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勃海)가 범람(汎濫)하였다.
부제(副題) : 도요장군(度遼將軍)의 활동범위(活動範圍) <2 편>
○ 조선사(朝鮮史)에서 가장 난해(難解)한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 『➀ 요동요서(遼東遼西)를 가르는 “요수(遼水)=요하(遼河)”이다. 또 하나는 ➁ 발해(勃海)=발해(渤海)』 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만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조선사(朝鮮史)의 신비(神秘)를 모두 벗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완벽(完璧)한 것은 아닐지라도, 오늘 두 마리 토끼를 잡아보기로 했다.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을 만든, 가공(加工)된 조선사(朝鮮史)를 주장(主張)하는 무리(群)들은, 식민지(植民地) 통치자(統治者)【일제(日帝)】들과 야합(野合)하여,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는데, 앞장서서 동조(同調)하고, 일제(日帝)가 던져준 그 틀을 갖고 뼈를 만들고, 살을 붙여, 오늘날의 조선사(朝鮮史)를 완성(完成)하였다. 그들은 그 대가(代價)로 명예(名譽)와 부(富)와 권력(權力)을 가졌다. 이것은 이들이 후손(後孫)들과 직계(直系) 후배(後輩)들이, 지금(只今)까지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핵심(核心)요직(要職)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證明)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대륙(大陸)과 국교(國交)가 터, 그곳으로부터 원문(原文)서적(書籍)을 구입(購入)할 수 있게 되자, 그동안 우리가 배우고, 가르치던 조선사(朝鮮史)가 ‘허구(虛構)의 역사(歷史)’이며, ‘가공(加工)으로 포장(包裝)되고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창작품(創作品)’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런 실정(實情)임에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여러 정권(政權)들은,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았으며, 국수주의(國粹主義)로, 민족주의(民族主義)로 몰아세웠다. 지금(只今), 이 시간(時間)에도, 역시(亦是) ‘똑같은 창작(創作)된 조선사(朝鮮史)’를 5천5백만 국민(國民)들에게 세뇌(洗腦)를 계속(繼續)하고 있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정권(政權)이다.
○ 친일(親日)정권(政權)! 친미(親美)정권(政權)! 둘 중의 하나가, 그동안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받쳐온 정권(政權)의 형태(形態)다. 누가 친일(親日)로부터, 친미(親美)로부터 벗어나 자주(自主)와 자립(自立)을 위해 노력(努力)했는가를 물어보자. 일제(日帝)의 총독(總督)에게, 수천(數千)만 동포(同胞)가 개(犬)처럼 충성(忠誠)하기를 바랐던 자(者)들이 누구더냐? 친일파(親日派)니, 친일(親日)분자(分子)니 하고 말한다. 이 중에서 가장 악랄(惡辣)한 자(者)들이, 바로 민족(民族)의 정기(精氣)나 혼(魂)을 팔아먹은 학자(學者)같지 않은, 가면(假面)을 쓴 학자(學者)들이었다. 이들을 처단(處斷)하지 않고는, 조선사(朝鮮史)는 결코 찾을 수 없다.
○ 본론(本論)으로 들어가 보자. “도요장군(度遼將軍)”은, 분명(分明)히 “요수(遼水)=요하(遼河)”를 건너가, 침략자(侵略者)들을 토벌(討伐)하기 위한 군대(軍隊)의, 최고(最高)사령관(司令官)을 말한다고 당시(當時)인들이 말해 놓고 있다. 『요수(遼水)=요하(遼河)』는 『북(北)에서 남(南)으로 또는 남(南)에서 북(北)으로 흘러가야 하는 자연(自然)의 섭리(攝理)가 있다.』 그래야만, 강(江)을 기준(基準)으로 동(東)쪽 지역과 서(西)쪽 지역을 별도(別途)의 이름으로 호칭(呼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이 바로 유명(有名)한 요동요서(遼東遼西)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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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資治通鑑) 후한 기(後漢 紀) <계속됩니다.>
(5) 孝和皇帝下永元五年(癸巳,公元九三年) : 師子覺其謀,乃別居五原界,每龍庭會議,師子輒稱病不往。: 사자(난제사자)는 그 모의를 알아차리고, 오원(五原)의 경계(境界)지역에서 따로 살면서, 용정(龍庭) 회의 때마다, 사자는 번번이 병을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度遼將軍皇甫稜知之,亦擁護不遣,單于懷憤益甚。 : 도요장군(度遼將軍) 황보릉(皇甫稜)이 이를 알고, 또 그를 옹호하면서 보내지 않으니, 선우는 분한 마음을 더욱 심하게 품게 되었다.
(6) 孝和皇帝下永元六年(甲午,公元九四年) 春,正月,皇甫稜免,以執金吾硃徽行度遼將軍。: 봄, 정월, 황보릉(皇甫稜)이 면직되고, 집금오(執金吾) 주휘(硃徽)에게 도요장군(度遼將軍)의 직책을 수행하게 하였다. 중략. 九月,癸丑,以光祿勳鄧鴻行車騎將軍事,與越騎校尉馮柱、行度遼將軍硃徽將左右羽林、北軍五校士及郡國跡射、緣邊兵,烏桓校尉任尚將烏桓、鮮卑,合四萬人討之。 : 9월, 계축, 광록훈 등홍(鄧鴻)에게 거기(車騎)장군의 업무를 수행하게 하여, 월기교위(越騎校尉) 풍주(馮柱), 도요장군(度遼將軍)의 업무를 수행하는 주휘(硃徽)와 함께 좌우(左右) 우림군(羽林軍)과, 북군(北軍) 5교 병사와 군국(郡國)의 적사(跡射)와 연변(緣邊)병을 거느리게 하고, 오환(烏桓)교위(校尉) 임상(任尙)에게는 오환(烏桓)과 선비(鮮卑) 도합 4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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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孝和皇帝下永元七年(乙未,公元九五年) 春,正月,鄧鴻等軍還,馮柱將虎牙營留屯五原。: 봄, 정월, 등홍(鄧鴻)의 군사들이 돌아왔지만, 풍주(馮柱)는 호아영(虎牙營)을 거느리고 오원(五原)에 주둔(駐屯)하였다.
(8)孝和皇帝下永元八年(丙申,公元九六年)秋,七月,度遼將軍龐奮、越騎校尉馮柱追擊破之,徙其餘眾及諸降胡二萬餘人於安定、北地。: 가을, 7월, 도요장군(度遼將軍) 방분(龐奮)과 월기교위(越騎校尉) 풍주(馮柱)가 이들을 추격(追擊)하여 깨뜨리고, 그 나머지 무리들과 항복한 흉노(匈奴) 이만(二萬)여명을 안정(安定)과 북지(北地)로 이사시켰다.
(9) 孝和皇帝下元興元年(乙巳,公元一零五年): 春,高句驪王宮入遼東塞,寇略六縣。: 봄, 고구려(高句驪)왕(王) 궁(宮)이 요동(遼東) 요새(要塞)지역으로 들어와, 6 개현을 침구(侵寇)하였다. 【본인(本人) 주(注) : 이때의 고구려(高句驪)왕(王)은 태조(太祖)대왕(大王)이다】
(10) 효 안제 영초 3년 (109년) ; 南單于圍中郎將耿種於美稷。: 남선우가 미직(美稷)에서 중랑장(中郞將) 耿种(경충)을 포위하였다. 冬,十一月,以大司農陳國何熙行車騎將軍事,中郎 將龐雄為副,將五營及邊郡兵二萬餘人,又詔遼東太守耿夔率鮮卑及諸郡兵共擊之。: 겨울, 11월, 대사농인 하희(何熙)에게 거기(車騎)장군(將軍)의 업무를 대리하도록 하고, 중랑장(中郞將) 龐雄(방 웅)을 부관(副官)으로 하여, 오영(五營)과 변경(邊境)에 있는 군대 2 만여 명을 거느리도록 하고, 요동(遼東)태수 耿夔(경기)에게 조서를 내려 선비(鮮卑)와 여러 군의 병사를 거느리고 함께 공격하도록 하였다. 以梁慬行度遼將軍事。: 양근(梁槿)에게는 도요장군(度遼將軍)의 업무를 대리토록 하였다.
(11) 孝殤皇帝永初四年(庚戌,公元一一零年)會熙卒,即拜梁慬度遼將軍。龐雄還,為大鴻臚。: 하희(何熙)가 죽자, 양근(梁槿)을 도요장군(度遼將軍)에 임명하였다. 방웅(龐雄)은 돌아와서 대홍려(大鴻臚)가 되었다.
➠ 추가(追加) / 喭曰:『關西出將,關東出相』 烈士武臣,多出涼州,士風壯猛,便習兵事。: 전해지는 말에(또는 속담에) : 「관서(關西)지방에서는 장군(將軍)이 많이 나오고, 관동(關東)지방에서는 재상(宰相)이 많이 나온다」하였는데, 열사(烈士)와 무신(武臣)이 양주(涼州)에서 많이 나오는데, 그 풍토(風土)가 웅장(雄壯)하고 용맹(勇猛)하여, 전투(戰鬪)에 관한 일을 쉽게 익혔기 때문이다.
(13) 孝殤皇帝元初二年(乙卯,公元一一五年)八月,遼東鮮卑圍無慮;九月,又攻夫犁營,殺縣令。중략. 冬,十月,時度遼將軍梁慬亦坐事抵罪。: 8월, 요동(遼東)선비(鮮卑)가 무려(無慮)를 포위하였다 : 9월에는 부리영(夫犁營)을 공격(攻擊) 현령(縣令)을 살해하였다. 중략. 겨울, 10월, 이때 도요장군(度遼將軍) 양근(梁槿) 역시 사건(事件)에 연루(連累)되어 죄(罪)를 받았다.
(14) 孝安皇帝元初三年(丙辰,公元一一六年)癸酉,度遼將軍鄧遵率南單于擊零昌於靈州,斬首八百餘級。: 계유, 도요장군(度遼將軍) “鄧 遵(등준)”이 남선우를 인솔하여 령주(靈州)에서 영창(零昌)을 공격하였는데, 참수한 것이 800 여 급이었다
(15) 孝安皇帝元初五年(戊午,公元一一八年)夏,六月,高句驪與濊貊寇玄菟。: 여름 6월, 고구려(高句驪)와 예맥(穢貊)이 현토(玄菟)를 침구(侵寇)하였다.
(16) 孝安皇帝元初六年(己未,公元一一九年)秋,七月,鮮卑寇馬城塞,殺長吏,度遼將軍鄧遵及中郎將馬續率南單于追擊,大破之 : 가을 7월, 선비(鮮卑)가 마성(馬城)의 요새를 침구하여 장리(長吏)를 죽이니, 도요장군(度遼將軍) 등준(鄧遵)과 중랑장(中郞將) 마속(馬續)이 남선우를 인솔하여 추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17) 孝安皇帝永寧元年(庚申,公元一二零年)遼西鮮卑大人烏倫、其至鞬各以其眾詣度遼將軍鄧遵降。 : 요서(遼西)선비(鮮卑) 대인 오륜(烏倫)과 기지건(其至鞬)이 각각 그 무리들을 데리고 도요장군(度遼將軍) 등준(鄧遵)에게 항복하였다.
(18) 孝安皇帝建光元年(辛酉,公元一二一年)幽州刺史巴郡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擊高句麗,高句麗王宮遣嗣子遂成詐降,而襲玄菟、遼東,殺傷二千餘人。: 유주자사(幽州刺使) 파군(巴郡)인 풍환(馮煥), 현토(玄菟)태수(太守) 요광(姚光),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등이 장병(將兵)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高句驪)왕(王) ‘궁(宮)’은 아들 ‘수성(遂城)’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고, 현토(玄菟)와 요동(遼東)을 습격, 2천여 명을 살상하였다. 夏,四月,高句麗復與鮮卑入寇遼東,蔡諷追擊於新昌,戰歿。功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俱沒於陳。: 여름, 4월, 고구려(高句驪)가 다시 선비(鮮卑)와 함께 요동(遼東)을 침구하자, 채풍(蔡諷)이 추격하여 신창(新昌)에서, 싸우다 죽었다. 공조연 용단(龍端)과 병마연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蔡諷)을 막다가, 진(陳)에서 함께 죽었다. 중략. 五月,庚辰,騭與子鳳並不食而死。騭從弟河南尹豹、度遼將軍舞陽侯遵、將作大匠暢皆自殺;唯廣德兄弟以母與閻後同產,得留京師。: 5월, 경신, 등즐(鄧騭)과 아들 등봉(鄧鳳)이 나란히 먹지 않다가 죽었다. 등즐(鄧騭)의 사촌아우 하남(河南)윤(尹) 등표(鄧豹)와 도요장군(度遼將軍) 인 무양후 등준(鄧遵), 장작대장 등창(鄧暢)도 모두 자살하였다. 유일하게 등광덕(鄧廣德) 형제는 어머니가 염(閻)황후(皇后)와 친자매였기 때문에 경사(京師)에 남을 수 있었다. 중략. 十二月,高句驪王宮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與州郡並力討破之。 : 12월, 고구려(高句驪)왕(王) ‘궁(宮)’이 마한(馬韓), 예맥(濊貊)의 수천 기병을 인솔하여 현토를 포위하니, 부여(夫餘)왕(王)이 아들 위구태(尉仇台)와 2만 여명을 거느리고 주(州)와 군(郡)과 힘을 합쳐 토벌 깨뜨렸다.
(19) 孝安皇帝延光元年(壬戌,公元一二二年) 虔人羌與上郡胡反,度遼將軍耿夔擊破之。: 건(虔)인 강(羌)과 상군(上郡)의 호(胡)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요장군(度遼將軍) 경기(耿夔)가 쳐 깨뜨렸다.
(20) 孝安皇帝下永建四年(己巳,公元一二九年)尚書偵射虞詡上言:「安定、北地、上郡,山川險厄,沃野千里,土宜畜牧,水可溉漕。: 상서(尙書)정사(偵射) ‘우후’가 상언하기를 : 「안정(安定). 북지(北地). 상군(上郡)의, 산천(山川)은 험악하나, 기름진 들판이 천리(千里)이며, 토양은 축목(畜牧)에 적합하며, 물은 관개와 운송을 할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21) 孝順皇帝下陽嘉四年(乙亥,公元一三五年)冬,十月,烏桓寇雲中,度遼將軍耿曄追擊,不利。十一月,烏桓圍曄於蘭池城;發兵數千人救之,烏桓乃退。 : 겨울 10월, 오환(烏桓)이 운중(雲中)을 침구(侵寇)하자, 도요장군(度遼將軍) 경엽(耿曄)이 추격(追擊)하였으나 불리(不利)하였다. 11월, 오환(烏桓)이 경엽(耿曄)을 난지(蘭池)성(城)에서 포위(包圍)하였다. : 군사 수천(數千)을 발동하여 구하니 오환(烏桓)은 퇴각하였다.
(22) 孝順皇帝下永和五年(庚辰,公元一四零年) 夏,五月,度遼將軍馬續與中郎將梁並等發邊兵及羌、胡合二萬餘人掩擊,破之。 : 여름, 5월, 도요장군(度遼將軍) 마속(馬續)과 중랑장(中郞將) 양병(梁並)등이 변병(邊兵)과 강(姜), 호(胡) 2만 여인을 징발(徵發) 징발하여 습격, 깨뜨렸다. 중략. 匈奴句龍王吾斯等立車紐為單于,東引烏桓,西收羌、胡等數萬人攻破京兆虎牙營,殺上郡都尉及軍司馬,遂寇掠並、涼、幽、冀四州。: 흉노 구룡왕 오사(吾斯)등이 거뉴(車紐)를 옹립(擁立)하여 선우로 하고, 동(東)쪽으로 오환(烏桓)을 끌어들이고, 서(西)쪽의 강(羌)과 호(胡)등 수만(數萬)이 경조(京兆) 호아영(虎牙營)을 깨드리고, 상군(上郡)도위(都尉)와 군사마(軍司馬)를 살해(殺害)하고, 병주(幷州). 양주(涼州). 유주(幽州). 기주(冀州) 4주를 침구(侵寇) 약탈하였다.
(23) 孝順皇帝下永和六年(辛巳,公元一四一年)夏,使匈奴中郎將張耽、度遼將軍馬續率鮮卑到谷城,擊烏桓於通天山,大破之。: 여름, 흉노(匈奴)중랑장(中郞將) 장탐(張耽), 도요장군(度遼將軍) 마속(馬續)에게 선비(鮮卑)를 인솔하여 곡성(谷城)에 이르러, 오환(烏桓)을 천산(天山)으로 통하는 곳에서 쳐, 크게 깨뜨렸다. 【오환(烏桓)을 통천산(通天山)에서 쳐, 크게 깨뜨렸다.】
(24) 孝質皇帝永壽二年(丙申,公元一五六年) 秋,七月,檀石槐寇雲中。以故烏桓校尉李膺為度遼將軍。膺到邊,羌、胡皆望風畏服,先所掠男女,悉詣塞下送還之。; 가을, 7월, 단석괴(檀石槐)가 운중(雲中)을 침구하였다. 옛 오환(烏桓)교위(校尉)였던 이응(李膺)을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았다. 이응(李膺)이 변경(邊境)에 도착하자, 강(羌)과 호(胡) 모두가 소문(風)을 듣고 두려워 항복(降服)하였는데, 이전에 약탈한 남녀(男女)들을, 남김없이 요새(要塞) 아래로 데리고 와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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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孝桓皇帝上之下延熹元年(戊戌,公元一五八年) 十二月,南匈奴諸部並叛,與烏桓、鮮卑寇緣邊九郡。帝以京兆尹陳龜為度遼將軍。 : 12월, 남흉노의 여러 부(部)가 반란을 일으키고, 오환(烏桓)과 선비(鮮卑)가 더불어 변경의 9 군(郡)을 침구(侵寇)하였다. 황제가 경조(京兆)윤(尹) 진구(陳龜)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았다.
(26) 孝桓皇帝上之下延熹六年(癸卯,公元一六三年) 詔征皇甫規為度遼將軍。: 조서를 내려 황보규(皇甫規)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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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孝桓皇帝中延熹九年(丙午,公元一六六年)秋,七月,鮮卑復入塞,誘引東羌與共盟詛。於是上郡沈氐、安定先零諸種共寇武威、張掖,緣邊大被其毒。: 가을, 7월, 선비(鮮卑)가 다시 요새(要塞)로 들어와 동강(東羌)을 끌어들여 함께 동맹을 맺고 맹세하였다. 이에 상군(上郡)의 심씨(沈氏)와 안정(安定)의 선령(先零)의 여러 종족이 함께 무위(武威), 장액(張掖)을 침구하니, 변경(邊境)지역이 크게 해독을 입었다. 詔復以張奐為護匈奴中郎將,以九卿秩督幽、並、 涼三州及度遼、烏桓二營,兼察刺史、二千石能否。: 조서를 다시 내려서 장환(張奐)을 호(護)흉노(匈奴)중랑장(中郞將)하고, 구경(九卿)과 같은 질목을 가지고 유주(幽州), 병주(幷州) 양주(涼州)의 세 주와 도요장군(度遼將軍), 오환(烏桓)교위(校尉)가 관할(管轄)하는 두 군영(軍營)을 살펴, 자사(刺史)와 이천(二千)석의 관리(官吏)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살피도록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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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도요장군(度遼將軍)의 대략적(大略的)인 활동(活動)범위(範圍)를 살펴보았다. 만약(萬若)에 말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이나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대로라면, “도요장군(度遼將軍)”은 지금의 요녕성(遼寧省)의 의무려(醫無閭) 또는 금주(錦州) 또는 심양(瀋陽) 정도(程度)에서 도요영(度遼營)의 진지(陣地)를 구축(構築)하고, 주둔(駐屯)했어야 맞는 말이다.
오죽하면 경조(京兆)를 수비(守備)해야 할 정예(精銳)중의 정예병(精銳兵)들이 모인 호아영(虎牙營)의 군대(軍隊)를, 도요장군(度遼將軍)에 배속(配屬)해, 요수(遼水)=요하(遼河)를 건너, 도요영(度遼營)에 주둔(駐屯)시켰을까를 생각해보자.
○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도요장군(度遼將軍)”과 그가 지휘(指揮)하는 수만(數萬)의 기마대(騎馬隊)는, 오늘날의 「영하성(寧夏省) 황하(黃河)북방(北方)과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을 흐르는 황하(黃河)북방(北方)인 “하북지방(河北地方)”에서, 수도 없는 전투(戰鬪)를 치르고 있는, 상황(狀況)을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조선(朝鮮)의 여러 왕조(王朝)들은, 반도(半島) 땅에 있지 않았다.』 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고증(考證)하는 것이며, 『소위(所謂) 한족(漢族) 왕조(王朝)는 현재(現在) 대륙(大陸) 땅에 없었다.』 는 것을 명백(明白)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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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孝桓皇帝下永康元年(丁未,公元一六七年) : 秋,八月,巴部言黃龍見。: 가을, 8월, 파군(巴郡)에서 황룡(黃龍)이 보였다. 중략. 六月大水,勃海海溢。: 6 월에 큰 홍수가 나서 발해(渤海)가 범람(汎濫)하였다.
● 위 기록(記錄) 중에서 : ➠ 『六 月 大 水, 勃 海 海 溢』 라는 구절(句節)을 보자. 육지(陸地)에서, 국지적(局地的)으로 큰 홍수(洪水)가 났다고 해서, 바다(海)에 해일(海溢)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건 결코 자연(自然)의 섭리(攝理)는 아니라고 본다. 또 중요(重要)한 것은, 가을(秋) 8월 다음에, 여름(夏)인 6월이 오지 않는다.
➀ 분명(分明)하게 기록(記錄)하기를, 가을(秋) 8월(月) 기록 다음엔 9 월(月)이나 와야 함에도, 6 월(月)이라고 한 것은 오류(誤謬)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6 월(月)”이 아니라 “6 주(州)”에 큰 홍수(洪水)가 나서 발해(渤海)가 범람(汎濫)했다는 것이 옳은 것이다. 곧 발해(渤海)와 가까운, 발해(勃海)를 끼고 있는 주변(周邊)의 6 개주(州)에서 큰 홍수(洪水)가 났으며, 이로 인해 발해(勃海)의 물이 넘쳤다는 뜻이다.
➁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발해(渤海)는, 하북성(河北省) 남쪽의 바다를 말한다고 하는데, 그 주위의 육지(陸地)에서 홍수(洪水)가 났다고 발해(勃海)가 어떻게 범람하겠는가? 이런 자연현상(自然現象)은 일어날 수 없다.
➂ 이 말의 뜻은, 『6 주(州)에서 홍수(洪水)가 나는 바람에, 내해(內海)인 “발해(渤海)”가 범람(汎濫)하였다.』 는 이야기다. 곧 『발해(渤海) 주변의 6 개 주(州)에서 홍수(洪水)가 나는 바람에, “발해(渤海)의 물이 넘쳐흘렀다.”는 것으로 이해(理解)되어야 정답(正答)이랄 수 있다.
➃ “발해(渤海)”가 『흑해(黑海)가 됐든, 카스피 해(海), 자이산 호(湖), 또는 포창해(蒲昌海)라든가, 또는 일천(一千)여리(餘里)에 이른다던 하서회랑(河西回廊) 북방(北方)의 옛 호(湖)였든 간에, 그 주변(周邊)에 있었던 ‘여섯 개 주(州)’에서 큰 홍수(洪水)가 나, 큰물들이 발해(渤海)로 흘러드니, 발해(渤海)가 넘쳤다 곧 범람(汎濫)했다』 는 이야기가 인간사(人間事)이지 않겠는가!
【원문(原文)에서 해일(海溢)이라고 하니, 혹시(或是)나 발해(勃海)바다【하북성(河北省) 남쪽바다】가 넘쳤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절(謝絶)한다. 왜냐하면 홍수(洪水)가 났다고 해서 바다(海)에서 해일(海溢)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해일(海溢)이란 지진(地震) 또는 화산(火山)폭발(爆發), 거대(巨大)태풍(颱風)으로 인한 해상(海上)에서, 큰 물결이 갑자기 일어나 육지로 넘어오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기존(旣存)의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하려는 자(者)들이 만들어 낸 “조작(造作)의 역사(歷史) 이야기”일 뿐이다. 역사(歷史) 또는 사회현상(社會現象)이나, 그 모든 인간사(人間事)에서, 『무엇이 진실(眞實)이고, 무엇인지 거짓인지를 분별(分別)하지 못하는 사회(社會)는, 온갖 비리(非理)의 온상(溫床)이 되고, 온갖 비리(非理)가 난무(亂舞)할 수밖에 없다.』 는 것이 문제(問題)다.
○ 지금(只今) 이 시각(時刻),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현실(現實)을 보면, 백번 이해(理解)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온갖 비리(非理)의 대표적(代表的)인 백화점(百貨店)이다.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해명(解明)이라도 듣고 싶은 심정(心情)이다.
2014년 11월 20일 <글쓴이 : 문 무(文 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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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맑은영혼 작성시간 14.11.21 길의 폭은 수레 열 대가 다닐 만한데, 매 여름철에 요수(遼水)가 들에 범람하면 길 가는 사람들이 그 버드나무가 있는 데를 보고 의지하여 길을 잃지 않았다. 그 나머지 큰길도 모두 그러하였다.(연원직지 제1권 출강록 임진년(1832, 순조 32) 11월28>
즉 요수가 범람하거나 너른 들에 물이 넓게 퍼저 있는곳 바로 그것이 바다(발해, 북해)입니다.
‘요해는 요수의 상류를 말한다.(遼海卽遼河上源也)’ 는 성경강역고의 내용도 마찬가지죠....요수의 상류에 요해가 있으면 이는 내륙호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강을 끼고 있는 (양자강이 동정호와 포양호를 낀 것과 같은)그런 곳이죠... -
작성자맑은영혼 작성시간 14.11.21 또 하나 유의 해야 할 것은 ....큰 비가 내려 범람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그 계절이 주로 6, 7, 8월로 여름철이자 장마철입니다. 즉 장마가 발생하는 곳임도 빼 놓을수 없는 fact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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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맑은영혼 작성시간 14.11.21 이와 같은 요동 들판+바다(요해)는 비가오지 않는 겨울철에 물이 말라 땅(뻘흙)이 들어나는데 이것이 더 마르면 엄청난 먼지를 일으킴니다. 그리고 그 흙은 매우 부드러운 석탄 앙금으로 그 지방이나 강의 상류에 수 많은 노천 탄이 있었음을 짐작할수 있읍니다. 유주의 땅은 검다 했으니 이런 연유 입니다.
유연(幽燕) 지방은 모래 개천의 불모지이므로 토지의 소출이 없는데, 황경(皇京)은 사방의 재물이 모두 모여드는 도회이므로, 이에 의지하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승정원일기 고종9년 1872 4 4> -
작성자맑은영혼 작성시간 14.11.21 대개 산해관 안팎이 다 너른 들이요, 검은 흙이라. 여기에 이르러 지기(地氣)가 명랑(明朗)하여 갑자기 별계(別界)를 이루었으니, 먼 산이 푸른빛을 띠어 출몰(出沒)하여 고움을 드리우며, 일대 난하 물이 둘러 반월형(半月形)이 되었는지라<무오연행록 6권 1799 2 15>
바람이 불면 길 가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북경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의 ‘치진(緇塵 세상 풍진 속에 분주하여 의복이 더럽혀짐)’이란 것이 곧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원직지 유관별록 천지산천>
많이 나온 이야기라 다 아시리라 생각 됩니다만.....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11.22 옛 선인들이 남기신 보배같은 기록들을 잘 살펴야겠지요. 조선사의 중요한 몇 가지 지형지물과 특이지형들만이라도 확실하게 찾는 다면 아주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됩니다. 우선 발해의 동쪽지방이 조선왕조의 터전이요, 백두산 남쪽이 조선의 터잔이요, 요수=요하의 동쪽(한 때 요서지방도 경략했음)이 조선의 터전이요, 또 운중지방의 동쪽과 동북지방이 유주지방이라는 몇 가지는 이미 밝혀졌다고 봅니다. 조선사의 세세한 줄거리는 그 틀안에 있기 때문에 크게 논할 필요성이 적다고 봅니다. 추후의 일이기 때문이죠. 성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