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복삼(同福蔘)과 양각삼(羊角蔘)
화순 동복면 모후산 자락에서 양각삼 10뿌리 발견
연합뉴스입력 : 2017.07.08 10:25수정 : 2017.07.08. 10:25
…(화순=연합뉴스) 김재선 기자 = 전남 화순군 모후산 자락에서 양각삼 10뿌리가 발견돼 화제다. 양각삼은 6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 도홍경이 신농본초경집주에 '화순 동복삼은 뿌리가 둥근 동자삼 형태로 양의 뿔을 닮았다'고 기술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화순 동복면 모후산 자락에서 양각삼 10뿌리 발견
(화순=연합뉴스) 김재선 기자 = 전남 화순군 모후산 자락에서 양각삼 10뿌리가 발견돼 화제다. 양각삼은 6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 도홍경이 신농본초경집주에 '화순 동복삼은 뿌리가 둥근 동자삼 형태로 양의 뿔을 닮았다'고 기술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지난 7일 오전 이슬을 머금은 모후산 북동쪽 2km 지점 7부 능선을 산행하던 약초꾼 정모(55)씨는 10여 년 전에 산삼을 발견한 곳 주변을 살피던 중 양각삼 10뿌리를 발견했다. 전통 심마니들은 과거 산삼을 발견한 곳을 '구광자리'라고 해서 종종 다시 찾는다. 이번에 발견한 10뿌리는 가족 산삼으로 밝혀졌다.
정형범 한국전통심마니협회 회장은 어미 삼수령을 50년 이상, 아기 삼수령을 20년 정도로 추정했다. 정 회장은 “짙은 황색을 띠는 백제 시대 화순 동복삼은 기미가 담백하고 단단하며 삼국 산삼 중 으뜸이다.”고 전해 내려온 만큼 동자삼 형태를 취하는 특징이 잘 나타난다."며 "양각삼은 약성이 뛰어나 일반 산삼보다 2배 이상 비싼 가격에 팔린다."고 말했다. kjsun@yna.co.kr.〈연합뉴스 기사 및 사진 인용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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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기사는 분명(分明) 반도(半島) 땅이, 인삼(人蔘)의 원산지(原産地)요, 특산물(特産物)이요, 토산물(土産物)이며, 토착(土着)식물(植物)로써, 범세계적(汎世界的)으로 유일(唯一)하게 약재(藥材)로써, 높은 약효(藥效)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고려인삼(高麗人蔘)”을 말하고 있다.
〈지난 수천(數千)년간 귀(貴)한 약재(藥材)로써 사용(使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推測)하고 있지만, 실제(實際) 문헌적(文獻的) 고증(考證)은, 서력(西曆) 6세기(世紀) 경에 처음 언급(言及)되었을 뿐,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에서도 6 세기(世紀) 이전(以前)에 기록(記錄)이나 또는 언급(言及)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위 기사(記事)에 따르면, 〈특히 백제(百濟) 땅이었던 “동복(同福)” 땅에서 나는 인삼(人蔘)을 특히 ‘동복삼(同福蔘)’이라 하여 효능(效能)면에 있어 탁월(卓越)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하였다.
동복삼(同福蔘)이란 〈6세기(世紀) 때, 중국(中國) 남북조(南北朝) 때의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 456~ 536】’이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에 “화순 동복삼은 뿌리가 둥근 동자삼 형태로 양의 뿔을 닮았다”고 한데서 처음 유래(由來)하는 것이며, 또한 처음 문헌(文獻)에 등장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미 〈서력(西曆) 100년 또는 200-300년 경(頃)에 백제(百濟)에서는 유명(有名)한 약재(藥材)로써 사용(使用)되었고, 그 효능(效能)이 입증(立證)되어, 해외(海外)에 까지 멀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형편(形便)이니 남북조(南北朝)시대의 학자(學者)였던 ‘도홍경(陶弘景)’의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에 까지 실려지게 된 것이다.〉라고 볼 수 있으며, ‘도홍경(陶弘景)’은 그 효능(效能)을 입증(立證)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남북조(南北朝)시대의 학자(學者)였던 ‘도홍경(陶弘景)’의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에서는 〈백제·고려(高句驪)·상당(上黨 : 山西省)의 인삼(人參)에 관한 기록(記錄)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상당(上黨)의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더하여 수(隋)의 『한원(翰苑)』 중의 「고려기(高麗記 : 고구려)」에 마다산【蓋馬大山일 것이다.】에 인삼(人參)이 많이 산출(産出)된다고 하였는데, 백두산(白頭山)이나 장백산(長白山)등지에서 나오는 인삼(人蔘)이 좋다는 이야기는 후대(後代)의 기록(記錄)에서도 등장(登場)하는 말이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유명(有名)한 특산물(特産物)에 대하여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언급(言及)조차 없는 것일까?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 반도(半島) 땅에서 산출(産出)되는 것 중에서 유명세(有名稅)를 탄 것이 바로 “인삼(人蔘)”이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백제(百濟)의 동복삼(同福蔘)’은 6세기(世紀) 때의 남북조(南北朝) 때의 기록(記錄)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有名)했다는 말이며, 또한 고구려(高句驪)의 개마대산(蓋馬大山)에서 나는 인삼(人蔘)도, 백제(百濟) 동복삼(同福蔘)과 마찬가지로 유명세(有名稅)를 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반도(半島) 땅에 살고 있는 21세기(世紀) 작금(昨今)의 시대(時代), 도저히 이해(理解)할 수 없는 반도(半島) 땅의 선조(先祖)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하는가? 이것이 문제(問題)다.
무슨 말인가 하면 : 반도(半島)의 지리지(地理志)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이에 대한 언급조차 없으며,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의 토산품(土産品)에는 그저 “인삼(人參)”이라는 말만 기록(記錄)되어 있을 뿐이지, 그 유명(有名)하다는 동복삼(同福蔘)에 대한 한 자(字)의 글귀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事實)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➊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 동복현(同福縣)
본래 백제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동복현(同福縣)으로 고쳐서 곡성군(谷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보성(寶城)의 임내(任內)로 하였는데, 현(縣)의 사람의 속설에 전하기를, “본현이 예전에는 보성군(寶城郡)에 속(屬)하였는데, 중 조염(祖琰)의 향(鄕)이라 하여 감무(監務)로 승격하였다.”하며, 본조 태조(太祖) 3년 갑술에 화순현(和順縣)을 겸하게 하여 감무로 하였다가 태종(太宗) 5년 을유에 현을 화순(和順)에 합쳐서 복순(福順)이라 개칭(改稱)하였고, 16년 병신에 다시 동복현으로 하였다. 옛 다소(茶所)가 1이니,와촌(瓦村)이었는데, 지금 와지 다공리(瓦旨茶貢里)라고 한다. (중략).
호수가 90호요, 인구가 2백 89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명이요, 영진군이 40명이요, 선군이 24명이다. (중략). 땅이 메마른 것이 많다. 간전(墾田)이 1천 6백 62결이요, 【논이 3분의 1이다】 토의(土宜)가 오곡ㆍ뽕나무ㆍ삼ㆍ목화ㆍ닥나무다. 토공(土貢)이 족제비털ㆍ칠(漆)ㆍ꿀ㆍ밀[黃蠟]ㆍ자리ㆍ차(茶)ㆍ표고ㆍ석이ㆍ인삼(人參)이요, 약재가 흰바곳[白附子]ㆍ녹용ㆍ고슴도치가죽ㆍ나팔꽃씨[牽牛子]ㆍ초결명씨[決明子]ㆍ당귀(當歸)ㆍ수뤼나물[葳靈仙]ㆍ바곳[草烏頭]ㆍ바디나물뿌리[前胡]ㆍ애기풀[遠志]ㆍ두룹뿌리[獨活]ㆍ족도리풀뿌리[細辛]이요, 토산(土産)이 가는 대ㆍ송이ㆍ은어다. 철장(鐵場)이 1곳이요, 【현의 서쪽 영신사동(靈神寺洞)에 있는데, 중품이다.】 자기소가 1이요, 【현의 남쪽 사평(沙坪)에 있는데, 중품이다.】역(驛)이 1이니, 금부(黔富)이다. (중략). / 끝.
《同福縣: 本百濟 豆夫只縣, 新羅改同福縣, 爲谷城郡領縣, 高麗初, 爲寶城任內。 縣人諺傳本縣古屬于寶城郡, 以釋祖琰之鄕, 陞爲監務。 本朝太祖三年甲戌, 兼和順縣爲監務。 太宗五年乙酉, 以縣合于和順, 改稱福順, 十六年丙申, 復爲同福縣。 古茶所一, 瓦村, 今稱瓦旨茶貢里。 四境, 東距順天十里, 西距和順二十里, 南距寶城三十里, 北距玉果三十里。 戶九十, 口二百八十九。 軍丁, 侍衛軍二, 營鎭軍四十, 船軍二十四。 土姓五, 吳、成、朴、宣、和。 厥土塉多, 墾田一千六百六十二結。【水田三分之一】 土宜五穀, 桑、麻、木緜、楮。 土貢, 黃毛、漆、蜂蜜、黃蠟、席、茶、蔈膏、石茸、人蔘。 藥材, 白附子、鹿茸、蝟皮、牽牛子、決明子、當歸、威靈仙、草烏頭、前胡、遠志、獨活、細辛。土産, 簜、松茸、銀口魚。 鐵場一所, 【在縣西靈神寺洞, 品中】 磁器所一。 【在縣南沙坪, 品中】 驛一, 黔富。》
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40권 / 전라도(全羅道) / 동복현(同福縣)
동쪽은 순천부(順天府)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쪽은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20리이며, 남쪽은 화순현(和順縣) 경계까지 24리에 이르고, 북쪽은 옥과현(玉果縣) 경계까지 38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두부지현(豆夫只縣)이던 것을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곡성군(谷城郡)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년에 보성군(寶城郡)에 붙였다가 뒤에 중 조염(祖琰)의 고향이라고 높여서 감무(監務)를 삼았다. 본조 태조(太祖) 3년에 화순 감무(和順監務)를 겸했고, 태종(太宗) 5년에 이 현을 화순에 합치고 복순(福順)이라고 고쳤으며, 16년에 각각 복구해서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하였다.
【관원】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두부지(豆夫只)ㆍ구성(龜城)ㆍ옹성(甕城)ㆍ복천(福川)ㆍ나복(蘿葍) 《목은집(牧隱集)》 상찰 찬(上札贊)에 나온다.
【성씨】본현(本縣) 오(吳)ㆍ성(成)ㆍ박(朴)ㆍ선(宣)ㆍ화(和)ㆍ지(池), 김(金) 속성(續姓)이다.
【산천】모후산(母后山)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백야산(白也山) 현의 동북쪽 20리에 있다. 서석산(瑞石山) 현의 서쪽 25리에 있으니 광산(光山) 편에 자세하다. 옹성산(甕城山)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산에 세 개의 바위가 있어 모양이 독과 같이 우뚝 서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우자령(亏刺嶺) 현의 동쪽 20리 순천부(順天府) 경계에 있다. 송현(松峴)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저점(猪岾) 현의 남쪽 35리에 있다. 이리왈령(伊离曰嶺) 현의 남쪽 30리 보성군(寶城郡) 경계에 있다. 도마현(刀磨峴)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경산(景山) 현의 서쪽 15리에 있으며 화순(和順) 편에도 나온다. 구봉산(九峯山) 현의 남쪽 18리에 있다. 달천(達川) 무등산(無等山)에서 나와서 현의 서남쪽 9리에 이르러 달천(達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보성군에 이르러 죽천(竹川)이 되었다. 용안연(龍眼淵) 현의 남쪽 20리에 있으니 곧 달천(達川) 하류이다. 검천(檢川) 모후산(母后山)에서 나와 현의 남쪽 5리에 이르러서 달천으로 들어간다. 와지천(瓦旨川) 송현(松峴)에서 나와 현의 북쪽 15리에 이르러 달천으로 들어간다. 영신천(靈神川) 현의 서쪽 25리에 있으니 서석산(瑞石山)에서 나와서 달천으로 들어간다. 배존천(裵存川) 현의 북쪽 50리에 있으니 백야산(白也山)에서 나와서 와지천(瓦旨川)으로 들어간다. 구점천(鳩岾川) 현의 서쪽 25리에 있으니 서석산에서 나와서 와지천으로 들어간다. 가을탄(加乙灘) 현의 남쪽 35리에 있으니 저점(猪岾)에서 나와서 용안연(龍眼淵)으로 들어간다.
【토산】 대ㆍ닥종이ㆍ감ㆍ은어[銀口魚]ㆍ옻[漆]ㆍ꿀ㆍ차ㆍ울금(鬱金), 철(鐵) 무등산(無等山) 밑에서 난다. 표고버섯ㆍ생강.
【누정】 응취루(凝翠樓) 객관(客館) 남쪽에 있다. ○ 성화(成化) 갑오년에 현감 유의(柳誼)가 세웠다. 송정(松亭) 현의 남쪽 7리에 있으니 아래로 달천에 임해 있다.『신증』 취승정(聚勝亭)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학교】 향교 현의 서쪽 4리에 있다.
【역원】 검부역(黔富驛)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남비원(攪轡院) 현의 북쪽 40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방석원(方席院)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남덕원(南德院)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사평원(沙坪院)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여점원(餘岾院) 현의 북쪽 48리에 있다.
【불우】 유마사(維摩寺) 모후산(母后山)에 있다. 영봉사(靈鳳寺) 구봉산(九峯山)에 있다. 혈암사(穴庵寺) 옹성산(甕城山)에 있다. 안심사(安心寺) 서석산(瑞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석등(石燈) 김상보(金尙保)의 기(記)에, “옛날 현리(縣吏) 오대승(吳大陞)이 관도(官道) 남쪽에 석등(石燈) 48개를 만들어 밤마다 불을 켜놓고 하늘에 절하더니 그 내외(內外)의 자손들이 모두 출세하고 계속하여 재상에 올랐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드디어 가서 보니 그 석등(石燈)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되어 풀 속에 묻혀 있기에 곧 사람을 시켜 이것을 수리하고 대(臺)를 쌓아 오씨(吳氏) 선세(先世)의 사적을 표했다.” 하였다. 수촌 폐현(水村廢縣)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압곡 폐현(鴨谷廢縣)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와촌소(瓦村所)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옹성산성(甕城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8백 74척이요, 성 위에 백여 자가 되는 석대가 있다. 그 위에 또 돌기둥과 돌난간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한전(羅漢殿)의 옛터라.” 한다.
【제영】 천연적으로 험한 곳이라 예부터 성을 만들지 않았네.[天險由來不設城] 성임(成任)의 시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효종(孝宗) 6년에 화순(和順)에 합하였다. 연전패(延殿牌)가 불에 탔기 때문이다. 현종(顯宗) 5년에 다시 세웠다. 수촌(水村) 오른쪽에 있는 읍터는 북쪽으로 20리이고, 압곡(鴨谷) 오른쪽에 있는 읍터는 북쪽으로 25리에 있다.
【방면】 읍내(邑內) 사방으로 10리이다. 내남(內南)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외남(外南) 서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내서(內西)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외서(外西) 서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내북(內北)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외북(外北) 북쪽으로 끝은 40리이다. ○ 와촌소(瓦村所)는 북쪽으로 20리이다.
【성지】 옹성(甕城) 북쪽으로 10리이고, 둘레는 3천 8백 74척이며 돌길은 사람이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이다. 길이 언덕 아래로 났는데, 사람이 성산(城山)에 올라서 굽어보면 성 밖으로 10여 보(步)이다. 뾰죽한 봉우리가 서로 그 사이에 사잇길이 있는데, 사람은 올라설 수가 없다. 남쪽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어 있고, 동쪽으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모두 돌로된 절벽이어서 1만 길의 높은 곳을 쌓았는데, 그 가운데 일곱 개의 우물과 한 줄기 시내가 있고 남쪽으로는 두 개의 문이 있어서, 잡아온 도적을 바치는 곳이다. 황진(黃進)의 말무덤이 높다랗게 솟아 동북면 한 모퉁이를 끊고, 거기에 쌓아서 내성(內城)을 삼았다.
【창고】 읍창(邑倉)ㆍ외창(外倉) 북쪽으로 40리에 있다.
【토산】 뽕ㆍ밤ㆍ호두
【누정】 물염정(勿染亭)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창랑정(滄浪亭)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적벽정(赤壁亭) 옹서(甕城) 서쪽 언덕에 있다. 환학정(喚鶴亭) 적벽정 서쪽에 있다. 강선대(降仙臺) 적벽의 북쪽 언덕에 있다.
【사원】 도원서원(道源書院) 현종 경술년에 세웠다가 숙종 정묘년에 사액하였다. 최산두(崔山斗) 자는 경앙(景仰)이고, 호는 헌재(軒齋)이며, 광양(光陽) 사람이다. 중종 기묘년에 본 현에 귀양 왔다가 무술년에 졸하였는데 벼슬은 사인(舍人)이다. 임억령(林億齡) 자는 대춘(大椿)이고 호는 석천(石川)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벼슬은 강원 감사(江原監司)이다. 정구(鄭逑) 충주(忠州) 편에 보인다. 안방준(安邦俊) 보성 편에 나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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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6세기(世紀)라면 서력(西曆) 500년대 이야기다. 도홍경(陶弘景)【陶弘景 456~ 536】이, 이때에 백제(百濟) 땅의 동복현(同福縣)에서 산출(産出)되는 동복삼(同福蔘)은 그 효능(效能)이 뛰어나, 중국(中國)에도 알려져 있어,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에 “화순 동복삼(同福蔘)은, 뿌리가 둥근 동자삼 형태로 양의 뿔을 닮았다”고 하였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당시(當時) 백제(百濟)의 땅에, 〈화순군(和順郡)이니, 동복현(同福縣)이니 하는 지방행정(地方行政)조직(組織)의 이름 자체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화순군(和順郡)을 검색(檢索)해 보면 :
〈마한시대에는 여래비리국(능주·화순), 벽비리국(동북)이었다. 삼국시대 때 화순은 백제의 잉리아현(仍利阿縣)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위의 글에서 인용(引用)한 “6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 도홍경이 신농본초경집주에 “화순 동복삼” 이라고 소개한 그 화순(和順) 또는 동복(同福)이란 이름은, 신라(新羅)때인 서력(西曆) 759년, 그리고 고려(高麗)때에 들어서 명명(命名)되었다는 이야기는 또 뭔가?
➋ 동복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동복군(同福郡)은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본래 백제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었다. 757년 동복현(同福縣)으로 개칭하고 곡성군의 영현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백제(百濟)가 망(亡)하고 난 뒤, 거의 일백(一百)년【서력(西曆) 660년 백제(百濟) 망(亡)】이 지나서야 비로소 “동복현(同福縣)”이란 이름이 처음 태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백제(百濟) 동복삼(同福蔘)”이라고 한다면, 이는 반도(半島) 땅에는 백제(百濟)란 옛 봉건왕조(封建王朝)는 없었다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다.
➌ 동복군(同福郡)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복군(同福郡)은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역사[편집] / 본래 백제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었다.
757년 동복현(同福縣)으로 개칭하고 곡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 보성군의 속현이 되었다. 주현으로 승격한 시기는 알 수 없다.
1394년 동복감무가 화순현을 겸임하였다.
1405년 동복감무가 폐지되고 화순감무가 설치되어 동복현을 관할하였다.
1407년 동복현과 화순현이 합병하여 복순현(福順縣)이 되었다.
1409년 전라도의 모든 속현과 향·소·부곡이 폐지되면서 동복지역에 있었던 와촌소(瓦村所)가 폐지되었다.
1416년 동복현과 화순현이 다시 분리되었다.
1665년 연전패(延殿牌)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여 화순에 편입되었다가, 1664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1895년에 나주부 동복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전라남도 동복군이 되었다. 7면 : 읍내면(邑內面), 내남면(內南面), 외남면(外南面), 내서면(內西面), 외서면(外西面), 내북면(內北面), 외북면(外北面)
1914년 동복군이 폐지되어 화순군에 편입되었다. 읍내면을 동복면으로 개칭하고, 내서면과 외서면을 이서면으로 통합하였다.
1932년 내남면과 외남면을 남면으로, 내북면과 외북면을 북면으로 통합하였다.
옛 동복군 지역은 화순군의 동복면, 이서면, 남면, 북면 이상 4면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인용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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➍ 동복군((同福郡) 또는 동복현(同福縣) : 〈동복삼(同福蔘)=양각삼(羊角蔘)〉
중국(中國)의 남북조(南北朝) 때, 양(梁)나라의〈도홍경(陶弘景)이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에 “화순 동복삼”〉이라고 소개한 그 〈화순(和順)의 동복삼(同福蔘)〉이란 이름은, 산출지(産出地)였던 동복군(同福郡) 또는 동복현(同福縣)의 이름에서 유래(由來)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당시(當時) 백제(百濟) 때 그곳은 “두부지현(豆夫只縣)이었다”고 하며, ‘화순(和順)이니 동복(同福)’이니 하는 “이름”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동복(同福)”이란 이름은 백제(百濟)가 당(唐)에 의해 망하고 난 뒤 99년 후(後), 즉(卽) 서력(西曆) 759년이 되어서야, 신라(新羅) 왕(王)에 의해 개명(改名)되었다고 한국사(韓國史)는 이야기한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냐! 백제(百濟)가 망(亡)하고 남 뒤, 거의 일백(一百)년이 지난 뒤에야 “동복(同福)”이라는 지명(地名)이 탄생(誕生)되었다고 설명(說明)하면서…그렇다면 당시(當時) 양(梁)나라의 도사(道士) 도홍경【陶弘景 456~ 536】이라는 학자(學者)는 일백(一百)년 뒤의 천기(天機)를 누설(漏泄)한 것일까?
이건 아니다. 이것은 천기(天機)누설(漏泄)도 아니요, 오직 역사(歷史)조작(造作)이나 무지(無知)의 산물(産物)일 뿐이다.
※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 : 〈6세기 경 중국 양(梁)나라의 학자 도홍경【陶弘景 456~ 536】이 중국 최고의 본초서(本草書)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을 증보하여, 주(註)를 단 의학서이다.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은 200∼300년경에 도사(道師)들에 의하여 편록(編錄)된 것으로, 모두 4권이며 365종의 약물(藥物)이 기재되어 있으며, 각 약효에 따라 상약(上藥) ·중약(中藥) ·하약(下藥)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정본(正本)은 모두 없어졌으나, 당(唐)나라의 신수본초(新修本草)를 비롯하여 후대의 본초서의 시조가 되었다. 현재 중국에는 몇 종류의 복원본(復元本)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➎ 작금(昨今)의 시대(時代)에 : 인삼(人蔘) 또는 고려인삼(高麗人蔘) 또는 홍삼(紅蔘)등은 반도(半島) 땅에서 산출되는 인삼(人蔘)으로 유명(有名)하다. 개성(開城)이나 풍기, 금산(錦山)외에도 우리나라 어디든 간에 인삼(人蔘)밭이 없는 곳이 드물 정도다.
이렇게 유명(有名)한 인삼(人蔘)에 대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을 보면 : 소설(小說)같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고, 근거(根據)나 증거(證據), 고증(考證)될 수 있는 자료(資料)가 빈약(貧弱)하고, 또한 해설(解說)이 제멋대로다.
➏ 인삼(人蔘)의 원산지(原産地) :
다음백과 / 인삼(ginseng, 人蔘) : 한국과 중국이 원산지로 추정된다. 강화인삼·풍기인삼 등 한국 인삼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주로 경기도와 충청남도에서 재배된다. 중국·일본·미국·러시아 등에서도 재배하고 있다. (중략).
인삼은 한국과 중국이 원산지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는 처음에는 야생의 산삼을 이용했다.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 本草綱目〉에 14세기 말부터 개성 부근에서 인삼을 재배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개성 부근의 토질이 인삼재배에 적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당시에도 이미 인삼재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라남도 동북지방에서는 조선시대 숙종 때 산삼의 씨를 채취하여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헌종 초에 개성의 보부상 최문(崔文)이 다른 지방의 인삼재배를 관찰하여 개성의 풍토에 맞는 재배법을 고안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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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筆者)는, 현재(現在)의 인삼(人蔘)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수백(數百) 또는 일천(一千)오백(五百)년 전(前)이나, 또는 그 이전(以前)의 인삼(人蔘)에 대한 것들에 대해 그 진실(眞實)을 알고자 함이다.
반도(半島)의 학자(學者)들 역시 이러한 모순(矛盾)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다만 증거(證據)나 근거(根據), 고증(考證)될 수 있는 자료(資料)가 없으니, 난감(難堪)한 심중(心中)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명(地名)조차 전혀 다른 백제(百濟)의 동복삼(同福蔘)은, 백제(百濟) 당시(當時)의의 지명으로 본다면 : 〈두부지삼(豆夫只蔘)이 되어야 하고, 인삼(人蔘)의 특징(特徵)에 따라 양각삼(羊角蔘)이라고 불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결국(結局) 이러한 이야기는,〈백제(百濟)는 반도(半島)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며, 백제(百濟)는, 요서(遼西)의 진평(晉平) 2 군(郡)을 다스릴 수 있는 곳으로 옮겨져야 마땅한 것이다.
〈백제(百濟)는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 땅에 있었으며, 일부 백제(百濟)인들이 반도(半島)로 이주(移住), 백제(百濟)와 같은 풍속(風俗)이나 언어(言語)등을 사용(使用)하며,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가능성(可能性)은 충분(充分)하다.〉고 본다.
조선사(朝鮮史)를 반도(半島)의 조그만 땅에, 못 처박아 안달하는 자(者)들! 그들의 사학(史學)은, 영원(永遠)히 부역(附逆)의 사학(死學)으로 불릴 것이다.
2017년 07월 09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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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로터스 작성시간 17.07.10 조선팔도를 축소한 지리에 맞춰서 쓴 반도역사서... 그렇게 백년 이상을 경과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동안 사람들이 배운 지리역사에 물들다보니 이상하게도 자연환경도 비슷하게 변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념의 에너지가 그대로 나타나듯, 逆天이 지나고 조선의 기운이 한반도에서 부흥할 수 있으면 말입니다.
극심한 가뭄이 지난 몇일의 장마에 해소되듯 문무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문 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7.10 안녕하세요. <로터스>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님의 말씀대로 조선의 역사를 우여곡절 끝에 그 진실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영토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자들의 원하는대로 "한반도"에서 꼼짝못할 것이니, 이 반도 땅에서라도 옛 조선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다면.......국민들과 정치인들이 한결같이 대동단결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장마철에,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