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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해설

황두여진(黃頭女眞)·황두실위(黃頭室韋)·황두회흘(黃頭回紇)!

작성자문 무|작성시간16.01.24|조회수871 목록 댓글 6

 

             황두여진(黃頭女眞황두실위(黃頭室韋황두회흘(黃頭回紇)!


                                이들의 관계(關係)?

                              

동방(東方)총령(葱嶺)의 동()쪽 지방(地方), 곧 진단(震旦)이다. 진단(震旦)은 곧 조선(朝鮮)이다.땅에, 금발(金髮)의 벽안(碧眼)을 가진 인종(人種)색목인(色目人)들이 무리를 이루고 살았는가? 에 대해 누구도 확실(確實)한 설명(說明)은 할 수 없다.사신(使臣), 무역(貿易)등으로 거주(居住)하던 무리들이 아닌,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으로 살던 무리들을 말한다.누구도 체험(體驗)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옛 기록(記錄)과 유물(遺物)유적(遺蹟)으로 판단(判斷)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이야기도, 후대(後代)의 일부(一部) 사람들이, 이를 이용(利用)하기 위해,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여, 본래(本來)의 이야기를 호도(糊塗)하거나,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놓는다. 특히 근세(近世)에 가까워올수록 그 정도(程度)가 심해지는데, 이것은 근세(近世)에 출현(出現)한 제국주의(帝國主義), 군국주의(軍國主義) 또는 민족주의(民族主義)에 의한 부산물(副産物)이며, 인류(人類)에게는 불행(不幸)이다.

 

대륙(大陸) 아이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推定)되는 : 서력(西曆) 1,111년 송대강역도(宋代疆域圖)북송(北宋) 정화(政和) 원년(元年)란 지도(地圖)를 보면,

 

    ➠ 황두(黃頭)회흘(回紇) :() 신강성(新疆省)의 포창해(蒲昌海) 남쪽과 하서회랑(河西回廊)감주(甘州)와 숙주(肅州)()쪽에 있었다.고 강역(疆域)표기(表記)를 해 놓았다. 이런 일련(一連)의 역사(歷史)이야기가 과연(果然) 올바른 것일까?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를 연구(硏究)하는 입장(立場)에서 보면, 참 어려운 이야기다.



고전(古典)에서는, 동방(東方) 땅에, 황두(黃頭)=금발(金髮)을 가진 종족(種族)에 대해 기록(記錄)해 놓은 것이 많지 않지만, 몇 기록(記錄)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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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력(西曆) 1,111 년대의 송대(宋代)강역도(疆域圖) :

 

   《황두(黃頭)회흘(回紇) : () 신강성(新疆省)의 포창해(蒲昌海) 남쪽과 하서회랑(河西回廊)감주(甘州)와 숙주(肅州)()쪽에 있었다.고 표기(表記)하였다. <지도(地圖)참조(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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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라 홍호(洪皓)의 송막기문(松漠記聞)1,1111,155: 황두여진(黃頭女眞) :

 

  黃頭女真者皆山居,號合蘇館女真. : 황두여진(黃頭女眞)은 모두 산에서 사는데, ‘합소관여진(合蘇館女眞)’이라고 부른다. 중략(中略). 天會十一年遂叛.興師討之,但守遏山下,不敢登其巢穴.經二年,出鬭而敗,復降,疑即黃頭室韋也.金國謂之黃頭生女真,髭髮皆黃,目精多綠亦黃而白多,因避契丹諱,遂稱黃頭女真. : 천회(天會)11년에 이르러 배반하였다. 왕사가 토벌하자, 다만 알산(遏山)아래에서 지켰는데, 감히 그 소굴(巢窟)에 오르지 못했다. 2년이 지나, 나가 싸웠으나 패하여, 다시 항복하였는데, 곧 황두(黃頭)실위(室韋)가 아닌가한다. ()나라에서는 황두(黃頭)생여진(生女眞)이라고 이르는데, 머리털과 코밑수염이 모두 누렇고(), 눈동자는 녹색(綠色)이 많고, 또한 누렇고 흰색도 많다. 이로 인해 글란(契丹)을 피하고 두려워하였는데, 황두 여진(黃頭女眞)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 황두여진(黃頭女眞)이라고 했으나, ()은 황두실위(黃頭室韋)가 아닐까? 하는 것으로 보면, 여진(女眞)과 실위(室韋)가 동류(同類)일 가능성(可能性)도 있다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서(河西) 땅의 산()에서 산다.고 한 것이다. 또 당시(當時)에 이들은 ()”국에 속()한 적도 있다는 것으로 보면, “하서(河西)” 땅에서 살았다는 말은 곧 위 (1)의 송대(宋代)강역도(疆域圖)와 같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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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中華民國滿族協會/試談滿洲民族之源流/李學智/二 女真民族溯源最近 :

 

   《中略.極邊遠而近東海者,則謂之東海女真.多黃髮,鬢皆黃,目睛綠者,謂之黃頭女真.: 중략. 극변(極邊) 멀리 동해(東海)에 가까운 곳에 사는 자들은, 동해(東海)여진(女眞)이라고 불리는데, 머리털이 황색이 많고, 코밑 털도 모두 황색이며, 눈동자는 초록색이다. 이들을 황두여진이라고 이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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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에서 설명(說明)(1) + (2), 서력(西曆) 1,111 ()에서 1,155 () ()의 이야기다.

 

    ➠ 위에서 설명(說明)(3)(1)로부터, 약 일천(一千)년이 지난 작금(昨今)의 역사(歷史)논문집(論文集)이다.

 

                                         위의 세 사료(史料)를 보면

 

    ➀ 홍호(洪皓)의 송막기문(松漠紀聞)황두여진(黃頭女眞)과 송대(宋代) 강역도(疆域圖)황두실위(黃頭室韋)상의 금발(金髮)의 인종(人種)들이 살았다는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가 하서(河西) 땅이란 점에서는 일치(一致)한다.

 

    ➁ 中華民國滿族協會 / 試談滿洲民族之源流 / 李學智 / 二 女真民族溯源 : 이곳에서 말하는 금발(金髮)인종(人種)이 산다는 지리적 위치는, 에서 설명(說明)하는 곳으로부터 대략(大略) 일만 리(一萬里) 정도(程度) 떨어진, ()쪽의 극변(極邊)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송막기문(松漠紀聞)과 송대(宋代)강역도(疆域圖)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특히 이 논문(論文), 최근(最近)에 작성(作成)된 것으로 볼 때, 그 진의(眞意)가 의심(疑心)스러울 수밖에 없다.

 

    1,900년 대 이후(以後), 대륙(大陸)에서의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은 조직적(組織的)이며, 국가적(國家的) 형태(形態)로 자행(自行)되었는데, 엄청난 예산(豫算)과 수많은 인원(人員)이 참여(參與)하였다. 또한 필요(必要)시 편집(編輯), 중간(重刊)등을 통해, 왜곡(歪曲)하고, 송본(宋本)이나, 당본(唐本)이니, 명본(明本)이니 하면서 또 글자를 바꿔, 편찬(編纂)하는데, 두우(杜佑)의 통전(通典)같은 경우(境遇), 조선(朝鮮)()이란 것도 있다.

 

허기야 오늘날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보면 : 역사(歷史)를 어떻게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는지의 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표본적(標本的)이며, 대표적(代表的)이란 이야기다. 어떤 조그마한 근거(根據) 또는 증거(證據)를 갖고 주장(主張)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에서 유()를 창조(創造)’하며, 역사(歷史)를 조작(造作)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창조(創造)란 말을 좋아 하는 것 같다. 창조(創造)경제(經濟)를 모토로 하는 분도 계시니 말이다.

 

    그러나 창조(創造): ()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든다는 뜻이니, 창조(創造)경제(經濟): 인류(人類)가 수십만(數十萬)년 살아오는 동안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形態)의 경제(經濟)를 만든다는 뜻이 되는데, 이건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미사려구(美辭麗句),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국민(國民)들을 세뇌(洗腦)시키는, 화사한 꽃잎처럼, 달콤한 말일 뿐이다.

 

    ‘혁신(革新)경제(經濟)’란 말을, ‘창조(創造)경제(經濟)’, 화사한 꽃잎처럼, 달콤한 말로 바꾼 것이다. 무지(無知)한 자()들이 무엇을 알겠느냐? 하면서 말이다.

 

    《그릇이 되지 않는, 안 되는 그릇의 무능력(無能力), 이제야 나타나고, 보이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허상(虛像), 실상(實像)인 냥 착각(錯覺)한 것이다. 착각(錯覺)하고 살아 온 우리가 그 대가(代價)를 치르고 있는 거다. 지금(只今)!

 

올바른 지도자(指導者)를 선택(選擇)하는 것은, 국가(國家)나 종족(種族), 또는 무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행사(行事)이며, 운명(運命)을 가르는 일이기도 하다. () 나라에서는 지금도 자국(自國)의 미래(未來)를 위해, 역사(歷史)를 이용(利用)하며, 자존심(自尊心)과 경각심(警覺心)을 일깨우려 한다. 지금 우린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는 싸움뿐이다. 분열(分裂)책동(策動)을 일심고, 거기에 어떤 정치적(政治的) 이익(利益)을 얻으려 하는, 기막힌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부린다. 가장 불행(不幸)한 지도자(指導者)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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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산서(山西):

 

   《白 服 突 厥=白 眼 突 厥 :腺厥別種也.與葛邏祿相近,唐貞元初,降於回鶻,既而數為回鶻所侵掠,因附於吐蕃.,一作眼. : 백복돌궐(白服突厥), 서돌궐(腺闕)의 별종(別種)이다. 갈라록(葛邏祿)과 함께 서로 가까운데, () 정원(貞元)초에, 회골(回鶻)에 항복했는데, 원래 여러 번 회골(回鶻)이 침입(侵入) 노략질하니, 이러 인하여 토번(吐蕃)에 기대었다. (), 일작 안()이다.라고 하였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의하면 : 갈라록(葛邏祿)에 대한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보면 : 지금(只今)의 우랄산맥(山脈)을 끼고, 그 동()과 서(西)쪽에서 살던 종족(種族)이며, 나라였다. 백안(白眼)이란 회안(灰眼)과도 통하는 말이며, 이는 신원사(新元史) 서기(序記)에서 말하는 : 而歸於蒙古者,為白達達,野達達.詳氏族表.突厥語譯義灰色目睛,蒙古以灰睛為貴種也. : 돌아온 몽고(蒙古)인들은, ‘백달달(白達達)’이요, ‘야달달(野達達)’이다. 씨족(氏族)표에 상세하다. 돌궐(突闕) 말의 역의(譯義)로 회색(灰色) 눈동자를 말하는데, 몽고(蒙古)에서 회색(灰色) 눈동자는 신분(身分)이 귀()한 자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백안(白眼), 회안(灰眼)과 같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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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말기(末期) 기록(記錄) :女真乘勝入黃龍府五十餘州,浸逼中京.中京,古白霫城 : 여진(女眞)이 이긴 기세로 황룡(黃龍)50여 주로 들어와, 중경(中京)을 침범하여 핍박(逼迫)하였는데, 중경(中京)은 옛 백습성(白霫城)이다.라 하였다.

 

    ➠ 백습(白霫)이란 : ‘철륵(鐵勒)=칙륵의 한 부족(部族)으로, 백습성(白霫城)이란, 백습(白霫) 부족의 추장(酋長)이 있던 아장(牙帳)을 말한다. 이들은 선비(鮮卑)계열(系列)이라고 하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 192 / 唐紀 八 / 太 宗 / 貞觀元年의 본문(本文) 주석(註釋)을 보면, 白霫居鮮卑故地,直京師東北五千里,與同羅,僕固接,避薛延陀,保奧支水冷陘山. : 백 습(白霫)은 선비(鮮卑)의 옛 땅에서 살았는데, 경사(京師)에서 곧바로 동북(東北) 5천리에 있으며, 동라(同羅). 복고(僕固)와 접하였으며, 설연타(薛延陀)를 피하여, 오지수(奧支水) 냉형산(冷陘山)에 보존하였다.고 하였다.

 

    ➠ ()은 선비(鮮卑)계인데 이중에서도 백습(白霫), 그 형상(形相)이 달랐기 때문에 백습(白霫)”이라 명명(命名)했을 것으로 판단(判斷)된다. 철륵(鐵勒)이나 설연타(薛延陀)등은 당()시대에, 천산북로(天山北路)와 그 서(西)쪽 지대(地帶)에서 살던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을 말하기를, 동북(東北) 5천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당시(當時) (), ()나라는, 이들로부터 서남(西南)5천리(千里) 지점(地點), ()나라의 경사(京師)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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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송 막 기 문(松漠紀聞) / 회골(回鶻)

 

   《回鶻自唐末浸微,本朝盛時,有入居秦川為熟戶者. : 회골(回鶻)은 당() ()에 조금씩 스며들어, 본조本朝 : ()나라때에는 매우 성하여 진천秦 川 : 진수(秦 水)를 말하며, 감숙성(甘肅省)에 있음주위에 들어와 살았는데, 이들을 숙호(熟戶)자라 한다. 女真破陝,悉徙之燕山,,,,.舊皆有族帳,後悉羈縻於西夏,唯居四郡外地者,頗自為國,有君長. : 여진(女眞)이 섬: 감숙성(甘肅省)지방을 깨뜨리자, 연산(燕山), 감주(甘州), 량 주(凉 州), 과주(瓜州), 사주(沙州)등지로 모두 옮겨갔다. 예전에는 그들 모두에 족장(族長)이 있었으나, 후에 서하(西夏)에 모두 예속되었는데, 유일(唯一)하게 살고 있는 자()들은 4 군 밖에사주(沙州). 과주(瓜州). 량주(凉州). 감주(甘州). 연산(燕山)주등의 지방을 말함있는 자들인데, 나라와 같았으며, 군장(君長)이 있었다. 其人卷髮深目,眉脩而濃,自眼睫而下多虬髯. : 그 사람들은 권발(卷髮)이며 눈은 깊고(深目), 눈썹은 짙고 무성하며, 속눈썹은 아래가 많고 구레나룻은 뿔 달린 용과 같다. 중략. 奉釋氏最甚,共為一堂,塑佛像其中,中略.誦經則衣袈裟,作西竺語,燕人或俾之祈禱,多驗.婦人類男人白晢,,青衣,如中國道服.然以薄青紗幂首而見其面. : 부처를 받드는 것이 가장 심하였는데, 함께 한 자리에, 흙으로 만든 부처의 상이 그 가운데에 있는데, (중략). 서 천축(西天竺)말로 연나라 사람(燕 人)들은 혹 더하여 소원을 비는데, 효험이 많고, 부인(婦人) 무리들과 남자들은 얼굴빛이 희며, 푸른 옷을 입고 나오는데, 중국(中國)의 도복(道服)과 같으며, 그 얼굴을 보면 엷은 청사(靑紗)로 머리를 뒤집어쓰고 있다. 其居秦川時,女未嫁者先與漢人通,有生數子年近三十始能配其種類. : 그들이 진천(秦川)에 살았을 때에, 우선 출가하지 않은 여인들을 한인(漢人)과 통하게 하여 태어난 여러 자식들이 삼십이 가까운데 처음 짝 지은 그 종류이다. 辛酉歲,金國肆眚,皆許西歸,多留不反.今亦有目微深而髯不虬者,蓋與漢兒通而生也. : 신유(辛酉) 해에, ()나라에서 거리낌 없이, 모두 서쪽으로 돌아가도록 하였으나, 많은 자들이 머무르며 반항치 않았다. 지금 또한 눈()이 조금 들어가고 뿔 달린 것 같은 구레나룻가 없는 자()들은, 대개 한()의 젊은이들과 통하여 태어난 자들이다. 라고 하였다.

 

   《嗢熟者,國最小,不知其始所居,後為契丹徙置黃龍府南百餘里,曰賓州.州近混同江,即古之粟末河黑水也.部落雜處,以其族類之長為千戶統之. : 올숙(嗢熟), 가장 작은 나라이다. 그들이 처음 어디에서 살았는지 알지 못하는데, 뒤에 글란(契丹)이 황룡(黃龍)부를 두니 남쪽 백여(百餘)리로 옮겨갔다. 빈주(賓州)라 이르는데, () 가까운 곳에 혼동강(混同江)이 있다. 곧 옛 속말하(粟末河) 흑수(黑水)이다. 부락에서 여러 사람들이 섞여 살았는데, 그 종족무리들의 우두머리를 천호(千戶)에서 다스렸다.라고 하였다.

 

    ➠ 회골(回鶻)은 감숙성甘肅省 : 옛 섬()지방이다서쪽과 신강성(新疆省) 및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에 있었는데, 위에서 언급(言及)한 회골(回鶻)들은, 가장 동쪽지방으로 와 있던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통전(通典)에서는, 장안(長安)으로부터 16,900 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강성(新疆省) (西)쪽의 동()구라파(歐羅巴) 또는 러시아 땅에 있어야 한다.

 

    ➠ 회골(回鶻)인들은 :其人卷髮深目,眉脩而濃,自眼睫而下多虬髯. : 그 사람들은 권발(卷髮)이며 눈은 깊고(深目), 눈썹은 짙고 무성하며, 속눈썹은 아래가 많고 구레나룻은 뿔 달린 용과 같다.婦人類男人白晢,,青衣,如中國道服.然以薄青紗幂首而見其面. : 부인(婦人) 무리들과 남자들은 얼굴빛이 희며, 푸른 옷을 입고 나오는데, 중국(中國)의 도복(道服)과 같으며, 그 얼굴을 보면 엷은 청사(靑紗)로 머리를 뒤집어쓰고 있다.고 하였다.

 

    ➠ 또한 올숙(嗢熟), () 기록(記錄)으로 볼 때, 길림성(吉林省)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속말(粟末). 흑수(黑水). 황룡(黃龍). 빈주(賓州)등으로 보았을 때

 

    그러나 생각해 보자. ()나라의 관리(官吏)였던홍호(洪皓)라는 사람이 축지법(縮地法)을 익힌 ()절정(絶頂)고수(高手)”라고 하더라도, 길림성(吉林省)과 감 숙성(甘肅省) 서쪽지방을 동시(同時)에 여행유배(流配)당 한 곳이나, 그 여정(旅程)으로 볼 때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지도(地圖)상에 직선거리(直線距離)로도 6,500-7,000 리이며, 길을 따라 간다면 10,000 리도 휠 씬 넘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호(洪皓)가 주군主君 : ()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모셔오기 위해 금()과 협상(協商)을 위해 떠났던 길과 그가 유배(流配)를 당했다는 곳은, 현재(現在)의 북방삼성(北方三省)지대(地帶)가 아닌, 중원(中原)의 서북(西北)쪽 지방(地方)의 여정(旅程)이라는 것을 증명(證明)하고, 고증(考證)해 주는 자료(資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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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말기(末期) 기록(記錄) :女真乘勝入黃龍府五十餘州,浸逼中京.中京,古白霫城 : 여진(女眞)이 이긴 기세로 황룡(黃龍)50여 주로 들어와, 중경(中京)을 침범하여 핍박(逼迫)하였는데, 중경(中京)은 옛 백 습 성(白霫城)이다.라 하였다.

 

    ➠ 백습(白霫)이란 : ‘철륵(鐵勒)=칙륵의 한 부족(部族)으로, 백습성(白霫城)이란, 백습(白霫) 부족의 추장(酋長)이 있던 아장(牙帳)을 말한다. 이들은 선비(鮮卑)계열(系列)이라고 하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 192 / 唐紀 八 / 太 宗 / 貞觀元年의 본문(本文) 주석(註釋)을 보면, 白霫居鮮卑故地,直京師東北五千里,與同羅,僕固接,避薛延陀,保奧支水冷陘山. : 백 습(白霫)은 선비(鮮卑)의 옛 땅에서 살았는데, 경사(京師)에서 곧바로 동북(東北) 5천리에 있으며, 동라(同羅). 복고(僕固)와 접하였으며, 설연타(薛延陀)를 피하여, 오지수(奧支水) 냉형산(冷陘山)에 보존하였다.고 하였다.

 

    ➠ 철륵(鐵勒)이나 설연타(薛延陀)등은 당() 시대에, 천산북로(天山北路)일부(一部)와 그 서(西)쪽 지대(地帶)에서 살던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을 말하기를, 동북(東北) 5천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당시(當時) ()나라는, 이들로부터 서남(西南)5천리(千里) 지점(地點), ()나라의 경사(京師)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서남부(西南部) 먼 땅에, 그들만의 중국(中國) 곧 나라의 중심(中心)인 황도(皇都)를 중국(中國)이라고 했는지는 모르나, 그것은 그들만의 것이다.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도 말하고 있잖은가!

 

                 ● 海國圖志 卷 074國 地 總 論 / <>原 無 今 補)○ 釋 五 大 洲

梵典言贍部洲中有四主,東人主即震旦,南象主即印度,北馬主即蒙古哈薩克,西寶主即大小西洋.是歐羅巴,利未亞皆屬贍部洲之明證.中略. : 범전(梵典)의 말씀은, 섬 부주(贍部洲)의 이라 했으며, 가운데에는 네 개 주()가 있는데, 동인(東人)의 주()는 곧 진단(震旦)이요, 남상(南象)의 주()는 곧 인도(印度), 북마(北馬)의 주()는 곧 몽고(蒙古)의 합살 극(哈薩克)이요, 서보(西寶)의 주()는 곧 크고 작은 서양의 바다(西洋)이다. 구라파(歐羅巴)와 이 미 아(利未亞)는 모두 섬 부주(贍部洲)에 속했다는 것은 명백하게 증명이 된다. 중략. 釋氏皆以印度為中國,故天主教則以如德亞為中國,而回教以天方國為中國. : 석씨(釋氏)는 모두 인도(印度)가 중국(中國)이라고 했으며, 천주교(天主敎)측에서는 여덕아(如德亞)를 중국(中國)이라 했고, 회교(回敎)에서는 천방 국(天方國)을 중국이라 하였다.고 말한다.

 

    ➠ 동인(東人)의 주(), 곧 진단(震旦)이라고 했으며,

        남상(南象)의 주(), 곧 인도(印度)라고 했으며,  

        북마(北馬)의 주(), 곧 몽고(蒙古) 합살극(哈薩克)이라고 했다. 해국도지(海國圖志) () 9를 보면 : 합살극(哈薩克), 우랄산맥 동남(東南)쪽에 표기(表記)되어있다.

 

    석씨(釋氏) : 인도(印度)가 중국(中國)이라고 했고,

        천주교(天主敎) : 여덕아(如德亞)를 중국(中國)이라 했으며,

        회교(回敎) : 천방국(天方國)을 중국(中國)이라고 했다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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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인(蒙古人)들을 포함(包含)한 일부(一部), 총령(葱嶺)의 동쪽 동방(東方)=진단(震旦), 일시적(一時的)으로 토벌(討伐), 점령(占領)했다고 하더라고 이들 인종(人種)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금발(金髮)의 벽안(碧眼) 또는 회안(灰眼)을 가진 자()들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아마도 이들은 모두 서(西)쪽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며, 동구라파(東歐羅巴)인과 러시아인 및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인들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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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왕조(封建王朝)시절(時節)의 강역(疆域)이란 : 조정(朝廷)에서 관리(官吏)를 보내고, 군대(軍隊)를 주둔(駐屯)하고, 조세(租稅)를 걷고, 왕권(王權)이 미쳐, 통치(統治)할 수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점령(占領)하고, 그 나라의 지도자(指導者)가한(可汗)이나 추장(酋長)등의 그곳 지도자(指導者)에게 벼슬을 주고, 위임통치(委任統治)한 곳을 강역(疆域)”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나라들을 제후국(諸侯國)이니, 속국(屬國)이니 하는 말로 표현(表現)하지만, 이러한 곳들은 관리(官吏)가 상시(常時) 주둔(駐屯)하지도 않고, 백성(百姓)들로부터 직접(直接) 조세(租稅)를 걷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라(), 부족(部族), 종족(種族)들은, 조정(朝廷)이 약해지거나, 주변(周邊)의 또 다른 세력(勢力)이 강해지면, 배신(背信)하고, 배반(背反)하는 경우(境遇)가 허다(許多)하다. 이것은 조정(朝廷)의 강역(疆域)이 아니기 때문에, 배신(背信)이니, 배반(背反)이니 하는 말은 한 측에서만 그럴 뿐, 당사자(當事者)들 입장(立場)에서 보면, 당연(當然)한 일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힘이 사해(四海)에 미쳤다는 말과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강역(疆域)이 사해(四海)이다라는 말은, 같은 뜻이 될 수 없다.

    현재(現在)로 보면 : ()합중국(合衆國)의 힘이 사해(四海)에 미친다.고 할 수 있지만, ()합중국(合衆國)의 영토(領土)가 사해(四海)이다.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理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힘이, 황제(皇帝)의 교화(敎化)가 사해(四海)에 미치는 것과 그 영토(領土)와는 별개(別個)라는 이야기다. 이런 것들을 착각(錯覺)하면,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지구(地球)라는 행성을 지배(支配)했다, 또는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토는 전() 지구(地球) 땅이다라는, 옛 왕조(王朝)의 성격(性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해(理解)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객관적(客觀的)이지 못한, 합리적(合理的)이지 못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조선사(朝鮮史), 폄하(貶下)될 수밖에 없다. 사고(思考)의 성숙(成熟)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회흘(回紇)이니, 선비(鮮卑), 여진(女眞)이니, 실위(室韋)니 하는 종족(種族)들은, 모두 엇비슷한 무리들이라고 보면 어떨까? 시대적(時代的)으로 다르게 불렸을 뿐, 그 종족(種族), 그 종족(種族)아니었을까? 생각 해 본다.

                                   20160124<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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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환국고려 | 작성시간 16.01.24 경학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역대 사서들의 기록들을 상고하지 않으며, 사서에서 말하는 지리를 고찰하지 않고, 역사의 진실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 입니다.
    작금의 현실은, 성인[聖人]이 소인[小人]이 되고 소인[小人]이 성인[聖人]이 되니, 물이 상류를 거슬러 흐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곡학아세하는 자들이 대도[大道]를 비웃고, 한줌의 양심도 없는 자들이 비도[非道]를 저지르며 정도[正道]를 조소하고, 역사의 깊이와 준엄함을 간과하는 자들의 망종은, 이미 한계를 벗어나고 그 도를 넘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옛 성현들이 천하의 무도[無道]함를 항상 경계했던 것은, 그 만한 까닭의 연원이 있을 것입니다.
  • 작성자환국고려 | 작성시간 16.01.24 시경[詩經]의 대아[大雅]편에서부터 기록된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그리고 어부수[魚鳧水], 이 어부수[魚鳧水]가 흐르는 조서산[鳥鼠山] 자락에는 지금도 조서산[鳥鼠山를 증명하는 고대의 비석과 유적이 의연히 서 있습니다.
    문무 선생님께서 해설하고 계시는 조선사의 설명과, 조서산[鳥鼠山]의 고 유적과 비석의 위치는, 여러 사서의 기록과 더불어 일치하고 있습니다.
    하,은, 주의 삼대와, 한, 당, 명, 청이 지금의 중국 대륙이라는 것은, 사서 오경을 통해서도 그 거짓이 백일하에 들어나고 있습니다.
    개인의 주장이 역사라고 한다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역사를 떠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입니다.

  • 작성자환국고려 | 작성시간 16.01.24 연산과 조서산, 위수, 그리고 촉 이러한 지역들은, 모두 오늘날 천산과 총령, 알타이산맥의 주변 지역들임을 모두 고증을 통하여 확인하고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반가운 일은, 산해관의 오화성지를 찾아 확인한 것 입니다.
    지금도 오화성터는 유지가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서 그 역사 기록의 정확함을 재삼 확인 시켜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모두 소개 할 예정 입니다.
    깊으신 노고에 감사를 드리며, 설한의 강 추위에 강건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1.24 오늘이 올 겨울중에서 가장 추운 날이 될 것 같습니다. 밖에 나가서 활동하는 분들에게는 힘든 하루일 것 같군요. <환국고려>! 님의 말씀, 동감합니다. 조선사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비록 반도라는 비좁은 땅에, 남의 손에 의해, 강제로 처밖혀 있는 조선의 후예들에게는, 그 의미가 남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현실고착화를 바라는 식민사관이나 반도사관 논자들과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조선사'라고 봅니다. 이 자들과 타협하는 그 날은, 조선사가 영원히 묻히는 날이라고 생각됩니다.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산해관의 오화성의 유적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산해관!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1.24 산해관!
    참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곳이죠.
    오화성. 환희령등 이곳 산해관을 넘나들던 주요 길목에는 많은 이들의 애환이 서려있습니다.
    눈물과 한 숨! 안타까움과 그리움과 반가움! 이 모든 것들이 이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 산해관이 오늘날의 하북성과 요녕성 경계지역의 바다 가에 있다는 말, 그것 자체가 거짓이라는 증거입니다. 발해 바다 가에 있는 오늘날의 산해관의 유지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며, 지금의 것들은 모두가 모조품일 뿐이죠. 그런데 실제의 산해관 현장에 오화성 유지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니......놀라울 뿐입니다. 조선사를 위해 즐거운 일입니다. 강추위에 건강조심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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