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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글란(契丹)=요(遼)와 고구려(高句驪)의 영토(領土)는? (2)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4.12.07|조회수427 목록 댓글 7

 

                  글란(契丹)=() 고구려(高句驪) 영토(領土)? (2)

 

(5) 자치통감(資治通鑑) / 唐紀 21 / 則天順聖皇后.萬歲通天元年 : ,五月,壬子,營州契丹松漠都督李盡忠,歸誠州刺史孫萬榮舉兵反,攻陷營州. : 당기 21 /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萬歲)통천(通天) 원년(元年) : 여름, 5, 임자(壬子), 영주(營州)의 글란도독(契丹都督) 이진충(李盡忠)과 귀성주(歸誠州) 자사(刺史) 손만영(孫萬榮)이 군사를 일으켜 반하여, 영주(營州)를 공격(攻擊) 함락(陷落)하였다. 註釋 : 開元十道志曰舜築柳城,即虞舜已前已有柳城之地,因有營州之稱. : 주석(註釋) : 개원(開元)십도지(十道志)에서 이르기를 : ()임금이 유성을 쌓았는데, 곧 우순(虞舜)임금 이전에 이미 유성(柳城)의 땅에 있어, 이로 인해 영주(營州)라 불렀다. 郡國志云當營室分,故曰營州.後漢末,遼西烏丸蹋頓所居: 군국지(郡國志)에서 이르기를 : 지금의 영주(營州)는 나눈 것이며, 고로 영주(營州)라 한다. 후한(後漢) , 요서(遼西)오환(烏丸) 답돈(蹋頓)이 이것에서 살았다. 後魏於平州界置遼西郡,周平齊,猶為高寶寧所據,隋討平寶寧,始置營州松漠都督府及歸誠州,太宗以內屬契丹部落置: 후위(後魏)가 평주(平州)지경에 요서군(遼西郡)을 두었고, ()가 제()를 평정했는데, 오히려 고보녕(高寶寧)이 의거한 바, ()나라가 고보녕(高寶寧)을 토평(討平)하고, 처음으로 영주(營州)를 두었다. 송막(松漠)도독부(都督府)와 귀성주(歸誠州), 태종(太宗)이 내속(內屬)한 글란(契丹)부락(部落)에 두었다. ,七月,辛亥,以春官尚書梁王武三思為榆關道安撫大使,姚鑄副之,以備契丹. : 가을, 7, 신해(辛亥), 춘관상서(春官尙書) 양왕(梁王) 무삼사(武三思)가 유관도안무대사(楡關道安撫大使)가 되고, 요주(姚躊)가 부()안무대사가 되었는데, 글란(契丹)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다.註釋 : 榆關在勝州界,與突厥接,非所以備契丹也.營州城西四百八十里,有榆關守捉城,所謂臨渝之險也.榆當作渝,史於此以後多以渝作榆. : 주석(註釋) : 유관(楡關)은 승주(勝州)지경에 있는데, 돌궐(突闕)과 접해 있었다. 이곳은 있는 것은 글란(契丹)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영주성(營州城) 서쪽 480 리에, 유관(楡關)수착성(守捉城)이 있는데, 이른바 림유(臨渝)의 험한 곳이다(所謂臨渝之險也). ‘()는 유()’인데, 많은 기록에서는 이것을 ()를 유()’로 하였다.中略.

 

   ㉮ 영주(營州)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설명(說明)하였는데, 대륙(大陸)의 서(西)쪽 지방(地方)인 하서회랑(河西回廊)과 신강성(新疆省)의 소륵하(疏勒河) 남쪽까지 뻗쳐있는 기련산(祁連山)주위에 있었던 기련주(祁連州), 영주(營州)의 관할구역(管轄區域)이었다.는 것을 알면, “영주(營州)”라는 지명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 영주(營州)는 요서(遼西)에 속하며, 이곳 주위에서 당()을 약탈(掠奪)하던 글란(契丹)들을 무마(撫摩)하고, 때론 토벌(討伐)하고를 반복(反復)했는데, 이들이 약()했을 때, 글란(契丹)들이 당() 태종(太宗)에게 내속(內屬)하자, 이곳에 송막(松漠)도독부(都督府)와 귀성주(歸誠州)를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當時)의 글란(契丹) 종족(種族)들은, 살고 있었던 곳으로부터, 계속 동남(東南)쪽으로 이동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원인(原因)은 흉노(匈奴)와 돌궐(突闕)에게 격파(擊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들을, () 하북성(河北省) 북쪽과 동북(東北)지방에 있었다고 한다면, 조선(朝鮮)은 그 남()쪽과 동남(東南)쪽 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理由), 사가(史家)들이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을 한 것이다. 이러한 연유(緣由)를 알아야 원전(原典)을 보면서, 해설(解說)할 수 있는 것이다.

   ㉰營州城西四百八十里,有榆關守捉城,所謂臨渝之險也. : 영주성(營州城) 서쪽 480 리에, 유관(楡關)수착성(守捉城)이 있는데, 이른바 림유(臨渝)의 험한 곳이다.

       ■ <림유산(臨楡山)=림유산(臨渝山)> : ()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 주변(周邊)에 이러한 산()이 있는가?

       ■ <림유하(臨楡河)=림유하(臨楡河)> : ()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 주변(周邊)에 이러한 강()이 있는가?

       ➠ 원전(原典)에서 말하기를 : <림유산(臨楡山)=림유산(臨渝山)>, 높이()가 수천(數千)()으로 거의 2,000m에 가깝고, 산세(山勢)가 아주 험()한 산()이라고 하였으며, 이 산()의 까마득한 단애(斷崖)아래를 흐르는 것이, 바로 <림유하(臨楡河)=림유하(臨渝河)>라고 하였다.

      〔또한 이곳에, 글란(契丹)의 후대(後代), 아보기(阿保機)가 요()를 세웠고, ()나라의 남경도(南京道) 지방(地方)이 바로 위에서 설명(說明)한 림유산(臨楡山)과 림유하(臨楡河)가 있는 곳이다. 또한 아보기(阿保機)의 처()는 회흘(回紇)종족(種族)이란 점도 알자.  

    지형지리(地形地理)적으로, 지명(地名)이나, 하천(河川)이름이나, ()의 이름이나, 그 무엇으로 보아도,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발해(渤海) 바닷가에 있다는 산해관(山海關), 결코 아니라는 증거(證據).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작금(昨今)산해관(山海關)이 유관(楡關)”이라고 하는 족속(族屬)들은 반도(半島)<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뿐>이다. 이 자()들은, 친일(親日)사관(史觀)에 정신(情神)이 혼미(昏迷)해져, 오락가락 하는 자()들일 것이다. 본인(本人), 민족(民族), 조선(朝鮮)의 혼()을 난도(亂刀)질한 이 자()들에게 묻고 싶다.

    ➠땅은 서서히 가라앉고, 온 국토(國土) 여기저기서, 화산(火山)은 분화(噴火)하고, 단층(斷層)과 단층(斷層)이 대()충돌(衝突)하는 이변(異變)이 생긴다면, 열도(列島)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지도 모르는, 열도(列島) 아이들을 위해서, 반도(半島) 땅을, 열도(列島) 아이들에게 넘겨주려 하는 것이냐? 그것이 너희들의 목표(目標)이냐?하고 말이다.

    ㉱ 글란(契丹)들은, “이진충(李盡忠)”이 추장(酋長)이 된 후, 점점 강성(强盛)해져, ()을 위협(威脅)하고는, 영주(營州)까지 함락(陷落)시키자,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지극(至極)한 총애(寵愛)를 받던, “양왕(梁王) 무삼사(武三思)”유관도안무대사(楡關道安撫大使)”로 보내면서, 수많은 군대(軍隊)를 출정(出征)시켰으나, 이들은 모두 전몰(戰歿)했다고 전한다.

       ➠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알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우선(優先)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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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오대사(新五代史) 사이(四夷)부록(附錄) -1 서두(序頭) / 契丹自後魏以來,名見中國.或曰與庫莫奚同類而異種. : 글란(契丹)은 후위(後魏)이래에, 중국(中國)에 이름을 보였다. 혹은 고막해(庫莫奚)와 같은 무리이나 다른 종()이다. 其居曰羅個沒裡.沒裡者,河也.是謂黃水之南,黃龍之北,得鮮卑之故地,故又以為鮮卑之遺種. : 그들이 사는 곳은 효라개몰리(梟羅個沒裡)’이다. ‘몰리(沒裡)’, “()이다.” 황수(黃水)의 남(), 황룡(黃龍)의 북()쪽의 선비(鮮卑)의 옛 땅을 얻었는데, 본래 또 선비(鮮卑)의 유종(遺種)이다. 當唐之世,其地北接室韋,東鄰高麗,西界奚國,而南至營州. : ()시대에, 그 땅은 북쪽으로 실위(室韋)와 접()하고, 동쪽은 고려(高麗)와 이웃하고(), 서쪽은 해국(奚國)과 경계(境界)하고, 남쪽은 영주(營州)에 이르렀다.

 

   ㉮ 글란(契丹)이란 종족(種族), <후위(後魏)=북위(北魏)=원위(元魏)>때 처음으로 기록(記錄)된 자()들인데, 북위서(北魏書) “글란(契丹)”편을 보면, 당시(當時) 글란(契丹)들의 거점지(據點地)를 알 수 있는 의미심장(意味深長)한 기록(記錄)이 있다.

 

      《글란(契丹) : 太和三年,高句麗竊與蠕蠕謀,欲取地豆于以分之.契丹懼其侵軼,其莫弗賀勿于率其部落車三千乘,眾萬餘口,驅徙雜畜,求入內附,止於白狼水東. : 글란(契丹) : 태화(太和) 3, 고구려(高句驪)와 연연(蠕蠕)이 몰래 모의(謀議)하여, 지두간(地豆干)의 땅을 취()해 나누려고 하였다. 글란(契丹)은 고구려(高句驪)와 연연(蠕蠕)이 쳐들어와 범할까봐 두려워하여, 그 추장(酋長) 막불하물(莫弗賀勿)이 인솔하여 그 부락(部落)의 수레 3천승과 무리 만여(萬餘)가구와 여러 말과 소외 여러 가축과 함께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옮기고, 내부하여 들어왔는데, 백랑수 동쪽에서 멈췄다. 고 하였다.

 

    ㉮ 위 글을 쉽게 이야기하면 : 북위(北魏) 태화(太和) 3서력(西曆)479; 고구려(高句驪) 장수왕(長壽王)때이다, 고구려(高句驪)와 연연(蠕蠕)이 은밀(隱密)히 모의(謀議), 지두간(地豆干)이란 나라를 뺏어, 그 땅을 함께 나누어 갖자고 하였다. 이때 주변에 있던 글란(契丹)들은, 너무 놀라고 두려워, 북위(北魏)에게 구원(救援)을 요청(要請)하면서, 수레 3천승과 일만(一萬)여 가구(家口)와 함께 기르던 여러 가지 가축과 함께, 말에 채찍질을 가하면서 도주하였는데, 백랑수(白狼水) ()쪽에 이르러 멈췄다.는 이야기다.

 

    ㉯ 고구려(高句驪)와 연연(蠕蠕), 왕실(王室)간에 혼맥(婚脈)으로 이어져있었다. , 여기서 고구려(高句驪)와 연연(蠕蠕)이 빼앗으려 했다는 지두간(地豆干)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가가 핵심(核心)이다. 우선(優先), 북위서(北魏書)에 의하면, 이들의 땅에서는, ()와 양()과 명마(名馬)가 산출(産出)되며, 의복(衣服)도 모두 가죽으로 만들어 입고, 오곡(五穀)은 없으며, 유일한 것은 가축(家畜)의 고기()와 유락()이라고 하였다.

 

    ㉰ 지두간국(地豆干國): 오낙후국(烏洛侯國)의 남()쪽에 있었다고 북위서(北魏書)는 말한다. 문제(問題)는 오낙후국(烏洛侯國) 나라 안에 북해(北海)가 있었다는 사실(事實)이다. 烏洛侯國,在地豆于之北,去代都四千五百餘里.中略.所謂北海也. : 오낙후국(烏洛侯國), 지두간(地豆干)의 북()쪽에 있는데, 대도(大都)로부터 4,500여리 떨어져 있다. 중략(中略). 이른바 북해(北海)이다.

 

    ㉱ 지두간(地豆干)이란 나라(), 북해(北海)가 있었다는 오낙후국(烏洛侯國)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북해(北海)는 중원(中原)대륙(大陸)의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다.는 것은 대부분(大部分)의 원전(原典)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북해(北海)”, 러시아의 최북단(最北端) “카라 해()”일 수밖에 없다.

 

    ㉲ 이때, 고구려(高句驪)와 연연(蠕蠕)이 모의(謀議)하여, 지두간(地豆干)의 땅을 빼앗으려 하자,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지두간(地豆干) 인접(隣接)지역에 글란(契丹)‘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렇지 않았다면, 글란(契丹)종족(種族)들이 어떻게 이러한 것고구려(高句驪)와 연연(蠕蠕)이 지두간(地豆干)의 땅을 빼앗으려 한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비극적(悲劇的)인 소식(消息)을 전해들은, 글란(契丹)추장(酋長), 3천여 개의 수레에 어린아이와 노인들과 부녀자(婦女子)들을 태우고, 사내()들은 말을 타고,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부리나케 도주(逃走)하면서, 선발대(先發隊) 몇 명을 북위(北魏) 조정(朝廷)으로 보내, 내부(來附)할 테니 구원(救援)해 달라 요청(要請)하고, 백랑수(白狼水) ()쪽에서 말()을 멈췄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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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한 가지, 문제(問題)를 제기(提起)한다. : 통전(通典) 글란(契丹)편을 보면 : 契丹之先與庫莫奚異種而同類,并為慕容氏所破,俱竄於松漠之閒.其俗頗與靺鞨同.中略.其後為突厥所逼,又以萬家寄於高麗. :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는 고막해(庫莫奚)의 다른 종류이나 같은 무리인데, 함께 모용(慕容)씨에게 깨어진바, 함께 송막(松漠)의 사이로 숨었다. 그 풍속(風俗)은 약간 말갈(靺鞨)과 같다. (중략). 그 뒤, 돌궐(突厥)이 핍박(逼迫)하자, 그 중 ()여가(餘家) 가 고려(高句驪)에 위탁()하였다. 고 하였는데,

 

    ➊ 북위(北魏)에 의탁(依託)한 글란(契丹): 고구려(高句驪)와 연연(蠕蠕)이 합공(合攻)하여, 자신들을 토벌(討伐)할까봐 두려워, 북위(北魏)에게 의탁(依託)한 것인데, 일만(一萬)여 가구(家口)이다. 이때는 연연(蠕蠕)이 강성(强盛)할 때인데, (西)쪽에 돌궐(突闕)이 있고, 연연(蠕蠕)의 동()쪽에 고구려(高句驪)가 있었다.서력(西曆) 479년이다.

 

    ➋ 통전(通典)에서 말하는, 고구려(高句驪)에 의탁(依託)한 글란(契丹): 글란(契丹)의 서(西)쪽에 있었던, 돌궐(突闕)이 핍박(逼迫)하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고구려(高句驪)에 자신(自身)들을 구원(救援)해달라는 요청(要請)과 함께, 의탁(依託)한 것인데, 일만(一萬)여 가구(家口)이다. 이때의 연연(蠕蠕):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신강(新疆) (西)쪽과 서북(西北)에 있던 연연(蠕蠕), 돌궐(突闕)에게 패(), ()했을 때이다. 고구려(高句驪) 양원왕(陽原王) 9/ 서력 553년이다.

 

    ➌ 이렇게 보면, 뭔가 보이지 않는가? 북위(北魏)라는 엣 봉건왕조(封建王朝)가 중원(中原) 땅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問題)인데,

 

       1) 고구려(高句驪)는 동()쪽에, 연연(蠕蠕)은 서(西)쪽에 있었는데, 글란(契丹)이 두려워 북위(北魏) 세력권(勢力圈)이 미치는 곳으로 도주(逃走)했다면, 그곳은 남()쪽이나 북()쪽이며,

그러나 북()쪽에 북위(北魏)가 있을 수 없다. 그곳은 동토(凍土)의 땅이니 말이다.

 

      2) (西)쪽의 돌궐(突闕)이 핍박(逼迫)하니, ()쪽에 있는 고구려(高句驪)로 의탁(依託)했다는 말은, 고구려(高句驪)와 돌궐(突闕)사이에 글란(契丹)이 끼어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때 연연(蠕蠕), 돌궐(突闕)에게 패(), ()했다.

 

      3) 도대체 북위(北魏)라는 왕조(王朝)는 어디에 있었는가? 존재(存在)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그 서(西)쪽이나 서남(西南)지방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가능(可能)한 것은, 북위(北魏)가 고구려(高句驪)에 복속(服屬), 탁발(拓跋)씨로, 고구려(高句驪)에 예속(隸屬)된 제후(諸侯)였다면,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에 있었을 가능성(可能性)이 있다. 이는 고구려(高句驪) 왕실(王室)과 북위(北魏)왕실(王室)사의 혼맥(婚脈)을 보면, 고구려(高句驪) 공주(公主)를 북위(北魏)의 왕비(王妃)로 보냈다는 것으로 보면, 북위(北魏)는 고구려(高句驪)의 제후(諸侯)라 할 수 있다. 탁발(拓跋)씨의 선대(先代)는 오낙후국(烏洛侯國) 출신(出身)이며, 이곳 오낙후국(烏洛侯國)에 탁발씨(拓跋氏) 선조(先祖)들이 살던 동굴(洞窟)이 있었다고 하였다. 잠시 샛길로 빠졌는데, 본론(本論)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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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다면 당시(當時), 글란(契丹)들이 살고 있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서북방(西北方)의 북해(北海) ()쪽 지대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또 그곳까지 고구려(高句驪)의 세력(勢力)이 미쳤다는 이야기다.

 

       ➠ 지도(地圖)로 본다면, 오브 강()과 우랄산맥(山脈)과 모스크바 사이의 북()쪽 지대이다. 이곳은 글란(契丹)들의 초() 거점지(據點地)라고 할 수 있다. 이후(以後) 이들은 더 남()쪽으로,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게 되는데, () 태종(太宗), 요서(遼西)지역까지 진출(進出)하였고, 이어 측천무후(則天武后)때는, 영주(營州)를 공격(攻擊), 함락(陷落)시키는 것이다.

 

      【고구려(高句驪)가 수()와 당()의 계속(繼續)된 공격(攻擊)으로, 국세(國勢)가 조금씩 기우는 것과 글란(契丹)이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의 서북(西北), ()쪽으로 진출(進出)하는 것은, ()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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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朝鮮史),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以上)으로, 왜곡되고 조작된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하며, 이것을 조선(朝鮮)의 입장(立場)에서 푸는 방법(方法),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가르쳐온, 모든 역사통설(歷史通說)에 대한, 부정(不正)으로부터 출발(出發)한다. 곧 머릿속에 기억(記憶)하고 있는, 역사통설(歷史通說)의 모든 것을 없애고, 다시 시작(始作)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方法)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쉽지, 수십(數十), 반세기(半世紀) 교화(敎化)되고, 각인(刻印)되고, 세뇌(洗腦)된 역사통설(歷史通說)을 없앤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조선(朝鮮)”하면, 먼저 반도(半島) 을 떠 올리는 것은, 모두가 공교육(公敎育)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세뇌(洗腦), 잘못된 역사교육(歷史敎育)에서 기인(起因)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大韓民國)은 태어날 때부터, 친일(親日)로부터 시작(始作)된 것이라고 해도,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아니다. 지금(只今)까지도 친일(親日)분자(分子)들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 있잖은가?

 

                                                            20141207<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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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2.09 예, 글 잘 보았습니다. 거란(글란)이 동부여의 후손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원전의 근거는 찾지 못했습니다만, 조선사는 워낙 오래되고 여러 갈래인지라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 해모수와 고주몽 또는 동명에 대해서도 한 번즘 걸러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설에는 주몽과 동명은 한 사람이 아니란 주장도 있으니까요. 해모수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기 때문에 연구가 있었으면 합니다. 조선사에 대한 열정과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작성자맑은영혼 | 작성시간 14.12.09 遼水右會白狼水,水出右北平白狼縣東南,北流西北屈,逕廣成縣故城南,王莽之平虜也,俗謂之廣都城. : 요수는 오른쪽(右)에서 백랑(白狼)수와 만나는데, 백랑 수는 우 북 평 ‘백랑 산’ 동남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굽어져, 광 성 현의 옛 성 남쪽으로 곧장 간다. <수경주>
  • 작성자맑은영혼 | 작성시간 14.12.09 백랑 수는 또 동북(東北)으로 곧장 용산(龍 山)으로 간다. 연(燕)나라 모용황(慕容皝)의 유성(柳城) 북쪽이며, 용산(龍 山)의 남쪽이며, 복지(福地)이다<수경주>
    渝水自塞外南入海.一水東北出塞為白狼水,又東南流至房縣注于遼. : 지리지에서 이르기를, 유수(渝 水)는 새외에서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하나의 물은 동북 변경 밖에서 나오는 백랑(白狼)수이고, 또 동남으로 흘러 방 현(房 縣)에 이르러 요(遼)수에 물을 댄다.<수경주>
    통전(通典) 주군(州郡)전(典) : 《營 州 今 理 柳 城 縣 。 殷 時 為 孤 竹 國 地. : 영주(營州) 【유성(柳城)현에서 다스렸다.】 은(殷)나라 때 고죽국의 땅이다.》
  • 작성자맑은영혼 | 작성시간 14.12.09 문무님의 글에서 인용하였읍니다.
    인용글에서 보듯이 백랑수, 요수, 우북평, 유성, 용산 등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지명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영주의 위치가 현 청해호 북쪽(동쪽?)이라면 유주와 요수도 쉽게 찾을수 있는 것 아닌지요....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2.10 제가 원전과 함께 설명드리는 것은, 원전에 의한 고증이 가능한 것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원전에서 확인 가능한 영주는 <청해호 북쪽과 신강성 나포박으로부터 소륵하 주변>입니다. 영주라는 주(州) 자체가 큰 면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디까지라고 말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위에서 님이 말씀하신 지명들은 모두 유주관할입니다. 최남석님과 맑은영혼님! 두 분모두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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