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가인(客家人)이란, 그 진실(眞實)은 무엇일까?
○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소위(所謂) 말하는 “객가인(客家人)”들의 선대(先代) 또는 후손(後孫), 그들을 비판(批判)한다거나 비난(非難) 또는 폄하(貶下)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님을 천명(闡明)합니다. 다만 “객가인(客家人)”에 대한 진실(眞實)을 규명(糾明)해보고자 함일 뿐이므로, 오해(誤解)없으시길 바랍니다.》
○ 이번 대만(待滿) 총통(總統)선거(選擧)에서, 첫 여성(女性) 총통(總統)으로 당선(當選)된 채영문(蔡英文)【차이잉원】 당선자(當選者)는 대만인(臺灣人)이면서, 객가인(客家人)【하카족, 커자족】후손(後孫)이라고 뉴스는 전한다. 덧붙여 설명(說明)하기를 “한족(漢族)의 일파(一派)”라고 이야기한다.
객가인(客家人) : 객가(客家)란 손님 또는 이주민(移住民)이나 그 가족(家族)이란 뜻이다. 한자(漢字) 의미(意味)를 보아서도 짐작(斟酌)할 수 있듯이, 객가(客家)는 이방인(異邦人)이라는 뜻이다. 또 실향민(失鄕民)이라고도 칭할 수 있다. 이러한 이주민(移住民) 또는 실향민(失鄕民)은 세계(世界) 각처(各處)에 없는 곳이 없는데, 유독 “객가인(客家人)”이라고 해서 유명세(有名稅)를 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객가인(客家人) 출신(出身)중에서, 태평천국(太平天國) 수령(首領) 홍수전(洪秀全), 계몽사상가(啓蒙思想家) 황준헌,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손문(孫文), 또는 전 싱가포르 국가원수(國家元首) 리 광요, 중공 원로 주덕, 중국(中國) 당대 문화의 기수 곽말약 등이 특출(特出)한 인물(人物)이라고 전하는데, 세계(世界) 각국(各國)의 이주민(移住民)들은 더없이 많고, 인물(人物)들 역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程度)로, 토착민(土着民)이 아닌 경우(境遇)가 허다(許多)하다.
객가인(客家人)은 시초는, 전(傳)하는 바로는, 「기원전(紀元前) 시황제(始皇帝)때 백월(百越)을 토벌(討伐)하기 위해 출정(出征) 보낸 군사(軍士)들 중에서, 귀환(歸還)하지 않고, 그곳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초(始初)」라는 주장(主張)도 있다.
물론(勿論), 후한(後漢)말의 황건적(黃巾賊)의 난(亂) 또는 삼국(三國) 위(魏)·촉(蜀)·오(吳)의 싸움과 서진(西晉) 말(末)의 오호(五胡)십육국(十六國)의 난(亂), 서진(西晉)의 천도(遷都), 당(唐) 말(末)의 황소(黃巢)농민(農民) 봉기(蜂起), 몽고(蒙古)에 의한 송(宋)나라의 멸망(滅亡)으로 인한 이주(移住)등, 중원(中原)의 많은 백성(百姓)들이, 남방(南方)으로 이주(移住)하였을 것이며, 조정(朝廷)의 개입(介入)으로, 토착민(土着民)들과의 불화(不和)로 인해, 이들은 더 남(南)쪽으로 밀려, 남하(南下)하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고 전(傳)한다.
이것을 진실(眞實)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말하면 : 중원(中原)으로부터 이주(移住)한 많은 백성(百姓)들은 : 《권력(權力)싸움에 밀려난 자(者), 주군(主君)으로부터 유배(流配)를 당한 자(者), 죄(罪)를 짓고 도주(逃走)한 자(者), 전란(戰亂)을 피해 이주(移住)한 무리(衆), 가뭄과 홍수(洪水)등의 천재지변(天災地變)을 피해 이주(移住)한 무리(衆)등》으로 나눠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 외(外)에도 많은 사연(事緣)과 이유(理由)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推定)할 수 있다.
이들이 이주(移住)하는 과정(過程)에서, 기존(旣存)에 터를 잡고 살고 있던 토착민(土着民)들과의 분쟁(紛爭) 또는 전쟁(戰爭)에 버금가는 치열(熾㤠)한 싸움이 있었을 것인데,
예(例)를 들면, 1856년에, 광동(廣東) 서부 대산, 개평 등에서는, 이주민(移住民)=객가인(客家人)과 토착민(土着民) 간의 대규모(大規模)의 싸움이 12년간이나 지속(持續)되었다고 하며, 당시(當時)의 청(淸) 조정(朝廷)에서는, 객가인(客家人)들을 더 남(南)쪽으로 이주(移住)시켰는데, 오늘날의 광동(廣東), 광서(廣西) 및 해남성(海南省) 등지(等地)의 객가인(客家人)은, 이렇게 형성(形成)되었다고 하며, 장개석(蔣介石)이 본토(本土)에서 패(敗)하고, 대만(臺灣)으로 도주(逃走)할 때, 대만(臺灣)의 토착민(土着民)들 수십만(數十萬)이 죽었다고 하는 예(例)를 보면 알 수 있다.
○ 태평천국(太平天國) 난(亂)의 홍수전(洪秀全)이나,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주인공(主人公) 손문(孫文), 등소평(鄧小平), 모택동(毛澤東)등을 보면 : 이들은 모두 객가인(客家人)의 후예(後裔)라고 하는데,
문제(問題)제기(提起)
① 이주(移住)한 무리들이 “한족(漢族)”이라는 이야기는, 현재(現在)의 역사통설(歷史通說)일 뿐이며, 일방적(一方的)인 이야기일 뿐이다. 왜냐하면 『중원(中原)이란 곳에는, 수많은 이민족(異民族)들이, 수천(數千)년, 토착민(土着民)을 밀어내고, 대규모(大規模) 무리들이 왕조(王朝)를 세우고, 사라지고를 반복(反復)했는데, 그들이 한족(漢族)이라는 이야기는, 대륙(大陸)인(人)들도 이해(理解) 못할 코-메-디다.』
『대륙(大陸)은 한족(漢族)』이란 이이야기는 : 20 세기(世紀) 초(初)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들의 정치적(政治的) 산물(産物)로 만들어진 신조어(新造語)일 뿐이다. 도대체 누가 한족(漢族)이며, 이를 무엇으로 증명(證明)하겠는가?
그들 스스로 말하는 역사(歷史)를 보면 : 기원전(紀元前) 황제(黃帝)【B.C 2697∼B.C 2599】로부터의 대륙(大陸) 역사(歷史) 이야기는 모두가 이민족(異民族)들의 황가(皇家) 이야기가 아닌가!
도대체 누가 한족(漢族)이란 말인가?
② 《19세기 말(末) ∼ 20세기 초(初), 조선(朝鮮)의 멸망(滅亡)과 해체(解體), 그리고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반도화(半島化)가 고착(固着)되는 시기(時期), 대륙(大陸)을 접수(接收)하는 인물(人物)들이 서남방(西南方) 또는 남방(南方)의 객가인(客家人)들이다.》 이들이 정말 말 그대로, 객가인(客家人)일까? 객가인(客家人)이란 말 자체(自體)가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역사(歷史)조작(造作)으로 인해 생겨낸 말이 아닐까?
실향민(失鄕民)이니, 이주민(移住民)이니 하는 무리들은 수없이 많다. 구태여 한족(漢族)의 명문가(名門家)의 귀족(貴族)출신(出身)이란 말은, 과장(誇張)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반란(反亂)이니 혁명(革命)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다는 말은, 중원(中原)으로부터 버림받은 자(者)들이라는 한(恨)이, 그것으로 표출(表出), 작용(作用)한 것은 아닐까? 중원(中原)왕조(王朝)타도(打倒) 곧 조선왕조(朝鮮王朝) 타도(打倒)로 말이다.
③ 이들 인물(人物)들의 생애(生涯)를 찾아보면 : 영국(英國)·미국(美國)·일본(日本)등으로 유학(留學)내지 적극적(積極的)인 지지(支持)로 인하여, 명성(名聲)을 얻게 되고, 이들 나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고, 반란(反亂)이나 혁명(革命)을 일으키는데, 이는 대륙(大陸)의 조선왕조(朝鮮王朝)를 해체(解體)하는데, 그 하수인(下手人)이 된 것은 아닐까?
④ 또 한편에서는 중원(中原)이라 부르는 지역에 살고 있던 후한(後漢) 시대 한족(漢族) ‘명문(名門) 귀족(貴族)’의 자손(子孫)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후한(後漢)시대(時代)만의 명문(名門)귀족(貴族)의 자손(子孫)이란 말이 나올까? 후한(後漢) 이후(以後)에 더 많은 무리가, 서진(西晉)이후의 많은 왕조(王朝)의 황실(皇室)과 대신(大臣) 및 백성(百姓)들이 이주(移住)했다면서 말이다.
명분(名分)을 얻고자, 그들 스스로 자칭(自稱)한 것은 아닐까?
⑤『객가인(客家人)들이 사용(使用)하는 언어(言語)는 중원(中原) 북방(北方)의 고대(古代)언어(言語)일 것이다』라고 추정(推定)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숫자의 발음(發音) 등이 현재(現在)의 일본어(日本語) 독음(讀音)에 가깝다는 설(說)도 있다. 그렇다면 당시 중원(中原) 고대(古代)언어(言語)가 현 일본어(日本語)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같은데,
여기서 한국어(韓國語)가 일본어(日本語)의 독음(讀音)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무엇이고, 중원(中原)의 고대(古代)언어(言語)가 곧 일본어(日本語)의 독음(讀音)에 가깝다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⑥ 당시 남방(南方)에는 오천(五千)년 이상을, 묘족(苗族)들이 토착민(土着民)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묘족(苗族)의 우두머리였다고 하는 치우천황【치우환웅은 배달국 14대 환웅 : 기원전 2707년에 등극】도, 객가인(客家人)이란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더하여 동방(東方)이란 진역(震域)을 말하고, 이는 곧 진단(震旦)이며, 동역(東域)이다. 이 동방(東方) 땅에 구이(九夷)가 살았다고 하였는데, 묘족(苗族) 역시 동방(東方)의 구이(九夷)중의 한 종족(種族)이다.
⑦ 객가인(客家人)! 이들의 거점지(據點地)를 보면 : 광동성(廣東省)·복건성(福建省)·호남성(湖南省)·절강성(浙江省)·사천성(泗川省)등의 산간(山間) 및 대만(臺灣)에서는 중북부의 타오위안 현, 신주 현, 먀오리 현 등지에 거주하며, 큰 소수민족을 구성하고 있다. 또 말레이지아, 싱가포르, 타이 등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많다. 객가인(客家人)이 많은 지역은, 중국(中國) 공산당(共産黨)이 매우 강한 영향력(影響力)을 가지기 때문에, 객가인(客家人)들 중에는 공산당(共産黨)에 참가(參加)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바로 이거라고 말할 수 있다.
봉건왕조(封建王朝)를 타도(打倒)한다는 것은, 곧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타도(打倒)이며, 당시 공산당(共産黨)은 봉건왕조(封建王朝)의 궤멸(潰滅)을 목적(目的)으로 봉기(蜂起)되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 위키 백과 : 《공산당【Communist party, 러시아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共産黨】은, 공산주의(共産主義)를 목표(目標)로 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유럽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정당(政黨)이다. 공산당(共産黨)은, 농민(農民)과 생산(生産) 노동자(勞動者)를 기반(基盤)으로 한 정당(政黨)이며, 몇몇 정당(政黨)은 모택동주의, 트로츠키주의를 이념으로 내걸고 있다. 적어도 공산당(共産黨)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標榜)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마르크스주의 철학적(哲學的) 강령(綱領)을 가지고 있거나, 평등(平等)지상주의(至上主義)를 옹호(擁護)한다는 것은, 공통점(共通點)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봉건왕조(封建王朝)는, 이들의 직접적(直接的) 타도(打倒)대상(對象)이 되었다. 이는 곧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직접적(直接的) 타도(打倒)대상(對象)이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⑧ 이러한 객가인(客家人)들은 토착민(土着民)들과는 달리, 토지(土地)의 소유(所有)가 어려웠기 때문에, 유통(流通), 상업(商業)에 일찍이 운을 떠, 부를 축적(蓄積)하다 보니, 이러한 특징(特徵)때문에 ‘중국(中國)의 유태인(猶太人)’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예(例)는 이주민(移住民)이 많은 다른 나라의 경우(境遇)와 흡사(恰似)하다고 본다. 이주민(移住民)으로써 어쩔 수 없는 선택(選擇)이었을 것이다.
⑨ 또한 객가인(客家人)들은, 전통적(傳統的)으로 경멸(輕蔑)을 받았던 군인(軍人), 또는 반란(反亂)이나 혁명(革命)등을 일으킨 자(者)들도, 이전(以前)부터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意味)하는 것일까?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에서는 아주 예민(銳敏)하고, 중요(重要)한 문제라고 본다.
⑩ 손문(孫文)【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 (58세) : 광동성(廣東省) 출신(出身)】: 《몇 차례의 반란(叛亂)거병(擧兵)을 하였고, 여러 명의 부인(婦人)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일본(日本) 여인(女人)도 ‘두 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중략. 오늘날 중화민국(中華民國)에서 국부(國父)로 추앙(推仰)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보다도 유명(有名)한 혁명(革命) 선구자(先驅者)로서 존경(尊敬)받고 있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韓國)의 독립운동(獨立運動) 지원(支援)과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창립(創立)에 커다란 일조(一助)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功勞)로 1962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로부터 건국훈장(建國勳章) 중장이 추서(追敍)되었다.》고 한다.
➠ 대륙조선(大陸朝鮮) 입장(立場)에서 이를 바라보면 : 참으로 난감(難堪)한 이야기다. 오천(五千)년 이상(以上)을 이어온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무너뜨리고, 그 잔재(殘在)마저 깡그리 없앤 후, <반도조선(半島朝鮮)=대한제국(大韓帝國)=임시정부(臨時政府)=대한민국(大韓民國)>을 건립(建立)하는데 힘써, 외국인(外國人)이지만 그에게 건국훈장(建國勳章)을 추서(追敍)했다?
무지하게 답답한 이야기다!
⑪ 장개석(蔣介石)【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 (87세) : 절강성(浙江省) 출신(出身)】 이 분에 대해서는 객가인(客家人)인지는 출처(出處)가 없어 모른다. 《장개석(張介石)은, 일본(日本) 육군(陸軍)사관학교(士官學校) 출신(出身)이며, 손문(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참가(參加), 1923년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때는 소련으로 군사시찰을 갔으며, 귀국 후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벌(北伐)을 시작하였으며, 중략(中略),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제1, 2, 3, 4대 총통(總統)으로, 여러 명의 부인(婦人)이 있었는데, 그의 부인(婦人)중에서도 일본(日本) 여인(女人)이 ‘두 명’이 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에 밀려 타이완으로 이전하였다. 중화민국의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 장기 집권하다가 1975년 사망했다. 중략. 중화민국 내에서는 쑨원 다음으로 '제2의 국부'(國父)로 불린다.》고 하였다.
➠ 장개석(張介石) 역시(亦是)도, 조선왕조(朝鮮王朝)를 해체(解體)시키는데, 대단한 역할(役割)을 했음을 짐작(斟酌)할 수 있다.
○ 국부(國父)란 본시(本是) 말은, 임금(君主=王)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작금(昨今)에 초대(初代) 대통령(大統領) 이승만(李承晩)을 “국부(國父)”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主張)을 하는 본 적이 있는데, 이러한 주장(主張)은 한 참 “오-바” 하는 것이다.
대통령(大統領) : 민주주의(民主主義) 나라의 행정부(行政府) 수반(首班)을 말하는 것이니, 봉건왕조(封建王朝)의 왕(王)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이상하게도 요즘 대한민국(大韓民國)사람들은 단어(單語) 선택(選擇)에, 너무 무지(無知)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大統領)은 : 행정부(行政府)수반(首班)이며, 국가(國家)를 대표(代表)하는 국가원수(國家元首)이다. 그러나 봉건왕조(封建王朝)의 군주(君主)인 여왕(女王)은,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런 것을 착각(錯覺)한다거나, 이런 것을 지향(指向)하려 한다면 많은 저항(抵抗)에 부딪칠 것이며, 나라의 골격(骨格)을 이루는, 헌법정신(憲法精神)에, 최(最)우선(于先), 위배(違背)된다는 사실(事實)이다. 초심(初心)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選擇)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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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자료(資料)를 찾다가…
○ 정 인갑 <북경 전 청화대 교수>가 ‘월드코리안뉴스’에, 게재(揭載)된 글 중(中)에서 《‘기자 동래설’은, 상이 망할 때, 많은 중원 인들이, 한반도로 피난 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한반도 남방에 있은 진한, 마한, 변한 세 나라 중 진한은 진의 폭정에 못 이겨 피난 온 중원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집중 거주하며 같은 언어, 문화 및 풍속을 지키지 못하고, 한민족에 완전히 동화돼 버렸기 때문에, 객가인이라고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 이 분 말씀은 :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의 전형적(典型的)인 역사해설(歷史解說)이라고 본다.
기자(箕子)가 동(東)쪽으로 왔다는 것이 기자(箕子)동래설(東來說)이다. 그러면 대륙사(大陸史)에서 말하는, 하남성(河南省) 땅에 성탕(成湯)과 이윤(伊尹)과 기자(箕子)의 묘가 있다는 말은 무엇이며, 중원인(中原人)들이 반도(半島) 땅으로 왔다는 증거(證據), 근거(根據)는 어디에 있는 건가? 이것은 중원인(中原人)들이 반도(半島)로 왔다는 것이 문제(問題)가 아니라,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니, 삼한(三韓)등이 반도(半島)에 있었다고, 미리 정해 놓고, 도상(圖上)연습(演習)하는 이런 이야기가 문제(問題)다.
➠ 더불어 삼한(三韓)이 한반도(韓半島) 남방(南方)에 있었다는 말은 또 무엇이고,
진한(辰韓)은 진(秦)의 백성(百姓)들이 폭정(暴政)에 못 이겨 피난(避難) 온 중원(中原)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들이 중원(中原)땅에서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을 지나오는 동안, 반도(半島)로 진입(進入)하여 남방(南方)으로 내려왔다는 근거(根據), 증거(證據)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 이들은 객가인(客家人)이 될 수 없는 것은, 한민족(韓民族)에게 완전히 동화(同化)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한민족(韓民族)이 반도(半島) 땅에, 이미 정착(定着)하여 살고 있는데, 이방인(異邦人)인 한족(漢族)들이 수없이 밀려오는데, “오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환영(歡迎)합니다.”했다는 말인가?
➠ 이 분 말씀대로라면, 한반도(韓半島) 남방(南方)이라면 : 반도(半島)땅에서도 절반(折半)밖에 되지 않는 임진강(臨津江)이나 한강(漢江)이남(以南) 땅일 것인데, 이곳에 삼한(三韓)의 78개 나라가 옹기종기 사이좋게 나누어 살고 있었다는 것인가?
전라도(全羅道)·충청도(忠淸道)땅에 마한(馬韓)이, 그 동(東)쪽 경상도(慶尙道) 땅에 진한(辰韓)=진한(秦韓)이, 그러면 변한(弁韓)=변한(卞韓)은 제주도(濟州島)와 대마도(對馬島) 사이의 바다(海)속에 있었다는 이야긴가?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월지국(月支國)에서 4, 5십 개 나라들을 통치(統治)했다고 하는데, 진왕(辰王)은 조물주(造物主)였단 말인가?
○ 필자(筆者)는, ‘정 인갑’이란 분이 무엇을 하는 분인지는, 인터넷을 뒤지다가 처음 알았는데, 이 분의 글 내용(內容)은, 조선인(朝鮮人)의 후예(後裔)로써, 심히 불쾌(不快)하기 짝이 없다.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신중(愼重)을 기해야 한다.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들, 스스로 무지(無知)로 인한,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은, 쉴 사이 없이 벌어지고 있는 진행형(進行形)이란 사실(事實)이 가장 두렵다.
2016년 02월 10일 <글쓴이 : 문무(文武)>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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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환국고려 작성시간 16.02.12 그러나 객가인[客家人]들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선과 고구려의 일파들이 대부분 입니다. 근세 조선의 말엽까지 이들은 부여와 구려의 북방이 선조들의 고향임을 말하고 있으며, 탐라에는 조선사의 기록대로 원나라의 무리들이 많이 이주해 왔음을 지금도 현지에서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양이와 반도사관의 일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역사의 왜곡은 어리석기 그지 없는 일이며, 스스로 역사속에서 한줌의 흩날리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말 것 입니다.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2.12 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조선사의 진실"이, 만 천하에 공개되어, 조선왕조의 실체가 밝혀지는 날이 왔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합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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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Romantic 작성시간 16.02.12 그들은 화교가 아닐까요.?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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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주몽의나라 작성시간 16.02.13 화교랑은 다르죠 그리고 화교들보면 화교안에서도 지들끼리 편갈라 싸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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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2.14 화교라는 의미는 : <외국에서 정착해 사는 중국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 객가인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봅니다. 그러나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등지에서 사는 중국사람을 객가인이라고 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화교라도 하는데, 그곳에서 "성공한 화교"를 구태여 객가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실향민(북한 땅에서 남한 땅으로 내려온 사람)이 있듯이, 객가인 역시 실향민이라고 봅니다. 다만 이들 객가인들은 남방이나 서남방지방의 "만족"들이 사는 변방지대에서 살았다는 것이, 이들을 정의하는데 중요한 거라고 생각됩니다. 곧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는 것이죠. 이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