑 瞳 者 必 曰 陵 苗 裔 也. : 검정머리털을 가진 자는 자세하지 않은데,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자들은 틀림없이 “이능(李陵)”의 후손(後孫)들이다.」라고 하였다.
통전(通典) 주석(註釋)에서도 : 송(宋)나라와 제(齊)나라의 역사서(歷史書)에 전하기를, 〔한(漢)나라 장수(將帥)로써 흉노(匈奴)에게 항복(降伏)한 “이릉(李陵)”의 후인(後人)이다. : 宋 齊 二 史 又 云 漢 降 將 李 陵 之 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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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위서(北魏書) 본기(本紀) 서기序 紀) 第一 /〔昔黃帝有子二十五人,或內列諸華,或外分荒服,昌意少子,受封北土,國有大鮮卑山,因以為號.: 오래된 옛 적에 황제(黃帝)는 스물다섯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혹은 나라 안의 여러 제후가 되었고, 혹은 나라밖 황 복(荒服)으로 나누어져, 창의(昌意)의 작은 아들은, 북쪽의 땅을 봉 받았는데, 나라 안에 대선비산이 있어, 이로 인해 이름이 되었다. 其後,世為君長,統幽都之北,廣漠之野,畜牧遷徙,射獵為業,淳樸為俗,簡易為化,不為文字,刻木紀契而已,世事遠近,人相傳授,如史官之紀錄焉.: 그 뒤, 대대로 군장이 되어, 유도【幽都 : 유주(幽州)】의 북쪽, 드넓고 아득한 들판에서, 가축을 방목하며 옮겨 다니며, 사냥을 생업으로 하였다. 黃帝以土德王,北俗謂土為托,謂后為跋,故以為氏.其裔始均,入仕堯世,逐女魃於弱水之北,民賴其勤,帝舜嘉之,命為田祖. : 황제(黃帝)는 토 덕 왕(土德 王)으로, 북쪽의 풍속에 토(土)는 탁(托)이요, 후(后 : 임금. 군장)를 이르기를 발(跋)이라 했으므로, 고로 씨(氏)가 되었다. 〕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탁발(托跋)씨 자신들의 이야기다.
○ 이러한 <탁발 씨(拓跋氏)=탁발 씨(托跋氏)> 선조(先祖)들이 있었다는 「유도(幽都)의 북쪽지방은 곧 광 막(廣漠)지대였으며, 이곳에 대선비산(大鮮卑山)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지형지리(地形地理)가 현 흑룡강 성(黑龍江省)을 흐르는 흑룡강(黑龍江)의 북쪽이라면, 이해(理解)할 수 있을까? 반도(半島)와 열도(列島)와 대륙(大陸)의 사학자(史學者)들만이 이해(理解)하는, 특정(特定)집단(集團)만이 이해(理解)할 수 있는, 그런 지형지리(地形地理)라면, 이것은 조선사(朝鮮史)를 조작(造作)한 무리(群)들과 깊은 관련(關聯)이 있다는 증거(證據)다.
2013년 08월 18일 <글쓴이 : 문무(文武)>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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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8.18 일단 북해와 한해는 전혀 다릅니다. 일부 주석자들은 북해를 한해를 혼동해서 같은 곳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많은 기록은 북해와 한해를 다르다고 설명하며, 고지도에 나타난 여러 지명들이 올바른 것이냐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우리는 조선사의 진실을 찾자는 목적이기 때문에 조선사의 진실속의 북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산일대를 중원으로 생각하시는 건 궐한님의 개인적 생각일 뿐, 그것이 논거는 될 수 없지요. 중원지방을 어느 곳으로 추정하느냐는 개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나, 북해니 한해니 하는 것들은 특이지형과 그곳의 특색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곳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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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궐한 작성시간 13.08.18 고지도에 틀림없이 그리 나왔으니...그런 시각들도 있었음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게 왜곡이던 진실이던요...
문무님께서 인용하시는 여러 고전들도...각기 시대마다 다르게 적용됀 기록이니...모두 진실이라 할 수 없듯이요...
문무님 말씀대로...여러 기록이나 지도들 다 참작하고 걸러내기 하며 진실을 가려야 하는데...
저 나름대로 그리하다 보니...북해니 동해는...꼭히 한군대가 아니라...
대표적인 장소가 세군대 이상으로 나온단 걸 말씀드린 겁니다.
어느시대에 어느왕조 기준 중심점에서의 북해냐 동해냐를 잘 취사선택해야 모순에 빠지지않는단 말씀입니다. -
작성자PKwon 작성시간 13.08.19 태평요람에 민제가 언급되는데 이는 서진 민제 사마업을 말하는바, 그 시절 사마업은 자기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마당이었으므로 자기와 별로 관계도 없는 이민족 수장에까지 칭호를 내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옛기록도 다 믿을 수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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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8.19 역사서는 기본 텍스트일 뿐입니다. 또 역사서는 후대에 편찬되는 것이란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역사서를 100%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토대로 조선사를 재구성해 보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고지도 역시 대부분의 것들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지는 잘 아실 것이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곳에서 말하는 내용을 가지고 특이사항이나 지형지리, 방향등을 참고하고, 편찬된 시기의 사회상을 엿 볼 수 있기 때문에 보는 것입니다. 서울(한국)은 한 곳밖에 없습니다. "서울"이 북미에도 있고, 유럽에도 있다면 분명 잘못된 것이며, 왜 잘못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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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8.19 지형지리나 기후, 당시의 환경, 특산품, 인종등등은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들의 선대 역사에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무시한 연구결과는 불보듯 뻔한 결과를 내놓을 것이며, 반도사학과 같은 큰 "우"를 범허게 범하게 됩니다. 인간이 만물을 창조한 신이 아닌이상 인간은 그저 인간의 생활사일 뿐이며, 그것은 보통사람들의 생활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마치 축지법이나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신의 경지로 승화시키려는 것은 역사가 아닌 판타지소설 같은 이야기로 변질되어 버리지요. 훌륭하고, 이해되는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논거가 없다면 우스겟 소리로 전략하고 그저 황당한 이야기로 치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