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란(契丹)=요(遼)와 고구려(高句驪)의 영토는? (1)
○ 기존(旣存)의 역사통설(歷史通說)【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역사(歷史)를 말하며, 이는 조선사(朝鮮史)뿐만 아니라, 세계사(世界史), 모두가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에서 이해(理解)하기 어렵고, 난해(難解)한 두 왕조(王朝)가 있는데, 바로 『요(遼)나라와 금(金)나라』 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는, 『‘발해(渤海)’는, ‘요(遼)’나라에 의해 멸망(滅亡)당했으며, 또 ‘금(金)’나라는 ‘요(遼)’나라를 멸망(滅亡)시켰다고 하며, ‘금(金)’나라는 원(元)나라에 의해 멸망(滅亡)당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실제(實際) “요(遼)”나라와 “금(金)”나라에 대해서는, 「이들의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의 후손(後孫)이나 근거지(根據地)는 오늘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는 점이다.
그저 말로만 전해지고 있을 정도(程度)인데, 이것 역시(亦是) 사가(史家)들에 의해 기록(記錄)된 것일 뿐이다. 문제(問題)는 이러한 사가(史家)들의 기록(記錄)은, 20 세기(世紀) 초(初), 혼란스러운 시기(時期)에, 목적(目的)을 가진 자(者)들에 의해, 대부분(大部分) 재(再)편찬(編纂)되었다는 점이다. 이것과 조선사(朝鮮史)의 조작(造作)과는 밀접(密接)한 관계(關係)에 있다는 점이다.
○ “요(遼)”는 ‘글란(契丹)’이며, ‘거란’이라고도 한다. 문제(問題)는 이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종족(種族) 또는 어떤 부족(部族)이며, 어떤 인종(人種)인가? 에 대해 누구도 말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하여 이들의 후손(後孫)들은 과연(果然) 누구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 역시(亦是) 누구도 말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이런 해괴(駭怪)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를 주장(主張)하는 입장(立場)에서, 이들 정체(正體)에 대한 것들을 논의(論議)해 보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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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회요(唐會要) 글란(契丹) / 契丹契丹居潢水之南.黃龍之北.鮮卑之故地.君長姓大賀氏.勝兵四萬三千人.分為八部.餘風俗與突厥同. : 글란(契丹)은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에서 산다. 선비(鮮卑)의 옛 땅이다. 군장(君長)의 성(姓)은 대하(大賀)씨이다. 뛰어난 병사가 4만 3천명이 있으며, 8부로 나누어져 있다. 많은 풍속(風俗)이 돌궐(突闕)과 같다.
➠ 위의 원전(原典)인 당회요(唐會要)에서는 : 돌궐(突闕)의 풍속(風俗)과 많은 부분(部分)이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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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전(通典) 글란(契丹) / 契丹之先與庫莫奚異種而同類,并為慕容氏所破,俱竄於松漠之閒.其俗頗與靺鞨同.中略.其後為突厥所逼,又以萬家寄於高麗. :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는 고막해(庫莫奚)의 다른 종류이나 같은 무리인데, 함께 모용(慕容)씨에게 깨어진바, 함께 송막(松漠)의 사이로 숨었다. 그 풍속(風俗)은 약간 말갈(靺鞨)과 같다. (중략). 그 뒤, 돌궐(突厥)이 핍박(逼迫)하자, 그 중 『만(萬)여가(餘家)』 가 고려(高句驪)에 위탁(寄)하였다.
➠ 위 원전(原典) 통전(通典)에서는, 글란(契丹)의 풍속(風俗)은 일부분(一部分)이 말갈(靺鞨)과 같다고 하였다. 「송막(松漠)사이로 숨어들어 종족(種族)을 보존(保存)했다」는 이야기는 「선비(鮮卑)와 오환(烏桓)이 선비산(鮮卑山)과 오환산(烏桓山)으로 스며들어 종족(種族)을 보존(保存)했다」는 이야기와 너무도 똑같다. 우연(偶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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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오대사(舊五代史) / 契丹者,古匈奴之種也.代居遼澤之中,潢水南岸,南距榆關一千一百里,榆關南距幽州七百里,本鮮卑之舊地也. : 글란(契丹), 옛 흉노(匈奴)의 핏줄이다. 대대로 요 택(遼澤)가운데에서 살았는데, 황수(潢水)의 남안(南岸)이다. 남쪽으로 유관(楡關)까지 일천(一千)일백(一百)리 떨어져 있으며, 유관(楡關)에서 남쪽으로 유주(幽州)는 칠백(七百)라 떨어져 있다. 본시 선비(鮮卑)의 옛 땅이다. 中略. 天祐末,阿保機乃自稱皇帝,署中國官號.其俗舊隨畜牧,素無 邑屋,得燕人所教,乃為城郭宮室之制于漠北,距幽州三千里,名其邑曰西樓邑,屋門皆東向,如車帳之法. : 천우(天祐) 말에, 아보기(阿保機)가 스스로 황제(皇帝)라 칭하고, 중국의 관호(官號)를 썼다. 그들의 풍속(風俗)은 오랫동안 가축을 들에서 기르며 따랐는데, 마을이나 주거(住居)도 없었는데, 연(燕)인들로부터 배워 득하여, 이에 막북(漠北)에 성곽(城郭) 궁실(宮室)의 제도를 행하였는데, 유주(幽州)는 3천리 떨어져 있었으며, 마을은 서루읍(西樓邑)이라 명하고, 집의 문은 모두 동향(東向)으로 하였는데, 거장(車帳)의 법을 따른 것이다.(같다).
➠ 위 원전(原典)인 구오대사(舊五代史)에서는 : 글란(契丹)은 흉노(匈奴)의 한 부류(部類)라고 하였다.
㉮ 글란(契丹)이 대대(代代)로 살던 땅에서, 「남쪽으로 일천(一千)일백(一百)리에 유관(楡關)이 있고, 유관(楡關)의 남쪽 700 리에 유주(幽州)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유관(楡關)은 산해관(山海關)이라고 하는데,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에 있을 수 없으며, 유주(幽州) 또한 현(現) 하북성(河北省)에 없었다는 것을 고증(考證)하는 내용(內容)이다.
➠ 유관(楡關)이, 현(現)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이라고 한다면, 산해관(山海關)은 바다 가에 있으므로, 그 남쪽 700 리에 유주(幽州)라는 땅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곳은 산동성(山東省) 앞 바다 한 가운데(海中)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원전(原典)을 조그만 연구(硏究)해도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산물(産物)이란 알 수 있음에도,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학계(學界)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 목말라, 더욱 발전(發展)시키지 못해 안달 하고 있다. 역사(歷史)는 ‘무리들’의 정신(혼)이라고 본다면,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친일이 바탕이며, 위정자(爲政者)들은 친일(親日)의 혼(魂)으로 무장(武裝)된 자(者)들”」이라고 볼 수 있다.
㉯ 당시(當時)의 글란(契丹)은 “막북(漠北)”에 있었으며, 유주(幽州)까지 3천리(千里) 떨어져 있었다.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에서 보면, 유주(幽州)는 중원(中原) 서북방(西北方)에 있어야 하며, 이곳은 “최소한(最小限)” 항애산맥(杭愛山脈)과 알타이산맥(山脈) 서(西)쪽과 서북방(西北方)이다. 【‘환국고려’님께서는 신강성(新疆省) 서쪽 일부와 카자흐스탄 발하슈 호(湖) 인근(隣近)까지라고 하셨는데, 그곳에 유적(遺跡)들이 지금도 존재(存在)하고 있다고 합니다.】
➠ 그렇다면 이러한 곳에서 「북방(北方) 또는 서북방(西北方) 3천리」 라면, 「러시아의 ‘오브 강’과 ‘우랄산맥(山脈)’과 ‘모스크바’ 지방이 된다.」 역사통설(歷史通說)은 강대국(强大國) 위주(爲主)로, 그들의 입맛에 따라 재편(再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자각(自覺)하지 않으면,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은 찾을 수 없다.
이러한 곳으로부터 흉노(匈奴)의 핍박(逼迫)으로 남천(南遷)하여,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으로 들어왔으나, 그것도 잠시, 서(西)쪽에 있던 돌궐(突闕)로부터 격파(擊破)되어, 일부(一部)는 송막(松漠)사이로 산재(散在)하여 보존(保存)하고, 일부(一部) 만여(萬餘)가(家)는, 당시(當時)에, 현(現) 신강성(新疆省)지방의 서(西)쪽 일부(一部)까지 세력(勢力)을 뻗쳤던, 고구려(高句驪)영토(領土)로 들어와 의탁(依託)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의탁(依託)한 글란(契丹)족들은, 대부분(大部分) 고구려(高句驪)화 되었으나, 고구려(高句驪)가 당(唐)에 망(亡)하자, 일부는 대조영(大祚榮)과 함께 “발해(渤海)”를 건국(建國)하게 되며, 일부(一部)세력(勢力)은, 송막(松漠)사이로 숨어들었던, 글란(契丹)무리와 합세(合勢)하게 되는 것이 역사(歷史)의 줄거리이다.
㉰ 글란(契丹)은 「옛 연(燕)나라와 인접(隣接)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위의 본문(本文)글에서, 「글란(契丹)은 집을 지을 지도 모르고, 그저 가축(家畜)을 따라 수초(水草)을 쫓아 이곳저곳으로 이동(移動)하며 살던 이목(移牧)민이었으나, 연(燕)나라 사람들로부터 집을 짓고, 성곽(城郭)과 궁실(宮室)의 제도(制度)를 배웠다」고 하였으니, 연(燕)나라와는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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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오대사(新五代史) 사이(四夷)부록(附錄) - 2 / 《雲契丹之先,常役回紇,後背之走黑車子,始學作車帳. :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는 상시 회흘(回紇)의 부역을 하였다. 등 뒤의 ‘흑 거 자(黑車子)’로 도망을 쳐, 처음으로 거장(車帳)을 만드는 것을 배웠다. 又北,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河,夏秋冰厚二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 : 또 북쪽의, 우제돌궐(牛蹄突闕)은, 사람의 신체가 소다리와 같은데, 그 땅은 더욱 추워, ➠호하(瓠河)의 물은,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이 얼어 두께가 2척(尺)이나 되는데, 봄과 겨울에는 더욱 철저하게 얼어, 상시 얼음을 그릇에 넣어 불에 녹여, 물을 얻어 마신다. 東北,至襪劫子,其人髦首,披布為衣,不鞍而騎,大弓長箭,尤善射,遇人輒殺而生食其肉,契丹等國皆畏之.契丹五騎遇一襪劫子,則皆散走. : 》
➠ 위의 글에 대단히 중요한 구절(句節)이 있다.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들이 살던 곳을 찾을 수 있는 중요(重要)한 단서(端緖)가 된다. 이곳은 고구려(高句驪)의 영토(領土)였으나, 당(唐)에 뺏기고, 부흥군【復興軍 : 고구려(高句驪)군과 말갈(靺鞨)병으로 구성(構成)되었다.】과 당군(唐軍)과 치열(熾烈)한 접전(接戰)을 벌인 곳이다. 이곳의 남쪽지방에 글란(契丹)이 대대(代代)로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곳이 어딘가, 아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를 보자.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산서(山西) 外夷附考 / 瓠<盧瓜>河,在漠外.胡嶠曰: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有寒水,曰瓠<盧瓜>河,夏秋冰厚三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雲. : 호로(과)하(瓠蘆(瓜)河) : 막외(漠外 : 사막의 밖)에 있다. 호교(胡嶠)가 이르기를 : 흑거자(黑車子)의 북(北)쪽에, 우제돌궐(牛蹄突闕)이 있는데, 사람의 신체가 소다리와 같은데, 그 땅은 매우 추운데 물이 있어, 호로(과)하(瓠蘆(瓜)河)라 하는데,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이 두께가 3척(尺)이나 되고, 봄과 겨울에는 더욱 철저하게 얼어, 상시 얼음을 그릇에 넣어 불에 녹여, 물을 얻어 마신다. 》 ※ 산서(山西)란 말은, 산(山)의 서(西)쪽 지대를 말한다.
➀ 글란(契丹)들은, 상시(常時) “회흘(回紇)”족에게 “부역(役=負役)을 당했다.”는 말에 따르면, 회흘(回紇)을 중심(中心)으로, 근접(近接)한 “서(西)쪽 또는 북(北)쪽”에 있었을 것이며, 흑거 자(黑車子)와 우제돌궐(牛蹄突闕)의 추운 기후(氣候)로 보면, 『글란(契丹)』 은 회흘(回紇)로부터 『북쪽과 서북(西北)쪽』 방향(方向)의 근접(近接)한 지방에 있어야, 복속(服屬)되어, 부역(負役)을 당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➁ 「호로하(瓠蘆河)」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산서(山西)편에 기술(記述)되어 있으며, 호로하(瓠蘆河)편에서는 『막외(漠外)지방』 에 있다고 하였다. 그 서쪽에 “해(奚)”가 있었다는 기록(記錄)에 따르면 이들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는 신강성(新疆省) 서북쪽 『러시아 땅의 오브강과 우랄산맥과 모스크바」사이의 땅이 된다.
➂ 이곳은 서기 668년 이전(以前)엔 고구려(高句驪)땅이었으나, 당(唐)에 의해 고구려(高句驪)가 망(亡)한고 난 뒤에는, “당(唐)”의 영토(領土)가 되었다가, 다시 “글란(契丹)”의 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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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2 / 자치통감(資治通鑑)唐紀18 / 高宗 咸亨四年 / 閏五月,燕山道總管,右領軍大將軍李謹行大破高麗叛者於瓠蘆河之西,俘獲數千人,餘衆皆奔新羅. : 당(唐) 고종(高宗) 함형(鹹亨) 4년, 윤 5월에, 연산도(燕山道)총관(總管)이던, 우령군(右領軍) 대장군(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이 고구려(高句驪)의 반군(叛軍)【부흥군(復興軍)이다.】을 호로하(瓠蘆河) 서(西)쪽에서 크게 깨뜨리고, 사로잡은 포로가 수천(數千)인이었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신라(新羅)로 달아났다.【註釋 : 胡嶠曰: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蘆河,夏秋冰厚二尺,秋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余按唐書劉仁軌傳,此瓠蘆河當在高麗南界,新羅七重城之北. : 주석(註釋) : 호교(胡嶠)가 이르기를 : 흑거자(黑車子)의 북(北)쪽에, 우제돌궐(牛蹄突闕)이 있는데, 사람의 신체가 소다리와 같은데, 그 땅은 더욱 추워, 호로하《瓠蘆河 : 호로하(瓠蘆河)또는 호하(瓠河)를 말하는 것으로, 고구려(高句驪) 망(亡) 후, 고구려(高句驪) 부흥군〔(復興軍 : 고구려(高句驪)군과 말갈(靺鞨)병이다)〕과 당(唐)군과의 치열(熾烈)한 전투(戰鬪)가 벌어졌던 곳이다.》란 물이 있는데,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이 얼어 두께가 2척(尺)이나 되는데, 가을과 겨울에는 더욱 철저하게 얼어, 상시 얼음을 그릇에 넣어 불에 녹여 물을 만들어 마신다. 당서(唐書)의 유인궤(劉仁軌)전을 상고해보면, 이 호로하(瓠蘆河)는 고구려(高句驪)의 남쪽지경, 신라(新羅)의 칠중성(七重城) 북쪽에 있다.】 時謹行妻劉氏留伐奴城,高麗引靺鞨攻之,劉氏擐甲帥衆守城,久之,虜退.上嘉其功,封燕國夫人.謹行,靺鞨人突地稽之子也,武力絕人,為衆夷所憚. : 이때, 이근행(李謹行)의 처(妻) 유(劉)씨는 벌노성(伐奴城)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고구려(高句驪)군이 말갈(靺鞨)병을 이끌고 공격하자, 유(劉)씨는 갑옷을 입고 무리들을 인솔하여 성을 지키자, 한참 후에, 오랑캐【고구려(高句驪)군과 말갈(靺鞨)병을 일컫는다.】가 퇴각하였다. 상(上 : 고종)이 기뻐하며 그 공으로, 이근행(李謹行)의 처(妻) 유(劉)씨에게 연국(燕國)부인(夫人)에 봉하였다. 이근행(李謹行)은 말갈(靺鞨)사람 돌지계(突地稽)의 아들로, 무력(武力)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오랑캐무리들이 그를 꺼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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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자치통감(資治通鑑) 기록을 보면, 당시(當時) 고구려(高句驪) 영토(領土)를 알 수 있는, 내용(內容)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상상(想像)을 벗어나는 지방(地方)이다.
㉯ 우제돌궐(牛蹄突闕)은 “현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타타르공화국의 북방지대에 있었다.”고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우제돌궐(牛蹄突闕)이 살고 있었던 이곳에, “호로하(瓠蘆河)”가 있었다는 이야기며, 이곳은 고구려(高句驪)의 영토(領土)이며, 따라서 고구려(高句驪)의 부흥군(復興軍)들이 말갈(靺鞨)을 앞세워 당군(唐軍)을 공격(攻擊)한 것이 아니겠는가!
㉰ 더하여 ‘호로하(瓠蘆河)’의 서(西)쪽 지방에서, 우령군(右領軍)대장군(大將軍)이자, 연산도(燕山道)총관(總管)이었던 이근행(李謹行)이 지휘(指揮)한 당군(唐軍)과 고구려(高句驪) 군(軍)과 말갈(靺鞨)이 함께 이근행(李謹行)을 공격(攻擊)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말이다. 이근행(李謹行)에게 패전(敗戰)한 고구려(高句驪) 부흥군(復興軍)인 <고구려군(高句驪軍) + 말갈군(靺鞨軍)>의 병사(兵士)들 수천(數千)이, 포로(捕虜)로 사로잡히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신라(新羅)로 달아났다는 이야기다.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의 두께가 2척이나 되는 동토(凍土)의 땅! 이곳의 남(南)쪽 땅은 “신라(新羅)의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조선사(朝鮮史) 영역(領域)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 그렇다면 이때 당(唐)나라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당연(當然)히 그 남(南)쪽 지방이다.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당(唐)”나라는 중원(中原)대륙(大陸) 땅에 없었다.」 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알기 위해서는 발상(發想)전환(轉換)이 필요(必要)하며, 이는 원전(原典)을 보면서 더욱 필요(必要)한 일이다.
㉲ 또 중요한 것은, 고구려(高句驪)의 영토(領土)다. 「흑거자(黑車子)니 우제돌궐(牛蹄突闕)」이라고 하는 옛 나라들은 잠깐 흥성(興盛)했다가 인접(隣接)나라들로부터 예속(隸屬)된 종족(種族)들로써, 지금(只今)의 지도(地圖)로 보면, “러시아”지방 “우랄산맥(山脈)과 모스크바사이”의 북방(北方)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곳까지도 고구려(高句驪)의 세력(勢力)이 미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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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가 전개(展開)된 영역(領域)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솔직히 이게 솔깃하다. ‘동호(東胡)였다’는 “조선(朝鮮)”의 근거지(根據地)와 조선(朝鮮)에 예속(隸屬)된 많은 나라들의 정체(正體)가 무엇이며, 이들이 있었던 땅은 과연(果然) 어디까지일까?
숨을 쉬고 있는 동안, 쉬지 않고, 연구(硏究)하다보면, 무엇인가 보일 게다. 그것은 조선(朝鮮)의 진실(眞實)의 역사(歷史) 이야기일 것이다. < 2 편으로 계속(繼續)됩니다 >
2014년 12월 0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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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마포대사 작성시간 14.12.07 소 중에서 제일 큰 소가 있는데 셀라당(가우어), 반탕 등등이 있는데 일반 물소들 보다 한배 이상 큽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벽창우 같은 존재인데요. 우제 돌궐이 사는 곳에는 이 소들보다 큰 놈들이 없습니다.
이 소들을 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으로 해도 사람이 신발로 쓰지는 못 합니다. 발굽과 가죽이 분리가
되겠지만 그 전에 발굽이 사람의 발 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12.08 마포대사 제 이야기는 소가죽을 잇대어 다리를 감싸는데, 다리와 가죽사이에 털이나 옷감등을 넣으면 보온재 역할을 할 수 있으니 추위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죽신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소가죽은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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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마포대사 작성시간 14.12.10 문 무 선생님에게 안 물어봤는데요....ㅋㅋㅋ
농담입니다. 문제는 이 우제돌궐이 소발굽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흔히 소발굽과 같은 놈들을 우제목 유제류로 분류를 합니다.
우제 돌궐고 추측을 했는데 본문을 보니 정확하게 발굽제자를 썼더군요.
단순하게 소가죽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요. 발굽이 소처럼 생겼다라는 것이
포인트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 추운 곳에는 소가 없습니다. 소는 남방계 동물이고요.
버팔로 같은 놈들은 좀 다른 종이고요. 가만 보면 우리 벽창우가 소중에서 제일 큰
놈일 것 같네요...^^! 우각돌궐이라면 상관이 없는데 우제돌궐이기 때문에 맑은영혼님도
다리를 파내고 사용했을 것이다라고 추측을 하신 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마포대사 작성시간 14.12.10 마포대사 만약에 엘크(마록, 누렁이)보다 더 큰놈이 살기는 삽니다.
말코손바닥사슴(와피티)라고 하는 놈인데 그놈이라면 어쩌면
가능도 하겠습니다. 어깨 높이가 2m넘는 놈들이니 발굽이 사람 발 정도는
될 듯 합니다. 발굽도 소발굽 처럼 생겼으니 색만 다르지 영락 없는 소발굽이죠.
조금 더 찾아봐야 할 듯 합니다. 이놈들은 전형적인 북방종이라 남쪽에는 없는 놈들입니다. -
작성자맑은영혼 작성시간 14.12.10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우제돌궐인들의 다리가 소와 같아 그렇게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이 생태학적으로 진짜 소의 다리와 같이 털도 많이 나고 발도 소의 발굽처럼 생겼다라는 것인데 이것은 제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지 추정하건데 그들도 맨발로 다닐수 없으니 신발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들이 키우던 가축(소, 순록...)의 일부를 잘라 적절한 가공을 거처 장화와 같이 길게 만들어 신고 다녔을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위에 소의 다리속을 파내어 신었을 것이란 이야기는 즉흥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